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도경이 순정의 손바닥에 이마를 얹은 채 나지막한 숨을 고르던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방 안을 채운 고요함은 묵직했다.도경이 “이제 됐다. 들어가 자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을 때, 순정은 약간 멋쩍은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왔다.제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지난밤 열이 올라 무던하게 체중을 실어 오던 도경의 행동이 괜히 머쓱하고 민망하게 잔상으로 남았다.식구들 챙기며 사는 게 익숙한 삶이었고 도경을 그저 남동생처럼 여겨왔건만, 제 손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숨을 내쉬던 도경의 행동은 다 큰 녀석치고 어리광이 심했다 싶어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간지럽고 어색했다.순정은 몸을 뒤척이길 반복하다 고개를 저으며 겨우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 하숙집은 중간고사 주간 특유의 어수선함으로 채워져 있었다.대학교 중간고사는 과목마다 시험 시간도, 제출 마감도 제각각이라 식구들의 아침 동선 역시 제각기 달랐다.순정은 일찍부터 주방으로 나와 각자 다른 시간에 학교로 출발할 식구들을 떠올리며 커다란 유리병에 담긴 노란 유자청을 꺼냈다.뚜껑을 열자 달콤하고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가을 아침의 차가운 주방 공기를 환하게 채웠다."아, 망했다! 오늘 오전 내내 빽빽하게 시험 연달아 있는데 요약 노트를 어디다 뒀더라!"가장 먼저 주방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의대 본과 2학년 민우였다.의대는 시험 스케줄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탓에 아침 일찍부터 시험이 잡혀 있었다.두꺼운 의학 전공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안경을 고쳐 쓰던 민우가, 주방 테이블에 차려진 유자차를 보고 반갑게 다가왔다."순정아, 이거 유자차야? 나 오늘 아침부터 3연속 시험이라 정신 하나도 없는데 진짜 고맙다!"순정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온 텀블러에 유자차를 넉넉히 담아 건네자, 민우는 그걸 챙기며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역시 네가 최고다! 잘 보고 올게!"민우가 전공책을 들쳐메고 대문 밖으로 급히 뛰어 나가자, 주방은 다시 조용해졌다.뒤이어 나온 체대생 태성이는 민우와 달리 훨씬 여
모두가 잠든 새벽 3시. 10월 중간고사와 과제 폭풍이 소리 없이 하숙집의 정적을 덮치고 있었다.주방에서 내일 아침에 요리할 식재료를 미리 손질해 두고, 식기대를 깔끔히 정돈해 둔 순정은 방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하지만 마당 건너편 도경의 방 창문으로는 여전히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열린 문틈 사이로 슥슥 도면을 문지르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순정은, 김이 다복하게 올라오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타서 들고 도경의 방 문앞으로 다가갔다."도경아, 아직 안 자?"문고리를 손끝으로 살짝 두드리자, 안에서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낮고 피곤에 젖은 목소리가 돌아왔다."……들어와."순정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안은 마치 건축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평소 늘 깨끗하고 단정하던 방은 간이 도판과 두꺼운 전공 서적, 구겨진 도면 종이들로 어지럽혀져 있었고, 바닥 구석에는 낮에 정리대를 만들다 남은 자작나무 톱밥 가루가 하얗게 가라앉아 있었다.평소 서늘할 정도로 정갈하던 도경은 맨투맨 소매를 팔꿈치까지 막 올려붙인 채, 붉어진 눈으로 도판 위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늘 빗어 넘기던 머리카락은 까치집이 진 채 이마를 덮고 있었고, 짙은 눈썹 사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커피 좀 마셔. 밤새 과제 하느라 졸리고 힘들지?"순정이 도면 옆, 겨우 비어 있는 책상 모퉁이에 컵을 내려놓자, 쌉싸름한 커피 향이 방 안의 자작나무 향과 섞여 아득하게 퍼졌다.도경은 안경을 슬쩍 벗어 던지며 피곤한 듯 마른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지그시 쓸어내렸다."고맙다."늘 묵직하고 어른스럽게 중심을 잡던 도경이, 이 새벽만큼은 온몸으로 피로를 드러내며 무방비하게 누그러져 있었다.순정은 제법 안쓰러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도경의 넓은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너 아침부터 사포질하고 도면 그리느라 쉬지도 못했잖아.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하지 그래?"그 순간이었다.순정이 어깨를 감싸려던 손을 거두려 하자, 도경의 길고 커다란 손이 순정의
이현이가 방으로 들어간 후에도 마당에는 은은한 훈기가 감돌았다.순정은 품에 안긴 선물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결이 고운 포장 속 딥 그린 가죽 지갑과 앤티크 머리핀. 장을 볼 때나 요리를 할 때 제 모습을 유심히 담아두었을 마음이 고마워 가슴이 아릿해졌다.이전 삶에서 아줌마로 긴 세월을 살며 남을 챙기고 희생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순정에게, 젊고 잘생긴 하숙집 남동생들이 자신을 '여자'로 의식하거나 좋아할 거라는 감각 따위는 아득히 먼 이야기였다.별 거 아닌 작은 호의들에 크게 고마워하며, 다정한 동생이 누나에게 표현한 순수한 정성이라 믿을 뿐이었다.순정은 밤샘 각색 작업에 들어간 이현이가 쓰러지지 않도록 주방에서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을 정성껏 타서 이현의 방 문 앞에 살포시 놓아두었다.그러고는 식힐 겸 조용히 마당으로 걸어나왔다.어느덧 깊어진 10월의 가을밤 공기가 차갑게 뺨에 닿았다.이현이 들어간 마당에 홀로 서 있던 순정은 차가운 바람에 어깨를 한번 추스르며 담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 마당 구석 툇마루 그늘 밑에서 나지막한 ‘냐아옹-’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언제 나왔는지 도경의 방 문이 살짝 열려 있고, 마당 구석 담장 밑에 편안한 회색 맨투맨 차림의 한도경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그 앞에는 노란 길고양이 알밤이가 정체 모를 나무 급식대에 머리를 박고 정신없이 간식을 먹는 중이었다.순정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그 급식대는 아침에 자신이 받은 양념통 정리대와 똑같은 자작나무 잔재로 만들어진 것이었다.모서리가 완벽하게 사포질되어 매끄러웠고, 한쪽 구석에는 자그마한 고양이 발바닥 문양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순정이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도경은 알밤이가 간식을 비워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알밤이가 기분이 좋은지 도경의 바짓단에 머리를 마구 비벼대며 골골대자, 도경이 피곤한 듯 손으로 턱을 스윽 쓸어내리며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순정이 애들 수발드느라 고생하는데,
아침 식탁 위에 한도경이 무심하게 툭 던져두고 간 정리대를 주방 싱크대 모퉁이에 딱 맞게 올려놓은 순정은, 손끝으로 부드러운 표면을 문지르며 흐뭇하면서도 묘하게 얼떨떨한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어젯밤 민우가 안경을 벗은 무방비한 얼굴로 툭 던진 데이트 신청(?) 아닌 신청, 오늘 새벽 태성이 땀에 젖은 채 어깨에 머리를 내맡기던 살가운 어리광, 그리고 키 작은 순정을 위해 밤새 칼질을 해서 선물해 준 도경의 무심한 세심함까지.전생에 아줌마로 오랜 세월을 보내며 이런 대접이라곤 받아본 적도 없던 순정은, 청년들이 몰아치듯 안겨주는 과분한 챙김에 온종일 머릿속이 숭숭 뚫린 듯 얼떨떨했다.‘나는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우리집애들은 너무 정이많아. 고맙기는 한데 묘하게 쑥스럽단 말이지.’’해 질 녘이 되자, 대문이 열리며 묵직하면서도 정갈한 구두 소리가 마당의 정적을 깨뜨렸다.“어? 이현아!”순정이 고개를 들었다가 순간 숨을 헉 들이켰다. 손에 들고 있던 양념병을 놓칠 뻔할 정도로 파격적인 변신이었다.평소 하숙집 마루를 유령처럼 기어 다니던, 물 빠진 헐렁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퀭한 이현이 아니었다.투명할 정도로 창백하고 하얀 피부 위로,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차콜색 슈트가 군살 하나 없는 슬림하고 기다란 체형을 완벽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평소 무심하게 내리고 다니던 앞머리를 단정하게 넘겨 올리자, 감춰져 있던 선 굵은 콧날과 짙은 눈썹, 날카로운 턱선이 시원하게 드러났다.특히 며칠 밤을 새운 탓에 눈 밑에 잔잔하게 깔린 옅은 다크서클은, 단정한 슈트 착장과 대비되며 오히려 이현 특유의 퇴폐적인 아우라를 극대화하고 있었다.“다녀왔습니다, 순정 누나.”강이현이 나른한 눈빛으로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목소리에는 그 특유의 능글맞으면서도 다정한 억양이 묻어났다.“너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근사해?”“드라마 제작사 대표님이랑 메인 작가님 만나는 미팅이 있었거든요. 어젯밤에 형들 족발 사주고 들어가서 새벽까지 각색안 수정
태성이가 샤워실로 달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에는 밤을 지새운 식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안경을 고쳐 쓴 민우였다.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민우는 순정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어색한 듯 기침을 한 번 '흠흠' 하고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민우야, 국 따뜻할 때 먹어.""어…… 어, 고맙다."순정이 내어주는 국그릇을 받아 들며 민우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지난밤의 무방비했던 데이트 신청의 여운이 두 사람 사이에 묘하게 감돌고 있었다.뒤이어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성이 머리를 털며 주방으로 들어섰다."와! 누나, 진짜 살 것 같아요! 아침에 누나가 어깨 안 빌려줬으면 나 오늘 훈련하다 기절했을지도 몰라요."태성이 특유의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민우 옆에 털썩 앉아 밥공기를 집어 들었다.민우가 숟가락을 들다 말고 태성을 흘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너 또 아침부터 순정이한테 치댔냐?""형은 몰라도 돼요!"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아 한창 숟가락질을 시작할 무렵, 마루 건너편 도경의 방 문이 드르륵 열렸다.밤새 모형 작업과 과제 크리틱 준비를 마친 도경이 피곤이 덜 풀린 얼굴로 주방에 들어섰다.도경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여전히 사포 가루와 본드 자국이 살짝 남아 있었다.도경은 식탁에 앉기 전, 품에 안고 있던 보자기 싸개 같은 것을 순정 쪽 식탁 구석에 툭 내던지듯 놓았다."어? 도경아, 이게 뭐야?"순정이 찌개 국자를 들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보자, 도경은 무심하게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숟가락을 챙겼다."보면 몰라? 주방 정리대."순정이 보자기를 풀어내자, 안에서 하얗고 매끄러운 아크릴과 자작나무 합판을 정교하게 결합해 만든 2단 양념통 정리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기성품이 아니었다. 하숙집 주방 싱크대 모퉁이의 좁은 홈 크기에 완벽하게 딱 맞아떨어지도록 맞춤 제작된, 도경의 세심한 설계 물건이었다."이걸…… 네가 직접 만든 거야?"순정이 감탄하며 정리대를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모서리
새벽녘의 서리 친 가을 바람이 마당을 쓸고 지나갈 때쯤, 하숙집은 가장 차갑고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어젯밤 이현이 사준 족발 상자의 잔해는 이미 깨끗이 치워졌고, 민우와 도경도 각자의 방에서 가을 밤을 하얗게 지새운 뒤였다.하지만 선발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체대생 태성의 하루는 남들보다 훨씬 일찍 시작됐다.새벽 5시 반, 태성은 이미 트레이닝복을 갖쳐 입고 마당으로 나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씽, 씽, 씽' 소리를 내며 줄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조용한 하숙집에 울려 퍼졌다.유도 전공인 태성에게 이번 시기는 그야말로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때였다.오전과 오후에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대비한 피 터지는 실기 훈련과 대련이 기다리고 있었고, 저녁에는 하숙집으로 돌아와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가며 중간고사 이론 문제집을 붙잡아야 했기 때문이다."후…… 후……."어깨너머로 가쁜 숨을 내쉬던 태성이 줄넘기를 거두고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태성의 온몸에서는 따끈한 열기와 함께 땀 냄새가 풍겨 나왔다.단단한 근육이 잡힌 등줄기가 거칠게 위아래로 꿈틀거렸다.그때, 주방 문이 드르륵 열리며 아침거리 재료를 확인하러 나온 순정이 모습을 드러냈다.순정은 툇마루에서 거친 숨을 내쉬는 태성을 보고 깜짝 놀라 다가갔다."어머 태성아! 이 새벽부터 훈련하고 온 거야? 날도 차거운데 땀 그렇게 흘리고 서 있으면 감기 걸려."순정이 얼른 주방에서 따뜻한 타월을 가져와 태성의 어깨에 둘러주었다.태성은 어깨에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들어 순정을 바라보았다.땀에 젖어 이마에 착 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어진 얼굴과 피로가 그득한 눈동자가 드러났다."누나……."태성이 멍한 눈으로 순정을 부르더니, 별안간 툇마루에 서 있는 순정의 허리춤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그리고는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순정의 어깨와 가슴팍 쪽에 큼지막한 머리를 덥석 얹어버렸다."어, 어?"태성의 갑작스러운 밀착이 이어지자 순정이 당황해 굳어버렸다.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