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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솔빛동 골목

Auteur: Jino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0-18 16:33:56

『오늘 일정: 토요일 저녁, 작업실 정리』

나는 작업표 귀퉁이에 적어 둔 말을 새 종이로 옮겼다.

『해윤 부지 12월 말』

접힌 쪽지를 읽을 수 있었던 건 경란이 상자를 닫기 전까지였다. 차에서 내린 뒤 바로 적었지만, 글씨 모양까지 옮기지는 못했다.

나는 그 아래에 물음표를 찍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공장 소리가 먼저 들렸다. 부지에 관한 연락이 왔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기계 점검 때문에 잘 안 들린다고 했다.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듣고 끊었다.

휴대폰에는 아직 새 연락이 없었다.

“그거 오늘 보낼 거야?”

다은이 작업대 건너편에서 물었다. 나는 종이를 뒤집어 가죽 가방 안에 넣었다.

“아니. 개인적으로 확인할 거.”

“그럼 발송할 건 이걸로 끝이지?”

다은이 묶어 놓은 상자를 가리켰다. 나는 주소를 확인하고 테이프 끝을 눌렀다. 오래된 사진첩을 맡긴 손님은 표지를 새로 씌우지 말아 달라고 했다. 닳은 모서리를 남긴 채 벌어진 부분만 붙였다.

“월요일에 열어 보시고 연락 달라고 써 뒀어.”

“좋아. 나 이제 청소한다.”

다은이 빗자루를 가져왔다. 나는 프레스기에서 뺀 종이를 눕히고 무게추를 올렸다. 창밖에서는 붕어빵 틀을 닫는 소리가 났다.

“냄새 올라온다.”

다은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네가 계속 말하잖아.”

“네가 한 번도 사러 안 가니까.”

나는 앞치마 끈을 풀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골목 입구입니다. 책 맡겨도 됩니까.』

보낸 사람 이름을 확인한 뒤 창으로 갔다. 간판 아래 이헌이 서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창문을 조금 열자 이헌이 고개를 들었다.

문자로 답하지 못한 채 눈이 마주쳤다. 이헌이 휴대폰을 넣었다.

“누군데?”

다은이 내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책 맡기러 오셨어.”

나는 창문을 닫고 앞치마를 벗었다. 주머니의 접지칼과 바늘을 꺼내 작업대에 올려놓았다.

“손님이면 올라오시라고 해.”

“금방 올게.”

계단을 내려가다 셔츠 소매에 묻은 풀을 발견했다. 마른 부분을 손톱으로 떼고 현관문을 밀었다.

이헌은 문에서 떨어져 기다리고 있었다. 목도리는 없었고 코트 단추도 잠그지 않았다.

“올라오시면 되는데요.”

“정리 중인 것 같아서요.”

이헌이 창 쪽을 봤다. 나는 문을 잡은 손을 놓았다.

“아직 문 닫을 시간 아니에요.”

“그럼 정식으로 맡기겠습니다.”

안주머니 쪽으로 손을 옮기는 걸 보고 시집을 가져왔다는 걸 알았다. 나는 먼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에서 상태를 볼게요.”

“윤나경 씨.”

다시 돌아보자 이헌이 내 손을 봤다.

“그건 안 떼도 됩니까.”

검지 옆에 풀이 붙어 있었다. 나는 손을 등 뒤로 옮겼다가 도로 내렸다.

“손 씻으면 없어져요.”

“다친 건 아니고요?”

“풀 묻은 거예요.”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톱에 남은 풀을 엄지로 문질렀다.

“실장님은 퇴근하셨어요?”

“네.”

“토요일에도 일하세요?”

“오늘은 했습니다.”

이헌의 시선이 내가 잡고 있던 문손잡이로 옮겨 갔다. 문을 열어 놓은 채 너무 오래 서 있었다. 나는 옆으로 비켰다.

그때 위에서 창문 여는 소리가 났다.

“나경아.”

다은이 창틀에 팔을 걸쳤다.

“내려간 김에 붕어빵 3개만.”

“손님 오셨잖아.”

“그러니까 내가 내려가면 되는데 너 신발 벌써 신었길래.”

다은은 그렇게 말하고 이헌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금방 올라오세요. 안 추워요?”

이헌도 인사를 하고 내 쪽으로 돌아섰다.

“사 가죠.”

“안 사셔도 돼요. 늘 저래요.”

“저도 저녁 전입니다.”

이헌이 붕어빵 노점 쪽으로 걸었다. 나는 열린 문을 닫고 따라갔다.

◈

노점 앞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었다. 주인은 방금 구운 붕어빵을 집게로 뒤집어 놓고 새 반죽을 부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휴대폰밖에 없다는 걸 확인했다.

가방을 작업실에 두고 내려왔다.

“제가 가서 지갑 가져올게요.”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복원 맡기러 오신 거면 손님이신데요.”

“다음에 사 주세요.”

이헌이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계단 쪽으로 돌리던 발을 멈췄다.

“몇 개 드릴까요?”

“6개 주세요.”

“3개면 되는데.”

내가 작게 말하자 이헌이 고개를 돌렸다.

“위에 두 분 계시잖아요.”

“다은이는 자기가 먹을 것만 말한 거예요.”

이헌이 창을 올려다봤다. 다은은 아직도 창문 곁에 서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 들어가라는 시늉을 하자 다은이 빈 종이봉투를 흔들었다.

“바로 먹을 것하고 가져갈 것 나눠 드려요?”

주인이 물었다.

“다 담아 주세요.”

이헌이 대답했다. 나는 접어 둔 소매를 조금 내려 손등을 덮었다. 골목 안으로 바람이 불어 왔다.

“기다려야겠네요.”

“추우면 먼저 올라가세요.”

“저도 먹을 거라서요.”

이헌이 빈 의자를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앉을 자리에 붙은 포장지 조각을 떼어 주었지만 나는 앉지 않았다.

이헌과 내 사이에는 의자 하나가 놓였다.

주인이 틀을 열자 김이 났다. 나는 봉투에 담기는 붕어빵을 보며 물었다.

“책은 계속 갖고 다니신 거예요?”

“네.”

“안주머니에 넣으면 등이 더 눌려요. 지금은 찢어진 데가 있으니까 꺼낼 때도 걸리고요.”

이헌은 코트 안쪽을 내려다봤다.

“보관할 것도 같이 부탁해도 됩니까.”

“상자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두께를 재 봐야 해요.”

“그것도 맡기겠습니다.”

바로 대답해서 나는 이헌을 봤다.

“상태 보고 견적부터 말씀드릴게요.”

“값은 윤나경 씨가 정해 주세요.”

“얼마가 나올지 아직 모르시잖아요.”

“필요한 만큼 고쳐 주시면 됩니다.”

이헌은 지갑을 넣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붙은 물기를 손끝으로 쓸려다가 멈췄다.

“많이 고치는 게 늘 좋은 건 아니에요.”

“네.”

“남길 수 있는 건 남길 거예요. 표지도, 안에 있는 종이도요.”

“그래 주세요.”

묻는 말마다 답이 짧았다. 그런데 시집을 꺼내지는 않았다.

나는 노점 아래 선반에 놓인 봉투를 봤다. 손님에게 책을 받아 놓고도 맡긴 이유를 되묻고 싶을 때가 있었다. 책보다 사람 얼굴을 더 오래 보고 있을 때였다.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기다리겠습니다.”

주인이 봉투를 내밀었다. 내가 손을 뻗자 이헌도 같은 봉투 아래를 받쳤다.

손등이 닿았다.

나는 봉투를 놓고 손을 거뒀다. 이헌은 봉투를 받아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주인은 틀 안에 남은 부스러기를 털고 있었다. 골목 끝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이헌의 손이 내 앞에 멈췄다. 잡아당기지도, 손목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나는 계단 위 창을 봤다. 다은은 보이지 않았다. 작업실 조명만 켜져 있었다.

고개를 내리자 이헌은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여기서는…….”

말끝을 잇지 못했다. 이헌이 손을 조금 내렸다.

나는 소매 밖으로 손을 꺼냈다. 손끝이 이헌의 손바닥에 닿자 움직임이 멎었다. 빼려면 뺄 수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폈다.

이헌이 내 손을 감쌌다.

둘 사이에 있던 의자 등받이가 내 코트에 닿았다. 나는 의자 옆으로 반걸음 옮겼다. 이헌도 그만큼 돌아섰다.

“손이 차네요.”

“물을 만지다 나와서요.”

“풀은 안 묻었습니다.”

나는 잡힌 손을 내려다봤다. 왼손 검지의 굳은살이 이헌의 손가락에 눌렸다. 실을 당길 때마다 따갑던 자리였다.

“묻어도 물로 씻으면 돼요.”

이헌의 엄지가 움직이다 멈췄다. 내 손을 더 세게 쥐지는 않았다.

노점 주인이 남은 반죽을 통에 덜어 놓았다. 손님이 오면 손을 바로 놓아야 했다. 건물 문이 열려도 그랬다.

나는 골목 입구를 봤다. 이헌은 내 손을 잡은 채 기다렸다.

휴대폰이 울렸다.

우리는 동시에 작업실 창을 올려다봤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소리는 내 주머니에서 났다.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꺼내니 다은의 문자였다.

『나 내려가. 봉투만 주면 돼.』

나는 화면을 끄고 이헌을 봤다.

“다은이 내려온대요.”

이헌은 곧바로 손을 풀었다. 손가락 끝이 떨어진 뒤에도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못했다.

이헌이 의자에서 봉투를 들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다은이 슬리퍼를 끌며 나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지금 구운 거예요?”

다은이 봉투 안을 들여다봤다.

“어, 6개네.”

“직원분 것도 있다고 하셔서요.”

“저 혼자 3개 먹는다고는 안 했는데.”

다은은 나를 한 번 보고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일단 위에 둘게요. 차 마시죠? 물 올릴게요.”

“제가 할게.”

“넌 손님 모시고 올라와.”

다은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문이 닫힐 때까지 등을 보고 서 있었다.

이헌이 내 옆에 멈췄다. 이번에는 손이 닿지 않았다.

“들어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문을 열었다.

◈

작업실에는 붕어빵 봉투가 펼쳐져 있었다. 다은은 자기 몫을 접시에 덜고 전기 주전자에 물을 채웠다.

“어디 앉으시면 돼?”

“창가 말고 이쪽에.”

나는 셋째 작업대의 의자를 뺐다. 마르는 종이가 없는 자리였다. 이헌은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셔츠 소매는 두 번 접혀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보지 않으려고 작업대 위의 솔부터 치웠다.

“손 먼저 씻고 올게요.”

세면대에서 물을 틀었다. 손가락 사이에 남은 풀을 씻고 수건으로 닦았다. 거울은 보지 않았다.

돌아오니 이헌은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작업대 옆에 서 있었다.

다은이 컵을 내려놓았다.

“뜨거울 때 드세요. 나경이는 일 시작하면 식는 것도 몰라요.”

“고맙습니다.”

“저는 안쪽 정리할게요. 이거 3개 가져간다?”

“다 가져가도 돼.”

다은이 접시를 들고 안쪽 방으로 갔다. 문이 반쯤 닫혔다. 나는 컵을 작업대 반대편 선반으로 옮겼다.

“책 근처에서는 안 마셔요. 여기 두시면 돼요.”

이헌이 컵을 따라 옮겨 놓았다.

나는 서랍에서 접수표를 꺼냈다. 이름과 연락처를 쓰는 칸에서 펜이 잠깐 멈췄다.

“성함은 제가 적어도 되죠?”

“네.”

강이헌이라고 적었다. 이어서 휴대폰 번호를 받아 썼다. 이미 저장된 번호였지만 끝까지 듣고 확인했다.

“받으실 분도 실장님으로 하면 될까요?”

“제가 찾으러 오겠습니다.”

“완성되면 연락드릴게요.”

나는 접수표를 밀어 놓고 작업대에 천을 깔았다. 책의 들뜬 부분이 걸리지 않도록 접힌 곳을 폈다.

이헌이 그제야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겉만 보고 다 고칠 수 있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해요.”

내가 말했다.

“안쪽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릴 수도 있어요. 오늘은 어디까지 맡기실지 정하는 거예요.”

“네.”

“찢어진 등을 붙이면 지금보다 덜 벌어질 수 있어요. 억지로 펼치시면 안 되고요.”

이헌은 시집을 꺼내 두 손으로 받쳤다. 처음 바에서 봤을 때도 저렇게 들고 있었다. 엄지가 찢어진 등에 닿지 않도록 비껴 있었다.

나는 천 가운데를 가리켰다.

“여기 놓아 주세요.”

이헌은 내려놓기 전에 책 아래를 한 번 봤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접수표를 옆으로 치웠다.

표지 모서리에 눌린 자국이 있었다. 등에는 실이 조금 나와 있었다.

“오늘 안 맡기셔도 괜찮아요.”

이헌이 고개를 들었다.

“견적만 받아 가셔도 돼요. 고치는 동안에는 여기 두고 가셔야 하니까요.”

“맡기려고 왔습니다.”

이헌이 책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아래를 받쳤다. 이헌의 손이 빠져나간 뒤에야 시집을 천 위에 놓았다.

낡은 종이 냄새가 났다.

나는 표지를 펴지 않고 비스듬히 세웠다. 부서진 등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받침을 댔다. 책 위쪽과 아래쪽의 닳은 정도가 달랐다.

손끝을 멈추고 다시 봤다.

표지 안으로 접혀 들어간 천 끝이 눈에 걸렸다. 바로 펴지 않고 책을 조금 돌렸다. 전에도 이 자리를 받쳐 든 적이 있었던가.

나는 책에서 손을 떼고 이헌을 봤다.

“이 책, 전에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이헌은 대답하지 않고 소매를 한 번 더 접었다.

(1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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