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8화. 단가의 문제아
아침 햇빛이 동문의 돌바닥 위로 길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문령에게는 주변이 전보다 조금 어둡게 느껴졌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긴 수월별궁,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진법, 죽은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봉인에 이어 이제는 목진이 나타난 흔적까지 부모와 연결되고 있었다.
문령은 백유겸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지금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노인은 한참을 침묵한 뒤 무겁게 대답했다.
“숨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하륜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차가운 숨에 가까웠다.
“감추는 것과 속이는 게 그렇게 다른가?”
“단 공자.”
“어젯밤부터 들은 말이 전부 같아. 때가 되면, 다음 장소에 가면, 준비가 되면.”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지만 검집 위에 얹혀 있던 손가락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문령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처음으로 하륜에게서 발견했다.
그는 단순히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만 제외된 채 모두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상처받고 있었다.
백유겸은 오래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수심각에 가시면 제가 알고 있는 것 중 일부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부라.”
하륜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
“정말 친절하군.”
더 묻지 않은 그는 동문 밖의 흔적을 살피기 시작했고, 잠시 뒤 낮게 말했다.
“밖으로 이어지는 흔적도 있다.”
문령의 손이 품 안의 옥패를 움켜쥐었다.
“밖이요?”
“흑련이 빠져나간 방향과 같다.”
수월별궁 밖이라는 말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문령에게 별궁 밖의 세상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이 많아지는 순간이면 낯선 얼굴이 자신을 보고,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날아오고, 어디를 바라보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짧은 시간 안에 판단해야 했다.
복잡한 진을 읽는 것보다 그런 순간들이 더 어려웠다.
하륜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물었다.
“못 가겠나?”
흑련의 붉은 입술과 자신을 제물이라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피한다고 사라질 일이 아니었다.
“갈게요.”
하륜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럼 내 뒤에 있어.”
그 말에는 문령도 곧바로 반응했다.
“계속 뒤에만 있을 생각은 없어요.”
하륜이 돌아보자 자신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대답했다는 것을 깨달은 문령이 조금 머뭇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필요하면 제가 앞으로 나가야 하니까요. 진이나 흔적은 제가 봐야 하잖아요.”
하륜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리고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럴 때는 나와.”
***
수월별궁에서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호숫가를 끼고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어부와 약초꾼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아침 장터에는 말린 약초 냄새와 물비린내, 갓 쪄낸 음식 냄새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옅은 은회색 치마 위에 푸른빛이 감도는 겉옷을 걸친 문령은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수월별궁 안에서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옷차림이 이곳에서는 유난히 눈에 띄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 머무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럴 때마다 어깨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앞서 걷던 하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많은 큰길을 벗어나 좁고 한산한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고, 처음보다 걸음 역시 느려져 있었다.
문령은 한참 뒤에야 그것이 자신에게 속도를 맞추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굳이 말하지 않았다.
물어보면 분명 우연이라고 할 것 같았다.
그때 골목 끝에서 거친 고함이 들려왔다.
“내놓으라니까!”
어린 약초꾼 하나가 덩치 큰 사내 셋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낡은 베옷을 입은 아이는 약초 바구니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었고, 장정 하나가 바구니를 억지로 잡아당길 때마다 가느다란 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륜의 걸음이 멈췄다.
문령은 흑련의 흔적을 쫓던 일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은 흑련부터 찾아야 하지 않나요?”
그러나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하륜은 이미 아이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짙은 남색 장포의 긴 자락이 골목의 먼지를 가볍게 쓸었다.
“단 공자.”
“금방 끝난다.”
장정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돌아섰다.
“넌 뭐야?”
하륜은 허리의 검에 손도 대지 않았다.
아이와 사내들 사이에 조용히 서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 떼.”
“네가 뭔데?”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하륜은 끝내 검을 뽑지 않았다.
날아오는 주먹을 옆으로 흘리며 손목을 비틀고, 다른 사내가 발을 올리는 순간 무릎 뒤를 가볍게 쳐 무게중심을 무너뜨렸다. 남색 옷자락이 한 차례 크게 돌아간 듯했을 뿐인데 잠시 뒤 세 사람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하륜은 그제야 겁에 질린 아이 앞으로 다가가 몸을 낮췄다.
“다친 데는?”
조금 전까지 장정들을 상대하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여전히 낮고 무뚝뚝했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아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흔들자 하륜은 바닥에 흩어진 약초를 하나씩 주워 바구니 안에 넣기 시작했다.
부러진 줄기까지 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정리하는 모습이 문령의 눈에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피 묻은 검을 든 남자였다.
말투는 불친절했고 타인의 기분을 헤아리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약한 사람 앞에서는 검을 꺼내지 않았다.
아이와 눈을 맞추기 위해 몸을 낮출 줄도 알았다.
문령은 자신이 처음 만난 날보다 하륜이라는 사람을 조금 다르게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골목 입구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사형께서는 여전히 사고를 만들고 계시는군요.”
하륜의 손이 약초 위에서 멈췄다.
푸른 무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와 비교적 부드러운 이목구비 때문에 첫인상은 온화했지만, 등에 비스듬히 멘 장창과 상대를 놓치지 않고 살피는 눈빛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강무결.”
하륜이 이름을 부르자 청년은 예를 갖춰 포권했다.
“장문인께서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령에게 이동했다.
“그리고 이분이 서문령 소저군요.”
낯선 사내의 시선이 오래 자신에게 머물자 문령의 어깨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바로 그때 하륜이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마치 우연처럼 보였지만 정확하게 문령과 강무결 사이를 가로막았다.
“쳐다보지 마.”
강무결의 눈썹이 올라갔다.
“벌써 보호하시는 겁니까?”
하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말조심해라.”
강무결은 더 이상 웃지 않고 품에서 봉서를 꺼냈다.
하지만 하륜이 받을 기색을 보이지 않자 결국 자신이 직접 펼쳐 읽기 시작했다.
“수월별궁의 첫 봉인이 흔들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단하륜은 즉시 문파로 복귀하고…….”
그는 다음 문장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서문가의 계승자는 단가의 감시 아래 둔다.”
문령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흑련에게는 제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열쇠였고,
이번에는 감시해야 할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계속 자신에게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도 서문령이라는 사람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쫘악.
갑작스러운 소리에 문령이 고개를 들었다.
하륜이 강무결의 손에서 봉서를 빼앗아 그대로 찢어버리고 있었다.
하얀 종이조각이 골목의 햇빛 속으로 흩어졌다.
“돌아가서 전해.”
“사형.”
“나는 수월별궁으로 간다.”
강무결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여유가 사라졌다.
“이번 일은 평소처럼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금지된 무공까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륜의 움직임이 멈췄다.
조금 전 아이의 약초를 정리하던 손이 천천히 검집 위로 올라갔다.
“뭐라고?”
강무결은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하륜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너도 알고 있었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해.”
긴 침묵 끝에 강무결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륜의 얼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령은 검집을 감싼 그의 손가락이 지나치게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강무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사형만 모르고 계셨습니다.”
그제야 문령은 깨달았다.
자신만 부모와 주변 사람들에게 진실을 감춰진 채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하륜 역시 자신의 가문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까지 온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수월별궁의 두 주인이라 불리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무엇의 주인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14화. 우리가 정할게요명월석 위의 두 이름은 마치 누군가 마지막 획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서문령.단하륜.문령은 자신의 이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평생 수없이 써온 이름이었다. 부모가 불러주었고, 책의 첫 장에도 적었고, 진법을 익힌 종이 아래에도 남겼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름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보였다. 이름을 새기면 수월별궁과 연결된다. 별궁이 흔들리면 자신도 흔들리고, 자신이 무너지면 별궁도 무너진다. 명월석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이름을 새기면 주인이 된다.새기지 않으면 세 번째 봉인은 열린다.하륜이 낮게 웃었다.“선택권이 아주 친절하군.”문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선택하지 않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았을 때 벌어질 일을 너무 잘 보여주고 있었다.“결국 또 해야 한다는 말이네요.”문령의 말에 하륜이 그녀를 돌아보았다.“아니다.”“뭐가요?”“안 해도 된다.”문령은 눈을 깜박였다.하륜은 명월석이 아니라 그녀를 보고 있었다.“네가 싫으면 이름을 새기지 마.”“그러면 봉인이 열려요.”“그건 별궁의 문제지.”문령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강호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그래도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네 책임이라고 밀어 넣는 건 다른 문제다.”문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월별궁보다 자신을 먼저 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부모도, 백유겸도, 별궁 자체도 늘 문령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말했다. 그런데 하륜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문령은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칠고 무뚝뚝해서 남의 마음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사람의 선택을 먼저 보았다.“단 공자는요?”문령이 물었다.“뭐가.”“정말 하기 싫으면 안 할 거예요?”하륜은 잠시 명월석을 바라보았다.“아직 모르겠다.”솔직한 대답이었다.문령은 그런 점도 마음에 들었다.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운명이니 책임
13화. 이름을 새기는 곳호수 아래로 이어진 계단은 수심각 뒤편에 숨어 있었다. 낮에는 물과 수초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돌계단이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지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은 물속으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위로 물이 넘치지 않았다. 양옆에서는 검푸른 호수가 벽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계단 위에는 달빛을 머금은 듯한 푸른 기운이 엷게 흐르고 있었다.문령은 첫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여기로 내려가는 거예요?”백유겸이 고개를 끄덕였다.“명월석은 수심각보다 더 아래에 있습니다.”강무결이 하륜의 팔을 한 번 바라보았다.“사형, 지금 상태로 내려가도 괜찮겠습니까?”“안 괜찮으면 네가 대신 이름을 새길 건가?”강무결이 입을 다물었다. 문령은 그 둘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게 웃었다. 하륜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웃었나?”문령의 얼굴이 굳었다.“아니요.”“방금 웃었는데.”“잘못 보신 거예요.”“그런가.”하륜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그 짧은 표정 때문에 문령은 괜히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조용했다. 발밑에서 돌을 밟는 소리가 작게 울렸고, 양옆의 물에서는 물고기들이 멀찍이 지나갔다. 머리 위로는 분명 호수가 있었는데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마치 물이 두 사람을 피해서 길을 내주는 것 같았다.문령은 몇 계단을 내려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하륜은 두 걸음쯤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문령은 괜히 앞을 보았다. 처음에는 뒤에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은 오히려 일정한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더 신경 쓰일 것 같았다. 그 변화가 문령에게는 아직 낯설었다.“멈춰요.”문령이 갑자기 말했다.하륜은 즉시 멈췄다.“왜.”문령은 물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물결처럼 흔들리던 선이 점차 글자가 되고 있었다.검의 주인은 베지 못할 것을 알아야 하고,진의 주인은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하륜이 글을 읽더니 낮게 말했
12화. 아직 주인이 아니다수심각 위로 새벽빛이 번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그림자와 물보라로 뒤엉켜 있던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했다. 달은 서쪽으로 기울었고, 수면 위에 남은 은빛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문령은 그 고요가 오히려 낯설었다. 위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무함을 내려다보았다. 물 아래에서 떠오른 함 안에는 빛이 바랜 비단 조각과 옥가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글씨가 적힌 비단은 아직 펼치지 않았다. 흑련이 남긴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봉인한다.문령은 무심코 하륜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난간 가까이에 서서 호수를 보고 있었다. 검은 이미 칼집에 들어갔지만 오른팔에는 조금 전의 검은 기운이 남긴 선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는 먹물이 피부 밑으로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문령은 그 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렇게 보면 없어지나?”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문령이 고개를 들었다. 하륜은 여전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이 보고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안 봤어요.”“봤다.”“……조금 봤어요.”하륜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강무결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전투보다 더 무거운 표정이 걸려 있었다.“사형. 그 기운은 단가로 돌아가 치료해야 합니다.”하륜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렸다.“치료할 수 있나?”강무결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백유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일반 의술로는 어렵습니다. 수월별궁의 진기가 눌러주지 않으면 더 깊이 파고들 가능성이 있습니다.”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령에게 향했다. 문령은 그 시선이 싫었다. 봉인을 읽는 것도 자신이었다. 진을 여는 것도 자신이었고, 이제 하륜의 몸에 남은 기운까지 자신이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사람이 아니라 열쇠나 도구가
11화. 봉인보다 먼저중심 진침이 빠진 순간 수심각이 크게 흔들렸다.기둥 아래까지 올라온 물결이 난간을 세차게 때렸고, 차가운 물방울이 문령의 뺨과 머리카락 끝에 튀었다.물 아래의 문이 더 크게 벌어졌다.검은 기운이 틈 사이로 솟구쳤다.그러나 문령의 눈에는 그보다 하륜이 먼저 들어왔다.그는 검을 든 채 서 있었다.검은 선이 오른팔을 타고 올라가 있었고, 눈동자 안의 금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령은 그의 앞에 진침을 꽂았다.푸른빛이 퍼졌다.검은 기운과 부딪히며 낮은 울림이 났다.하륜의 검끝이 문령의 어깨 가까이에서 멈췄다.“비켜.”목소리는 하륜의 것이었지만, 평소와 달랐다.문령은 고개를 저었다.“안 비켜요.”“진이 무너진다.”“알아요.”문령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손도 떨렸고 숨도 짧았다.그래도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하륜의 검끝보다 그의 눈을 보았다.조금 전까지 자신이 보는 곳을 먼저 보던 사람.자신이 틀릴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때도, 지금까지는 맞았다고 담담히 말하던 사람.문령은 그 기억들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다.다만 낮게 말했다.“돌아와요.”하륜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문령은 그 반응 하나에 숨을 붙잡았다.“단하륜.”검은 기운이 거칠게 일어났다.하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문령은 피하지 않았다.“저 여기 있어요.”그 말은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말을 한 뒤 문령은 잠시 멈췄다.왜 그런 말을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다만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한 쌍의 진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자신이 길을 보면 하륜이 그 길로 왔다.그렇다면 이번에도 자신이 길을 보여야 했다.문령은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검날이 아니라 하륜 쪽으로.“이쪽이에요.”그녀의 목소리가 바람 사이로 낮게 흘렀다.하륜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왔다.검은 빛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금빛이 흔들렸다.문령의 가슴이 조여왔다.“아까 그랬잖아요.”문령은 숨을 골랐다.“제가 보는 곳으로 간다고.”하륜
10화. 네가 보는 곳으로검은 손이 수면을 뚫고 올라온 순간, 호수의 달빛이 산산이 흔들렸다.조금 전까지 잔잔하던 수심각 아래로 먹빛 파문이 번지더니, 물속에서 사람의 형상을 닮은 그림자들이 하나둘 기어올랐다. 얼굴도 눈도 없는 검은 몸이 물에 젖은 천처럼 늘어졌다가 다시 일어섰다.문령은 난간 가까이에 서서 숨을 낮췄다.하륜의 검이 가장 먼저 달려든 그림자의 몸을 갈랐다.검은 형체가 양쪽으로 찢어졌다.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바닥으로 흩어진 검은 물방울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나였던 그림자가 둘이 되어 일어났다.문령의 얼굴이 굳었다.“베면 안 돼요.”하륜의 검끝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돌아보지 않았다.“그럼?”짧은 한마디였다.문령은 그림자를 보지 않고 그 아래를 보았다.수면 위에서 끊어지는 달빛, 기둥 아래로 모였다 흩어지는 물결, 검은 형체가 올라오기 직전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파문.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아무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다.그러나 진은 언제나 흐름을 남겼다.문령의 시선이 동쪽 기둥 아래에서 멈췄다.“오른쪽으로 두 걸음.”하륜이 바로 움직였다.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검은 팔 하나가 솟구쳤다.문령은 손에 쥔 진침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검을 세우지 말고 눕혀요. 달빛 밖으로 밀어내듯이.”하륜의 손목이 돌아갔다.세워져 있던 검날이 비스듬히 누웠다. 검은 그림자의 옆구리를 밀어내자, 형체가 수심각 기둥이 드리운 그늘로 미끄러졌다.그 순간 몸이 힘을 잃었다.검은 물처럼 바닥에 흩어지더니 그대로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문령의 눈빛이 선명해졌다.“맞아요.”“다음.”하륜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문령은 다시 호수를 읽었다.“왼쪽 한 걸음.”하륜이 움직였다.“조금 뒤로.”이번에는 문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이 먼저 돌아갔다.두 번째 그림자가 밀려났다.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몇 번쯤 이어졌을 때, 문령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하륜이 너무 빨랐다.자신이 끝까지 말하기 전에
9화. 물 아래의 달별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강무결은 단가의 명령서가 하륜의 손에서 찢어진 뒤부터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하륜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문령은 두 사람 사이를 걷다가 몇 번이나 앞선 하륜의 등을 바라보았다.며칠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단하륜은 화가 날수록 오히려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주변 사람에게 감정을 쏟는 대신 입을 다물었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처음에는 자신에게만 무뚝뚝한 줄 알았다. 하지만 강무결에게도, 백유겸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필요한 말 이상은 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함부로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말투는 거칠어도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문령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몇 걸음 앞서가던 하륜의 보폭이 어느 순간 느려졌다.동쪽 회랑을 지나 수심각으로 이어지는 돌길에 들어서자 그와 문령의 거리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하륜의 한 걸음은 자신보다 훨씬 컸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같은 간격이었다.“저 때문에 천천히 걷는 거예요?”하륜이 고개만 조금 돌렸다.“아니다.”“아까는 더 빨리 걸었잖아요.”잠깐의 침묵 뒤 그가 앞을 보며 말했다.“밤길이 미끄럽다.”문령은 저도 모르게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비는 오지 않았고 돌길은 말라 있었다.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수심각은 수월별궁의 가장 동쪽, 호수 안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낮이라면 푸른 물결과 낡은 기둥이 어우러져 고즈넉하게 보였겠지만, 달이 뜬 뒤의 수심각은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검푸른 호수 위로 은빛이 길게 부서졌고 처마 끝의 풍경은 바람도 없는데 이따금 낮게 울었다.문령은 좁은 나무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수심각 아래 물고기를 보고 싶어 호숫가까지 내려갔던 날, 평소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어머니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문령아. 저곳에는 가지 마라.왜냐고 묻자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