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현이가 방으로 들어간 후에도 마당에는 은은한 훈기가 감돌았다.순정은 품에 안긴 선물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결이 고운 포장 속 딥 그린 가죽 지갑과 앤티크 머리핀. 장을 볼 때나 요리를 할 때 제 모습을 유심히 담아두었을 마음이 고마워 가슴이 아릿해졌다.이전 삶에서 아줌마로 긴 세월을 살며 남을 챙기고 희생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순정에게, 젊고 잘생긴 하숙집 남동생들이 자신을 '여자'로 의식하거나 좋아할 거라는 감각 따위는 아득히 먼 이야기였다.별 거 아닌 작은 호의들에 크게 고마워하며, 다정한 동생이 누나에게 표현한 순수한 정성이라 믿을 뿐이었다.순정은 밤샘 각색 작업에 들어간 이현이가 쓰러지지 않도록 주방에서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을 정성껏 타서 이현의 방 문 앞에 살포시 놓아두었다.그러고는 식힐 겸 조용히 마당으로 걸어나왔다.어느덧 깊어진 10월의 가을밤 공기가 차갑게 뺨에 닿았다.이현이 들어간 마당에 홀로 서 있던 순정은 차가운 바람에 어깨를 한번 추스르며 담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 마당 구석 툇마루 그늘 밑에서 나지막한 ‘냐아옹-’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언제 나왔는지 도경의 방 문이 살짝 열려 있고, 마당 구석 담장 밑에 편안한 회색 맨투맨 차림의 한도경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그 앞에는 노란 길고양이 알밤이가 정체 모를 나무 급식대에 머리를 박고 정신없이 간식을 먹는 중이었다.순정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그 급식대는 아침에 자신이 받은 양념통 정리대와 똑같은 자작나무 잔재로 만들어진 것이었다.모서리가 완벽하게 사포질되어 매끄러웠고, 한쪽 구석에는 자그마한 고양이 발바닥 문양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순정이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도경은 알밤이가 간식을 비워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알밤이가 기분이 좋은지 도경의 바짓단에 머리를 마구 비벼대며 골골대자, 도경이 피곤한 듯 손으로 턱을 스윽 쓸어내리며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순정이 애들 수발드느라 고생하는데,
아침 식탁 위에 한도경이 무심하게 툭 던져두고 간 정리대를 주방 싱크대 모퉁이에 딱 맞게 올려놓은 순정은, 손끝으로 부드러운 표면을 문지르며 흐뭇하면서도 묘하게 얼떨떨한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어젯밤 민우가 안경을 벗은 무방비한 얼굴로 툭 던진 데이트 신청(?) 아닌 신청, 오늘 새벽 태성이 땀에 젖은 채 어깨에 머리를 내맡기던 살가운 어리광, 그리고 키 작은 순정을 위해 밤새 칼질을 해서 선물해 준 도경의 무심한 세심함까지.전생에 아줌마로 오랜 세월을 보내며 이런 대접이라곤 받아본 적도 없던 순정은, 청년들이 몰아치듯 안겨주는 과분한 챙김에 온종일 머릿속이 숭숭 뚫린 듯 얼떨떨했다.‘나는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우리집애들은 너무 정이많아. 고맙기는 한데 묘하게 쑥스럽단 말이지.’’해 질 녘이 되자, 대문이 열리며 묵직하면서도 정갈한 구두 소리가 마당의 정적을 깨뜨렸다.“어? 이현아!”순정이 고개를 들었다가 순간 숨을 헉 들이켰다. 손에 들고 있던 양념병을 놓칠 뻔할 정도로 파격적인 변신이었다.평소 하숙집 마루를 유령처럼 기어 다니던, 물 빠진 헐렁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퀭한 이현이 아니었다.투명할 정도로 창백하고 하얀 피부 위로,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차콜색 슈트가 군살 하나 없는 슬림하고 기다란 체형을 완벽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평소 무심하게 내리고 다니던 앞머리를 단정하게 넘겨 올리자, 감춰져 있던 선 굵은 콧날과 짙은 눈썹, 날카로운 턱선이 시원하게 드러났다.특히 며칠 밤을 새운 탓에 눈 밑에 잔잔하게 깔린 옅은 다크서클은, 단정한 슈트 착장과 대비되며 오히려 이현 특유의 퇴폐적인 아우라를 극대화하고 있었다.“다녀왔습니다, 순정 누나.”강이현이 나른한 눈빛으로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목소리에는 그 특유의 능글맞으면서도 다정한 억양이 묻어났다.“너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근사해?”“드라마 제작사 대표님이랑 메인 작가님 만나는 미팅이 있었거든요. 어젯밤에 형들 족발 사주고 들어가서 새벽까지 각색안 수정
태성이가 샤워실로 달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에는 밤을 지새운 식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안경을 고쳐 쓴 민우였다.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민우는 순정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어색한 듯 기침을 한 번 '흠흠' 하고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민우야, 국 따뜻할 때 먹어.""어…… 어, 고맙다."순정이 내어주는 국그릇을 받아 들며 민우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지난밤의 무방비했던 데이트 신청의 여운이 두 사람 사이에 묘하게 감돌고 있었다.뒤이어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성이 머리를 털며 주방으로 들어섰다."와! 누나, 진짜 살 것 같아요! 아침에 누나가 어깨 안 빌려줬으면 나 오늘 훈련하다 기절했을지도 몰라요."태성이 특유의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민우 옆에 털썩 앉아 밥공기를 집어 들었다.민우가 숟가락을 들다 말고 태성을 흘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너 또 아침부터 순정이한테 치댔냐?""형은 몰라도 돼요!"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아 한창 숟가락질을 시작할 무렵, 마루 건너편 도경의 방 문이 드르륵 열렸다.밤새 모형 작업과 과제 크리틱 준비를 마친 도경이 피곤이 덜 풀린 얼굴로 주방에 들어섰다.도경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여전히 사포 가루와 본드 자국이 살짝 남아 있었다.도경은 식탁에 앉기 전, 품에 안고 있던 보자기 싸개 같은 것을 순정 쪽 식탁 구석에 툭 내던지듯 놓았다."어? 도경아, 이게 뭐야?"순정이 찌개 국자를 들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보자, 도경은 무심하게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숟가락을 챙겼다."보면 몰라? 주방 정리대."순정이 보자기를 풀어내자, 안에서 하얗고 매끄러운 아크릴과 자작나무 합판을 정교하게 결합해 만든 2단 양념통 정리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기성품이 아니었다. 하숙집 주방 싱크대 모퉁이의 좁은 홈 크기에 완벽하게 딱 맞아떨어지도록 맞춤 제작된, 도경의 세심한 설계 물건이었다."이걸…… 네가 직접 만든 거야?"순정이 감탄하며 정리대를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모서리
새벽녘의 서리 친 가을 바람이 마당을 쓸고 지나갈 때쯤, 하숙집은 가장 차갑고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어젯밤 이현이 사준 족발 상자의 잔해는 이미 깨끗이 치워졌고, 민우와 도경도 각자의 방에서 가을 밤을 하얗게 지새운 뒤였다.하지만 선발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체대생 태성의 하루는 남들보다 훨씬 일찍 시작됐다.새벽 5시 반, 태성은 이미 트레이닝복을 갖쳐 입고 마당으로 나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씽, 씽, 씽' 소리를 내며 줄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조용한 하숙집에 울려 퍼졌다.유도 전공인 태성에게 이번 시기는 그야말로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때였다.오전과 오후에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대비한 피 터지는 실기 훈련과 대련이 기다리고 있었고, 저녁에는 하숙집으로 돌아와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가며 중간고사 이론 문제집을 붙잡아야 했기 때문이다."후…… 후……."어깨너머로 가쁜 숨을 내쉬던 태성이 줄넘기를 거두고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태성의 온몸에서는 따끈한 열기와 함께 땀 냄새가 풍겨 나왔다.단단한 근육이 잡힌 등줄기가 거칠게 위아래로 꿈틀거렸다.그때, 주방 문이 드르륵 열리며 아침거리 재료를 확인하러 나온 순정이 모습을 드러냈다.순정은 툇마루에서 거친 숨을 내쉬는 태성을 보고 깜짝 놀라 다가갔다."어머 태성아! 이 새벽부터 훈련하고 온 거야? 날도 차거운데 땀 그렇게 흘리고 서 있으면 감기 걸려."순정이 얼른 주방에서 따뜻한 타월을 가져와 태성의 어깨에 둘러주었다.태성은 어깨에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들어 순정을 바라보았다.땀에 젖어 이마에 착 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어진 얼굴과 피로가 그득한 눈동자가 드러났다."누나……."태성이 멍한 눈으로 순정을 부르더니, 별안간 툇마루에 서 있는 순정의 허리춤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그리고는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순정의 어깨와 가슴팍 쪽에 큼지막한 머리를 덥석 얹어버렸다."어, 어?"태성의 갑작스러운 밀착이 이어지자 순정이 당황해 굳어버렸다.태성
10월 중순의 밤은 깊어갈수록 차가워졌다.하숙집 마당을 둘러싼 담벼락 위로 가을 서리가 살포시 내앉을 무렵, 민우의 방은 여전히 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다.의대 본과 2학년의 중간고사는 말 그대로 피 말리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심혈관계 질환의 기전과 임상 양상', '약물 작용 기전과 부작용'. 이름만 들어도 아득해지는 단어들이 사방 1미터짜리 작은 책상 위에 사태처럼 쏟아져 있었다.민우는 며칠째 제대로 누워보지도 못한 채, 책상 앞에 꽂꽂이 앉아 두꺼운 전공 서적과 씨름하고 있었다.새벽 2시 반. 민우는 뻑뻑해진 눈을 감으며 쓰고 있던 도수 높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안경을 벗자 샤프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던 평소의 인상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긴 속눈썹 아래로 피로가 짙게 깔린 눈매와 조금은 무방비해진 표정이 나타났다.늘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던 의대생 한민우의 패기 뒤에 숨겨진 20대 청년의 피곤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민우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타들어 가듯 바짝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마침 주방에는 순정이 툇마루 쪽 문을 살짝 열어둔 채 가을 밤공기를 쐬며 멸치 육수를 우려내고 있었다.시험기간 동안 제대로 밥도 못 먹고 밤을 새우는 하숙집 식구들이 아침에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국을 끓여두려는 참이었다."어, 민우야. 아직 안 잤어?"순정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 뚜껑을 닫으며 뒤를 돌아보았다.민우는 안경을 쓰지 않아 형체가 살짝 뭉개져 보이는 순정을 향해 걸어왔다.평소라면 차분하고 각 잡힌 걸음걸이었겠지만, 지금은 며칠 동안 쌓인 피로 때문에 조금 비틀거리는 듯 걸음이 어설펐다."어…… 순정아. 너 왜 안 자고 있어?"민우가 잠에 취한 듯 나지막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안경을 벗은 민우의 눈동자가 순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점이 살짝 풀린 듯하면서도 묘하게 깊은 눈빛이었다."내일 아침에 먹을 국 좀 끓이느라. 너 눈이 왜 그래? 안경은 어디 두고 나
대문 밖 가로수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선선한 가을 바람이 마당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마루 끝 제일 명당에 식빵을 굽고 앉아 있던 고양이 알밤이가 귀를 쫑긋거렸다.가문의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하숙집에는 평화가 찾아온 듯 싶었지만, 그 평화는 한가함과는 거리가 먼 종류의 것이었다.이 작고 낡은 하숙집에 '중간고사'라는 또 다른 종류의 전쟁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평소 시끌벅적하던 하숙집 마당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진 것은 지난주부터였다.세 명의 대학생과 한 명의 웹툰 작가, 그리고 집안일을 맡은 순정까지. 하숙집의 시계는 전혀 다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아…… 심혈관계 기전 파트 여기서부터 어디까지냐……."새벽 1시, 주방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온 민우의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의대 본과 2학년의 중간고사는 말 그대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수준이었다.벽돌보다 두꺼운 전공책 세 권에, 강의 자료와 필기 노트가 방 안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단순히 단어를 외우는 수준이 아니라 질환의 기전과 진단, 치료 방식까지 머릿속에서 하나의 체계로 연결해야 했기에 민우는 며칠째 잠다운 잠을 자지 못했다.민우가 멍한 눈으로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을 받아 마시고 있을 때, 마루 건너편 방 문이 스르륵 열리며 도경이 들어왔다.도경의 손과 팔뚝에는 우드락 본드와 자른 스티로폼 가루, 아크릴 가루가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시험공부도 공부지만, 당장 다음 날 아침 제출해야 하는 설계 과제 모형과 크리틱 준비 때문에 도경은 셋 중 가장 늦게까지 작업하는 사람이었다."순정아, 찬물 좀 더 있냐?"도경이 주방으로 걸어 들어오며 무심하게 물었다.그러나 정수기 앞에 서 있는 건 순정이 아니라 퀭한 눈의 민우였다."나다. 순정이는 벌써 자러 들어갔어.""아, 민우냐. 눈이 아주 핏빛이네. 공부 많이 했냐?""말도 마라. 전공책 페이지 넘어갈 때마다 내 수명도 같이 넘어가는 기분이다."도경이 건조하게 실소를 터뜨리며 컵에 맹물을 채웠다.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