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의 말에 바로 진정우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리고 어제 신지태가 말했던 허진호에게 거액을 투자한 성이 진 씨인 그 남자가 마침 생각났다.나는 허진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이 말씀하신 강한 남자,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에요? 아니면 그런 친구가 있으세요?”허진호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가볍게 헛기침했다.“그게...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는 좀 애매한데 그러니까... 좀 더 단단하고 남자답고 반듯하고...”그는 말하며 식당 벽에 걸린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에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국기 게양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군복을 입고 우뚝 선 병사들의 모습. 활기차고 반듯한 자세가 딱 ‘강한 남자’를 상징하는 듯했다.그 모습을 보자 진정우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리고 허진호의 말투에서 뭔가 숨겨진 의도가 느껴졌다.‘성이 진 ]씨? 강한 남자? 군인 출신?’이 모든 단어가 진정우와 정확히 들어맞았다.나는 허진호를 살펴보며 느닷없이 물었다.“혹시 그 친구 이름이 진정우인가요?”“네? 뭐라고요?”허진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대표님 친구 중에 진정우라는 분이 있나요?”나는 한 번 더 물었다.“진정우?”그는 고개를 젓더니 능청스럽게 웃었다.“그런 사람 없어요. 그게 누군데요?”하지만 그의 눈빛은 나를 피하려고 애쓰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 강한 남자일 텐데요.”“하하.”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가요? 그런데 현실에도 그런 사람이 있긴 있나요? 그 사람하고는 어떤 관계세요? 친하세요?”나는 그의 표정에서 엿보이는 약간의 호기심을 읽고 장난스럽게 대꾸했다.“제 친구에 대해 꽤 관심 있으신가 봐요. 그럼 한 번 소개해 드릴까요?”“정말요? 하지만... 괜찮을까요?”허진호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괜찮지 않나요?”나는 일부러
나는 허진호에게 일부러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그의 대답을 통해 숨겨진 ‘대표님’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다.물론 진정우가 그 대표님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 가난해 보였고 부유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하지만 모든 정보가 자꾸만 그를 떠올리게 했다.오후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휴대폰을 열어보니 새로 추가된 친구 목록에 용준호의 이름이 있었다.메시지 창에는 단순히 "친구가 되었습니다"라는 알림만 떠 있었고 그 외의 연락은 없었다.용준호는 내가 친구 요청을 수락한 것을 알았을 텐데 일부러 무시한 듯했다.아마 어젯밤 내가 그의 요청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무언의 응수였을 것이다.그는 쉽게 건드릴 사람이 아니었다. 사소한 일도 기억하며 되갚아주는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이래서 진정우와 강유형이 그와 거리를 두라고 경고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이미 얽힌 상황에서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그가 먼저 다음 수를 두기 전까지 나는 침착하게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저녁 5시쯤, 나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동네 주민들은 아직 저녁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과 놀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어머, 지원아! 퇴근했네?”1층에 있다 유씨 아줌마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네. 그런데 아직 집에 안 들어가세요?”나는 가볍게 물으며 미소를 지었다.이런 별것 아닌 대화가 사람 사이를 더 친밀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장 봐오긴 했는데 아직 요리는 못했어. 하, 난 너처럼 복도 없어서 요리 잘하는 남자 친구가 없네.”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층을 가리켰다.진정우가 이미 집에 와 있었다.나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참으로 낮고 따뜻했다.“문 열려 있어요.”문을 살짝 열자마자 맛있는 요리 냄새가 코를 찔렀다.아침에 대충 먹었기에 지금 너무 배가 고팠다. 부엌의 후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나는 문가에 서서 말했다.“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서
계속 울리던 전화가 갑자기 멈췄다.순간, 공기 중에는 가스레인지 불소리와 서로의 심장 소리만이 남았다.이 가까운 거리에서 숨결이 뒤섞이고 나는 진정우의 눈 속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뭔가 일어나겠는데?’강한 예감이 들었다.똑똑.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정우야! 우리 집 물이 잘 안 나오네. 좀 와서 봐줄 수 있어?"아래층 유씨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밀착해 있던 그의 몸이 한순간 살짝 뒤로 물러섰고 나는 그 틈을 타 재빨리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았다.잠시 후, 진정우는 부엌에서 나와 아줌마를 따라갔다."바로 내려갈게요.""그래, 그래."아줌마는 문 너머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미안, 정우를 잠깐만 빌려 갈게."‘하하... 빌려 간다니.’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빌려 가시는 건 좋은데 빨리 돌려주세요. 오래 빌리시면 안 돼요."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아줌마는 깔깔 웃으며 답했다."알겠어, 알겠어."진정우는 아줌마를 따라 나갔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수박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방으로 들어갔다.그가 다시 날 부르러 왔을 때는 약 30분이 지난 뒤였다.시간이 지나니 아까의 어색함은 이미 사라졌다."해결했어요?"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수도꼭지가 물때 때문에 막혔더라고요. 새 걸로 바꿨더니 괜찮아졌어요.”그 말을 듣고 이곳의 재개발 이야기가 떠올랐다."이 동네 곧 철거되는 거 아시죠?"“네.”그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겠죠. 어차피 임대로 살고 있으니 떠나야 하잖아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어디로 갈 건데요?""아직 생각 중이에요."나는 집을 살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그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저녁, 그의 요리는 여전히 훌륭했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언젠가 이 사람이 내 인생에서 사라지면, 아마 어떤 음식도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 거야.’저녁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함
강유형도 이곳에 와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오늘은 조명 테스트가 있는 날이고 그는 이 놀이공원의 대주주로서 미리 와서 확인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시선이 마주치는 찰나, 강유형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그 순간, 내 손이 따뜻해졌다. 진정우가 내 손을 잡은 것이다.솔직히 말하자면, 내 남자 친구 역할을 맡은 그는 이런 상황에서 꽤 노련했다. 강유형만 등장하면, 그의 태도는 마치 주권을 선언하려는 듯한 강렬함으로 즉시 변하곤 했다.강유형의 시선이 우리 손에 잠깐 머물렀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특별히 불쾌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심지어 그의 목소리도 평온했다.“언제 시작하죠?”그의 질문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조명 테스트를 보러 온 것이다.“10분 뒤요.”진정우가 답했다.“관측 지점은 어디죠?”강유형이 다시 물었다.진정우의 손이 내 손을 살짝 더 꽉 잡았다. 나는 그를 바라봤고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내 의견을 묻고 있었다.진정우가 이곳에서 이미 수없이 테스트를 봤을 텐데 관측 지점을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는 내 의견을 존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구역마다 관측 지점이 다르고 표시도 되어 있어요. 전체적으로 관측하기 가장 좋은 곳은 관람차죠.”나는 공식적인 대답을 했다.강유형은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진정우를 향해 물었다.“두 분은 어디서 관측하실 건가요?”그 말의 뜻은 우리와 동행하겠다는 건가?그는 이 상황이 불편하지 않은 걸까?아니, 그럴 리 없다. 이미 그는 다른 사람과 연애 중이고 과거를 다 내려놓았을 텐데.“저희는 우선 전체적으로 한 바퀴 둘러보려고요. 그리고...”진정우가 잠시 멈추고 말했다.“오늘은 공식적인 테스트가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조명 상태를 지원 씨에게 보여주려고 한 거예요.”강유형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그러나 그는 차분히 “그래요.”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그 ‘그래요’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목이 말라왔다. 우리 셋이 같은 관람차 칸에 타자는 뜻일까?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진정우는 내 손을 잡아 다른 관람차 칸으로 이끌었다.“같이 안 타나요?”뒤에서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불편해서요.”진정우는 단호히 말하며 자연스럽게 나를 칸 안으로 올려주었다.그리고 그는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칸 안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강유형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그의 시선은 차갑고 무거웠으며 화난 게 분명했다.“일부러 그런 거죠?” 나는 진정우를 보며 물었다.“네.” 그는 담담히 대답했다.“같이 타고 싶지 않아서요.”그 말은 솔직했고 어딘가 뻔뻔하면서도 아이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진정우는 차갑고 냉정한 모습도 있고 따뜻하고 세심한 면도 있지만 지금처럼 귀엽고 엉뚱할 때도 있다.“정우 씨.”“네?”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관람차 안의 은은한 조명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귀여워요.”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관람차 안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타이밍 참 절묘하네.“뭐라고요?”그는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내 말을 믿기 힘들었던 건지 되물었다.나는 웃음으로 넘기며 대답하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관람차가 천천히 올라가면서 놀이공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회전목마와 롤러코스터, 워터슬라이드, 그리고 점점 작아지는 놀이공원 전체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과 도시의 불빛들까지 어우러져 있었다.조명이 화려하게 바뀌자 시선이 다시 놀이공원으로 돌아갔다.놀이공원 안쪽의 따뜻한 분위기와는 달리, 밖에서 보는 놀이공원의 조명은 도시를 빛내는 상징 같았다.이곳은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었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 같은 존재였다.“지원아, 이 놀이공원 마음에 들어? 내가 준 선물이잖아.”갑자기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강유형이 이 놀이공원의 설계도를 내게 내밀며 했던 말이었다.그 순간, 나는 그가 날 사랑한다
다채로운 세상이 그의 손바닥 아래 감춰지자 내 시야는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따뜻한 체온이 어떤 빛보다도 큰 안도감을 주었다.“소원을 빌어봐요. 앞으로 제가 지원 씨 곁에 있을 테니 바라는 건 뭐든 이뤄질 거예요.”진정우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며 속삭였다. 마치 첼로 선율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관람차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긴장으로 경직됐던 마음이 그의 말 한마디에 점차 풀려갔다.소원...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부모님이 떠나신 후,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꼈다.강유형과 함께할 때도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가 오래도록 함께하기를 바랐다.하지만 그건 마음속에 품었던 작은 바람일 뿐, 진지하게 소원을 빌어본 적은 없었다.지금이라도 소원을 빌어야 한다면...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 걸까?머릿속이 복잡해졌고 결국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들의 죽음과 남겨진 진실.“우리 부모님의 사고 진실을 알고 싶어.”나는 조용히 말했다.“그건 제가 밝혀낼게요.”진정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럼 굳이 소원을 빌 필요도 없겠네. 그냥 말하면 해결해 줄 테니까.”진정우는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래서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죠.”내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원래 이런 거 잘 안 믿어요.”나는 다시 놀이공원의 찬란한 조명으로 시선을 돌렸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더 이상 하느님 같은 건 믿지 않아요.”그는 이번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앞으로는 저를 믿어주세요.”그 말은 마치 내 삶의 수호자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 같았다.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믿으며 살아간다는 걸.다시 조명이 빛을 발했다. 여기 조명들은 매 순간 변화해 같은 빛을 두 번 보는 일이 없었다.이 놀이공원의 조명 설계 비용은 전체 투자
파란 바다 위를 달리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인어공주'를 떠올리게 했다.그녀는 물결 위에서 뛰놀며 가끔씩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너무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 마치 현실에서 살아 있는 소녀가 물결 위를 달리고 있는 듯했다.나는 숨조차 멈추며 그 장면에 몰입했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그러다 갑자기 큰 파도가 일면서 새로운 그림자가 나타났다.한 소년이었다.키가 훤칠한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소녀도 그를 바라보다가 몇 초 뒤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오빠, 난 다윤이라고 해. 오빠 이름은 뭐야?”그 말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물결 위에서 뛰놀던 그 소녀가 바로 나라는 걸 깨달았다.“오빠, 도망가지 마!”“오빠, 나 좀 기다려줘!”...소년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소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둘은 손을 맞잡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오빠, 나 힘들어. 업어줘.”“오빠, 좀 더 빨리 뛰어봐!”소녀는 소년의 등에 업혀 둘이 물결 위를 함께 뛰었다.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이건 단순한 조명이 아니었다.진정우가 나를 위해 어린 시절의 꿈을 조명으로 재현해 준 것이다.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었고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이라는 걸.“오빠, 다윤이는 커서 오빠랑 결혼할 거야.”“꼭 기다려줘야 해. 절대 잊으면 안 돼!”장면이 계속 바뀌면서 나는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진정우가 내 삶에 등장한 건 우연도 아니었고 의도도 아니었다.그건 그가 지켜온 오래된 약속 때문이었다.조명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다.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했고 동시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조명의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했다.그들은 내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다윤아, 행복해야 해.”눈물이 언제 흘러내렸는지조차 몰랐다.단지 조명이 꺼질 때쯤에는 이미 목 놓아 울고 있었다.이때 진정우
“정말 비열하군.”강유형이 낮게 으르렁대며 진정우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마음 아파할 겨를도 없이 급히 다가가려는 순간, 진정우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강 대표가 말하는 비열함이란 당신이 지원이에게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한 적이 없어서겠죠.”강유형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진정우, 네가 이런 유치한 쇼로 지원이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지원이는 이런 환상 따위 좋아하지 않아. 알겠어?”내가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맞다, 한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우리가 막 연인이 되었던 첫 밸런타인데이에 그는 나에게 어떤 선물도, 심지어 저녁 한 끼도 준비하지 않았다.다음 날 신지태,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신지태가 우리 첫 밸런타인데이를 어떻게 보냈냐고 장난스럽게 물었을 때 나는 정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당황스러웠다.그 후, 강유형이 내게 사과하며 그저 깜빡 잊었다고 말했고 나는 억지로 “난 이런 거 안 좋아해”라며 넘어갔다.하지만 세상에 꽃과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그는 그저 주지 않았을 뿐이다.“지금도 지원이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진정우의 낮고 단호한 물음에 강유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그는 분명히 봤을 것이다.그리고 그 눈물이 무엇 때문인지도 알 것이다.진정우가 AI로 부모님을 재현해 낸 감동, 그로 인해 솟구친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그를 향한 감동의 눈물이었다.진정우의 사랑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 빛났다.정성스러운 한 끼의 식사, 묵묵히 나를 지켜주는 것, 나만을 위해 준비한 조명 쇼까지...강유형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시선을 돌리고 진정우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지원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우린 10년을 함께했고 지원이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어.”진정우는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강유형은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믿기 어렵겠지? 지원이 왼손 중지에 있는 작은 흉터를 봤어? 그게 증거야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