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유형도 내 발을 주물러 준 적이 있다. 그때는 감동을 느꼈지만 지금과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손길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우가 내 발을 다 주물러 줄 때쯤, 밖에서 할머니가 소리치며 누군가를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똑똑히 들어, 내 사람한테 누가 해코지하면 내가 가만 안 있을 줄 알아! 너네 조상 대대로 내가 저주할 거야!” “무슨 일이에요?” 나는 조용히 물었다. 진정우는 내 발을 그의 무릎에서 내려 다른 돌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일어서는 순간 나는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걸 보았다. 나는 더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의 다음 말이 그게 아님을 알려주었다. “앞으로 여기서는 치마 좀 덜 입어요.” 나는 고개를 숙여 내가 입고 있는 치마를 보았다. 짙은 파란색 실크로, 몸에 딱 달라붙는 데다가 옆이 살짝 트여 있었다. 내가 앉아 있을 때, 치마 틈이 위로 올라가서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 있었다. 방금 진정우가 내 발을 주물러 줄 때 아마 뭔가를 봤을 것이다... 나도 얼굴이 약간 붉어졌지만 지는 건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내가 치마 입는 게 거슬려요?” 진정우의 목젖이 빠르게 두 번 움직이더니, 그는 말없이 성큼성큼 마당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할머니의 꾸짖음도 멈췄다. 나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발목을 들고 폴짝폴짝 뛰며 문가로 갔다. 거기서 나는 진정우가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의 앞에는 소문의 주인공인 오향설이 서 있었다. “당신 행동은 고의적인 상해예요. 신고만 하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진정우는 땅에 흩어진 기름 얼룩을 가리켰다. 바로 내가 아까 미끄러진 그 자리였다. 보아하니, 내가 발을 헛디딘 것은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짓이었다. “내가 그랬다고 어떻게 증명해요? 본 사람 있어요?” 오향설은 목소리를 높였다. 집주인 할머니가 말했다. “벌써
이렇게 노골적인 말은 평생 처음으로 해봤다. 진정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차갑게 대답했다. “착각한 겁니다.” “...” 그는 뒤돌아 서서 수박을 잘랐다. 한 조각 한 조각, 마치 줄을 맞춰 대기하는 병사들처럼 가지런하게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그의 방을 다시 한번 엿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왜 안 먹고 있어? 보고만 있으면 배가 부르니?” 할머니가 다가와 나를 놀렸다. 이 할머니는 참 대단한 분이다. 욕할 때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남을 걱정할 때는 자상하며, 농담을 할 때는 능청스럽게 내뱉는 재치까지 갖추셨다. “할머니를 기다렸어요. 저를 위해 속 풀이해 주시느라 고생하셨잖아요.” 나는 장난스럽게 가장 큰 수박 조각을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달다. 하지만 나는 당뇨가 있어서 많이 먹으면 안 돼.” 나도 수박을 먹기 시작했지만 진정우는 방으로 돌아가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되자 그는 또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에게 저녁을 먹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빨리 가버려서 입도 떼지 못했다. 할머니가 옆에서 코웃음을 쳤다. “정우는 원래 굉장히 차가운 사람이야. 너한테만 저렇게 특별히 신경 써.” ‘나한테 어떻게 특별히 신경을 쓴다는 거지?’ 나는 묻지 않았지만 그가 내 발을 주물러 준 것이 효과가 있기는 했다. 밤새 자고 일어났더니 발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마당 안은 너무도 고요해서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민소매 슬립 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가다가, 돌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진정우는 내 모습을 몇 초 동안 바라보더니, 이내 급히 시선을 피했으며 귀마저 붉어졌다.나는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고,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할머니가 정겹게 나를 불렀다. “지원아,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렀지만 할머니의 자식들이 찾아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는 나와 진정우를 자신의 자식처럼 여기고 계신 것 같았다. 저녁에 잠들기 전 안리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묻기에 나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작은 동네에 있는 동안 정말 행복했으니까. 부모님이 떠난 후로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휴가를 더 연장해서 이곳이 지겨워질 때까지 머물고 싶다고 말했다. “너 혹시 그 군인 오빠를 놓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묻자 진정우와 몇 번의 짧은 만남 속에서 느낀 미묘한 설렘이 떠올랐다. “놓치기 싫다기보다는... 그 사람이랑 있을 때 심장이 활기차게 띠는 느낌이야.” “좋네, 우리 조 비서님의 회복력도 꽤 괜찮은데?”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안리영도 잠깐 침묵하더니 물었다. “강유형 그 나쁜 놈, 아직도 연락이 없어? 카톡도 하나 안 보냈어?” 나는 입술을 핥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응, 없어.” 안리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인간은 네가 평생 자기를 못 떠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나는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번에는 강유형한테 보여줄 거야.” 안리영과 통화를 하며 잠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전화는 끊어져 있었고 안리영이 남긴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이 세상에 누구도 누구 없이 살 수 없는 건 아니야.] 그렇다. 나는 강유형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다. 며칠 동안 잘 먹고 잘 지냈으니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다시 자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이 새벽에 누가 메시지를 보낸 걸까? 눈을 뜨고 화면을 확인하자 순간 멍해졌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강유형이었다.[이제 그만하고 돌아
큰 문제? 얼마나 큰 문제인데? 나는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천천히 말해요, 무슨 일이에요?” 이소희는 상황을 설명해 주었는데, 대략 조명과 디자인 시안이 완전히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명 자체의 품질 문제가 있거나, 시공 설치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문제를 이미 알고 있으면 관련 책임자를 찾아 해결하면 되잖아요. 내가 돌아간다고 해도 결국 그 일을 할 거예요.”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언니, 언니 제발 돌아와요. 저 혼자서는 정말 감당이 안 돼요. 요즘 대표님께서 무슨 생각인지, 매일같이 놀이공원에 와서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때마다 골치 아픈 일들이 생겨요. 저 정말 미칠 것 같아요.” 이소희의 목소리는 거의 울먹일 지경이었다. 강유형이 나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떠올리며, 혹시 일부러 이소희를 곤란하게 만들어 나를 압박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마음이 약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걸 싫어한다는 걸 말이다. “소희 씨가 먼저 처리해봐요.” 나는 여전히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이소희를 일부러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성장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계속해서 배우고 책임을 지면서 발전하게 된다. 나는 사직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녀에게는 승진의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니 그에 따른 능력도 갖춰야 했다. “언니, 저 혼자선 이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요. 조명이 놀이공원의 핵심이잖아요.” 이소희는 여전히 나를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몇 초 동안 생각한 끝에 나는 말했다. “문제 보고서를 보내고 현장에서 나랑 영상 통화해요. 가능하면 밤에 조명을 다 켜고 내가 상황을 보고 나서 결정할게요.” 이소희는 내가 정말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언니, 대표님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거죠? 실은 저도 혼자 감당할 수 있다면 언니한테 이런 말을
확실히 그곳은 가장 높은 지점이었다. 나는 영상을 통해 조명 아래의 놀이공원을 내려다봤다.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설계도에 있던 조명의 기본 색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원래 디자인에서는 조명 바탕색이 파란색에서 점점 변하는 그라데이션으로,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바다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통 짙은 파란색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라데이션은 없었다. 색깔 자체는 짙고 강렬했지만 그 속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언니, 전체 모습은 이래요. 시공 쪽 문제인지, 아니면 조명 제조사에서 문제가 생긴 건지 모르겠어요.” 이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공 팀이랑 제조사랑 이야기는 해봤어요? 그 사람들은 뭐래요?” 내가 물었다. “시공 쪽은 자신들이 요청대로 시공했다고 하고, 제조사도 우리가 요청한 대로 조명을 납품했다고 주장해요. 서로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해서, 도대체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건지 모르겠어요.” 이소희는 몹시 난감해 보였다. “지원 언니, 이 문제는 진짜 해결이 안 돼요. 언니도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잖아요.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 언니도 원하지 않잖아요?” 이소희는 나를 다시 설득하려고 했다. “알았어요, 돌아갈게요.” 이번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바로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곧 이소희가 보내온 드론 촬영 영상을 받았는데,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짐을 챙겼다. 아홉 시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지원아,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또 요가라도 하려고?” 할머니가 나를 보고 물었다. 며칠 동안 나는 시간이 나면 마당에서 요가를 하곤 했는데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내 팔, 다리, 허리가 다칠까 봐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아니에요.” 나는 할머니 앞에 다가가 말했다. “할머니, 저 이제 가봐야 해요.” 할머니는 놀라며 물었다. “아니, 아직 며칠 더 있기로 하지 않았니?” “회
당구장.강유형이 큐대를 휘둘렀지만 공은 모두 빗나갔다.한편에서 신지태는 큐대를 닦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윤지원이 아직도 너한테 답장 안 했어? 연락도 없고?”강유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지태는 당구대에서 가장 까다로운 각도의 공을 겨냥해 큐대를 휘둘렀다. 쿵 소리와 함께 공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들어갔다.“보통 이러지 않잖아. 네가 그렇게 말했을 때도 별로 신경 안 쓴 것 같더니, 이번에는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지?” 신지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강유형은 윤지원이 당구장에 와서 물어봤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윤지원이 너한테 뭘 물었지?”신지태는 또 한 번 공을 넣더니, 멋지게 당구대에 걸터앉아 다른 공을 겨냥했다. 쿵 소리와 함께 이번에도 완벽하게 공이 들어갔다.“이미 말했잖아. 네가 조나연이나 임석진이랑 학교 다닐 때 뭔가 문제가 있었냐고 물었지. 난 없다고 했고, 그래서 윤지원이 떠난 건 나랑 전혀 상관없어.” 신지태는 책임을 깔끔하게 넘겼다.“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불안해?” 강유형의 말투는 여전히 거칠었다.신지태는 마지막 남은 공을 바라보다가 강유형을 보며 말했다. “너 정말로 윤지원이 왜 떠났는지 모르는 거야? 왜 혼인 신고조차 안 하고 떠났는지?”“몰라, 그냥 삐진 거겠지. 그동안 내가 너무 오냐오냐 해줬으니까!” 강유형은 화가 난 듯 대답했다.혼인 신고를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도 그를 불편하게 대했고, 회사에서도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심지어 바람을 피우다 걸렸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정말, 사람들은 아무 말이나 지어내기 일쑤다.“네가 오냐오냐 해줬다고?” 신지태는 웃었다. “유형아, 솔직히 말해서 난 네가 지원이를 오냐오냐 해줬다는 느낌을 전혀 못 받았어. 오히려 너는...”신지태는 잠시 멈췄다. “오히려 너는 윤지원이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 믿고, 네가 없으면 지원이가 못 살 거라 생각했던 거지. 그래서 지원이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을
오후 세 시.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짐도 풀지 않고 바로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이소희도 그곳에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서 나를 꼭 껴안았다. “언니, 드디어 돌아오셨네요.”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나랑 몇 군데만 가서 확인해 봐요.”어젯밤은 거의 한숨도 못 잤다.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을 계속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공사나 조명업체를 의심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건 큰 프로젝트였으니까.만약 그들 탓으로 문제가 발생한다면 돈을 벌기는커녕 큰 손해를 볼 게 뻔했다.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다른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해야 했다.조명을 켰다 껐다 하며, 설계도와 비교해 가며 문제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일을 멈출 수 있었다. “지원 언니, 언니 이번 주는 완전 몰아서 일하는 거네요.” 지친 이소희가 나를 놀리듯 말했다. 정말로 일주일이나 지나버린 걸까? 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는 이소희와 함께 회사로 가서 밤새 우리가 찾아낸 문제들을 정리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다음 날 시공사와 조명업체에 연락해 논의하고 강유형에게 보고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강유형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었고, 무척 화가 나 있었다고 이소희가 전해주었다. 그녀는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결국에는 둘 다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강유형은 나에 대한 감정은 별로 좋지 않지만, 일에서는 철저히 공과 사를 구분하며 매우 엄격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벌을 받더라도 해야 할 일은 완벽히 해내야지.” 나도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우리는 새벽 6시까지 일을 했고 결국 이소희는 지쳐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들었다. 나도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졸리지 않았다. 간단히 세면
강유형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에 흰 셔츠를 입고 별무늬가 박힌 넥타이를 맸다. 그 넥타이는 작년 그의 생일에 내가 선물한 것이었다. 그는 그 넥타이를 한 번도 맨 적이 없어서, 아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야 이 넥타이를 맨 걸 보니 아주 뜻밖이었다.강유형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고 그의 눈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은 날카롭고 위협적이었다.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요즘 어디 갔었어?” 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연차 휴가를 보냈습니다.” 나는 딱히 답이 되지 않는 말을 했다.강유형은 책상 위에 얹어놓은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어디로 갔냐고 물었어.”“청평군에 다녀왔습니다.” 숨길 것도 없어서 솔직하게 지명을 말했다. 그가 더 깊게 찡그린 미간에 잠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청평군이 어디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청평군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고 그가 그런 곳을 알 리가 없었다.하지만 그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썼다면 이미 알았을 것이다. 나는 그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며, 부모님이 나를 가장 데려가고 싶어 했던 곳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나는 중요하지 않았기에 내가 했던 말은 그저 흘려들었을 뿐이다. “그런 곳에 여행이라도 갔다는 건가?” 강유형의 질문에 나는 웃음이 나왔고 결국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왜 휴대폰을 꺼놨어? 메시지도 확인 안 하고?” 그가 말할 때마다 나를 질책하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제 자유입니다, 대표님.”그의 얼굴이 순간 더 어두워졌다. “그래, 그건 네 자유지. 하지만 회사 규정상, 어떤 경우에도 업무에 지장이 있어선 안 돼.”“제가 무슨 일을 방해했습니까?” 나는 차분하게 반문했다.강유형은 침을 꿀꺽 삼켰고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진정우가 내 코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