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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Aвтор: 차차
잠에서 깬 심유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당황한 상태에서도 그곳이 어딘지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지난번 그녀가 “운 좋게” 하룻밤 묵었던 8888호 방이었다.

충격과 공포에 쏟아지던 잠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유진이 이불을 슬쩍 들어보았다.

이불 아래 있는 자신의 몸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만큼 처참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어제 그녀가 입고 있었던 옷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호텔 VIP 고객을 위해 준비된 실크 가운이 걸쳐져 있었다.

목 위로 두텁게 몇 번이나 덧발랐던 화장도 사라지고 그 대신 얼룩덜룩한 검붉은 색 키스마크가 남아있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감히 기억을 찾을 용기도 없었다.

2미터 침대에 현재 그녀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베개도 정갈하게 침대 머리에 놓여 있었다. 방금 그녀가 어지럽힌 이불을 제외하고 주름 하나 없을 정도였다.

심유진은 허태준이 잠을 자고 깨나서 나간 건지, 아니면 이곳에서 자질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희망 대로 후자가 맞았으면 좋겠지만.

욕실 문은 열려있었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빨래 바구니에는 옷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위에는 허태준의 옷이 있었고 아래에는 그녀의 옷이 깔려있었다.

두 사람의 옷이 한데 엉켜 어쩐지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심유진은 곧바로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입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녀는 간단히 씻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허태준의 옷을 입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막 옷장을 열었을 때 누군가에 의해 방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심유진이 옷장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옷장 문이 몇 번이나 열렸다 닫았다 하더니 겨우 닫혔다.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허태준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간단한 캐주얼 차림이었고 머리도 자연스럽게 흐트러져있었다.

심유진이 침대 옆에 서있는 모습을 본 그는 약간 놀랐지만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걸로 표현했다.

“깼으면 옷 갈아입어.”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침대에 던졌다.

“여형민이 당신한테 할 말이 있대.”

그 말만 하고 그는 더 머무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쇼핑백을 열어보니 안에는 온통 여자 옷이었다. 속옷만 해도 3 세트나 있었다. 부끄러움에 그녀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허태준의 무덤덤한 모습을 보니 분명 그가 직접 가서 산 옷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어떤 옷인지 본적도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옷을 산 사람이 상남자인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쇼핑백 안에는 속옷을 제외하고 온통 핑크 색인 원피스 몇 벌밖에 없었다. 거기다 레이스까지 잔뜩 달려있었는데 남자가 봤을 때 여리여리한 그런 옷들뿐이었다.

이십몇 년 전 심유진이 아직 초등학생일 때에는 이런 옷들을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물론 그녀한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심유진은 그중에서 그나마 가장 무난해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고 가방에서 항상 갖고 다니는 파우더를 꺼내 휑한 목에 발랐다. 어떻게든 키스마크를 가릴 마음으로.

허태준과 여형민은 거실에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소파의 양쪽 끝에 앉아있었다.

“여 변호사님, 허 대표님.”

그녀가 먼저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순간 여형민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풋!”

그가 주먹을 꽉 쥐고 입을 가렸다.

“그 원피스……”

그는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심유진은 괴로운 표정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고개를 숙여 긴 머리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여형민은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이었다.

“예쁘네요.”

심유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허태준이 물었다.

“안 예뻐?”

그의 시선을 느낀 심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허태준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왠지 언짢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예뻐요.”

그제야 허태준의 얼굴이 펴졌다.

“심 매니저님 여기 앉으세요.”

여형민이 자기 옆의 빈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자리는 그와 허태준의 중간 자리였다. 심유진은 조금 의아했다.

“앉아.”

허태준이 입을 열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심 매니저님 자리가 좀 좁아서 그러는데 저쪽으로 조금만 가주시겠어요?”

여형민이 진지하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심유진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그 소파는 마침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소파였는데 원래 그녀가 정중앙에 앉으면 아무하고도 부딪힐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한쪽으로 자리를 옮기니 허태준과 꼭 붙어앉게 되었다.

그녀는 허태준이 사람과 몸이 닿는 것조차 싫어한다 했던 여형민의 말이 떠올라 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허 대표님. 역시 저는 저쪽에 가서 앉을게요.”

그녀가 옆에 놓인 일인용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그녀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허태준에 의해 막혀버렸다.

“그냥 여기 앉아.”

그의 말투는 덤덤했고 아무런 표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보아낼 수 있었다.

오히려 이제 심유진이 안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팔을 들어 허태준과 살짝 틈을 벌렸다.

그녀의 작은 행동을 힐끗 본 허태준의 눈이 싸늘해졌다.

심유진이 여형민한테 물었다.

“여 변호사님 저를 찾으셨다고요?”

여형민이 “네” 하고 짧게 답했다.

“제가 매니저님 전 남편한테 연락해서 그가 초안을 작성한 《이혼 협의서》와 매니저님 사인이 있는 《주택 증여 계약서》를 받았습니다. 계약서는 전문 기구에 보내 감정을 의뢰했고요.”

심유진은 여형민의 작업 추진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네?”

그녀가 놀라 되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하죠?”

“제가 매니저님 전 남편 명의 하에 있는 재산을 찾아봤는데 현재 그한테는 2백만원 정도밖에 없더라고요. 자기 수중에 있던 주식도 몇 달 전에 전부 팔아치웠어요.”

여형민의 얼굴이 몹시 진지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심유진이 무의식적으로 부정했다.

조건웅한테 현금이 얼마 없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자신의 돈을 전부 주식에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주식 시장이 크게 뒤흔들릴 때 그도 적지 않게 손해를 보았었다. 하지만 그래도 수중에 2백만원 밖에 없을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주식에 투자한 총 금액이 2억은 넘는다고 했었다.

“제가 매니저님 이름으로 법원에 그의 재산 동결 신청을 넣었지만 이미 늦었어요. 큰 소용은 없을 겁니다.”

여형민이 솔직하게 말했다.

‘분노’라는 단어는 이제 심유진의 심정을 다 표현해 내기 부족할 정도였다.

지금 당장 그녀의 눈앞에 조건웅이 있었다면 자신의 이미지가 추락할지언정 지체 없이 그를 때렸을 것이다.

“이제 저는 그저 두 손 놓고 손해 볼 일밖에 없는 건가요?”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조건웅은 돈이 없으니 그의 몫은 고사하고 자신의 몫까지 그에게 넘겨야 할 상황이었다.

참으로 치밀한 계략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여형민이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전 남편이 재산을 빼돌린 건 명확한 사실입니다. 고소하면 됩니다. 승산도 크고요. 이미 제가 사람을 시켜 증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저희는 그가 빼돌린 돈을 전부 빼앗아 오고 그를 감방에 보내 꽤나 뜻깊은 교훈까지 줄 수 있죠.”

그의 말에 심유진의 불안이 싹 사라졌다.

“제가 어떻게 협조하면 되나요?”

그녀가 물었다.

“아무것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형민이 말했다.

“저희는 최대한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괜히 움직였다가 그들의 경계심을 키워 증거를 없앨 기회를 주면 안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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