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리영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가 그동안 혼자서 마음고생하며 좋아하던 사람인데 내 부탁에 구안석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구안석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다니 안리영이 얼마나 속상했을지 상상이 갔다.‘구안석은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서 왜 이렇게까지 그녀의 마음에 상처 주는 걸까?’내가 말하려던 찰나 구안석이 입을 열었다.“전혀 귀찮지 않아. 그리고 오직 너만이 날 귀찮게 할 수 있지.”‘어라? 이건 또 무슨 말이지?’난 혼란스러워했고 안리영도 당황한 얼굴이었다.“선배... 그게 무슨...”“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구안석이 다시 말을 끊고 말했다.안리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렇다면 왜 다른 남자한테 관심을 보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아주는 거지?”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문득 깨달았다.‘구안석 씨가 질투하는 거였네. 그런데 이 남자는 그걸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표현하다니. 아직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설마 이게 사실상 고백인가?나도 덩달아 설레기 시작했고 나는 안리영을 지켜봤다.그녀도 그의 말에 완전히 당황한 표정이었다.“선배, 지금... 저한테 질투하시는 거예요?”‘아니... 그걸 말이라고. 왜 다시 확인하는 거야?’“맞아. 너는 나만 좋아해야 해. 흔들리면 안 돼,”구안석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그는 정말 직설적이고 솔직했다.안리영은 한 번 목을 삼키며 말았다.“선배님, 저... 좋아해요. 그런데 선배님은 저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잖아요. 그래서...”그녀는 말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난 싫다고 말한 적 없잖아.”구안석이 또 한 마디 덧붙였다.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몹시 기뻤다.‘이제 구안석도 안리영을 좋아한다는 거잖아!’안리영은 아직도 조금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구안석의 말은 더 확실하게 그의 마음을 드러냈다.“안리영, 나도 널 좋아해. 네가 날 좋아했던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말이야.”구안석의 고백은 점점 더 직설적이고 강렬
‘아파!’나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강한 손이 내 팔을 꽉 잡고 나는 그 힘에 끌려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낯선 얼굴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그 사람은 나를 보고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를 놓고 갑자기 뒤돌아 뛰어갔다.나는 아픈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급하게 떠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뒤에 있는 안리영의 사무실을 보며 깨달았다.그 남자는 분명히 문 앞에 서서 나와 안리영의 대화를 훔쳐 듣고 있었다.그렇게 집중해서 듣고 있으니 내가 나가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결국 내게 부딪히게 된 거다.그렇다면 이 사람은... 차가운 마음이라는 아이디로 알려진 사람이었을까?내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서 진정우가 다가왔다. 내가 그쪽으로 가려고 했을 때 안리영이 사무실 안에서 한마디 했다.“선배, 나 지금 배고파.”그 말을 들은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안리영, 역시 선수야. 갑자기 차가운 태도와 부드러운 태도를 오가고 있다니... 정말 잘 다듬어진 모습이야.’“뭘 웃어?”진정우가 가볍게 물었다.“안리영과 구 교수님 말이야. 결국 사귀게 됐어.”나는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진정우는 잠깐 뒤를 보고는 내 책을 잡고 손목을 잡았다.“이제 돌아가자.”“소영이 혼자 괜찮을까?”나는 안리영에게는 말해 놓았지만 여전히 걱정이 되어 물었다.“괜찮아.”진정우는 안심한 듯 말했다.“그동안 소영이는 고향에서 혼자 지내왔어.”그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그러네. 소영이는 겉보기에는 여리여리해 보이지만 그동안 정말 독립적이었지.’그렇게 말하는 진정우를 따라 나는 걱정 없이 집으로 향했다.집으로 가는 길에 진정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여전히 진소영의 수술에 대해 걱정하는 것 같아 나도 조용히 있었다.차에서 내려 집에 도착했을 때 진정우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나는 슬쩍 손을 빼려 했지만 진정우는 손을 놓지 않았다.그가 내 손을 꽉 잡고 있었고 나는
진정우는 내 이마를 가만히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하지만 난 널 너무 좋아야. 정말 많이... 많이...”그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뜨거운 곳으로 가져갔다.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확 빼고 몸 뒤로 숨겼다.그는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는 전혀 안 그런 거야?”“하나도 안 그래. 난 졸려. 그냥 자고 싶어.”나는 그를 밀치며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열쇠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결국 진정우가 내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주었다.“당황하지 마.”그는 내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그 말에 내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마치 그의 열기가 나를 덮친 듯한 기분이었다.진정우는 문을 열어줬지만 내가 들어가려는 순간 내 팔을 잡았다.“정말 나를 안 들여보낼 거야?”“절대 안 돼!”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했다.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를 째려보며 소리쳤다.“정우 씨!”“알았어.”그는 무표정하게 말하며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창문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모든 방을 둘러본 뒤 다시 내 앞에 섰다.“확인했어. 문도 창문도 다 안전하고 집 안도 아무 이상 없어.”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다. 그리고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오늘 하루 종일 비행기도 타고 병원도 다녀왔으니 피곤할 거야. 샤워하고 푹 자.”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의 다정한 말투에 나는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를 더 이상 벌주고 싶지도 않았다.사실 그가 고향에서 나를 대했던 태도가 떠올랐다.그건 진소영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동시에 나를 배려하려는 마음도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우리 둘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까.“잘 자. 지원아.”진정우는 내 손을 놓으며 돌아서려 했다.나는 순간 그를 붙잡았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진정
진정우가 돌아간 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들었다.안리영에게서 사진과 함께 메시지가 와 있었다.사진 속에는 잠들어 있는 진소영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너의 작은 시누이가 무사히 잘 자고 있음.]역시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였다.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 나의 여왕님.]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안리영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마치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그녀가 이제 막 짝사랑하던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으니 나와 기쁨을 나누고 싶었을 게 분명했다.화면 속 그녀는 의자에 기대어 있었는데 얼굴 가득 기쁨이 넘쳐나는 모습이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와, 얼굴에서 꽃이 피었네. 숨길 수가 없어. 이렇게 행복한 티를 내다니.”“칭찬 고마워. 지원아.”안리영이 엄지를 치켜들며 웃었다.나는 그녀를 더 놀리며 말했다.“근데 리영아, 너 꽤 사람을 잘 다루는 것 같더라. 오늘 보니까 수준급이던데?”“그래? 내가 그런가?”그녀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물었다.“당연하지.”안리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받아들였다.나는 아까 본 장면을 떠올리며 흥분해서 말했다.“리영아, 네가 고백받는 순간에 내가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 알아? 구 교수님이 널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난 네가 당장 교수님의 품에 뛰어들 줄 알았어!”“그랬다면 너무 뻔하지 않아? 그래서 안 그랬어.”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왜 그렇게 침착한 거야? 혹시 너무 행복해서 머리가 하얘졌던 거야?”“아니야. 행복한 건 맞는데 일부러 그랬어.”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뭐야. 감히 수작을 부린 거야?”“그런 셈이지.”그녀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원아, 나는 선배를 정말 오래 좋아했지만 내 감정에 휘둘리고 싶진 않았어. 그리고 선배가 나를 받아들인다는 게 내게 어떤 큰 은혜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정말 연애에 대한 감각이
“비밀이라면 말하지 마.”안리영은 내가 농담하는 줄 알며 웃었다.하지만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너한테 추파 던지던 남자는... 명확히 거절했어?”“당연하지.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했어.”“근데 아직 포기 안 한 것 같아. 그러지 않았으면 꽃과 음식을 계속 보내지 않았겠지.”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그 남자가 아까 밖에서 몰래 엿듣기도 했어.”그러자 안리영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나는 어제 그 남자에 대해 설명했다.예전에 내가 소개팅 상대에게 스토킹 당하고 위협을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리영아, 요즘 특히 조심해. 그런 남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가능성이 커. 출퇴근하거나 운전할 때도 항상 주의해야 해.”안리영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걸어갔다.“어디 가는 거야? 내가 한 말 듣긴 했어?”나는 뒤따라 물었다.그녀는 간호사 데스크로 가더니 졸고 있는 간호사에게 말했다.“오늘 밤 8시 30분 전후 10분 동안 제 사무실 문 앞을 드나든 남자의 CCTV를 좀 확인해 줘요.”그녀가 시간을 정확히 말하는 걸 보니 구안석의 고백 때문에 시간을 기억하는 듯했다.간호사는 곧바로 CCTV를 확인했고 안리영은 그제야 내게 말했다.“네가 말한 그 사람이 날 쫓아다니는 남자일 확률은 낮아.”“뭐?”나는 이해하지 못했다.“그 남자의 가족에게 확인했는데 지금 이 지역에 없어. 어제 이미 떠났고 오늘 보낸 물건은 온라인으로 주문한 거래.”안리영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의아했다.그렇지만 그 남자는 분명 어젯밤 내 얘기를 엿듣고 있었다.곧 간호사가 CCTV 영상을 가져왔다.“안 의사님, 이 사람 맞나요?”안리영은 영상을 나에게 넘기며 물었다.“지원아, 네가 확인해 봐. 이 사람 맞아?”영상 속 남자는 회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맞아. 이 남자야.”영상을 통해 내가 그와 부딪힌 장면까지 보이자 안리영이 말했다.“확실히 날 쫓아다니던 그 남자는 아니야. 이 남자는 처음 보
그 남자는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서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혹시 저 아세요?”내가 다가가며 바로 물었다.“아니요. 모릅니다.”나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엔 평범해 보였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피부는 하얗고 오늘 입은 물빛 티셔츠 덕분에 한층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이었다.“하지만 어제와 오늘 우연히 마주친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나는 그의 말이 거짓말임을 넌지시 지적했다.“정말 모릅니다. 다만 당신이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요.”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건 너무 식상하지 않아?”그는 내 웃음 속 비꼼을 눈치챘는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진짜라니까요. 사진도 있어요.”그는 말을 마치고 휴대전화를 꺼내 몇 번 터치한 뒤 내게 화면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한참 들여다봤다.사진 속 여자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동그랗게 묶고 있었다. 얼굴은 나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지만 눈가에 있는 눈물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나는 사진 속 여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정말 닮긴 했네요. 하지만 저는 이 여자를 몰라요.”“그럴 줄 알았습니다.”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데 왜 저를 따라다니는 거죠?”나는 그의 신발에 잠시 시선을 두며 물었다. 그가 신고 있는 운동화가 묘하게 눈에 들어왔다.그는 잠시 침묵했다.그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런 식으로 따라다니면 스토킹으로 간주할 수 있어요. 신고해도 된다고요.”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런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의도가 나쁘지 않더라도 이런 행동은 여자에게 불안하고 무섭게 느끼게 만들 수 있어요. 이해하시겠어요?”내 말투는 마치 직원에게 충고하는 듯 단호했다.“죄송합니다.”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솔직히 특별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요.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은 그냥 없던 걸
산소 기계를 끄면 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그럼 지금은 그녀 곁에 있어야죠. 끝까지 함께 지켜 줘야죠.”“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소지훈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폐를 끼쳐드려서 미안해요.”나는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기적이 있기를 바랄게요.”소지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젯밤 그를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뭘 봐? 전화도 안 받았고.”진정우가 다가와서 내가 들고 있던 꽃을 받아 들고 물었다.나는 소지훈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어젯밤 그와의 우연한 만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소지훈의 사정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가장 중요한 건 소지훈의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정우 씨, 사람과 혈연관계가 없어도 닮은 사람이 있는 이유가 뭘까?”“사람은 유전자란 걸로 구성되니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유전자가 비슷한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지.”진정우는 아주 공식적인 답을 했다.나는 소지훈이 나를 따라다녔던 이유를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그럼 언젠가 정우 씨는 날 닮은 사람을 보면 나를 찾으려고 할 거야?”“왜 그래야 하는데?”진정우는 날카롭게 물었다.“그냥. 만일의 경우 말이야.”“내 눈에 너는 오직 너 하나뿐이야.”진정우는 그다지 흔들림 없이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다른 생각 안 할게.”진정우는 내 옆에 있던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언제나 너는 오직 너 뿐이야. 나에겐 너밖에 없어.”“하하.”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알겠어. 빨리 가자.”진정우는 꽃을 들고 내 손을 잡았다.“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방금 사진을 봤는데 내 얼굴과 정말 닮은 여자애가 있었어.”내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정확히 말하면... 닮은 정도가 90%는 됐어.”그때는 그냥 얼굴이 비슷하다는 점에 놀랐지만 사진이 내 머릿속에 남고 나서야 닮은 점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지켜본 지 한참 된 것 같았다.그래서 아까 진정우와 내가 나눈 대화도 그들이 다 들었을 것이다.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이렇게 마주쳤으니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었다.진정우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아줌마, 삼촌, 진혁 오빠.”그러자 아줌마가 제일 먼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원아, 정우야, 너희 둘은 여기서 뭐 하고 있어?”나는 진정우를 힐끗 보며 대답했다.“친구를 보러 왔어요.”진소영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진정우가 진소영을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줌마와 삼촌이 진소영이 병원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병문안을 오려고 할지도 모르고 그럼 진소영이 나와 그들의 관계를 물을까 봐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나는 말을 마치고 삼촌을 쳐다보았다. 삼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서 있었고 안색도 안 좋아 보였다. 분명 몸이 편찮으신 것 같았다.“삼촌, 괜찮으세요?”“그냥 혈압이 좀 올라서 그렇지 별일 아니야.”삼촌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줌마가 삼촌을 한 번 쳐다봤다. 삼촌이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삼촌도 뭔가를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처럼 서로 숨기는 게 많아지면서 우리 관계도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예전에는 삼촌이 감기만 걸려도 나한테 먼저 약을 구해달라고 했었는데.“지원아, 너희 여기서 뭔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게 없어?”.“없어요.”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거절했다.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고 진정우가 분위기를 깨며 말했다.“삼촌, 저희랑 같이 가서 진찰받으시죠.”그 말은 정말 좋은 말이었다. 진정우는 항상 사람들에게 그를 고마워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괜찮다니까. 너희는 너희 일 보러 가.”삼촌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고 아줌마도 곧바로 말했다.“지원아, 나중에 시간 되면 삼촌 좀 보러 와.”“네. 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나는 진정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우리가 걸음을 떼자 아줌마의 한숨 소리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