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 가문을 붙잡아 뒀다고?’이 말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진수로가 진정우에게 ‘우리’라고 표현했다는 점이었다.안리영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인 채 진정우의 대답을 기다렸다.진정우는 고급 맞춤 정장을 입고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고위 결정권자 같았고 진수로는 오히려 그의 부하처럼 보였다.“힘들면 알아서 결정하세요.”진정우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그럼 오늘 강씨 가문과 최종적으로 논의할게.”진수로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고 곧이어 물었다.“시간 되면 한 번 같이 밥 먹자.”진정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요즘 바빠서...”진수로는 거절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더 해보려는 듯했지만, 진정우는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난 지금 약혼녀와 친구들과 저녁 식사 중이라 다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그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진수로는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려놓았다.그들이 멀어지자 안리영이 나를 쿡 찌르며 말했다.“야, 진수로가 진씨 가문의 상속자잖아. 그런데 진정우 앞에서는 마치 말단 직원 같네.”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건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진정우가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재라서 그런가? 요즘 대기업들은 기술형 인재를 중요하게 여기잖아.”나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하며 웃었다.“하, 우리나라에 인재가 넘쳐나는데 그런 이유는 아닐걸?”안리영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왜 그런 거지?”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혹시... 진정우도 진씨 가문 사람 아니야?”안리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 있다가, 그동안의 기억이 스쳐 갔다.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말도 안 돼. 소영이 수술비도 내가 냈는데 그가 진씨 가문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어.”“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안리영은 잠시 뜸을 들
나는 창밖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그 둘이 정말 뭔가 있었다면 벌써 그런 기류가 있었겠지. 그랬다면 너한테 기회조차 없었을 거고.”“맞아. 내가 구 교수를 좋아할 때, 그도 날 좋아했어. 우리는 같은 주파수에 있었어. 비록 완전히 같은 차원은 아니어도.”안리영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너희는 정말 영혼의 짝 같아.”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근데 너희 혹시... 그냥 영혼만 통하는 게 아니라 몸도...”안리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아직은 아니야.”“그럼 그가 주저하는 거야? 아니면 네가 아직 망설이는 거야?”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놀렸다.“그냥 뭔가 아직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그녀는 숨김없이 솔직히 말했고 나는 고민하는 척하며 말했다.“그럼 오늘 나와 정우가 너희를 위해 호텔 스위트룸을 하나 잡아줄까? 분위기만 맞추면 다 잘 될걸?”“야, 됐거든? 그런 거 분위기 아니고 민망한 거야.”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내 말을 받아넘겼다.“근데 왜 그렇게 날 빤히 쳐다봐?”“네가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나 싶어서.”안리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여자는 살짝 나쁜 구석이 있어야 남자가 더 좋아하는 법이거든.”우리는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진정우가 이미 돌아와 구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아까 화장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슬쩍 말을 꺼냈다.“아까 대표님 만났어.”“그래?”그의 반응은 여전히 미지근했다.“둘이 뭐라고 얘기했어?”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화장실에서 잠깐.”진정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살짝 더 떠봤다.“근데 대표님이 KS 그룹이랑 협력 논의 중인 것 같더라.”“맞아.”이번에도 그는 짧게 대답했다.“응? 넌
나와 진정우는 구 교수 바로 옆방에 묵게 되었다.사실 내가 호텔에 머물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오늘 밤 안리영이 구 교수 방에 남게 될지 궁금해서였다.진정우와 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바로 테라스로 나갔다. 발을 들이기 무섭게 구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리영아, 너도 해외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걸 생각해 본 적 있어? 너 정도 실력이면 해외에서도 훌륭히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나는 몸을 숙여 테라스 너머를 살폈다. 구 교수는 안리영을 다정하게 감싸안은 채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글쎄, 오늘 전까진 생각해 본 적 없어.”안리영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가운 톤과는 달리 한없이 부드러웠다.“그럼 이제 생각해 볼래?”구 교수의 말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안리영은 대답하지 않았고 구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거기서 네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선배.”안리영이 부르며 그의 품에 안긴 채 물었다.“선배는 국내로 돌아올 생각 없어?”구 교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단호히 대답했다.“...없어.”안리영은 그의 품속에서 머리를 들고 물었다.“왜?”“해외에서 경력을 쌓다 보니 특정 국가에 국한되는 게 싫어. 글로벌하게 일하고 싶어.”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의 말에 안리영은 잠시 침묵했다.“선배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건 맞지만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쌓아온 인맥은 전부 국내에 있는데...”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안리영은 사랑에 눈이 멀지 않고 현실적인 관계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알아. 내가 너한테 무조건 나를 따라오라는 게 아니야. 그저 우리가 함께할 미래를 생각해 보자는 거지. 결혼하면 결국은 같은 곳에 있어야 하잖아.”구 교수는 안리영의 귀에 얼굴을 대며 다정히 말했다.이 대화를 들으며 나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보이는 작은 습관이 떠올랐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자주 감싸안았고 강유형은 내 얼굴을 쓰
“그리고 딱딱하지.”내가 두 글자를 덧붙이자 진정우는 입을 꽉 다물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나를 슬쩍 내려놓았다.“진정우.”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설마 이거 가지고 삐진 거야?”“아니.”그는 단호히 대답했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왜 내가 너를 ‘거친 남자’라고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안 들어도 알아.”그는 내 허리를 감싸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나를 호텔 방에 있던 흔들의자에 앉혔다.“알고 있다고? 뭘?”나는 두 다리를 흔들며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가 더 움직이지 못하도록.진정우의 목젖이 두 번 위아래로 움직였지만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척했다.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기분이었다.“말해 봐. 뭘 안다는 거야?”나는 그의 허리를 감싼 다리로 장난을 치며 물었다.그는 여전히 침묵했다. 아마 그가 절대 먼저 말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에 내가 말을 이어갔다.“말 안 하면 내가 알려줄게.”나는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까이 댔다.“‘거칠다’라는 건, 너를 처음 봤을 때 너무 무뚝뚝하고 예의도 없고 여자를 다룰 줄 모른다는 뜻이야.”내 말에 그의 몸이 미묘하게 반응했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며 덧붙였다.“반박하지 마. 왜냐하면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런 인상이었으니까. 내 머릿속엔 이미 너는 거친 남자로 각인됐거든.”나는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몸이 긴장하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딱딱하다는 건 부정 못 하겠지?”내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으며 그의 몸을 더듬었다.“진짜 딱딱해. 손에 닿으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흔들의자가 갑자기 휘청거렸다.“꺅!”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품에 안겼다.진정우는 곧 흔들의자를 붙잡고 나를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엔 진짜 ‘딱딱한’ 걸 보여줄게.”그의 목소리엔 농도 짙은 농담이 섞여 있었
안리영 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까 내가 목격한 기류를 보아하니, 아마도 지금 나와 진정우처럼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것이다.그런 상황에서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도 처음이라면 분명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불쾌한 사건이 될 터였다.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진정우를 살짝 밀며 말했다.“잠시만.”진정우는 가슴이 들썩이며 나를 뜨겁게 바라보았다.“뭐라고?”나는 문 쪽을 가리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들어봐. 누군가가 안리영의 일 망치려는 것 같잖아.”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서?”“그러면 안 되지.”나는 벌써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그러면 지금 우리의 일은? 같이 망치는 거잖아.”그 말에 나는 살짝 부끄러웠지만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자기야, 잠깐 기다려봐. 내가 저년을 물리치고 올게.”내 말투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정말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점점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다.과거 강유형과 함께 있을 땐, 어른스럽고 냉철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미래의 사모님’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체면을 위해 모든 상황에서 배려하고 우아하게 굴어야만 했다. 그 결과 젊음마저 소모된 느낌이었다.하지만 진정우와 함께하는 지금은 달랐다. 그는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줬다.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미끄러지듯 바닥에 내려섰다. 흐트러진 옷을 간단히 정리하고 방문을 열어 방해꾼과 맞설 준비를 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맞은편 구 교수의 방에서 나온 사람은 뜻밖에 안리영이었다.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문틀에 기대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그녀가 유리하다면 그냥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리해진다면 즉시 지원군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구 교수님은 어디 계세요?”소희연이 먼저 직설적으로 물었다.“샤워 중이에요.”익숙한 대사가 안리영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녀의 목소
안리영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럼요. 구 교수님은 여자 친구가 있으니, 희연 씨도 당연히 선을 지키실 줄 알았어요.”자기가 진짜 여자 친구임을 당당히 드러냈다.소희연은 잠시 안리영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공격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침묵하다가 마침내 말했다.“구 교수님께 내일 한 시간 일찍 출발하라고 전해주세요. 늦으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테니까요.”그 말은 분명히 위협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싸움을 걸 핑계를 만들고 있었다.안리영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오늘 밤은 쉬지 않고 시간을 보내야겠네요.”그 순간 나는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역시 내 친구!’소희연은 안리영의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더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뒤돌아 떠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안리영은 나를 가리키며 손짓했다.‘네가 옆방에 있다는 걸 몰랐다면 더 좋았을 텐데.’그녀의 뜻을 이해한 나는 웃음으로 답했다.이날의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안리영은 완벽히 승리했다. 그것도 너무나 우아하고 깔끔하게.방으로 돌아온 나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진정우에게 달려가 그를 꼭 껴안고 입을 맞췄다.“자기야, 나 방금 너무 행복해. 내 친구 리영이 진짜 멋있었어!”진정우는 내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네가 이긴 것처럼 좋아하네. 왜, 너도 적을 물리친 것 같아?”“그럼! 리영의 적은 곧 내 적이야. 그녀의 행복이 내 행복이거든. 그걸 망치려는 사람은 절대 용납 못 해.”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 순간 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서 안리영의 행복을 위해 우리의 시간을 희생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앞으로?”그는 일부러 단어를 꼬투리 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나는 그에게 키스로 답했다.그리고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계속 흔들의자에서 할 거야?”그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응.”나는 그의
내가 그토록 찾으려 애썼던 것이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다니, 정말 놀랍고도 흥분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이어진 것은 당혹감이었다.‘왜 이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걸까? 그리고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어떻게 안 거지?’부모님의 교통사고가 발생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지금까지 보고서에서 빠진 페이지를 공개하지 않았을까?이제 와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뭘까? 정말로 보고서를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든 나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나는 숨을 고르며 메시지를 작성했다.[어떻게 만나 뵐 수 있을까요?]하지만 상대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나는 초조하게 1분을 기다리며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떠올리려 했다. 언제 내 연락처에 추가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그때 친구 추가 기록을 살펴보다가, 이 사람이 내 연락처를 추가하며 남긴 ‘신정훈 경사’이라는 메모를 발견했다.그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이 사람이 처음 나에게 친구 추가 요청을 했을 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었고 나도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부모님 사고를 처리했던 경찰일까?나는 더욱 흥분하며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신 경사님, 만나 뵙고 싶습니다.]이번에는 상대가 곧바로 ‘입력 중’이라는 알림을 띄웠다. 나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화면을 지켜봤다.곧이어 도착한 메시지.[전화할 테니 기다리세요.]그 짧은 문장을 보고 나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알겠습니다.]그 후로 상대는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짧은 문장들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흥분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용진표의 경고 삼촌의 설득, 그리고 일부러 사라진 보고서의 한 페이지...이 모든 상황이 뒤얽혀 있다는 건 그 페이지가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과연 이게 누구에게 어떤 충격을 줄까? 아
다음 날, 나는 일찍 깼다. 진정우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테라스로 나갔다. 마침 구 교수가 차에 타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는 안리영의 손을 잡고 있었다. 꼭 끌어안거나 키스하진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다정한 분위기는 어젯밤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그리고 그 뒤에 소희연이 내려왔다. 그녀는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깔끔한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미모와 세련된 차림새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이 여자는 정말 예뻐 보이는 법을 아는구나.’소희연의 옷차림은 단순히 멋을 낸 것이 아니었다. 구 교수의 시선을 끌고 동시에 안리영에게 압박감을 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선배님, 안녕하세요!”소희연은 환하게 웃으며 구 교수에게 인사했다.그 웃음에는 어젯밤 안리영과 구 교수가 함께 있었던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구 교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어.”그 한마디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구 교수도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타입이구나.’어젯밤 소희연이 무슨 말을 했는지 구 교수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소희연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안리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네가 내 험담을 했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안리영은 한술 더 뜨며 말했다.“제가 구 교수님께 말했어요. 늦으면 다들 기다리지 않겠다고.”그 말에 소희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구 교수에게 무언가를 해명하려 했지만 구 교수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는 안리영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제 돌아가. 도착하면 연락할게. 내가 정리되는 대로 바로 나를 찾아와.”그의 눈빛은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나조차 가슴이 뭉클했는데 바로 곁에 있던 소희연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그녀는 잠시 얼어붙어 있다가 억울한 듯 차에 올라탔다.안리영은 구 교수를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고 마지막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