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7화. 두 번째 봉인은 물 아래 있다
흑련이 사라진 뒤에도 월영서고 안에는 붉은 향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백유겸이 닫혀 있던 창을 하나씩 열자 호수 쪽에서 불어온 차가운 밤바람이 책장 사이를 지나갔고, 붉은 연기는 오래된 종이와 마른 나무 냄새 속으로 스며들다가 조금씩 밖으로 밀려나갔다.
문령은 책상 앞에 앉아 《수월봉마진 초해》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으로 검날을 닦고 있었지만, 흑련이 남긴 한 단어만큼은 문령의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제물.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손끝이 서늘해졌다.
“서 소저.”
백유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책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첫 번째 봉인이 풀렸으니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던 기록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문령은 책을 달빛이 가장 밝게 들어오는 자리로 옮겼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책장을 조금씩 기울이자 희미한 먹빛이 물속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첫 봉인이 풀리면 수심각으로 가라.
그리고 그 아래 새로운 문장이 이어졌다.
두 번째 봉인은 물 아래 있다.
“수심각…….”
수월별궁 호수 가장자리에 세워진 작은 누각.
낮에는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는 그곳만큼은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왜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아직은 안 된다고.
하륜이 책 가까이 다가와 몸을 조금 숙였다. 전투 중 풀린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 아래로 흘러내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다음 장소가 거긴가?”
“그런 것 같아요.”
“언제지?”
다음 장에는 아무 글도 없었다.
그러나 한동안 달빛 아래 놓아두자 희미했던 먹빛이 천천히 짙어졌다.
다음 달이 물에 잠기기 전.
백유겸이 창밖의 달을 살피고는 무겁게 말했다.
“내일 밤입니다.”
첫 번째 봉인이 풀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두 번째 봉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령은 마음을 정리할 틈조차 없는 상황이 답답했지만, 하륜은 별다른 동요 없이 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그럼 내일까지 준비하면 되겠군.”
문령은 그를 한동안 보다가 물었다.
“정말 같이 가실 건가요?”
하륜의 시선이 그녀에게 옮겨왔다.
“네가 혼자 갈 수 있나?”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에게 붙잡혔을 때도, 조금 전 흑련의 독침이 자신을 향했을 때도 혼자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고 있었다.
문령은 쓸데없는 자존심 대신 사실을 인정했다.
“아니요.”
“그럼 묻지 마라.”
말투는 여전히 무례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싫지 않았다.
하륜은 문령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같이 가겠다고 했다.
***
새벽이 지나 아침 햇빛이 창호 사이로 들어왔지만 문령은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밤새 펼쳐놓은 《수월봉마진 초해》를 다시 보고 있던 중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갑자기 누군가 찾아오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문령의 어깨가 순간 긴장했지만 곧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다.”
문을 열자 하륜이 회랑에 서 있었다.
어젯밤 입었던 짙은 남색 장포는 그대로였지만 피와 먼지는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흐트러졌던 머리도 다시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다만 눈가에는 밤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사람 특유의 옅은 피로가 남아 있었다.
하륜은 문령의 얼굴을 한 차례 살피고는 미간을 조금 좁혔다.
“잤나?”
“아니요.”
“그럴 줄 알았다.”
“왜요?”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죽은 사람 얼굴 같으니까.”
문령은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 말은 꼭 그렇게 해야 해요?”
“틀린 말은 아니잖아.”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문령은 결국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왜 이 남자를 믿지 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기분을 헤아리는 재주가 부족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어디 가는데요?”
“동문.”
“수심각이 아니라요?”
“그 전에 볼 게 있다.”
어젯밤 목진이 쓰러져 있던 동문의 피는 이미 씻겨 있었지만 돌바닥 사이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문령은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바닥 가까이 몸을 낮췄다. 사람 앞에서는 시선 하나를 두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진의 흔적 앞에서는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손끝으로 그을린 선을 따라가던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달라졌다.
“이상해요.”
하륜도 문령 옆에 몸을 낮췄다.
“뭐가?”
문령은 돌 틈을 따라 남은 검은 기운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동문의 진은 외부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기운을 막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건 반대예요.”
그녀는 흐름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
“안에서 바깥쪽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끌려 들어왔어요.”
하륜의 눈빛이 백유겸에게 향했다.
“누군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는 뜻인가?”
백유겸이 무언가 대답하려다 잠시 망설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동문의 안쪽 진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문령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유겸의 얼굴에 드러난 망설임을 보는 순간 가슴 안으로 서늘한 예감이 스며들었다.
“누구예요?”
대답이 없었다.
문령은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지만 백유겸은 끝내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설마…… 저희 부모님인가요?”
백유겸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문령은 깨달았다.
적어도 이 별궁에서 동문의 안쪽 진을 움직일 수 있었던 사람은 자신의 부모뿐이었다.
그리고 백유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14화. 우리가 정할게요명월석 위의 두 이름은 마치 누군가 마지막 획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서문령.단하륜.문령은 자신의 이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평생 수없이 써온 이름이었다. 부모가 불러주었고, 책의 첫 장에도 적었고, 진법을 익힌 종이 아래에도 남겼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름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보였다. 이름을 새기면 수월별궁과 연결된다. 별궁이 흔들리면 자신도 흔들리고, 자신이 무너지면 별궁도 무너진다. 명월석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이름을 새기면 주인이 된다.새기지 않으면 세 번째 봉인은 열린다.하륜이 낮게 웃었다.“선택권이 아주 친절하군.”문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선택하지 않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았을 때 벌어질 일을 너무 잘 보여주고 있었다.“결국 또 해야 한다는 말이네요.”문령의 말에 하륜이 그녀를 돌아보았다.“아니다.”“뭐가요?”“안 해도 된다.”문령은 눈을 깜박였다.하륜은 명월석이 아니라 그녀를 보고 있었다.“네가 싫으면 이름을 새기지 마.”“그러면 봉인이 열려요.”“그건 별궁의 문제지.”문령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강호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그래도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네 책임이라고 밀어 넣는 건 다른 문제다.”문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월별궁보다 자신을 먼저 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부모도, 백유겸도, 별궁 자체도 늘 문령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말했다. 그런데 하륜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문령은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칠고 무뚝뚝해서 남의 마음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사람의 선택을 먼저 보았다.“단 공자는요?”문령이 물었다.“뭐가.”“정말 하기 싫으면 안 할 거예요?”하륜은 잠시 명월석을 바라보았다.“아직 모르겠다.”솔직한 대답이었다.문령은 그런 점도 마음에 들었다.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운명이니 책임
13화. 이름을 새기는 곳호수 아래로 이어진 계단은 수심각 뒤편에 숨어 있었다. 낮에는 물과 수초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돌계단이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지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은 물속으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위로 물이 넘치지 않았다. 양옆에서는 검푸른 호수가 벽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계단 위에는 달빛을 머금은 듯한 푸른 기운이 엷게 흐르고 있었다.문령은 첫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여기로 내려가는 거예요?”백유겸이 고개를 끄덕였다.“명월석은 수심각보다 더 아래에 있습니다.”강무결이 하륜의 팔을 한 번 바라보았다.“사형, 지금 상태로 내려가도 괜찮겠습니까?”“안 괜찮으면 네가 대신 이름을 새길 건가?”강무결이 입을 다물었다. 문령은 그 둘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게 웃었다. 하륜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웃었나?”문령의 얼굴이 굳었다.“아니요.”“방금 웃었는데.”“잘못 보신 거예요.”“그런가.”하륜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그 짧은 표정 때문에 문령은 괜히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조용했다. 발밑에서 돌을 밟는 소리가 작게 울렸고, 양옆의 물에서는 물고기들이 멀찍이 지나갔다. 머리 위로는 분명 호수가 있었는데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마치 물이 두 사람을 피해서 길을 내주는 것 같았다.문령은 몇 계단을 내려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하륜은 두 걸음쯤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문령은 괜히 앞을 보았다. 처음에는 뒤에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은 오히려 일정한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더 신경 쓰일 것 같았다. 그 변화가 문령에게는 아직 낯설었다.“멈춰요.”문령이 갑자기 말했다.하륜은 즉시 멈췄다.“왜.”문령은 물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물결처럼 흔들리던 선이 점차 글자가 되고 있었다.검의 주인은 베지 못할 것을 알아야 하고,진의 주인은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하륜이 글을 읽더니 낮게 말했
12화. 아직 주인이 아니다수심각 위로 새벽빛이 번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그림자와 물보라로 뒤엉켜 있던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했다. 달은 서쪽으로 기울었고, 수면 위에 남은 은빛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문령은 그 고요가 오히려 낯설었다. 위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무함을 내려다보았다. 물 아래에서 떠오른 함 안에는 빛이 바랜 비단 조각과 옥가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글씨가 적힌 비단은 아직 펼치지 않았다. 흑련이 남긴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봉인한다.문령은 무심코 하륜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난간 가까이에 서서 호수를 보고 있었다. 검은 이미 칼집에 들어갔지만 오른팔에는 조금 전의 검은 기운이 남긴 선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는 먹물이 피부 밑으로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문령은 그 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렇게 보면 없어지나?”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문령이 고개를 들었다. 하륜은 여전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이 보고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안 봤어요.”“봤다.”“……조금 봤어요.”하륜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강무결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전투보다 더 무거운 표정이 걸려 있었다.“사형. 그 기운은 단가로 돌아가 치료해야 합니다.”하륜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렸다.“치료할 수 있나?”강무결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백유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일반 의술로는 어렵습니다. 수월별궁의 진기가 눌러주지 않으면 더 깊이 파고들 가능성이 있습니다.”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령에게 향했다. 문령은 그 시선이 싫었다. 봉인을 읽는 것도 자신이었다. 진을 여는 것도 자신이었고, 이제 하륜의 몸에 남은 기운까지 자신이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사람이 아니라 열쇠나 도구가
11화. 봉인보다 먼저중심 진침이 빠진 순간 수심각이 크게 흔들렸다.기둥 아래까지 올라온 물결이 난간을 세차게 때렸고, 차가운 물방울이 문령의 뺨과 머리카락 끝에 튀었다.물 아래의 문이 더 크게 벌어졌다.검은 기운이 틈 사이로 솟구쳤다.그러나 문령의 눈에는 그보다 하륜이 먼저 들어왔다.그는 검을 든 채 서 있었다.검은 선이 오른팔을 타고 올라가 있었고, 눈동자 안의 금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령은 그의 앞에 진침을 꽂았다.푸른빛이 퍼졌다.검은 기운과 부딪히며 낮은 울림이 났다.하륜의 검끝이 문령의 어깨 가까이에서 멈췄다.“비켜.”목소리는 하륜의 것이었지만, 평소와 달랐다.문령은 고개를 저었다.“안 비켜요.”“진이 무너진다.”“알아요.”문령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손도 떨렸고 숨도 짧았다.그래도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하륜의 검끝보다 그의 눈을 보았다.조금 전까지 자신이 보는 곳을 먼저 보던 사람.자신이 틀릴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때도, 지금까지는 맞았다고 담담히 말하던 사람.문령은 그 기억들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다.다만 낮게 말했다.“돌아와요.”하륜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문령은 그 반응 하나에 숨을 붙잡았다.“단하륜.”검은 기운이 거칠게 일어났다.하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문령은 피하지 않았다.“저 여기 있어요.”그 말은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말을 한 뒤 문령은 잠시 멈췄다.왜 그런 말을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다만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한 쌍의 진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자신이 길을 보면 하륜이 그 길로 왔다.그렇다면 이번에도 자신이 길을 보여야 했다.문령은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검날이 아니라 하륜 쪽으로.“이쪽이에요.”그녀의 목소리가 바람 사이로 낮게 흘렀다.하륜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왔다.검은 빛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금빛이 흔들렸다.문령의 가슴이 조여왔다.“아까 그랬잖아요.”문령은 숨을 골랐다.“제가 보는 곳으로 간다고.”하륜
10화. 네가 보는 곳으로검은 손이 수면을 뚫고 올라온 순간, 호수의 달빛이 산산이 흔들렸다.조금 전까지 잔잔하던 수심각 아래로 먹빛 파문이 번지더니, 물속에서 사람의 형상을 닮은 그림자들이 하나둘 기어올랐다. 얼굴도 눈도 없는 검은 몸이 물에 젖은 천처럼 늘어졌다가 다시 일어섰다.문령은 난간 가까이에 서서 숨을 낮췄다.하륜의 검이 가장 먼저 달려든 그림자의 몸을 갈랐다.검은 형체가 양쪽으로 찢어졌다.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바닥으로 흩어진 검은 물방울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나였던 그림자가 둘이 되어 일어났다.문령의 얼굴이 굳었다.“베면 안 돼요.”하륜의 검끝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돌아보지 않았다.“그럼?”짧은 한마디였다.문령은 그림자를 보지 않고 그 아래를 보았다.수면 위에서 끊어지는 달빛, 기둥 아래로 모였다 흩어지는 물결, 검은 형체가 올라오기 직전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파문.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아무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다.그러나 진은 언제나 흐름을 남겼다.문령의 시선이 동쪽 기둥 아래에서 멈췄다.“오른쪽으로 두 걸음.”하륜이 바로 움직였다.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검은 팔 하나가 솟구쳤다.문령은 손에 쥔 진침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검을 세우지 말고 눕혀요. 달빛 밖으로 밀어내듯이.”하륜의 손목이 돌아갔다.세워져 있던 검날이 비스듬히 누웠다. 검은 그림자의 옆구리를 밀어내자, 형체가 수심각 기둥이 드리운 그늘로 미끄러졌다.그 순간 몸이 힘을 잃었다.검은 물처럼 바닥에 흩어지더니 그대로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문령의 눈빛이 선명해졌다.“맞아요.”“다음.”하륜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문령은 다시 호수를 읽었다.“왼쪽 한 걸음.”하륜이 움직였다.“조금 뒤로.”이번에는 문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이 먼저 돌아갔다.두 번째 그림자가 밀려났다.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몇 번쯤 이어졌을 때, 문령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하륜이 너무 빨랐다.자신이 끝까지 말하기 전에
9화. 물 아래의 달별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강무결은 단가의 명령서가 하륜의 손에서 찢어진 뒤부터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하륜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문령은 두 사람 사이를 걷다가 몇 번이나 앞선 하륜의 등을 바라보았다.며칠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단하륜은 화가 날수록 오히려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주변 사람에게 감정을 쏟는 대신 입을 다물었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처음에는 자신에게만 무뚝뚝한 줄 알았다. 하지만 강무결에게도, 백유겸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필요한 말 이상은 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함부로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말투는 거칠어도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문령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몇 걸음 앞서가던 하륜의 보폭이 어느 순간 느려졌다.동쪽 회랑을 지나 수심각으로 이어지는 돌길에 들어서자 그와 문령의 거리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하륜의 한 걸음은 자신보다 훨씬 컸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같은 간격이었다.“저 때문에 천천히 걷는 거예요?”하륜이 고개만 조금 돌렸다.“아니다.”“아까는 더 빨리 걸었잖아요.”잠깐의 침묵 뒤 그가 앞을 보며 말했다.“밤길이 미끄럽다.”문령은 저도 모르게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비는 오지 않았고 돌길은 말라 있었다.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수심각은 수월별궁의 가장 동쪽, 호수 안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낮이라면 푸른 물결과 낡은 기둥이 어우러져 고즈넉하게 보였겠지만, 달이 뜬 뒤의 수심각은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검푸른 호수 위로 은빛이 길게 부서졌고 처마 끝의 풍경은 바람도 없는데 이따금 낮게 울었다.문령은 좁은 나무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수심각 아래 물고기를 보고 싶어 호숫가까지 내려갔던 날, 평소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어머니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문령아. 저곳에는 가지 마라.왜냐고 묻자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