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너 지금 그 모습은... 조금 좋아하거나 마음이 설렌 것 같지 않냐?”“언니...”진소영이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래, 내가 맞았다.“그거 전혀 이상한 거 아니야. 이제 너도 충분히 연애할 나이야.”나는 옆을 보며 말했다. 그 옆엔 한 쌍의 남녀가 책을 보며 서로 가끔 눈을 맞추고 있었고 그들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다.나는 문득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커플들을 보면 유난히 부러웠다. 나는 강유형을 여러 번 불러 함께 책을 읽자고 했지만 그는 몇 분도 못 참고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뜨곤 했다.그때부터 이미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갈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언니.”진소영이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진소영을 보며 물었다.“그 남자 이름이 뭐야? 비밀로 해줄게.”사실 나는 그 남자가 소지훈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진소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언니, 저 말하기 싫은데...”그녀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강요할 수는 없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물론, 말하지 않아도 돼.”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지며 말을 이었다.“언니, 내가 언니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그 사람과 나는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에요. 가끔 만나서 같이 책을 읽을 때가 있을 뿐,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알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소영의 불안함을 달래주었다.“언니, 난 언니가 너무 좋아요. 마치 내 친구 같아요.”진소영이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나와 진정으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친구? 앞으로는 그냥 언니와 친구처럼 지내자. 너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언제든지 곁에 있을게.”진소영은 그런 내 말에 기뻐하며 웃었다.“그럼 이제 언니는 내 친구이자 언니도 되겠네!”나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진소영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진소영은 나와 진정우와 결별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오빠, 언니 왜 그래? 언니 아픈 거야?”“오빠, 왜 아무 말도 안 해? 언니가 나랑 같이 집에 가려고도 안 했어. 뭐야, 둘이 싸운 거야?”“오빠, 언니 언제 깨어날 거 같아?”...진소영의 초조한 목소리 속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진정우는 한쪽에 서 있었고 진소영은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눈가가 빨갛게 충혈된 걸 보니, 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갔다.진정우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괜한 생각하지 마. 의사 선생님도 별일 아니라고 하셨잖아.”“그럼 둘은 괜찮은 거야?” 진소영은 진정우를 꼭 쥐고서 물었고 진정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중에 얘기해줄게.”“오빠!” 진소영은 목소리를 높이며 그를 불렀다.“역시 언니랑 싸운 거구나. 왜 그런 거야? 오빠가 나를 아끼는 것처럼 언니도 아낀다고 했잖아!”“소영아, 네가 모르는 게 있어. 그러니까 말 못 해. 집에 가서 기다려줄래?” 진정우는 애써 진정하며 그녀를 달랬다.“안 가. 언니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진소영은 완강히 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저었다. 진정우는 잠시 인내심을 보였지만 이내 짜증이 살짝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여기 있으면 내가 지원이한테 사과할 기회조차 없잖아.”진소영은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표정이 밝아졌다.“알겠어. 그럼 나 먼저 갈게. 이제 오빠답네!”“사람 불러 데려다줄게.” 진정우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밖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진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잠깐만. 언니 한 번 더 보고 갈게.”진소영이 내 쪽으로 다가오자 나는 급히 눈을 감았다.눈을 감고 있었지만 진소영의 걱정 어린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진정우에게 다시 물었다.“오빠, 언니 진짜 많이 말랐어. 얼굴도 안 좋고. 빈혈 때문에 쓰러졌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내가 빈혈이었구나.’순간, 내가 강유형에게 피를 너무 많이 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를 살리긴 했지만 결국 내 몸이 달아난 셈이었다.
그는 매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돕느라 정작 동생의 심장 이식 수술비조차 마련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그리고 강유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에게 피를 주지 않았다면 그건 그를 죽게 내버려둔 거나 다름없었다.그런데도 진정우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고 나도 더 이상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아 눈을 번쩍 떴다. 그의 관심과 사랑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그러자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순간 멈췄고 눈에 담긴 따뜻함과 안쓰러움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잠시 후 그는 손을 거두려 했고 나는 재빠르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진정우,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나를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면서 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건데?”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왜 이렇게 자주 우는지 모르겠다.항상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눈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왔다.‘그래, 울고 싶으면 울어. 진정우 앞에서 우는 거라면 괜찮아.’이 눈물을 통해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아파하는지 보여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까는 자는 척하는 내 눈물 자국조차 닦아주던 사람이, 지금은 눈앞에서 내가 우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 무언의 태도가 나를 더 미치게 했다.“진정우, 대체 뭐가 문제야? 왜 날 사랑하면서도 이렇게 밀어내는 거냐고! 대답 좀 해!”내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감정이 폭발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이미 말했잖아.”그의 낮은 목소리는 차갑게 들렸고 나는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말도 안 돼! 너는 그런 속 좁은 사람이 아니잖아. 그리고 너도 나랑 헤어지고 힘들어하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왜 밤마다 허진호 끌고 야근하고 몰래 담배를 피우겠어?”그와 스쳐 지날 때마다 느껴졌던 담배 냄새가 떠올랐다.그러자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그래, 나도 힘들어. 사랑하는데 헤어졌으니까 당연히 힘들지.”그 말은 내 가슴을 후벼팠다.“그럼 왜
진정우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자 내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이 판결을 기다리듯 숨이 막히고 긴장감이 몰려왔다.오랜 침묵 끝에 그는 마침내 손을 들어 내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손 놔.”그 한마디가 날 무너뜨렸다.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이 가슴을 짓눌렀다.이토록 쓰라린 순간에도 나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날 외면했다.그는 정말 마음을 굳힌 게 분명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함께할 수 없다는 그의 고집에 분노와 원망, 그리고 절망이 뒤섞여 결국 나는 이성을 잃고 그의 어깨를 덥석 물었다.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고 그의 얕은 신음이 들렸지만 그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물리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분이 풀리지 않아 더 세게 물며 생각했다.‘이렇게라도 아프게 해야 정신을 차릴 거야.’하지만 내 턱이 아플 정도로 힘을 줘도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마치 나무처럼 단단하고 움직임도 없었다.나는 그에게 모든 말을 쏟아냈고 약속도 했고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붙잡았는데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계속 매달려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깨닫고 결국 그를 밀치며 말했다.“가. 나가. 그리고 다시는 날 찾지 마.”진정우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참아왔던 눈물이 터졌다.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안리영이 병실로 찾아왔을 때, 나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껍데기처럼 누워 있을 뿐이었다. 강유형에게 배신당했을 때조차 이렇게까지 공허하지 않았다.“난 네가 빈혈로 쓰러진 줄 알았는데 혼까지 빠져나간 줄은 몰랐네.”안리영은 날카롭게 내뱉으며 병실로 들어왔다. 나는 힘없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어떻게 온 거야? 직위 해제 끝났어?”“내가 안 왔으면 너 여기서 굶어 죽어도 아무도 몰랐을걸.”
안리영이 떠나버리면 정말로 나와 이야기할 친구 하나도 남지 않겠지.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결국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이라지만 부모나 친구는 물론, 심지어 부부 사이라도 그렇다지만 안리영만은 내 곁에 남아주었으면 했다.“아니야, 난 그냥 좀 더 쉴 생각이야. 그만두라면 그만두는 그런 쉬운 사람이 아니거든.”안리영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오, 안 과장님 드디어 반항하시네? 이제 좀 단단히 한 방 먹이겠다는 거야?”“맞아. 안 그러면 다음번에 무슨 일이 터져도 제일 먼저 나를 버리려 할 거 아니야.”역시 안리영다웠다.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녀는 늘 현실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근데 너무 세게 나가다가 망하면 어떡해?”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안리영은 물컵을 따라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여기서 날 놓치면 날 데려가겠다는 병원이 줄을 설걸?”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자신 있게 말했다.“나 같은 사람이 갈 데가 없을 것 같아?”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고했다.안리영의 능력을 알기에 이 병원이 그녀를 놓친다면 그녀를 영입하려는 병원이 줄을 설 게 뻔했다. 실제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늘 거절했었다.“한 곳에서 날 외면하면 더 좋은 곳으로 가면 그만이지”라는 안리영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안리영은은 진지하게 진정우와 나 사이의 일을 물었다. 그러자 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그녀의 말을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그 사람과는 길이 안 맞더라고. 그냥 나랑 맞는 사람을 찾아보려고. 나도 선택지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안리영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윤지원이지. 우리가 직장이든 남자든 거기에 기대지 않아도 돼. 그들은 단지 우리 삶에 즐거움을 더해줄 뿐이지,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빛나.”그녀의 말은 내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주는 듯했다. 안리령은 내 퇴원 절차를 도왔고 우리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그날
나는 핸드폰을 쥔 채 잠시 망설였다. 강유형이 나를 왜 찾는 걸까?안리영은 턱짓으로 받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나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대답했다. 진정우와의 관계가 끝난 지금이라 해도 강유형과 다시 잘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나를 찾을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벽을 치게 되었다.“나 돌아왔어.”그는 무슨 큰일을 겪고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알아. 강진혁한테 들었어.”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덧붙였다.“우리 만날 수 있을까? 네가 나랑 단둘이 만나는 게 싫다면 우리 집에 와도 돼. 부모님이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셔.”순간, 공항에서 나를 맞이하던 강유형의 부모님 모습이 떠올랐고 그들이 나를 걱정했던 건 사실이었다.“할 말이 있어. 신지태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진정우와도 관련 있어.”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진정우와 나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와 관련된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나는 본능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알았어. 이따 갈게.”“좋아. 엄마한테 말해둘게. 너 오면 만두 해준다고 계속 기다리셨거든.”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전화를 끊자 안리영이 한마디 했다.“전 남친 참 열심이네.”나는 그녀의 농담에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진정우와 관련된 일이 있다고 했어.”“그건 그냥 미끼야. 지원아, 너랑 진정우는 이미 끝난 거잖아.”안리영은 날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았지만 애써 부정하며 말했다.“진정우 때문이 아니라 강유형 부모님 때문에 가는 거야. 만두도 먹으러 가는 거고.”안리영은 비웃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만두 한 끼가 아니라 강유형 집 재산의 3분의 1을 줘도 모자랄걸? 너 그 사람 목숨 살려줬잖아.”그 말에 나는 지난 일이 떠올랐다. 강유형의 부모님이 모든 걸 솔직히 설명했고 내가 그것에 의심을 품는 건 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일 뿐이었다.“너랑
“아까 누가 문 두드렸어?”안리영이 내 기분을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조나연. 지난번에 나한테 협력하자고 하더니 이번엔 얘기 좀 하자고 찾아왔어. 무시했지.”나는 커튼을 열어 밖을 바라보았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그 애, 한 달 뒤면 아이가 퇴원할 거래. 아이 상태도 괜찮다고 하더라. 그런데 단 한 번도 병문안에 가지 않았다네.”안리영이 조나연의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한 번 본 적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여자는 돈밖에 몰라. 만약 강유형이 아이를 데려간다면 바로 따라붙을걸.”“근데 도대체 무슨 협력을 하자고 한 걸까?”안리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르겠어. 어차피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엮이면 안 돼. 문제만 생길 테니까.”나는 단호하게 말했다.“맞아. 그런 사람은 멀리하는 게 상책이지. 근데 그런 끈질긴 성격에 한두 번 거절했다고 포기할까?”안리영은 비웃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아침으로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아침 식사를 끝낸 뒤, 안리영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강씨 집안으로 향했다.강유형과 강진혁이 모두 있었고 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니? 빈혈 때문이구나. 피를 너무 많이 써서 그래.”강유형 어머니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지원아, 우리 집에서 지내며 몸 좀 추스르자. 기운 차릴 때까지 같이 있자.”“그건 좀...”나는 애써 웃으며 거절했다. 이제 와서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삼촌은 나의 난처한 표정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앉아서 얘기하자꾸나. 계속 서 있으면 힘들잖니.”“제가 너무 걱정만 했네.”강유형 어머니는 나를 소파로 이끌며 앉히고는 부엌으로 가서 죽을 가져왔다.“요즘 왜 이렇게 말랐어? 몸 때문이야?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어?”삼촌은 내 상태를 금방 알아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몸 때문이라고 하면 그들이 미안해할 테고 진정우와의 문제라고 하면 더
“비가 오는데 무슨 말을 꼭 밖에서 해?”아줌마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삼촌이 눈치를 줬다.“엄마, 아까 만두 빚어야 한다면서요. 제가 도와드릴게요.”그동안 말없이 있던 강진혁이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이끌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유형을 따라 밖으로 나갔고 그는 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솔직히 말하면 집 안에서도 충분히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데 굳이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따지지 않았다.“춥지 않아? 옷 가져올까?”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헤어진 후로 그는 예전보다 훨씬 다정해진 것 같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괜찮아.”나는 그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 들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는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말했다.“우리 마지막으로 이렇게 비 속에서 걸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1년 전이었다. 그때 며칠간 폭우가 계속 내려 도시 곳곳이 침수되고 차로 이동이 불가능했다.내가 걸어서 집에 가자고 내가 제안했을 때,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겠다고 했다.“너는 헬리콥터를 타고 갈 수 있겠지만, 직원들은? 회사 대표가 혼자만 빠져나간다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내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처음에는 서로 바짓단을 젖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걷다가, 결국 물에 젖고 말았다.그때 나는 일부러 물웅덩이를 세게 밟아 그에게 물을 튀겼고 그도 화가 나서 나에게 물을 튀기며 맞받아쳤다.그렇게 물싸움을 하다 보니 화가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침수 지역을 벗어났을 때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더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지금 그가 그때 일을 다시 꺼내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지만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그저 지나간 추억일 뿐이었다.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그는 씁쓸한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