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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물 아래의 달

작가: 미셀1278
last update 게시일: 2026-10-08 21:29:52

9화. 물 아래의 달

별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강무결은 단가의 명령서가 하륜의 손에서 찢어진 뒤부터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하륜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문령은 두 사람 사이를 걷다가 몇 번이나 앞선 하륜의 등을 바라보았다.

며칠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단하륜은 화가 날수록 오히려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주변 사람에게 감정을 쏟는 대신 입을 다물었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처음에는 자신에게만 무뚝뚝한 줄 알았다. 하지만 강무결에게도, 백유겸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필요한 말 이상은 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함부로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말투는 거칠어도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문령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몇 걸음 앞서가던 하륜의 보폭이 어느 순간 느려졌다.

동쪽 회랑을 지나 수심각으로 이어지는 돌길에 들어서자 그와 문령의 거리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하륜의 한 걸음은 자신보다 훨씬 컸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같은 간격이었다.

“저 때문에 천천히 걷는 거예요?”

하륜이 고개만 조금 돌렸다.

“아니다.”

“아까는 더 빨리 걸었잖아요.”

잠깐의 침묵 뒤 그가 앞을 보며 말했다.

“밤길이 미끄럽다.”

문령은 저도 모르게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비는 오지 않았고 돌길은 말라 있었다.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수심각은 수월별궁의 가장 동쪽, 호수 안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낮이라면 푸른 물결과 낡은 기둥이 어우러져 고즈넉하게 보였겠지만, 달이 뜬 뒤의 수심각은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검푸른 호수 위로 은빛이 길게 부서졌고 처마 끝의 풍경은 바람도 없는데 이따금 낮게 울었다.

문령은 좁은 나무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수심각 아래 물고기를 보고 싶어 호숫가까지 내려갔던 날, 평소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어머니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문령아. 저곳에는 가지 마라.

왜냐고 묻자 어머니는 수심각을 오래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직 네가 알아서는 안 되는 곳이니까.

그때는 단순히 위험해서 그런 줄 알았다. 이제 와 생각하면 수월별궁에는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감춰진 것이 너무 많았다.

생각에 잠긴 사이 익숙한 냄새가 가까워졌다.

서늘하고 조금 씁쓸한 약초 향.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가 다가왔는지 알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낯설었던 사람의 냄새를 벌써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령에게는 조금 이상했다.

“안 들어갈 건가?”

문령이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 선 하륜은 처음 만났던 밤과 달라 보였다. 그때는 젖은 검은 머리와 피 묻은 검, 낯선 사내가 가까이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해 얼굴을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달빛이 이마와 반듯한 콧날을 따라 희게 내려앉는 것도, 늘 차갑게만 보이던 눈매가 옆에서 보면 생각보다 깊다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자신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춘 사람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전과는 묘하게 달라 보였다.

문령은 몇 초 더 바라보다가 하륜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돌렸다.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런 표정이었어요.”

하륜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사람 얼굴도 읽나?”

“진보다는 어려워요.”

말을 하고 나서 문령은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일 자체가 불편했는데, 지금은 대답이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하륜이 먼저 다리 위로 올라섰고 문령도 뒤따랐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좁은 다리였다. 바람에 밀린 하륜의 장포 자락이 문령의 손등을 스쳤다. 별것 아닌 접촉인데도 감각이 오래 남았다.

문령이 물 아래를 살피려고 난간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순간, 팔꿈치 위로 단단한 손이 닿았다. 하륜이 그녀를 한 걸음 뒤로 당겼다.

“더 가지 마.”

“안 떨어져요.”

“떨어지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놓았지만 문령은 바로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닿았던 팔 위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고 가까워진 거리 사이로 약초 향도 더 선명했다.

문령은 괜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단 공자는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무슨 뜻이지?”

“단가에서는 돌아오라고 했잖아요.”

하륜은 잠시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 명령을 따를 거였으면 아까 돌아갔겠지.”

“그러니까 왜요?”

이번에는 하륜의 시선이 문령에게 오래 머물렀다.

“네가 혼자 갈 것 같아서.”

문령은 눈을 깜박였다.

“제가요?”

“말렸다고 안 갈 얼굴은 아니던데.”

맞았다. 무서워도 갔을 것이다. 부모가 남긴 비밀을 모른 채 돌아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륜은 다시 앞을 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읽어야 내가 움직일 수 있다.”

문령은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틀릴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그렇게 잘 따라와요?”

하륜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맞았으니까.”

문령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조차 판단할 때마다 몇 번씩 되짚는데, 이 사람은 문령이 보았다고 하면 보았다고 믿었고 움직이라고 하면 이유를 묻기 전에 움직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판단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수심각 안으로 들어서자 백유겸이 문을 닫았고 강무결은 창을 든 채 북쪽 기둥에 섰다. 마침 구름 사이에서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은빛이 호수 위로 길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빛이 수심각 아래까지 닿자 검푸른 수면 아래에서 가느다란 검은 선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선들은 호수 가장자리까지 뻗어 거대한 원을 이루고, 그 안으로 수십 겹의 문양이 얽혀 있었다.

“이건…….”

하륜이 그녀 곁에 섰다.

“건물 밑에 있는 진인가?”

문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수심각이 진 안에 있는 거예요. 호수 전체가 하나의 진이에요.”

잠시 모두가 말을 잃었다.

그때 문령은 더 깊은 곳에서 흔들리는 빛을 발견했다. 호수 아래에 또 하나의 달이 있었다. 하늘의 달이 비친 것이 아니라 검푸른 물속 깊은 곳에서 은빛의 둥근 빛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물로 이루어진 문이 떠 있었다.

“저기예요.”

하륜의 손이 검자루 위로 올라갔다.

“두 번째 봉인?”

문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속으로 들어가면 안 돼요. 여기서 길을 열어야 해요.”

말을 하면서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제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백유겸이 입을 열기 전에 하륜이 먼저 말했다.

“실패하면 다시 막는다.”

문령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그렇게 쉬워 보여요?”

“아니.”

하륜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도 막는다.”

그는 품에서 금패를 꺼냈다.

“네가 열어.”

다른 손이 검자루를 감쌌다.

“내가 막을 테니까.”

문령은 잠시 하륜을 바라보다 자신의 옥패를 꺼냈다. 두 패가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동시에 낮게 울었다.

여전히 무서웠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랐다. 자신이 무엇을 열어버리더라도 적어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진문이 그려지자 수면이 흔들렸다.

두 번째 선이 이어지자 물 아래의 달이 갈라졌다.

세 번째 획을 긋는 순간, 검은 손 하나가 수면을 뚫고 솟구쳤다.

하륜의 검이 번개처럼 칼집에서 빠져나와 문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계속해.”

그가 말했다.

“뒤는 보지 마.”

문령은 진문을 그리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단하륜이라는 사람은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더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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