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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Author: 차차
“예를 들어……”

여형민이 교활하게 씩 웃으며 허태준 쪽을 힐끗 보았다.

“여기 있는 허 대표와 잘 지내봐요. 허 대표한테 뒤에서 그 인간들이 골탕 먹게 힘 좀 써달라고 해요.”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하늘 높이 치솟던 심유진의 기대가 바늘에 콕 찍힌 듯이 펑 하고 터져버렸다.

“그건……”

그녀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고고하게 있는 허태준을 몰래 힐끔거렸다.

“역시 허 대표님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죠.”

그때 허태준이 입을 열었다.

“왜? 나 같은 건 쓸모없나?”

그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유진이 서둘러 해명했다.

“절대 아닙니다. 공사 다망한 허 대표님한테 어떻게 이런 작은 일로 폐를 끼치겠어요? 더군다나 저와 대표님은 안지도 며칠 안 됐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말한 부분 어디에서 허태준의 역린을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허태준이 한 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의 눈빛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그렇게 작은 일이 나한테 폐를 끼칠 수나 있겠어? 하지만……”

갑자기 그가 화제를 돌렸다.

“어제 심 매니저가 나를 도왔으니 나도 응당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면 당신이 한번 말해 봐.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는지.”

“괜찮습니다.”

심유진이 주저 않고 그를 거절했다.

“대표님께서는 오늘 아침에도 이미 저를 크게 도우셨습니다. 그걸로 계산 끝내죠. 이제 서로 빚진 건 없습니다.”

허태준은 여전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이었다.

“잘 생각해 봐 심 매니저. 이런 기회는 다음에 오지 않아.”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심유진이 답했다.

“충분히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

허태준이 그녀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옮기고 와인잔을 들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젖히자 검붉은 색 액체가 잔을 타고 그의 입안으로 흘러들어갔다.

꿀꺽.

그의 목젖이 꿀렁거렸다.

심유진은 그저 생각 없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허태준의 완벽한 옆선과 무심히 흘러나오는 퇴폐적인 섹시미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왠지 목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심지어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침을 꿀꺽 삼키기까지 했다.

그녀의 추태를 허태준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앞에 있던 여형민은 똑똑히 보았다.

“심 매니저님이 보기에는 우리 허 대표 잘 생겼습니까?”

그의 돌발 질문에 넋을 놓고 바라보던 심유진이 화들짝 놀랐다.

“네?”

그녀가 서둘러 자신의 표정을 감추며 애써 침착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여형민이 다시 한번 묻자 허태준도 고개를 돌렸다.

심유진은 적당히 둘러댈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겼습니다.”

이 정도 말은 양심에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형민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면 매니저님은 허 대표 같은 스타일 좋아해요?”

그 물음에 심유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허태준의 얼굴을 좋아하기는 했다. 하지만…… 얼굴 만이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아리송한 답변을 했다.

“허 대표님과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럼 그쪽은?”

이번에 말을 꺼낸 사람은 여형민이 아니라 허태준 본인이었다.

심유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저도 좋아합니다.”

양심 따위, 어디 직업보다 중요할까.

그녀의 말이 그저 인사치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허태준은 그녀의 답에 기뻤다.

“심 매니저가 그렇게 나를 좋아한다니……”

그가 웨이터를 불렀다.

“같은 와인으로 한 병 더 주세요.”

그의 행동에 심유진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하기에 너무 늦은 걸까?

**

이미 뱉은 말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현재 심유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열심히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다. 많이 마셔야 그나마 덜 손해 본다.

그 결과 그녀는 고주망태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유진은 술 버릇이 좋았다. 취해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풀린 눈으로 자기 자리에 꿈쩍 않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여형민이 그녀를 불렀다.

“심 매니저님?”

그녀는 2분 정도 있다가 “네” 하고 답했다. 말꼬리가 제법 길었고 톤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목에 힘이 빠졌는지 머리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져있었는데 누가 봤으면 일부러 귀여운척하는가 싶을 정도였다.

여형민이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허태준을 놀리기 시작했다.

“지금 너희 집 유진이 모습, 아주 범죄를 유발할 정돈데.”

허태준이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고 대꾸하지 않았다.

여형민이 코를 만지며 눈치 있게 입을 다물었다.

심유진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도, 그가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들렸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나 괴로웠다. 머릿속이 어지러운 것이 어떻게 해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밀어 와인 때문에 빨갛게 변한 입술을 핥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진한 와인 향기가 배어 있는 품에 안겨졌다.

허태준이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단단히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무릎 뒤를 가로질러 번쩍 안아 들었다.

“여긴 네가 계산해.”

그는 여형민한테 그 말만 남긴 채 성큼성큼 레스토랑 입구로 향했다.

여형민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롱했다.

“친구보다 여자다 이거지!”

**

허태준은 그대로 자신의 방에 돌아왔다.

오는 길 내내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심유진의 얼굴은 그의 품에 가려져 있었기에 들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허태준을 알아보고 감히 더 쳐다보지 못한 채 그저 뒤에서 몇 마디 수군거릴 뿐이었다.

“허 대표님이 여자를 안고 올라가셨어~”

심유진은 줄곧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허태준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그녀가 이미 잠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눈은 꼭 감겨 있었고 오뚝한 콧날이 규칙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조그마한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빨간 입술이 유달리 매혹적이었다.

허태준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녀의 입술은 마치 젤리처럼 부드러웠지만 젤리만큼 달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씁쓰름한 와인 향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녀의 입술을 아주 달콤하게 음미했다.

허태준이 야금야금 그녀의 입술을 탐하자 잠들었던 심유진도 뭔가를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리자 허태준의 입술이 그녀의 볼을 스치며 두텁게 칠한 화장을 맛보게 되었다.

곧바로 그가 입안에 묻은 화장품을 뱉어내고 휴지로 입을 닦았다. 그러고는 욕실로 가서 지독한 분향이 나지 않을 때까지 몇 번이나 입을 헹궈냈다.

그가 고개를 숙여 확인하니 예상대로 그의 하얀 셔츠의 가슴 부분에 큼지막한 연갈색 자국이 남아있었다.

허태준은 셔츠를 벗고 불쾌하다는 듯이 빨래 바구니에 처넣었다. 그리고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와 침대에 걸터앉아 심유진의 메이크업을 조심스럽게 지워줬다.

파운데이션을 어찌나 두텁게 발랐는지 원래의 피부색이 안 보일 정도였다.

허태준은 오늘 그녀의 화장이 예전 그 어느 때보다도 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그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파운데이션을 지워내자 빨갛게 부어오른 반쪽 얼굴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아침에 와서 난리를 피운 그 늙은 여자가 때린 흔적이었다.

허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눈에 언뜻 살기가 스쳤다.

그가 손끝으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심유진의 부어오른 얼굴을 만졌다.

“바보, 멍청이.”

그가 이를 악물고 욕했다. 자신의 화를 표출하듯이 그녀의 얼굴을 두 번 찔렀지만 손끝에 힘을 싣지는 못했다.

“그런 인간 때문에 나를 버리다니.”

“네가 지금 이렇게 사는 건 다 네가 자초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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