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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월영서고의 붉은 향

Author: 미셀1278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2 12:48:18

5화. 월영서고의 붉은 향

쿵.

월영서고의 육중한 문이 닫히자 묵직한 울림이 높은 천장과 빽빽한 책장 사이를 한 차례 돌아나갔다.

문령은 품에 안고 있던 《수월봉마진 초해》를 조금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장의 작은 창을 통해 흘러들던 달빛이 오래된 책등 위에 잔잔하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문이 닫힌 뒤부터는 그 은빛마저 얇은 안개에 잠긴 것처럼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하듯 낯선 향이 퍼졌다.

처음에는 막 피어난 꽃처럼 달콤했지만 한 번 더 숨을 들이마시자 혀끝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고, 가슴 깊숙한 곳까지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았다.

또각.

책장 사이의 어둠을 가르며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비단 장포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 물처럼 매끄럽게 흘렀고, 넓은 소매와 치맛단에는 피처럼 짙은 붉은 꽃이 수놓여 있었다. 한쪽 어깨를 타고 길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에는 달빛이 닿을 때마다 푸른 윤기가 번졌으며, 붉게 물든 입술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가늘게 휘어진 눈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

“그 책을 제게 주시면 됩니다.”

흑련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에게 맡겨둔 물건을 돌려달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문령이 대답하기도 전에 하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가 입은 짙은 남색 장포는 몇 번의 싸움 끝에 소매 끝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지만, 검을 쥔 어깨와 허리는 여전히 반듯했다. 손목을 돌려 검끝을 낮추자 넓은 소매가 뒤로 미끄러지며 단단한 손등이 드러났다.

“한 걸음 더 오면 벤다.”

흑련의 붉은 입술 끝이 조금 더 올라갔다.

“단 공자께서는 여전하시네요. 처음 보는 여인에게도 인사보다 검이 먼저니.”

하륜의 눈매가 서늘하게 좁혀졌다.

“나를 아나?”

“단가의 문제아를 모르는 사람이 강호에 얼마나 있을까요?”

문령은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하륜에게 시선을 옮겼다.

문제아.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온 하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잘 맞는 말이었다.

하륜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검자루를 감싼 손가락의 마디가 조금 도드라졌다.

“그렇다면 내가 경고를 두 번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군.”

“알지요.”

흑련이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를 천천히 들어 허공을 그었다.

“그래서 두 번째 말을 듣기 전에 끝내려고요.”

그 순간 바닥 가까이 가라앉아 있던 붉은 향이 살아 있는 뱀처럼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유겸의 얼굴빛이 변했다.

“숨을 참으십시오. 환각향입니다!”

문령은 급히 호흡을 멈추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향은 코를 통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치맛자락을 스치고 지나간 붉은 연기가 피부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왔고, 눈앞의 책장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천천히 일렁였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령아.”

문령의 손이 멈췄다.

어머니였다.

책을 읽다 틀리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 어린 문령이 악몽을 꾸고 깨어났을 때 밤새 등을 쓸어주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

“그 책을 넘겨주렴.”

문령은 《수월봉마진 초해》를 가슴 깊숙이 끌어안았다.

“그래야 네가 산단다.”

환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아는 것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하게 귓가에 닿자, 단 한순간이라도 진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문령아.”

목소리가 한층 더 다정해졌다.

“엄마 말 들어야지.”

문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품에 안긴 책의 단단한 모서리가 손바닥을 누르는 감촉을 느꼈다.

그 순간 어머니가 남긴 문장이 떠올랐다.

그를 믿지 마라. 그러나 그 없이는 봉인을 닫을 수 없다.

문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는 언제나 어려웠다. 아무리 부드럽게 웃어도 그 속을 알 수 없었고, 한마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뜻이 숨겨져 있는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진은 달랐다.

진에는 반드시 흐름이 있었고, 거짓이라 해도 흔적을 남겼다.

문령은 더 이상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붉은 향이 흘러가는 방향을 좇았다.

향은 무질서하게 퍼지고 있지 않았다. 달빛이 닿는 곳을 피해 책장 아래로 흘러들었다가 몇 갈래로 나뉘고, 다시 서고 중앙에서 하나로 모여들고 있었다.

길이 있었다.

그렇다면 시작점도 있었다.

문령은 긴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진침을 꺼냈다.

은빛 침끝에 푸른 기운이 맺히는 것을 본 흑련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아직도 움직일 수 있군요.”

문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서문가의 마지막 아이답다고 해야 할까요?”

그 순간 하륜의 검이 움직였다.

달빛보다 차가운 검광이 붉은 향을 가르며 흑련의 목을 향했지만, 검끝이 닿기 직전 그녀의 몸이 안개처럼 흐려졌다.

검은 비단과 붉은 자수가 허공 속으로 스며들었다.

“실체가 아니에요!”

문령의 목소리가 서고를 울렸다.

하륜은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이미 움직임을 멈췄다.

바로 그때 그의 등 뒤에서 검은 옷자락이 꽃잎처럼 펼쳐졌다.

흑련이었다.

붉은 소매 아래 드러난 흰 손가락 사이에는 가느다란 검붉은 독침이 끼워져 있었다.

“뒤쪽!”

하륜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손목만 가볍게 비트는 순간 검집 끝이 정확하게 흑련의 손등을 쳤고, 독침이 돌바닥 위로 튕겨나가 맑은 금속음을 냈다.

이어진 검끝이 검은 소매를 스치면서 붉은 자수 몇 가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흑련의 입가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옅어졌다.

“소문보다 훨씬 빠르시네요.”

하륜은 검끝을 다시 그녀에게 겨누었다.

“소문은 원래 늦지.”

그의 말을 들은 흑련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문령에게로.

“그러면 저 아이는 얼마나 버틸까요?”

서고를 떠돌던 붉은 향이 한순간 방향을 틀어 문령에게 밀려왔다.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에 무릎이 꺾일 것 같았지만 문령은 진침을 놓지 않았다.

첫 번째 침이 바닥에 박히자 붉은 기운의 한 갈래가 흔들렸고, 두 번째 진침이 책장 아래로 들어가자 오래된 먼지가 푸른빛을 머금으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문령이 마지막 침을 들어 올리는 순간 독침 하나가 붉은 안개를 가르며 날아왔다.

챙―!

눈앞에서 은빛 검광이 번쩍였다.

독침은 문령에게 닿지 못한 채 책장 깊숙이 박혔다.

그녀의 앞에는 어느새 하륜이 서 있었다.

넓은 등과 짙은 남색 장포가 붉은 향과 문령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계속해.”

짧은 한마디였지만 이상하게 그 말에는 조금의 의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문령은 하륜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 마지막 진침을 힘껏 꽂았다.

“월영반사진.”

흔들리던 목소리가 차츰 가라앉았다.

“열려라.”

천장의 작은 창으로 달빛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달빛은 붉은 향을 몰아내는 대신, 그 속에 숨어 있던 것들의 윤곽을 하나씩 드러냈다.

문령의 앞에 세 명의 흑련이 서 있었다.

세 여인의 굳은 얼굴에서 같은 순간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고, 검은 비단 치맛자락마저 바람 한 점 없는 서고 안에서 물결처럼 똑같이 찰랑였다.

누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세 명의 흑련이,

동시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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