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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하숙 놓습니다

Author: popona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6 20:21:45

강태오를 내쫓은 다음 날부터, 순정은 팔을 걷어붙였다.

전생에서 순정이 유일하게 자신 있어 했던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손맛, 하나는 억척스러움.

시장 골목 반찬가게를 하던 시절 갈고닦은 그 손맛과, 삼십 년을 버텨낸 그 억척스러움을 이번 생에는 오롯이 자신을 위해 써먹을 참이었다.

"할머니, 저 이 집으로 하숙 놓을게요."

순정은 마루에 걸린 할머니의 흑백 사진을 향해 중얼거렸다.

사진 속 할머니는 여전히 인심 좋은 얼굴로 웃고 계셨다.

이 집 마당에서 상추를 뜯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이던 그 손, 저녁마다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지나가는 사람도 붙잡아 밥 한 끼 먹이던 그 넉넉함.

순정은 그걸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저도 할머니처럼 해볼게요. 사람들 모이고, 웃음소리 나고, 밥 냄새 나는 집으로 다시 만들어볼거예요."

순정은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 부모님이 바빠 이 집에 맡겨졌을 때, 할머니는 늘 순정의 밥그릇에 고기 한 점을 더 얹어주며 "많이 먹어야 야무지게 큰다"고 하셨다.

그 손맛과 그 마음이, 이제는 순정의 것이 되어 있었다.

일주일 내내 순정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낡은 방 세 개를 도배하고, 삐걱거리는 마루를 손수 사포질했다.

페인트가 벗겨진 대문 기둥에는 새로 파란 페인트를 칠했고, 곰팡이가 슬어 있던 화장실 타일도 하나하나 락스로 닦아냈다.

무거운 원목 상상을 혼자 번쩍 들고 마루로 옮기는데도 허리에서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전생 같으면 파스를 세 장씩 붙이고 한의원으로 뛰어갔을 일이었다.

순정은 짱짱한 제 팔뚝과 허벅지를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어우, 몸이 가벼우니까 노동을 해도 피로가 안 쌓이네!"

팔을 위로 뻗어 도배지를 붙일 때마다 어깨뼈가 시원하게 늘어났다.

전생의 오십대 시절에는 오십견 때문에 팔 한 번 제대로 올리지 못해 끙끙댔고, 조금만 서서 청소를 해도 무릎 뼈마디가 모래알처럼 서걱거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딛는 발걸음마다 탄력이 튀어 오르고 손아귀에는 힘이 팍팍 들어갔다.

오십오 년 살아온 아줌마 짬밥에 스물다섯의 쌩쌩한 통뼈가 합쳐지니, 집 전체를 뒤엎는 대청소마저 일이라기보다 신나는 스트레칭처럼 느껴졌다.

"이래서 젊은 게 보약이라는 거구나."

순정은 신이 나서 빗자루를 틀어잡고 마루 바닥을 쓱쓱 쓸어내렸다.

몸이 안 아프다는 게 이렇게 감사하고 신나는 일일 줄이야.

마른걸레로 마루를 박박 문지르는 손길에 묵은 때가 벗겨지며 나무 윤기가 매끄럽게 돌아왔다.

순정은 이마에 맺힌 땀을 팔통으로 쓱 닦아내며 쾌재를 불렀다.

옆집 부녀회장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순정이 너, 그 몸으로 뭘 그렇게 혼자 다 하려고 그래?"

"저 원래 이런 거 잘해요, 아주머니. 걱정 마세요."

부녀회장 아주머니는 못 미덥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정이 뚝딱뚝딱 못질을 하고 벽지를 바르는 솜씨를 보고는 이내 감탄했다.

"어이구, 손끝 야무진 거 봐라. 어디서 배웠어?"

"그냥 살다 보니 늘었어요."

순정은 씩 웃으며 팔뚝의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사실 이 정도 노동은 전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새벽 파출부 일에, 반찬가게 새벽 장보기에, 남편이 벌여놓은 사고 뒷수습까지 하던 몸이었다.

몸이 아프지 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순정에게는 이 정도 일이 오히려 신이 났다.

부동산에 광고지를 붙이고, 대학가 게시판에도 하숙생을 구한다는 전단을 붙였다.

"밥 잘 나오는 조용한 하숙집, 아침저녁 식사 제공, 방값 상담 가능."

순정이 손수 써 붙인 전단에는 유독 '밥'이라는 글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부동산 사장님은 전단을 훑어보더니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밥보다 방음이 잘 되는 걸 더 따진다"며 웃었지만, 순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밥 잘 먹여 놓으면, 그런 건 다 별거 아니게 돼요."

하숙집 이름도 정했다.

할머니가 생전에 쓰시던 문패를 그대로 살려, "순정 하숙"이라고 나무 팻말에 새겨 대문에 걸었다.

팻말을 거는 순간 순정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전생에는 남을 위해서만 밥을 지었는데, 이번엔 이 밥이 온전히 순정 자신의 것이 될 참이었다.

돈을 벌기 위한 밥이면서, 동시에 순정이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었다.

방을 다 정리한 순정은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순정은 피식 웃었다.

"장부터 봐야겠네."

메뉴는 이미 머릿속에 다 그려져 있었다.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을 만한 매콤한 제육볶음, 국물 시원한 콩나물국, 그리고 손이 많이 가지만 다들 환장하는 갈비찜까지.

반찬가게를 하던 시절 순정이 늘 되뇌던 원칙이 있었다.

재료를 아끼면 손님이 알아채고, 정성을 아끼면 손님이 떠난다. 순정은 그 원칙을 이 하숙집에도 그대로 적용할 셈이었다.

시장에 나간 순정은 오랜만에 콧노래가 나왔다.

배추며 무며, 국거리 고기며, 예전 반찬가게 시절처럼 눈대중으로 신선한 것들을 골라 담았다.

상인들이 "새댁, 오늘 장 크게 보네" 하고 인사를 건네면, 순정은 능청스럽게 "곧 밥 많이 먹는 사람들이 여럿 들어올 예정이라서요"라며 웃어 보였다.

생선 좌판 아주머니는 순정의 손끝을 보고 "손맛 좀 아는 손이네" 하며 넉넉하게 덤을 얹어주었다.

순정은 그 말이 괜히 반가워서, 오는 길 내내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순정은 첫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며 마당을 쓸었다.

대문 옆에는 "하숙생 구함" 전단이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었다.

순정은 빗자루를 세워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번 생에서는 또 어떤 인연들이 이 대문을 넘어올지.

그리고 사흘 뒤, 대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저기…… 하숙집이 여기 맞나요?"

순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대문 앞에 서 있는 건, 얼굴이 반쯤 흙빛이 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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