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오늘 일정: 목요일 저녁, 상담 마무리』
“사진 찍을 옥상 자리를 봤어요.”
나는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어 생수병을 집었다. 뚜껑에 손가락을 걸었다가 다시 몸통을 쥐었다.
경란은 문턱을 넘지 않은 채 의자 쪽을 봤다.
“직원은?”
“다른 의자 사진을 가지러 내려갔어요. 회장님이 앉으실 건 등받이가 더 높아야 할 것 같아서요.”
이헌이 벽 쪽 의자를 가리켰다.
“팔걸이도 낮습니다. 일어나실 때 불편하실 겁니다.”
경란의 눈이 의자에서 이헌의 목 아래로 옮겨 갔다. 나는 생수병을 가방에 넣었다. 끝까지 들어가지 않아 지퍼를 열어 둬야 했다.
“넥타이는 왜 그러니?”
이헌이 매듭에 손을 댔다.
내가 펴 놓은 셔츠 깃 끝이 조금 들려 있었다. 나는 가방 안쪽으로 물병을 더 밀었다.
“옥상에 나와서 풀었습니다.”
이헌은 자기가 느슨하게 한 매듭을 아래로 조금 내렸다. 경란은 휴대폰 화면을 끄고 말했다.
“추운데 올라와서 별걸 다 보고 있네. 내려와. 밑에서 기다려.”
문이 닫히자 나는 가방에서 손을 뺐다. 이헌과 나 사이에 놓인 테이블 끝을 보고 있었다.
“사진은 제가 받을게요.”
“네.”
이헌은 먼저 문을 열었다. 바람에 문이 밀리지 않도록 손잡이를 잡고 비켜섰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숙였다.
문을 지나갈 때 넥타이 끝이 보였다. 매듭을 바로잡느라 잡았던 자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나는 가방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
계단 아래에는 직원이 의자 사진을 들고 서 있었다.
“어머님께서 내려오시라고 하셔서요. 상담실에서 보실까요?”
“네. 바닥 틈도 말씀드릴 게 있어요.”
나는 직원 옆으로 갔다. 이헌은 뒤에서 옥상 문을 닫았다. 계단이 끝날 때까지 발소리가 따라왔다.
상담실에서 경란은 이미 내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코트를 받았다.
“입어. 차 타면 바로 갈 거야.”
“사진만 확인할게요.”
직원이 새로 가져온 사진을 펼쳤다. 나는 팔걸이와 좌판이 함께 나온 것을 골라 예약표 위에 놓았다.
“회장님 의자는 이걸로 부탁드려요. 그리고 옥상 발판 틈은 촬영 전에 막아 주실 수 있나요?”
“네. 표시해 두겠습니다.”
“드레스 입고 걸을 길도요. 제가 걸린 자리라서요.”
경란이 예약표를 보다가 펜을 내 쪽으로 밀었다.
“그런 건 여기다 써 둬. 말로만 하면 빠져.”
나는 빈칸에 바닥 확인이라고 적었다. 경란이 시계를 보면서도 펜을 가져가지는 않았다. 의자 옆에 한 번 더 표시하고 나서야 펜을 내려놓았다.
직원이 다음 방문 때 입을 옷을 설명했다. 경란은 주원에게 보내겠다며 예약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코트를 입고 단추를 잠갔다. 이헌은 상담실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문밖으로 한 발 물러났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경란이 내 앞에 섰다. 이헌은 뒤에 있었다. 나는 경란의 코트 깃만 보며 걸었다.
건물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경란의 차가 입구 가까이 와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기사가 뒷문을 열었다.
“너는 어디 가니?”
경란이 이헌에게 물었다.
“회사로 갑니다.”
“주원이 보면 오늘 여기 왔다 갔다고 해. 제 결혼사진인데 남한테 맡겨 놓고.”
“연락해 두겠습니다.”
나는 열린 차 문 옆에서 인사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실장님.”
경란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남들이 들으면 회사 사람인 줄 알겠네. 주원이 따라서 불러. 곧 식구 될 건데.”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조심히 가세요, 삼촌.”
이헌은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세요.”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경란이 반대편으로 타는 동안 이헌은 길가로 비켜섰다. 차 문이 닫히자 이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앞좌석에 가린 뒤에도 나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경란이 안전띠를 당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가방은 발밑에 둬. 무릎 위에 끌어안고 있지 말고.”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안전띠를 맸다. 차가 출발하자 입구에 서 있던 이헌이 창틀 밖으로 사라졌다.
◈
경란이 휴대폰으로 예약표 사진을 보냈다. 받는 사람 이름을 확인한 뒤 화면을 껐다.
“불편했니?”
“어떤 게요?”
“이헌이 부른 거. 주원이 대신 왔어야 하는데.”
“의자 보는 걸 도와주셨어요.”
“그런 건 잘해. 누가 뭘 불편해하는지 잘 보거든.”
경란은 창밖을 보며 귀걸이 아래를 만졌다. 옥상에 올라오기 전 통화할 때도 눌렀던 자리였다.
나는 코트 소매에서 실밥을 떼었다.
“원래 자주 도와주세요?”
“누구를?”
“집안일이요.”
경란이 나를 봤다. 나는 떼어 낸 실밥을 휴지에 붙였다.
“오늘도 대신 오셨으니까요.”
“아버님이 시키시면 하지. 우리한테 부탁받고 움직일 애는 아니야.”
차가 멈췄다. 앞차의 불빛이 창에 비쳤다. 경란은 어깨에 걸린 안전띠를 조금 내려놓았다.
“주원이하고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삼촌이라고 하려니 어색하지?”
“아직은요.”
“아버님이 늦게 얻으셨잖아. 둘째 부인한테서.”
나는 휴지를 접던 손을 멈췄다. 경란은 내 쪽이 아니라 앞좌석 등받이를 보고 있었다.
“집에 사진이 없어서 몰랐을 거야. 식 올리고 들어오신 뒤에도 같이 산 날은 길지 않았어.”
“지금은 안 계신 건가요?”
“오래전에 돌아가셨어.”
경란은 말을 끊고 가방을 열었다. 안에서 손거울을 찾다가 지퍼를 다시 닫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방향지시등 소리만 났다.
경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아버님 서재에도 드나든다며.”
“장부를 고치고 있어요.”
“이헌이하고 같이?”
“옆에서 쪽수를 확인해 주셨어요. 빠진 장이 있으면 안 돼서요.”
“무슨 말을 하든 네가 다 대답할 필요는 없어. 집안 사정도 아직 모르잖아.”
나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내려다봤다.
“작업에 필요한 얘기만 했어요.”
“그럼 됐고.”
경란은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깨가 문에 닿기 전에 멈췄다.
“가까이 지내면 편할 건 없어. 주원이가 싫어할 수도 있고.”
“주원 씨가요?”
“자기보다 아버님 말씀을 쉽게 들으니까. 제 아버지는 안 불러도 이헌이는 부르시거든.”
차가 다시 움직였다. 경란은 가방 손잡이를 세워 잡았다.
“아까는 곧 식구 될 거라고 하셔서요.”
말이 나간 뒤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경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호칭은 그렇게 해야지. 밖에서 남들이 듣잖아.”
“네.”
“하지만 너는 주원이한테 시집오는 거야. 누구 옆에 서야 하는지는 알아 둬.”
나는 안전띠 아래 눌린 코트 자락을 폈다.
“실장님도 주원 씨 가족이시잖아요.”
경란의 손에서 가방 손잡이가 내려갔다.
“우리 식구 아니야.”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앞좌석의 기사는 그대로 운전했다.
경란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가방을 무릎 위로 당겼다.
“밖에 나가서 그런 얘기 하라는 뜻은 아니고. 집집마다 사정이 있는 거니까.”
나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약혼식 날 회장 곁에서 손님을 맞던 이헌이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 나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라던 사람이 같은 입으로 선을 그었다.
“저는 아직 모르는 게 많네요.”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 괜히 중간에 끼지 말고.”
경란이 귀 밑으로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귓불을 짚은 채 멈췄다.
곧 반대쪽 귀를 만졌다. 진주 한 알이 달린 쪽이었다.
“잠깐만.”
경란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가방이 무릎에서 미끄러지자 내가 손으로 받쳤다.
“뭐가 없어지셨어요?”
“귀걸이. 오른쪽.”
경란은 코트 깃을 털고 목도리 안쪽을 들췄다. 나는 가방을 좌석 가운데 놓았다. 경란의 손이 빈 귓불을 다시 눌렀다.
“아까는 있었는데. 차 타기 전에도 만졌어.”
“움직이지 말고 계세요. 옷에 붙어 있을 수도 있어요.”
“어디?”
나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경란이 코트 깃을 벌려 주었다. 진주도 잠금쇠도 보이지 않았다.
“목도리 좀 볼게요.”
경란이 목도리를 풀었다. 나는 양쪽 끝을 모아 무릎 위에 펼쳤다. 천을 접은 자리에는 머리카락만 붙어 있었다.
경란이 앞좌석을 향해 말했다.
“차 좀 세워 봐요. 여기서 빠진 것 같은데.”
기사가 길가에 차를 세웠다. 실내등이 켜졌다.
경란은 안전띠를 풀자마자 몸을 돌려 앉았다. 손바닥으로 좌석을 훑다가 손톱을 세웠다.
“이 가죽 틈으로 들어가면 못 꺼내는 거 아냐?”
“우선 코트부터 들어 보세요.”
내 말에 경란이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접어 둔 목도리를 가방 위에 놓고 휴대폰 불빛을 좌석 아래로 비췄다.
경란은 코트를 들고 기다리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한 짝만 잃어버리면 소용도 없는데.”
“작업실에서도 바늘을 잃어버리면 먼저 안 움직여요. 밟으면 더 깊이 들어가거든요.”
“귀걸이를 바늘 찾듯 찾는다고?”
“작고 뾰족한 게 붙어 있으니까요.”
나는 휴대폰을 옆으로 기울였다. 좌석과 등받이가 만나는 틈에서 흰 것이 보였다. 빛을 바로 대자 진주 표면이 드러났다.
“있어요.”
경란이 손을 뻗었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막았다.
“누르시면 밑으로 빠져요. 잠깐만요.”
가죽 사이에 잠금쇠가 걸려 있었다. 억지로 당기면 틈이 벌어지면서 귀걸이가 내려갈 자리였다.
나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접지칼을 꺼냈다. 흰 끝을 본 경란이 손을 거뒀다.
“차에 흠집 나겠어.”
“날이 없는 도구예요. 앨범 접을 때 쓰는 거라서요.”
나는 접지칼을 가죽에 대지 않고 진주 아래로 넣었다. 끝을 조금 들어 받치자 잠금쇠가 보였다. 다른 손 검지로 쇠 부분을 걸어 올렸다.
경란은 숨을 멈춘 채 내 손만 봤다.
진주가 손바닥에 올라왔다. 잠금쇠도 붙어 있었다. 나는 손을 펴서 보여 줬다.
“빠진 데는 없어요.”
경란은 바로 집어 가지 않았다. 내가 잠금쇠를 열었다 닫아 보자 그제야 손을 내밀었다.
“그게 헐거웠나 보네.”
“끼우실 때 끝까지 잠겼는지 확인해 보세요.”
경란은 귀걸이를 받아 귓불에 대다가 손을 내렸다. 거울을 찾던 손으로 귀 뒤를 만졌다. 귓불 아래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안 끼는 게 낫겠어요.”
“왜?”
“계속 만지셔서 빨개졌어요. 피는 안 나요.”
경란은 손거울을 꺼내 귀를 비춰 봤다. 입술을 누르고 있다가 반대쪽 귀걸이도 뺐다.
나는 접지칼을 휴지로 닦아 가방에 넣었다. 떨어뜨리지 않도록 앞주머니 지퍼를 끝까지 잠갔다.
“차에서 쓰던 휴지는 이쪽에 둘게요. 내릴 때 가져갈게요.”
경란은 거울을 닫았다.
“고맙다.”
나는 가방에 휴지를 넣다가 고개를 들었다.
“찾아서 다행이에요.”
경란은 귀걸이 두 짝을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조금 전까지 꼿꼿하게 앉아 있던 어깨가 등받이에 닿았다.
“손에 익은 게 있으니 이런 건 잘하는구나.”
“작은 부품이 빠진 책도 자주 맡아서요.”
“다시는 안 찾게 넣어 둬야겠어.”
경란이 가방 안쪽 주머니를 뒤졌다. 나는 내려놓았던 안전띠를 다시 맸다. 기사는 경란이 움직임을 마칠 때까지 출발하지 않았다.
경란은 내 발밑 가방을 보고 물었다.
“작업실로 가니?”
“네. 정리할 게 남아서요.”
“솔빛동이라고 했지? 가는 길 알려 드려.”
나는 기사에게 골목 앞에서 내리겠다고 했다. 경란은 내가 길을 설명하는 동안 가방에서 상자를 꺼냈다.
손바닥에 얹히는 크기였다. 뚜껑을 열자 안쪽 덮개에 끼워 둔 종이가 걸렸다. 경란은 귀걸이를 쥔 손 때문에 종이를 바로 밀어 넣지 못했다.
“이것 좀 잡아 봐.”
나는 상자 밑을 받쳤다.
접힌 쪽지 끝이 뚜껑 바깥으로 나왔다. 경란이 귀걸이를 넣으며 손가락으로 밀었지만 종이는 접힌 자리에서 펴졌다.
글씨가 위를 향했다.
길게 뻗은 받침과 끝을 꺾어 쓴 숫자가 보였다. 약혼식 때 아버지에게 건넨 봉투에도 저 글씨가 있었다. 석진이 직접 적었다며 아버지가 내게 보여 줬었다.
경란의 손이 귀걸이에서 떨어졌다.
나는 상자를 받친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해윤 부지 12월 말』
(14화 끝)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커튼이 다 내려간 뒤에도 나는 2층 창을 올려다봤다. 이헌이 현관문을 연 채 기다렸다. 그날은 안에서 손만 녹이고 바로 나왔다. 경란에게서는 6일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12월 24일 저녁, 나는 같은 현관 앞에 다시 섰다. 2층 창가의 커튼은 걷혀 있었다.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구두 밑창에 붙은 눈이 매트에 떨어졌다.“나경 씨, 손 시려?”주원이 내 뒤에서 문을 닫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괜찮아요.”“장갑 좀 끼고 다녀. 오늘 사진도 찍을 건데 손 빨갛겠다.”주원은 내 가방을 받아 들려다 안에서 종이봉투가 나오자 웃었다.“내 선물?”“회장님 드릴 거예요.”“나는 빈손으로 들어왔는데. 옆에 서 있어야겠다.”거실에서는 접시 놓는 소리가 났다. 경란은 식탁 끝에서 냅킨을 펴고 있었다. 진주 귀걸이 아래로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 있었다.“늦지는 않았네. 외투 벗고 앉아.”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을 때 이헌이 보였다. 식탁 건너 창문 옆이었다. 소매를 두 번 접은 손에 물잔을 들고 있었다.“오셨습니까.”“네, 삼촌.”입안에 남은 호칭을 삼켰다. 이헌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사이에는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주원이 내 옆 의자를 빼 주었다.“자기, 오늘은 일 얘기 금지야. 아버지도 약속하셨고.”석진이 금색 시계를 보고 웃었다.“아직 내가 아무 말도 안 했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본가 장부 수선 마무리』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맡기신 건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회장은 책상 위의 장부를 당겼다. 끈이 눌린 자리를 살피던 손이 멈췄다.“그럼 됐네.”더 묻지 않았다. 나는 기록지 한쪽에 수선한 자리를 짚어 드린 뒤 서재를 나왔다. 이헌이 문을 닫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뗄 때까지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안에서는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외투 가져올게요.”이헌이 현관으로 갔다. 나는 가방 안쪽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 모서리에 손끝이 닿았다가 빠졌다. 여기서 화면을 켜면 서재 문이 열려도 못 볼 수 있었다.이헌이 코트를 벌려 주려다 내 가방을 봤다.“놓고 입어요. 제가 들고 있을게요.”“바닥에 안 닿게만 해 주세요.”가방을 건네고 팔을 넣었다. 소매 안에서 옷이 말려 올라가 손목을 당겼다. 이헌은 기다렸다가 가방을 돌려줬다. 검은 외투는 아직 팔에 걸쳐 있었다.“회사로 가세요?”“조금 있다가요.”나는 현관 유리 너머를 봤다. 정원 길에는 눈이 치워져 있었다. 담장 아래에만 군데군데 흰 눈이 남았다.“잠깐 걸어도 될까요?”이헌이 외투를 입었다.“정원으로 나가요.”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가방 밑이 젖어 있었다. 서재에서 천을 걷을 때 묻은 건지, 바닥에 남은 눈이 닿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방을 기울여 바닥의 이음매부터 확인했다.“안까지 들어갔어요?”“겉만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