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런데 이젠 돈뿐만이 아니라 시간까지 들여 강루인의 옆에 있어 줬다. 남들이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남편이겠지만 강루인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영도가 자리를 비울 때면 유진이 강루인의 곁을 지켰다. 아무튼 옆에 아무도 없는 일은 없었다.호텔 수영장이 바다와 마주하고 있었다. 유진이 강루인의 옆에 있는 선베드에 앉아 물었다.“사모님, 자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오랫동안 만났는데도 강루인은 유진에게 별로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쌀쌀맞진 않았고 그저 여행 친구로만 생각했다.남들이 자유를 뭐라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강루인이 생각하는 자유는 이것밖에 없었다.“이혼이요.”이혼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자유를 언제쯤 다시 누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유진이 그녀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었다.“아주 큰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작은 범위 내에서 자유를 찾아봐도 돼요.”그러면서 눈앞의 망망대해를 가리켰다.“예를 들면 저 바다처럼요. 전 어릴 때 속상한 일이 있으면 늘 수영을 했어요. 바닷속에 몸을 뉘고 물고기처럼 헤엄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모든 고민이 사라지더라고요. 그 순간엔 머릿속이 완전히 비워지는 기분이었는데 정말 좋았어요.”유진이 계속 말했다.“사모님도 좋아하는 운동을 찾거나 생활 방식을 바꿔보세요. 사모님을 괴롭히는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새롭게 살아가는 거죠.”강루인은 멍한 얼굴로 파도가 일렁거리는 바다를 쳐다봤다. 다시 새롭게 살아간다는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해울시에 온 후 강루인은 몽유병 증세를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주영도는 그녀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울시에 온 지 나흘째 되던 날에 또다시 몽유병 증세를 보였다.깊은 밤, 주영도가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강루인을 감싸 안으려다 아무도 없는 걸 알아채고는 벌떡 일어났다.눈을 떠보니 강루인이 침대에 없었다. 침대 옆에 슬리퍼가 놓여있는 걸 본 순간 주영도의 눈
주영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처리할 일이 산더미였고 회의도 끝없이 이어지다 보니 강루인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강루인은 오히려 이런 상황이 더 좋았다. 그가 바빠서 호텔로 아예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반면 주영도는 일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 강루인을 볼 때마다 모든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하여 그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그는 성큼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그녀의 몸 냄새를 맡았다.“온 오후 방에서 자던데 혹시 몸이 안 좋아?”강루인의 말투가 차분했지만 말 속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영도 씨한테 안겨 있으면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속이 메스꺼워.”주영도가 그녀의 입술을 톡 쳤다.“예쁘게 말하는 법을 언제쯤 배울래?”“나 언제 집으로 갈 수 있어?”그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하고 싶은 얘기만 했다.“내가 옆에 없어서 심심했어?”‘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나?’주영도가 강루인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내일 아침에 일이 없으니까 같이 나가서 구경이나 하자. 요 며칠 밥도 제대로 안 먹었지? 살이 또 빠졌어.”그의 걱정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강루인은 그가 만지던 손가락을 홱 빼냈다.“졸려.”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주영도도 씻은 후 곧장 따라 들어갔다.다음 날 새벽 다섯 시, 주영도가 강루인을 깨웠다.“일어나. 좋은 거 보러 가자.”강루인은 그가 말하는 ‘좋은 것’에 눈곱만큼도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주영도가 한번 결정한 일은 기어코 실행할 것이다.그는 옷을 챙겨 입고 채비를 마친 뒤 차를 몰아 호텔을 나섰다.차가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 산 정상에 멈췄을 때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주영도가 차 문을 열고 강루인에게 손을 내밀었다.“내려.”강루인은 그의 손을 힐끗 쳐다봤다가 잡지 않고 혼자 알아서 내렸다.산 정상이라 바람이 거셌다. 주영도는 미리 준비해둔 숄을 꺼내 강루인의 어
유진은 심호흡하고 목청을 가다듬은 뒤 전화를 받았다.“대표님.”휴대폰 너머로 주영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와이프랑 어디 좀 다녀올 생각인데 선생님도 같이 가시죠.”유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후에야 유진은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는 걸 알아챘다. 시선이 책상 위의 돈다발로 향한 그때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주영도가 강루인을 데리고 나온 순간부터 강루인은 주도권을 잃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출장 당일, 그녀는 짐과 함께 차에 태워졌다.그들을 데리러 온 노윤환은 강루인도 함께인 걸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 생각했다.‘한시라도 떨어지기 싫어서 사모님도 데리고 오신 거야? 아니면 감시하려고?’‘황제’의 속내까지 꿰뚫어 보던 유능한 ‘간신’조차도 지금 이 상황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남녀 문제에 있어서 예측 불가한 주영도라 노윤환 역시 속수무책이었다.공항.이미 도착한 유진을 보고도 강루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일행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몇 시간 후 해울 공항에 착륙했다.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주영도는 일정 때문에 나가야 했다. 강루인과 점심을 같이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주영도가 강루인의 목을 감싸 안더니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일 끝나면 제대로 구경시켜줄게.”그가 돌아선 순간 강루인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얼굴을 거칠게 닦아내고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으로 걸어갔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윤환이 이 장면을 모두 목격했다. 주영도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는데 놀랍게도 화난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태연했다.노윤환은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대표님 이젠 이런 걸 즐기시나?’주영도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진이 강루인을 찾아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저더러 사모님이랑 같이 점심 식사하라고 하셨어요.”비행기에서 식사를 거른 터라 배가 고팠던 강루인은 유진을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해도
유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저한테요? 무슨 일이시죠?”‘진료가 아니면 무슨 일로 찾아왔지?’구아정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강루인 씨한테 심리 상담해주고 있다고 들었어요.”유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걸 본 구아정이 계속해서 물었다.“무슨 병인가요?”유진이 대답했다.“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어요.”의사라면 환자의 병력을 누설해서는 안 되었다.“저 일해야 하니까 이만 나가 주세요.”하지만 구아정은 꼼짝도 하지 않고 발밑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유진은 검은색 가방과 구아정을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구아정이 가방 지퍼를 열자 지폐 뭉치가 드러났다. 그 순간 유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무슨 뜻이죠?”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돈을 내밀다니... 절대 좋은 일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유진이 말했다.“전 당신이 누군지 모르니까 당장 이 돈 들고 나가세요.”구아정이 돈 가방을 유진에게 밀었다.“이건 계약금이에요. 제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나중에 더 드릴게요.”딱 봐도 함정인 제안을 유진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이보세요. 전 당신이 누군지, 무슨 부탁인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지금 당장 제 진료실에서 나가 주세요.”구아정은 나갈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선생님 남동생이 강간범이라던데... 부모님도 공범이고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구아정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구아정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자신을 치료해주는 정신과 의사가 강간범의 가족인 걸 환자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과연 선생님을 계속 믿을까요? 그런 형편없는 부모한테서 멀쩡한 자식이 나올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선생님이 다니는 이 병원에서도 이런 불안 요소를 떠안으려 할까요?”유진의 숨이 살짝 거칠어졌다.“원하는 게 대체 뭐예요?”‘뭔가 계획을 가지고 날 찾아온 게 틀림없어. 그런데 날 노린 게 아니라 목표는 강루인 씨 같아.’구아정이 다정하게
유진은 매일 한두 시간씩 강루인과 얘기를 나눴다. 강루인은 주영도를 대하는 것처럼 유진을 공기 취급했다.환자에게 무시당하는 게 익숙한 일이라 그녀는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까요?”강루인이 덤덤하게 대꾸했다.“내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영도 씨가 허락했을 때 그때 다시 보죠.”“제가 가서 말씀드려 볼게요.”주영도가 허락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강루인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합격’한 아내가 아니었으니까.매번 대화할 때마다 유진이 대부분 말했고 강루인은 거의 입도 벌리지 않았다.떠나기 전 유진이 가져온 치자꽃을 강루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루인 씨 주려고 가져왔어요.”강루인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들어 힐끗 쳐다봤다.“정원에 꽃이 많더라고요. 대부분 사모님이 키운 거라면서요? 정말 대단하세요. 저도 꽃 키우는 걸 좋아하는데 제 손에서는 다 죽어버리는 거 있죠? 그래도 치자꽃은 살아남더라고요.”“꽃 키우는 분이 그러셨어요. 치자꽃이 추위도 잘 견디고 가뭄도 잘 견뎌서 제일 강인한 꽃이라고. 꽃봉오리를 따서 물에 담가도 죽지 않고 다음 날이면 다시 생기를 찾아 피어난대요.”강루인이 차분하게 말했다.“피어나면 뭐해요. 어차피 죽을 텐데.”“죽음은 누구나 맞이하는 결말이에요. 예외도 없고 막을 수도 없고요. 하지만 살아가는 건 우리 몫이에요. 슬프게 살아가나 행복하게 살아가나 똑같이 하루를 보내는 건데 굳이 고통스럽게 살아야 할까요? 스스로를 괴롭혀서 남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는 게 낫죠. 그러면 적어도 덜 아프니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고 강루인도 다시 침묵에 잠겼다.살아있는 것과 버티는 것의 차이를 강루인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죽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주영도와 맞서는 것도, 그에게 길들여지는 것도 싫었다. 하여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서로의 삶을 망치
입이 무거운 유진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죄송하지만 환자의 상황을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어요.”주초원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나도 딱히 알고 싶지 않아.’주영도가 아픈 게 아니라는 소리에 주초원도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선샤인 빌리지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주영도를 찾아갔다. 서재 문을 연 순간 방 안 가득한 담배 냄새에 주초원이 연신 기침했다.“콜록콜록...”주영도가 고개를 돌렸다.“여긴 왜 왔어?”주초원이 입을 삐죽거렸다.“일이 없으면 오면 안 돼요? 오빠, 요즘 나한테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오빠한테 가장 소중한 동생이 맞긴 해요?”그 말에 주영도의 날카롭던 눈빛이 눈에 띄게 다정해졌다.“말해봐. 무슨 일이야?”주초원이 오빠와 닮은 커다란 눈을 굴리며 말했다.“곧 내 생일인 거 잊지 않았죠?”그녀가 말하지 않았다면 정말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뭐 갖고 싶어?”주초원이 한정판 명품 몇 가지를 줄줄 읊자 주영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말을 이었다.“17살 생일은 성인이 되기 전의 가장 중요한 생일이잖아요. 친구들 불러서 함께 보내고 싶은데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어요?”“응.”주영도의 머릿속에 온통 강루인뿐이라 제대로 듣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그럼 아정이 언니도 남아서 내 생일 같이 보내도 된다는 말이죠?”구아정의 이름을 듣고서야 주영도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주초원이 이어 말했다.“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번복하면 안 돼요. 이건 내 생일 선물이에요.”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주영도가 입을 열었다.“네 생일이 지나면 바로 떠나라고 할 거야.”주초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까지 아직 보름이나 남았으니 일단 버티다가 생일이 지난 후에 떠날지 말지 생각하면 되었다.일이 성사되자 주초원이 만족한 얼굴로 서재를 나왔다. 이 기쁜 소식을 얼른 구아정에게 전해야 했다.침실 앞을 지날 때 주초원은 무심코 안을 들여다봤다. 조용히 앉아 있는 강루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