나는 안리영을 찾아갔다. 마침 그녀는 집에 있었다.“지난번에 한밤중에 전화했을 때 무슨 일이었어? 그때 시술 마치고 너무 피곤해서 답을 못했네. 어디 아팠어?” 안리영이 나를 보자 그때 일을 떠올렸다.나는 신발을 벗고 카펫 위로 걸어가며 말했다.“내가 진짜 아팠다면 벌써 잿더미가 됐겠지.”안리영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왜, 화났어?”“아니야, 별일 아니었어.” 나는 진정우가 아팠던 일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안리영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한밤중에 연락할 정도면 무슨 큰일이 있었을 거 아냐.”“정우 씨 때문이었어.” 결국 나는 털어놓았다.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안리영은 수박 주스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그 사람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조만간 후회하지 않도록 잘 잡아둬. 평생 안 보면 후회할걸?”나는 수박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강유형이랑은 정말 끝났어.”안리영은 코웃음을 쳤다.“너희는 이미 끝난 사이 아니었어?”“이번에는 진짜야.” 나는 어느 한 곳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안리영은 내 기분을 읽은 듯 잔을 들고 내 잔과 부딪쳤다.“축하해.”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강유형이 너한테 잘해준 건 알아. 그런데 너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안리영은 당당히 말했다.“그 사람이 나한테 아무리 잘해도 네게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정말 든든한 친구였다.“자, 이제 다 잊고 주스 마셔. 잠시 후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안리영이 다시 잔을 들었다.“가고 싶지 않아. 그럴 기분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안리영은 내 의견을 무시하고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먹고 나서 클럽도 가자. 멋진 남자들도 좀 구경하고.”하얀 가운을 벗은 안리영은 숲속의 작은 요정처럼 변신해 있었다. 그녀만큼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다.그녀는 나를 새로 오픈한 프렌치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거기서 간만에 푸아그라를 먹자
조나연이 강유형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이런 질문을 할 리가 없었다.하지만 두 시간 전만 해도 강유형은 나에게 돌아오고 싶어 했었는데. 갑자기 그의 말이 떠올랐다.‘혹시 내가 잘못되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후회할 거야?’ 설마 나를 후회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결혼을 서두르는 걸까?그렇다면, 그는 정말 미친 거다. 어리석고 유치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조나연을 바라보았다. “네?”“나, 유형 씨랑 함께하고 싶어요. 결혼할 생각으로요.” 조나연이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무심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축하해요.”“하지만 강유형 부모님이 이 아이를 받아들일지 걱정이에요.” 조나연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말할 이유도 없었다.그때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지원 씨.”조나연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유형 씨 부모님이 당신을 친딸처럼 아끼신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제 부탁을 좀 들어주실 수 없을까요?”그녀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요.”그러자 조나연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왜요? 제가 당신과 강유형 사이를 망친 건가요?”그녀가 자신이 우리 사이의 문제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는 점은 놀라웠다.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죠.”나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다. 조나연은 분명히 나와 강유형 사이를 틀어지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남지 않을 순 없었다.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가 오히려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강유형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끌려갔을 테니까.조나연은 비웃듯이 말했다. “정말 제가 원인이라고
아줌마가 좋아하는 건 밝고 당당한 성격의 여자들이다. 아줌마의 말로는, 작고 소심해 보이는 외모를 가진 사람은 그만큼 마음과 그릇도 작을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물론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옳지 않지만, 평생 많은 걸 겪어온 아줌마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도와줄 수 없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왜요?” 조나연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아줌마는 자기 생각이 확고한 분이라 쉽게 남의 말을 듣지 않으세요.” 나는 간단하게 설명했다.“그래도 당신 말을 잘 듣는 편이잖아요. 유형 씨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자신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말했다.정작 남편이 죽었을 때도 별 반응 없던 사람이 이제 와서 강유형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다니, 웃음이 나왔다.“내가 아줌마와 친하다는 걸 알고 있다면 아줌마가 당신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것도 알았어야죠.” 나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사실 아줌마는 내가 강유형과 헤어지기 전부터 나를 마음에 들어 했기에 나를 대신할 사람을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조나연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행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예요, 남에게 기대지 말고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조나연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아이가 없다면 받아주실까요?”그 말을 듣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미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질문을 하는 그녀가 조금 답답했다.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나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안리영은 내가 겪은 상황을 듣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대단하네, 뻔뻔하기도 하고.”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강유형과 연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집안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을걸.”나는 강유형 부모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삼촌은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라서, 자식이 평범한 사람을 만나도 상관없지만 최소한 배경은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줌마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들이 다른 사람의
너무 창피했다!이런 일이 두 번째라니, 전에는 진정우가 샤워하고 나올 때 마주쳤고, 이번엔 그의 몸을 상상하다가 그대로 들켜버렸다.아무래도 이건 진정우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 내가 이렇게 오래 두드렸는데 왜 이제야 문을 여는 거지?이 상황에서 덜 민망해지려면, 술에 취한 척하고 필름이 끊긴 것처럼 연기하는 게 낫겠지. 그럼 내가 덜 민망하고, 오히려 보는 사람이 곤란할 테니까.“여기 있잖아. 안에 있었네?”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진정우를 가리키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진정우에게 말했다.“얘가 좀 취했어요.”“안 취했거든!”나는 안리영의 말에 연기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원래 취한 사람일수록 자기는 안 취했다고 하니까.그녀는 내 허리를 슬쩍 꼬집으며 말했다.“아, 맞네. 너 겨우 와인 한 잔 마셨잖아. 취할 리가 없지.”이 말을 듣고 나는 순간 멈췄다. 어디 두고 보자, 안리영! 믿었던 친구에게 이렇게 당하다니.나는 진정우 쪽으로 눈길도 못 주고 있는데, 그가 먼저 물었다.“날 찾은 이유가 뭐죠?”“아니, 아무 일도 없어요.”말을 얼버무리며 재빨리 돌아서서 안리영을 끌고 나가려 했다. 그런데 진정우가 한마디 더 했다.“저는 할 말이 있어요.”정말 이러다 숨 막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머리가 아파요. 얘기는 내일 해요.”나는 그에게 더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서둘러 내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하하, 너 정말 너무 귀엽다!”안리영은 문을 닫자마자 나를 보며 웃었다.나는 당황해서 그녀를 째려보았다. 안리영은 전혀 죄책감 없는 얼굴로 말했다.“좋아하면 더 용감해져야지! 차라리 이번 기회에 다 들켜버리고, 앞으로는 방문을 활짝 열고 한 침대에서 지내면 되잖아? 그러면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그녀의 농담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나는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나가! 빨리 나가! 우리 절교야!”“그럼, 진정우랑 정말 잘 되면 나중에 나한테 감사 인사해야 한다?”안리영은 진정으로
“아직 수술은 안 했어. 일단 예약만 해둔 상태인데 내가 예약 시간을 좀 확인해 볼게.” 안리영이 잠시 멈추더니 몇 초 뒤 다시 말했다. “11시야.”나는 시계를 보았고 지금은 10시였다.“혹시 이유는 말 안 했어?” “별다른 말은 없고 그냥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만 했어. 혼자 와서 서명도 했고 아이가 이미 3개월이 넘어서 수술을 해야 해.” 안리영이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아직 아이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일단 시간을 좀 끌어 줘. 내가 강유형에게 연락해 볼게.”“정말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야?” 안리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어제 막 만난 조나연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수술하러 온다면, 내가 강유형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그가 오해할 수도 있잖아. 게다가...”이 아이는 세상에 남은 임석진의 유일한 핏줄이니까.안리영과 전화를 끊고 강유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가 전화를 받지 않아, 혹시 어제 내가 그를 차갑게 대했던 탓인가 싶어 잠시 고민했다. 계속 신호가 가길래 전화 연결을 끊고 다시 걸려는 순간,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뭐야?”“조나연이 병원에서 유산 수술을 받으려고 해, 안리영 병원에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전했다.“뭐라고?” 강유형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한 시간 후에 수술이야. 지금 가면 아직 늦지 않았어.” 나는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강유형에게 소식을 전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나도 병원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도착해 내렸을 때 마침 강유형이 다급하게 주차장을 빠져나와 산부인과 건물 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그가 이렇게 다급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나도 빠르게 그를 따라가려던 찰나, 안리영이 나타나 내 팔을 붙잡았다.“잘 막아놨지?” 내가 물었다.안리영은 대답 대신 나를 안전 통로 쪽으로 데려갔다. “얘기 한번 들어봐, 흥미진진할 거야.”우리는 구석에 숨었고 잠시 후
강유형이 뭐라고 더 말했는지 나는 듣지 않았다. 지금 들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으니까.그동안 의아했던 점들이 전부 설명되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이렇게 비참할 줄은 몰랐다.임석진은 내가 잘 알던 사람이었다. 마른 체형에 밝은 성격으로 동네 오빠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는데...그의 죽음이 가장 친한 친구와 아내의 관계를 견디지 못해서라니...임석진이 죽었을 때 강유형이 그렇게 무너져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결국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니 임석진의 부모님이 조나연을 그렇게 차갑게 대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아마도 임석진의 부모님은 그녀의 아이가 임석진의 자식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사실 나는 강유형이 바람을 피운 것에 대해 그렇게까지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가 정말로 싫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생명을 앗아간 원흉이라니 말이다.안리영도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나를 데리고 그녀의 휴게실로 갔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임석진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가 그토록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생각에 마치 그의 고통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강유형, 진짜 용서 못 해.”안리영도 놀라움과 분노가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이제 조나연이 강유형에게 들러붙었으니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와 연을 맺게 될 거야.”“그건 자업자득이지.”안리영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그리고 조나연도 참 뻔뻔하지. 강유형에게 신호를 주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까지 했겠어? 이건 둘 다 잘못한 거야. 그런데 지금 와서 오히려 강유형에게 책임을 묻고 더 나아가 임석진의 유일한 핏줄까지 없애려 하다니. 너무 잔인해.”안리영이 화가 나서 쏟아내는 말에 나도 맞장구치며 중얼거렸다.“리영아, 아이는 어떻게든 지켜야 해.”내가 조나연의 선택을 대신할 권리는 없지만 그건 그녀가 임석진에게 진 빚이었다. 나는 그를
신지태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잠시 내 말을 곱씹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갑자기 왜 묘지를 찾으려는 거야?”“가서 인사드리고 싶어서.”나는 솔직하게 답했다.신지태는 나를 잠시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나도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고 강유형이 임석진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만약 신지태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지금쯤 강유형과 절교했을 것이다.“무슨 일 있었어?”신지태는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챘는지 물었다.“그냥 같이 가줘.”그가 걱정된다면 동행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신지태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임석진의 묘로 안내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도착하자마자 멀리서 임석진 부모님의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멀리까지 들려왔고 섞여 있는 험한 말들도 희미하게 들렸다. 굳이 알아듣지 않아도 조나연을 향한 원망이라는 건 짐작이 갔다.지금 가까이 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나와 신지태는 멀찍이서 기다렸다. 잠시 후 임석진의 부모님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깨를 부축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지쳐 보였다.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내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두 분은 우리를 보지도 않은 채 그냥 지나쳤다. 그들에게는 죽은 아들만이 온 세상인 듯했다.“하아...”신지태가 멀어지는 두 분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임석진이 저분들을 참 힘들게 했네.”그의 말을 듣자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석진 오빠의 잘못은 아니야.”부모님에게 아들 잃은 슬픔을 주려 한 게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가 그를 결국 그렇게 만들었다.“뭐?”신지태는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나는 묵묵히 준비한 꽃을 들고 임석진의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 묘비에 있는 임석진의 사진 속 그의 웃음은 너무나 밝고 따뜻해서 세상을 품을 듯했다. 그런 그가 가장 친한 친구와 아내의 배신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니... 그의 절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석진아, 그쪽에서 잘
문을 열자 진정우가 서 있었다. 한 손으로 문을 열고 다른 손에는 채소가 든 봉지를 들고 있었다. 내가 갑작스레 문을 열었는지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가 살짝 놀란 눈빛을 지었다.나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왜 그러세요?”“아니에요.”나는 고개를 저었다.“어디 아픈 거예요?”진정우가 봉지를 내려놓고 내 앞에 다가왔다. 아직 반쯤 잠에 취한 듯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아 다시 고개를 저었다.이마에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은 것이다. 그는 살짝 당황한 듯 물었다.“열이 나는 것 같은데요?”아직 멍한 상태라 그 말이 내 얘긴 줄도 몰랐다. 진정우는 내 상태를 눈치챈 듯 다음 순간 방으로 들어와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원래도 몸이 가볍게 느껴졌는데 그가 들어 올리자 더욱 무중력 상태가 된 듯했다. 본능적으로 그의 옷을 잡아 의지했다.그는 나를 소파에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슬리퍼는요? 맨발로 돌아다닌 거예요?”그가 말하기 전까지 나도 몰랐다. 맨발로 문을 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나의 멍한 상태에 살짝 한숨을 쉬며 방에 들어가 내 슬리퍼를 가져와 내 발에 신겨 주었다.“체온계 있어요?”그가 다시 물었다.“물 좀 마시고 싶어요.”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부엌으로 가서 물을 따라주려 했지만 물 주전자가 비어 있었다.물을 데우기보다는 그가 다시 다가와 나를 들어 올려 집 밖으로 데려갔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고 그가 어디든 데려가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그는 나를 자신의 집 소파에 내려놓고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체온계를 가져와 내 손에 쥐여주며 물었다.“체온 잴 줄 아시죠? 제가 도와드리긴 좀 그렇네요. 겨드랑이에 넣으시면 돼요.”그는 체온계를 내가 떨어뜨릴까 봐 내 손을 살짝 잡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떼며 말했다.“물 곧 데워 드릴게요. 조금 후에 약도 먹어야 해요. 열이 안 떨어지면 병원
이 한 방은 강진혁을 향한 것이자 강씨 가문의 체면에 날린 일격이었고 동시에 그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역시 용진표였다. 본색을 드러낼 땐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명백히 아들을 대신해 분풀이를 한 것이다.“이 자식아, 네 아버지도 생전에 감히 나한테 아니오라고 하지 못했어. 어디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 것이냐.”그는 비서에게서 건네받은 실크 손수건으로 사람을 때린 손을 천천히 닦았다.강진혁의 입가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눈동자 밑바닥엔 살기를 담은 분노가 깔려 있었지만 겉으론 억지웃음을 지으며 피 묻은 입가를 닦았다.“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예의도, 규칙도 몰랐습니다.”그 모습은 비굴하기 그지없었다.나는 안다. 그건 그저 잠시 몸을 낮춘 것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 이미 조시언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운 판에 용진표까지 자극했다간 내일 세운 계획은 아예 무산될 것이다.용진표가 오늘 조문이라는 명목으로 이것에 온 것도 결국엔 그를 윽박지르기 위함이었다. 내일은 아마 큰 소동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하지만 내일은 본래 강두식의 발인이 예정되어 있었다.나는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죽어서조차 편히 쉬지 못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어쩌면 이것도 업보인 셈이었다.선과 악은 결국 되돌아오고 하늘은 공평하게 그 누구도 쉽게 용서하시지 않는다.강진혁이 상황을 파악하고 꼬리를 내리자 용진표도 더는 문제 삼지 않고 돌아섰다.강진혁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용진표가 사라진 방향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엔 마치 죽여버리겠다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는 참았다. 스스로도 말했듯이 그는 인내에 가장 능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때 김희연이 다가가 그의 입가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려 했으나 그는 조용히 몸을 피했다.“아주머니, 구급상자 좀 가져와 주세요”김희연이 가사도우미에게 말했다.“필요 없어요”강진혁은 단호히 거절했다.김희연이 뭔가를 더 말하려 했
조시언은 강두식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절을 올리고 김희연에게 다가가 애도의 뜻을 전했다.그 모습은 마치 그가 정말로 단지 조문하러 온 사람인 듯한 착각이 들게 했지만 조금 전 지하 주차장에서 강진혁과 벌인 격렬한 대치전을 생각하면 그렇지만은 않았다.“엄마.”강유형도 김희연에게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슬이 맺힌 눈으로 고개만 끄덕였다.“옷 갈아입고 아버지 곁을 지켜드리렴.”강유형은 이미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가사도우미의 도움 아래 옷을 갈아입은 그는 김희연의 곁에 나란히 섰다.찾아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들이 흩어지는 건 당연했다.강씨 가문은 강유형의 손에서 강진혁에게로 넘어간 뒤 눈에 띄게 힘을 잃었다. 게다가 강진혁이 용씨 가문과 얽히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기류도 감지되었다.이런 때일수록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마지막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것이다.“조시언 씨를 모셔다드려!“조시언이 막 애도를 마친 순간 강진혁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조시언이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내쫓듯 말을 꺼냈다.“괜찮아요, 전 우리 리영이를 기다려야 하거든요.”조시언은 안리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단번에 뜻을 알아채고는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난 지원이와 함께 있을 거야.”나는 당연히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누군가가 김희연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고 안리영도 내 옆에 있겠다고 했으니 조시언은 자연스레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강진혁의 눈빛엔 거슬린다는 기색과 도발적인 분노가 아른거렸지만 이곳은 장례식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럼 조시언 씨는 접견실에서 잠시 쉬시죠.”강진혁의 목소리는 차디차고 딱딱했다.조시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안리영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조용히 자리를 나섰다.하지만 그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문 밖엔 여전히 그의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의미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