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말인 토요일 아침, 하숙집 마루에는 평소와 전혀 다른 무거운 정적이 내리앉아 있었다.가을 바람이 마루 문틈을 간간이 흔들며 지나갔지만, 평소 같으면 시끌벅적했을 식구들 중 누구 하나 먼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늦은 밤까지 이현이 그린 웹툰을 몰래 정독하느라 다들 밤잠을 설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어젯밤 이현의 입을 통해 무덤덤하게 흘러나왔던 그 참담한 과거가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는 까닭이었다.평일 같으면 주말이라고 마루 끝에 누워 늘어지게 늦잠을 잤을 태성은, 방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이현의 방 쪽을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러고는 평소처럼 "아우, 잘 잤다!" 하며 큰소리로 인사하는 대신,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다.민우 역시 일찍부터 책상 앞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짚고 있었지만, 정작 화면 속 텍스트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다.안경 너머로 드러난 민우의 눈빛은 깊은 생각에 잠겨 연신 헛손질만 반복하고 있었다.순정은 그런 하숙집 식구들의 정경을 모른 척하며 부엌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국을 국자로 천천히 저었다.두부와 애호박이 뭉근하게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가 작은 부엌 가득 퍼졌지만, 오늘따라 그 익숙한 아침 냄새마저 조금은 낯설게 감돌았다.간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순정아."도경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도경이 현관에 서서 순정을 부르고 있었다."응?""오늘 내가 상 차릴까?"순정이 국자를 든 채로 의아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평소 주말 같으면 "밥 먹어라" 하고 두세 번은 소리를 질러야 겨우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나던 사람이, 오늘따라 먼저 나서서 일을 돕겠다고 하니 그 속내가 뻔히 보였다."됐어. 너는 가서 얼굴이나 씻고 와.""그래도…… 국그릇이라도 옮길게.""괜찮다니까. 오늘은 내가 할 테니까, 씻고 밥 먹을 준비나 해."도경은 더 고집하지 못하고 돌아섰지만, 현관으로 향하던 걸음이 잠시 멈춰
유쾌했던 낮 동안의 소동이 한풀 꺾이고, 하숙집에 깊은 밤이 찾아왔다. 낮에 이현이의 태블릿에서 터진 '솜사탕 정체 발각 사건'은 집안의 커다란 해프닝이었다. 이현이가 엄청난 정산금을 버는 인기 작가라는 사실에 식구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솜사탕'이라는 오글거리는 필명과 막장 웹툰을 그린다는 사실로 이현을 놀려먹을 생각에 다들 신이 나 있었다. 식구들은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간 뒤, 약속이라도 한 듯 핸드폰을 켜고 이현의 웹툰 1화를 검색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다들 가벼운 호기심, 그리고 내일 아침 툇마루에서 이현이 얼굴을 보며 "어이, 솜사탕 작가님!" 하고 놀려줄 흑역사 짤이나 껀덕지를 잡으려는 불순한 심산이었다. 책상 앞에 앉은 막내 태성이는 "에이, 이현이 형이 그려봤자 얼마나 대단하겠어" 하고 픽 웃으며 스크롤을 내렸다. 도경이 역시 침대에 누워 덤덤하게 "얼마나 막장이길래 민우 형이 저렇게 난리였나" 하는 호기심으로 화면을 밝혔다. 순정 역시 제 방에서 휴대폰 빛에 의지한 채 이현의 작품을 열었다. 초반만 해도 식구들의 반응은 흥미진진했다. 자극적인 불륜과 암투, 찰진 대사, 횡령 사건까지 속도감 있게 터지는 연출에 다들 속으로 '오, 생각보다 재밌는데?' 하며 몰입했다. 하지만 회차가 10화, 20화를 넘어가면서 각자의 방 안을 채우던 가벼운 감정들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식구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갔다. 웹툰 은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재벌가의 뒤편에 숨겨진 추악한 다크사이드—횡령, 불륜, 스폰, 권력 암투를 배경으로 한 자극적인 마라맛 드라마였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짜 중심이자, 독자들의 가슴을 비벼 까는 핵심 서사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 거대한 저택 한구석에 방치된 ‘서자 소년’의 이야기였다. 화려한 대리석 바닥과 웅장한 인테리어, 하지만 그 공간 안에서 소년은 완벽한 투명인간이었다. 가족들이 모여 화기애애하게 고급 요리를 먹는 거대한 식
"야, 이현아. 일어나 봐."민우가 다급하게 이현의 어깨를 흔들었다.이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왜요, 형. 나 좀만 더 자면 안 돼요……""너…… 너 '솜사탕'이야? 이 만화, 네가 그린 거야?"민우가 태블릿 화면을 이현의 눈앞에 바짝 들이밀었다.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이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어, 어? 잠깐, 그거 왜 형이……!"이현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화면은 민우의 손에 들려 있었다.태블릿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지만, 놀란 마음에 손끝이 허공만 몇 번 휘저었다."이리 줘요! 그거 아무한테나 보여주는 거 아니라니까!""아니,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민우가 태블릿을 한 손으로 든 채 뒤로 살짝 물러섰다.안경 너머 눈빛이 뭔가 복잡한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화면 속 숫자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민우는 자신이 평소 알던 이현과 지금 눈앞의 사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너 진짜…… 네가 그 그린 사람 맞아?""……맞으면 뭐요."이현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도로 주저앉았다.얼굴은 이미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지금껏 하숙집 식구들에게 필명도, 작품 제목도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었다.재벌가의 횡령과 불륜, 스폰서 이야기까지 자극적인 소재를 가감 없이 담아낸 그 막장 웹툰이, 다른 사람도 아닌 하숙집 식구들 눈에 들어가는 상상만으로도 이현은 얼굴이 화끈거렸다."미친……"민우가 낮게 중얼거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단순한 놀람이 아니었다. 지난 몇 달간 매주 업데이트를 기다리며 본인이 혼자 속으로 욕하고 애간장을 태웠던 그 인기 웹툰의 작가가, 알고 보니 매일 마주 앉아 밥을 먹던 하숙집 동생이었다니."나 이거 매주 금요일 밤마다 쿠키 구워가면서 봐…… 작가가 맨날 사람 피 말리게 완결짓는다고 속으로 욕하면서 봤는데, 그게 너였다고?""……네?"이현이 순간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민우 형이 자기 만화를 읽고 있
주말 오후의 툇마루는 평화롭다 못해 나른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창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마루 바닥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고, 거실 소파에는 며칠 밤을 내리 새운 이현이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평소에도 나른하고 피곤해 보이는 녀석이었지만, 오늘따라 눈가에 진하게 내려앉은 다크서클과 파리한 낯빛이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처럼 보일 지경이었다.그 옆에서 민우는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노발대발 바라보며 마루 바닥에 앉아 있었다.민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게 물들어 있었고, 급기야 씩씩대는 한숨 소리가 거실 전체를 울렸다.평소 이성적이고 차분한 의대생 민우답지 않은 기이한 모습이었다."아니, 진짜 작가 양반 양심 미쳐가는 거 아니냐고! 아무리 욕하면서 보는 막장웹툰이라도 정도가 있지, 주인공이 몇 살인데 이렇게까지 굴려?"민우가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마루 바닥을 쿵 소리가 나게 쳤다.마침 주방에서 갓 찐 단호박과 고구마를 접시에 담아 나오던 순정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민우야,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이현이 깨우겠다.""아, 순정아…… 미안. 내가 너무 몰입해서."민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들어 올려 보였다."아니 봐봐, 내가 요즘에 챙겨보는 웹툰이 있거든. 이라고, 요즘 인터넷에서 난리 난 막장 웹툰인데…… 이번 주 내용이 정말 너무해서 그래. 이 작가 필명이 '솜사탕'이거든? 독자들 가슴에 소금 뿌리는 데 아주 도가 튼 사이코패스가 분명해, 솜사탕은 무슨...솜사탄이다, 솜사탄!""……재벌가의 유령들?"익숙한 제목이었다.'……잠깐, 많이 들어 본 제목인데... 이거 그거잖아. 회귀전 전생에 시청률 15퍼센트 넘게 터지면서 신드롬급 인기였던 그 드라마.'순정의 머릿속으로 전생의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던 그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 회사 동료들이 점심시간마다 삼삼오오 모여 다음 화를 예측하던
대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잠기자, 마당을 지배하던 팽팽한 정적이 가라앉았다.순정은 손때 묻은 나무 기둥에 가만히 이마를 대고 서 있었다.쿵쾅거리며 뛰던 심장 소리가 차츰 느려지자, 비로소 살아있다는 실감이 차올랐다.남의 눈치를 보며 얹혀살던 전생의 그 서러웠던 삶에 마침표를 찍은 느낌이었다.내 힘으로, 내 의지로 지켜낸 내 보금자리였다.그때, 거실 창문 뒤와 평상 뒤편에 숨죽이고 있던 네 남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슬금슬금 순정의 주위로 모여들었다.네 남자는 멀찍이 떨어진 거실 창문과 평상 뒤에서 업자와 순정의 대화를 정확히 듣지 못했었다.그저 정 사장이 타 온 승합차 측면에 적힌 '황금 부동산'이라는 큼지막한 글자, 그리고 대문 앞에서 서슬 퍼렇게 소리를 지르며 업자를 쫓아내던 순정의 모습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던 참이었다.“……누나. 하숙집 접으시는 거예요……? 제가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적자 난 거죠……?”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태성이었다.툇마루 밑에 쪼그려 앉은 태성의 눈에는 습기가 촉촉하게 차올라 있었다.버림받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불쌍한 대형견 그 자체였다.“혹시 요즘 하숙집 어려워? ...우리 월세 진짜 말도 안 되게 적게 내고 있긴 했지.”도경 역시 무심한 척 툭 던졌지만, 후드티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손끝과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차갑게 그늘져 있었다.“맞아요, 누나. 요즘 물가에 성인 남자 넷이 매일 고기 반찬 먹는데 하숙비가 남을 리 없죠. 저 처음에 들어오면서 말했던 것처럼 하숙비 열배로 올리셔도 괜찮아요.”이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손을 꽉 쥐며 나직하게 거들었다.눈빛에 짙은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과방에서 막 돌아와 상황을 지켜보던 민우마저 차분했던 평소와 달리 불안함이 감도는 눈빛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순정아, 재정적인 문제라면 우리가 보증금을 올리거나 계약 조건을 조율해도 돼. 편하게 말해줘.”네 남자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깊은 불안감이
[제66화] 마당으로 들어선 불청객평화롭던 하숙집 대문 너머로 낯선 구두 소리가 짤깍거리며 들려온 것은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정오 무렵이었다.마당 툇마루 끝에 앉아 양파를 까던 순정은 흙먼지 날리는 대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정장을 입은 오십대의 사내가 구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마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가 타고 온 차에는 '황금 부동산'이라는 세 글자가 굵게 새겨져 있었다."어이구, 순정 양! 오랜만이야. 안 본 사이에 아주 숙녀가 다 됐네, 제법 여자냄새가 나!"번지르르한 목소리와 미끈거리는 눈빛.전생의 기억 속에서 하숙집을 헐값에 매각하도록 부추겼던 바로 그 부동산업자, 정 사장이었다.그는 하숙집 마당으로 스스럼없이 걸어 들어오며 순정의 차림새를 아래위로 흘끔거렸다.그의 눈빛에는 오랜 세월 부동산판을 구르며 얻은 징그러운 타성과, 어린 여자를 향한 묘한 업신여김이 짙게 깔려 있었다.정 사장은 마당을 빙 둘러보며 기왓장의 금이나 낡은 기둥을 괜히 손가락으로 딱딱 소리가 나게 콕콕 찔러보았다."이 오래된 한옥도 이제 수리비만 계속 나갈 텐데…… 마침 이 일대 재개발 노리는 큰 손이 붙었어. 시세보다 훨씬 잘 쳐줄 테니까 이참에 털고 깔끔하게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게 어때? 돈 챙겨서 편하게 살아야지."순정은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멈추었다. 서늘한 바람이 마당을 지나쳐 가며 툇마루 위로 짙은 그늘을 늘어뜨렸다."필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순정이 단칼에 거절하며 양파 망을 단단히 묶자, 정 사장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허허 웃으며 턱 아래를 긁었다.그의 얼굴에 감도는 비웃음은 한층 더 짙어졌다."에이, 순정 양. 뭘 모르고 이러나 본데…… 이거 사실 할머니 살아계실 적에 나랑 이미 얘기가 어느 정도 끝났던 건이야. 할머니도 이 낡은 집 너한테 짐만 될까 봐 팔고 편하게 살라고 당부하셨다고. 시집갈 밑천이나 마련하라고 말이야. 여자 혼자서 이 큰 집 관리하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정 사장은 혀를 차며 툇마루 근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