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수월별궁의 두 주인: Chapter 1 - Chapter 10

14 Chapters

1화. 죽은 자가 내 문을 두드렸다

1화. 죽은 자가 내 문을 두드렸다수월별궁에는 오래전부터 지켜온 몇 가지 금기가 있었고, 그중 첫 번째는 어린 문령에게도 이상할 만큼 단순한 말이었다.죽은 자가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말 것.서문령이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여섯 살 때였다.그날 밤에는 비가 내렸다. 호수를 둘러싼 산자락은 짙은 안개에 잠겨 있었고, 검은 기와를 두드리던 빗물은 처마 끝을 따라 가느다란 줄기가 되어 떨어졌다. 평소라면 달빛이 호수 위에 내려앉아 긴 회랑과 정자의 윤곽을 은빛으로 드러냈겠지만, 그날은 달조차 구름 뒤로 숨어 별궁 전체가 깊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어머니는 어린 문령을 동문 앞에 세우고 작은 은침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령아, 잘 기억해야 한다.”평소와 다르지 않은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문령은 어머니의 눈빛이 유난히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누가 이 문을 두드리더라도 함부로 열어주어서는 안 된다.”문령은 닫힌 문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아는 사람이 와도요?”“그래.”“다친 사람이 와도요?”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처마 끝에서 빗물이 떨어지고, 호수 위를 지나온 바람이 문틈을 스쳤다. 어머니는 잠시 문밖의 어둠을 바라보다가 문령 앞에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죽어가는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문령은 이해할 수 없었다. 책에서는 다친 사람을 돕는 것이 옳다고 배웠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죽어가는 사람인데 어떻게 문을 안 열어줘요?”어머니의 눈에 아주 잠깐 슬픈 빛이 스쳤다.“세상의 다른 곳에서는 네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월별궁에서는 다르단다.”“왜요?”어머니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문령의 작은 손을 감싸 진침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여주었다.“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그날의 문령은 몰랐다.어머니의 말이 가르침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닥쳐올 일을 알고 남긴 경고였다는 것을.***쿵.둔탁한 소리에 문령의 눈이 번쩍 뜨였다.창호 너머에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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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피 묻은 검을 든 두 번째 주인

2화. 피 묻은 검을 든 두 번째 주인안개 사이로 다가오던 남자는 가까워질수록 또렷해졌다. 젖은 검은 장포가 넓은 어깨를 따라 내려앉아 있었고, 허리에는 긴 장검이 걸려 있었다.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그의 걸음이었다.수월별궁을 처음 찾은 사람이라면 복잡하게 이어진 회랑을 한 번쯤 살필 법했지만, 남자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문령의 시선이 검끝에 머물렀다.뚝.피 한 방울이 돌바닥에 떨어졌다.“당신이…….”생각보다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문령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물었다.“이 사람을 죽였나요?”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차갑고 깊은 눈이 문령을 스친 뒤 바닥의 시신과 피로 적힌 문장을 차례로 바라보았다.두 번째 주인을 들이지 마라.아주 잠깐 그의 표정이 변했다.“그 질문은 내가 해야겠는데.”“뭐라고요?”“네가 저자를 안으로 들였나?”“제가 문은 열었지만, 이미 밖에 쓰러져 있었어요.”“그게 문제다.”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문령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다가 멈췄다.수월별궁에는 나이가 지긋한 관리들과 무사들은 많았지만 문령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사내는 거의 없었다. 그 때문인지 문령은 자신도 모르게 눈앞의 남자를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키가 컸고, 문령이 눈을 맞추려면 턱을 조금 들어야 했다. 눈매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얼굴선은 지나치게 거칠지 않았고, 비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에 내려와 있었다.문령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또래 남자들은 원래 이렇게 큰가?’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자신이 낯선 남자의 얼굴을 너무 오래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문령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그의 검에서는 아직 옅은 피 냄새가 남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차갑고 씁쓸한 약초 향이었다.두 사람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한 걸음만 더 가까워지면 검보다 그의 숨결이 먼저 닿을 것 같았다.문령은 진침을 쥔 손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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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시체가 아니라 그림자를 베어라

3화. 시체가 아니라 그림자를 베어라문령은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조금 전 직접 맥을 짚었다. 숨도 멎었고 심장도 뛰지 않았다.그런데 죽은 사내의 손가락이 천천히 돌바닥을 긁으며 선을 그리고 있었다.한 획이 이어지고 또 다른 획이 붙을수록 문령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진문?’죽은 사람은 진을 그릴 수 없다. 진문은 살아 있는 사람의 호흡과 맥, 손끝의 기운이 함께 움직여야 완성되는 것이었다.그런데 사내의 손은 정확하게 칠방위의 결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저 사람이 그리는 게 아니에요.”하륜이 검을 들었다.“그럼?”문령의 시선이 시신의 발밑으로 내려갔다.“안쪽에서 조종하고 있어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체의 몸이 뒤틀렸다.우드득.굳어 있던 팔과 다리가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일어났고, 흐려진 눈과 달리 입술만은 천천히 올라가 웃는 모양을 만들었다.“두…… 주인…….”죽은 목소리 안에 다른 음성이 섞여 있었다.“검의 패…… 진의 패…….”하륜의 검이 어둠을 갈랐다.검광이 시체의 어깨를 베었지만 검은 기운은 갈라졌다가 순식간에 다시 붙었고, 오히려 검끝을 타고 손목 쪽으로 번져왔다.“검을 빼요!”하륜은 즉시 검을 거뒀다.바닥으로 떨어진 검은 기운을 바라보던 문령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모든 등불이 꺼져 있는데도 시체의 발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붙어 있었다.그림자는 몸보다 조금 먼저 움직였다.“시체가 아니에요.”하륜이 문령을 보았다.그녀가 바닥을 가리켰다.“그림자를 베어야 해요.”“어디를?”그 질문에 문령은 잠시 말을 잃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경계하던 남자가 지금 자신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문령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진의 흐름에 집중했다. 복잡하게 얽힌 검은 기운이 눈앞에서 천천히 길을 드러냈다.“왼쪽으로 세 걸음.”하륜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문령이 말한 그대로 움직였다.“검끝을 낮춰요. 몸을 베듯이 치면 다시 붙어요. 물 위의 달을 가른다고 생각하세요.”하륜은 잠시 문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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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를 믿지 마라

4화. 그를 믿지 마라문령은 열린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월영서고는 어린 시절부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어머니가 진서를 읽어주던 자리도, 혼자 책을 베껴 쓰다 졸아버리곤 했던 자리도 모두 이곳에 있었지만, 가장 안쪽의 이 문만은 한 번도 넘어본 적이 없었다.몇 번이나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도 어머니는 늘 같은 대답만 했다.아직은 안 된다.그때는 그저 자신이 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문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자 그 말의 끝을 어머니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문령이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종이와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천장에 난 작은 창으로 달빛 한 줄기가 내려오고 있었고, 그 빛이 닿는 책상 위에는 낡은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주변에는 얇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책 위에는 먼지가 거의 없었다.마치 누군가 방금 전까지 읽고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문령은 천천히 책 앞으로 다가갔다.표지에 적힌 글자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수월봉마진 초해.그 아래에 남은 필체를 보는 순간 손끝이 멈췄다.어머니의 글씨였다.어린 시절 진문을 잘못 쓰면 붉은 먹으로 고쳐주던 글씨, 늦은 밤 책상에 엎드려 잠든 문령 옆에 짧은 메모를 남겨두곤 했던 바로 그 필체였다.문령은 책장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의 손길이 종이 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 쉽게 다음 장을 넘길 수 없었다.첫 장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문령아,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첫 번째 봉인은 이미 풀렸을 것이다.문령은 잠시 숨을 멈췄다.어머니는 알고 있었다.자신이 언젠가 이곳에 서게 될 것을.반가움보다 먼저 서늘한 감정이 가슴 한쪽을 훑고 지나갔다.문령은 천천히 다음 줄로 시선을 내렸다.그리고 네 곁에는 반드시 단가의 검을 든 자가 있을 것이다.자연스럽게 하륜에게 시선이 향했다.그는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고, 달빛은 얼굴의 절반만 희미하게 비추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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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월영서고의 붉은 향

5화. 월영서고의 붉은 향쿵.월영서고의 육중한 문이 닫히자 묵직한 울림이 높은 천장과 빽빽한 책장 사이를 한 차례 돌아나갔다.문령은 품에 안고 있던 《수월봉마진 초해》를 조금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장의 작은 창을 통해 흘러들던 달빛이 오래된 책등 위에 잔잔하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문이 닫힌 뒤부터는 그 은빛마저 얇은 안개에 잠긴 것처럼 흐릿해지고 있었다.그 자리를 대신하듯 낯선 향이 퍼졌다.처음에는 막 피어난 꽃처럼 달콤했지만 한 번 더 숨을 들이마시자 혀끝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고, 가슴 깊숙한 곳까지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았다.또각.책장 사이의 어둠을 가르며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검은 비단 장포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 물처럼 매끄럽게 흘렀고, 넓은 소매와 치맛단에는 피처럼 짙은 붉은 꽃이 수놓여 있었다. 한쪽 어깨를 타고 길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에는 달빛이 닿을 때마다 푸른 윤기가 번졌으며, 붉게 물든 입술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아름다운 얼굴이었다.하지만 가늘게 휘어진 눈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그 책을 제게 주시면 됩니다.”흑련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에게 맡겨둔 물건을 돌려달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문령이 대답하기도 전에 하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그가 입은 짙은 남색 장포는 몇 번의 싸움 끝에 소매 끝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지만, 검을 쥔 어깨와 허리는 여전히 반듯했다. 손목을 돌려 검끝을 낮추자 넓은 소매가 뒤로 미끄러지며 단단한 손등이 드러났다.“한 걸음 더 오면 벤다.”흑련의 붉은 입술 끝이 조금 더 올라갔다.“단 공자께서는 여전하시네요. 처음 보는 여인에게도 인사보다 검이 먼저니.”하륜의 눈매가 서늘하게 좁혀졌다.“나를 아나?”“단가의 문제아를 모르는 사람이 강호에 얼마나 있을까요?”문령은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하륜에게 시선을 옮겼다.문제아.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온 하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잘 맞는 말이었다.하륜의 얼굴에는 별다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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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열쇠와 제물

6화. 열쇠와 제물세 명의 흑련은 마치 하나의 그림자를 셋으로 찢어놓은 것처럼 닮아 있었다.붉은 입술 끝에 걸린 미소부터 한쪽 어깨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넓은 비단 소매 아래에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는 순간까지 조금의 차이도 없었기에, 얼굴만 보고 실체를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문령은 세 여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발끝과 그림자, 붉은 향이 흘러가는 방향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눈은 속일 수 있었다.하지만 기운의 흐름까지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다.“찾을 수 있나?”곁에서 하륜의 목소리가 들렸다.달빛이 그의 장검을 따라 가늘게 흘러내리고 있었고, 검을 쥔 오른손은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힘을 빼고 아래로 내려져 있었다.문령은 흐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조금만 기다려요.”“얼마나?”이번에는 잠시 대답이 늦었다.“……모르겠어요.”재촉하는 말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하륜은 아주 잠깐 침묵했을 뿐이었다.“그럼 찾을 때까지 막으면 되겠군.”그가 문령의 앞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며 세 흑련과의 거리를 좁혔다.문령은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속 긴장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빨리하라고 하지 않았다.방법을 설명하라고도 하지 않았다.자신이 답을 찾아낼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겠다고 했다.문령은 다시 붉은 향에 집중했다.첫 번째 흑련의 발밑에서는 향이 그대로 통과했고, 두 번째 역시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가장 왼쪽 책장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발끝에서는 향의 흐름이 아주 미세하게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문령의 눈빛이 달라졌다.“왼쪽이에요.”하륜의 검끝이 조금 들렸다.“세 번째 책장 앞!”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륜이 움직였다.짙은 남색 장포가 바닥 가까이 크게 퍼지면서 긴 소매가 검광을 따라 한 번 펼쳐졌고, 세 명의 흑련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하륜의 검끝이 그녀의 어깨를 스쳤다.검은 비단이 길게 갈라지고 그 아래 드러난 흰 피부 위로 붉은 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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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두 번째 봉인은 물 아래 있다

7화. 두 번째 봉인은 물 아래 있다흑련이 사라진 뒤에도 월영서고 안에는 붉은 향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백유겸이 닫혀 있던 창을 하나씩 열자 호수 쪽에서 불어온 차가운 밤바람이 책장 사이를 지나갔고, 붉은 연기는 오래된 종이와 마른 나무 냄새 속으로 스며들다가 조금씩 밖으로 밀려나갔다.문령은 책상 앞에 앉아 《수월봉마진 초해》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으로 검날을 닦고 있었지만, 흑련이 남긴 한 단어만큼은 문령의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제물.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손끝이 서늘해졌다.“서 소저.”백유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책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첫 번째 봉인이 풀렸으니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던 기록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문령은 책을 달빛이 가장 밝게 들어오는 자리로 옮겼다.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책장을 조금씩 기울이자 희미한 먹빛이 물속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첫 봉인이 풀리면 수심각으로 가라.그리고 그 아래 새로운 문장이 이어졌다.두 번째 봉인은 물 아래 있다.“수심각…….”수월별궁 호수 가장자리에 세워진 작은 누각.낮에는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는 그곳만큼은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왜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아직은 안 된다고.하륜이 책 가까이 다가와 몸을 조금 숙였다. 전투 중 풀린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 아래로 흘러내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다음 장소가 거긴가?”“그런 것 같아요.”“언제지?”다음 장에는 아무 글도 없었다.그러나 한동안 달빛 아래 놓아두자 희미했던 먹빛이 천천히 짙어졌다.다음 달이 물에 잠기기 전.백유겸이 창밖의 달을 살피고는 무겁게 말했다.“내일 밤입니다.”첫 번째 봉인이 풀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두 번째 봉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문령은 마음을 정리할 틈조차 없는 상황이 답답했지만, 하륜은 별다른 동요 없이 검을 칼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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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단가의 문제아

8화. 단가의 문제아아침 햇빛이 동문의 돌바닥 위로 길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문령에게는 주변이 전보다 조금 어둡게 느껴졌다.어머니와 아버지가 남긴 수월별궁,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진법, 죽은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봉인에 이어 이제는 목진이 나타난 흔적까지 부모와 연결되고 있었다.문령은 백유겸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왜 지금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노인은 한참을 침묵한 뒤 무겁게 대답했다.“숨기려는 것이 아닙니다.”그 말을 들은 하륜이 짧게 웃었다.웃음이라기보다 차가운 숨에 가까웠다.“감추는 것과 속이는 게 그렇게 다른가?”“단 공자.”“어젯밤부터 들은 말이 전부 같아. 때가 되면, 다음 장소에 가면, 준비가 되면.”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지만 검집 위에 얹혀 있던 손가락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문령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처음으로 하륜에게서 발견했다.그는 단순히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자신만 제외된 채 모두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상처받고 있었다.백유겸은 오래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수심각에 가시면 제가 알고 있는 것 중 일부는 말씀드리겠습니다.”“일부라.”하륜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정말 친절하군.”더 묻지 않은 그는 동문 밖의 흔적을 살피기 시작했고, 잠시 뒤 낮게 말했다.“밖으로 이어지는 흔적도 있다.”문령의 손이 품 안의 옥패를 움켜쥐었다.“밖이요?”“흑련이 빠져나간 방향과 같다.”수월별궁 밖이라는 말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문령에게 별궁 밖의 세상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이 많아지는 순간이면 낯선 얼굴이 자신을 보고,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날아오고, 어디를 바라보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짧은 시간 안에 판단해야 했다.복잡한 진을 읽는 것보다 그런 순간들이 더 어려웠다.하륜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물었다.“못 가겠나?”흑련의 붉은 입술과 자신을 제물이라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피한다고 사라질 일이 아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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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물 아래의 달

9화. 물 아래의 달별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강무결은 단가의 명령서가 하륜의 손에서 찢어진 뒤부터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하륜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문령은 두 사람 사이를 걷다가 몇 번이나 앞선 하륜의 등을 바라보았다.며칠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단하륜은 화가 날수록 오히려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주변 사람에게 감정을 쏟는 대신 입을 다물었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처음에는 자신에게만 무뚝뚝한 줄 알았다. 하지만 강무결에게도, 백유겸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필요한 말 이상은 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함부로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말투는 거칠어도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문령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몇 걸음 앞서가던 하륜의 보폭이 어느 순간 느려졌다.동쪽 회랑을 지나 수심각으로 이어지는 돌길에 들어서자 그와 문령의 거리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하륜의 한 걸음은 자신보다 훨씬 컸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같은 간격이었다.“저 때문에 천천히 걷는 거예요?”하륜이 고개만 조금 돌렸다.“아니다.”“아까는 더 빨리 걸었잖아요.”잠깐의 침묵 뒤 그가 앞을 보며 말했다.“밤길이 미끄럽다.”문령은 저도 모르게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비는 오지 않았고 돌길은 말라 있었다.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수심각은 수월별궁의 가장 동쪽, 호수 안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낮이라면 푸른 물결과 낡은 기둥이 어우러져 고즈넉하게 보였겠지만, 달이 뜬 뒤의 수심각은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검푸른 호수 위로 은빛이 길게 부서졌고 처마 끝의 풍경은 바람도 없는데 이따금 낮게 울었다.문령은 좁은 나무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수심각 아래 물고기를 보고 싶어 호숫가까지 내려갔던 날, 평소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어머니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문령아. 저곳에는 가지 마라.왜냐고 묻자 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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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네가 보는 곳으로

10화. 네가 보는 곳으로검은 손이 수면을 뚫고 올라온 순간, 호수의 달빛이 산산이 흔들렸다.조금 전까지 잔잔하던 수심각 아래로 먹빛 파문이 번지더니, 물속에서 사람의 형상을 닮은 그림자들이 하나둘 기어올랐다. 얼굴도 눈도 없는 검은 몸이 물에 젖은 천처럼 늘어졌다가 다시 일어섰다.문령은 난간 가까이에 서서 숨을 낮췄다.하륜의 검이 가장 먼저 달려든 그림자의 몸을 갈랐다.검은 형체가 양쪽으로 찢어졌다.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바닥으로 흩어진 검은 물방울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나였던 그림자가 둘이 되어 일어났다.문령의 얼굴이 굳었다.“베면 안 돼요.”하륜의 검끝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돌아보지 않았다.“그럼?”짧은 한마디였다.문령은 그림자를 보지 않고 그 아래를 보았다.수면 위에서 끊어지는 달빛, 기둥 아래로 모였다 흩어지는 물결, 검은 형체가 올라오기 직전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파문.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아무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다.그러나 진은 언제나 흐름을 남겼다.문령의 시선이 동쪽 기둥 아래에서 멈췄다.“오른쪽으로 두 걸음.”하륜이 바로 움직였다.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검은 팔 하나가 솟구쳤다.문령은 손에 쥔 진침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검을 세우지 말고 눕혀요. 달빛 밖으로 밀어내듯이.”하륜의 손목이 돌아갔다.세워져 있던 검날이 비스듬히 누웠다. 검은 그림자의 옆구리를 밀어내자, 형체가 수심각 기둥이 드리운 그늘로 미끄러졌다.그 순간 몸이 힘을 잃었다.검은 물처럼 바닥에 흩어지더니 그대로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문령의 눈빛이 선명해졌다.“맞아요.”“다음.”하륜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문령은 다시 호수를 읽었다.“왼쪽 한 걸음.”하륜이 움직였다.“조금 뒤로.”이번에는 문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이 먼저 돌아갔다.두 번째 그림자가 밀려났다.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몇 번쯤 이어졌을 때, 문령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하륜이 너무 빨랐다.자신이 끝까지 말하기 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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