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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작업대 셋째 칸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16:34:09

『오늘 일정: 월요일, 시집 해체』

“어디서 보셨습니까.”

이헌이 접은 소매를 누르며 물었다. 나는 시집 아래의 받침을 조금 옮겼다.

“모르겠어요. 표지 천 때문인가.”

“천이 흔한 겁니까.”

“이런 건 많이 썼어요. 안쪽으로 접어 붙인 모양이 눈에 익어서요.”

기울여 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는 책을 눕히고 벌어진 등 쪽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헌이 가까이 오려다 작업대 모서리에서 멈췄다.

“안쪽도 봐야 알겠어요.”

“오늘 다 보실 겁니까.”

“아뇨. 월요일에 시작할 거예요. 뜯기 전 상태부터 남겨야 해서요.”

나는 접수표의 작업 항목을 짚었다. 표지와 책장을 떼어 낸 뒤 끊긴 실을 걷어 내야 했다. 이헌은 설명을 듣고 펜을 들었다.

“남겨야 할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버릴 건 따로 모아 둘게요. 낡은 실도요.”

이헌이 서명한 접수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시집을 보관함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이헌의 손은 빈 안주머니 앞에 잠깐 머물렀다. 나는 보관함을 작업대 셋째 칸에 놓았다.

◈

월요일 오후, 나는 같은 칸에서 보관함을 꺼냈다.

다은은 창가에서 가계부를 싸고 있었다. 천을 씌운 표지가 포장지 밖으로 조금 나왔다.

“끈은 아직 묶지 마. 할머니 오시면 안쪽부터 보실 거야.”

“알아. 벌써 전화 두 번 하셨어.”

“또 찢어질까 봐 걱정하시더라.”

“그래서 펼쳐 놓고 기다린다고 했어.”

다은이 끈을 내려놓고 내 작업대로 왔다. 나는 앞치마에서 바늘을 꺼내 도구 받침에 놓았다. 바늘을 굴려 휜 데가 없는지 확인한 뒤 카메라를 켰다.

“드디어 삼촌님 책 하는 거야?”

렌즈 덮개를 놓칠 뻔했다.

“손님 책이야.”

“손님 이름이 강이헌이잖아.”

“그러니까 이름으로 불러.”

“네 약혼자 삼촌이라며. 그럼 나도 조심해야지.”

다은이 보관함에 붙은 접수표를 봤다. 나는 시집을 꺼내며 팔로 접수표를 가렸다.

“앞에서는 그러지 마.”

“앞에서는 실장님이라고 했어.”

“그럼 뒤에서도.”

다은은 대답 대신 책 받침을 가져왔다. 늘 쓰던 쐐기 받침이었다. 내가 손을 뻗기 전에 시집 양옆에 하나씩 놓았다.

“붕어빵 잘 먹었다고 전해 줘. 내가 너무 많이 먹었더라.”

“네가 산다고 해.”

“그러지 뭐. 그런데 또 오셔?”

나는 카메라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찾으러 오시겠지.”

“그렇지. 맡겼으니까.”

다은이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테이프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표지의 눌린 자리부터 찍었다. 모서리, 등, 책장 사이를 차례로 남겼다. 종이가 부서지는 곳에는 연필로 표시한 종이를 끼웠다.

표지 안쪽은 풀을 두껍게 발라 붙여 놓은 상태였다. 억지로 열면 앞장까지 뜯길 수 있었다. 나는 얇은 주걱을 넣어 이미 떨어진 곳부터 벌렸다.

받침 높이를 바꾸자 표지가 조금 더 열렸다.

안쪽 위편에 글씨가 있었다. 풀 자국 아래로 가려져 있던 이름이었다.

『서은숙』

나는 주걱을 내려놓았다.

받침을 손보는 동안에도 눈은 그 자리에 머물렀다. 성을 먼저 쓰고 간격을 띄운 뒤 이름을 붙여 썼다. 마지막 글자 아래에는 펜이 머문 자국이 있었다.

접수표에는 책 주인의 이름이 따로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이름이 보이도록 사진을 찍었다. 작업 기록에 위치를 적고, 덮고 있던 종이를 더 떼지는 않았다. 누가 쓴 글씨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잉크 위에 물을 댈 수는 없었다.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확인할 것은 사진과 함께 정리해서 보내는 편이 나았다.

표지를 받친 채 등 쪽을 보았다. 위아래의 실이 여러 군데 끊어져 있었다. 끊긴 끝을 핀셋으로 집어 종이 위에 옮겼다. 잡아당기면 구멍까지 찢어질 수 있어, 남은 실은 자르기 전에 땀을 따라가야 했다.

아래쪽에서 핀셋이 멈췄다.

실이 한 번 비껴 나갔다가 제 구멍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란해야 할 땀 사이에 사선이 하나 끼었다. 매듭은 작게 묶었는데 그 앞의 실만 헐거웠다.

나는 작업등을 당겼다.

왼손 검지에 실을 걸고 다음 구멍으로 넘길 때, 손을 너무 빨리 빼면 저런 땀이 남았다. 처음 배울 때 몇 번이나 풀었던 자리였다.

지금도 두꺼운 종이를 꿰매다 손이 급해지면 가끔 생겼다.

“다은아.”

내가 부르자 문틈으로 얼굴이 나왔다.

“왜?”

“이거 좀 봐.”

다은은 내 옆으로 와서 허리를 굽혔다. 나는 핀셋 끝으로 실 옆을 가리켰다.

“구멍 하나 건너갔네.”

“건너간 건 아니야. 돌아와서 여기로 들어갔어.”

“아, 그러네. 풀었다가 다시 꿰맸나?”

“그랬으면 실이 겹쳐야 해. 이건 처음부터 이렇게 묶었어.”

다은이 자세를 낮췄다. 나는 작업등을 옆으로 비켜 주었다.

“초보가 한 거네.”

“응.”

“그래도 안 빠졌잖아. 이만큼 닳도록 버텼으면 잘한 거지.”

다은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실을 자르려던 가위를 도구 받침으로 돌려놓았다.

“이 부분은 좀 더 보고.”

“남길 수 있어?”

“그대로는 어려울 것 같아. 기록은 남겨야지.”

초인종이 울렸다. 다은이 출입문으로 가는 동안 나는 시집 위에 얇은 종이를 덮었다.

◈

할머니는 빈 장바구니를 접어 들고 들어왔다.

바닥에 놓으려기에 다은이 의자를 빼 드렸다. 할머니는 앉기 전에 창가의 가계부부터 찾았다.

“그거지?”

“네. 안쪽 보시겠어요?”

내가 포장지를 펼쳤다. 할머니는 가방에서 안경집을 꺼냈다. 안경다리 한쪽에 실이 감겨 있었다. 귀에 걸고 나서도 책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이제 만져도 돼?”

“네. 천천히 여시면 돼요.”

나는 앞부분에 받침을 넣었다. 젖어서 붙어 있던 장은 한 장씩 떼고, 없어진 모서리에는 얇은 종이를 덧댔다. 덧댄 자리가 먼저 보이지 않도록 색을 맞추느라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가 검지를 입술 쪽으로 가져가다 멈췄다.

“참, 침 바르지 말랬지.”

“그냥 넘기셔도 잘 넘어가요.”

나는 종이 모서리를 살짝 들어 드렸다. 할머니는 그 아래로 손가락을 넣었다.

가계부에는 날짜 옆에 물건값이 적혀 있었다. 쌀, 기름, 장갑. 같은 물건에도 금액을 고친 자국이 있었다.

할머니의 손이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이게 보이네.”

작게 중얼거려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가계부 위로 고개를 숙이자 다은이 옆의 조명을 켰다.

“여기, 장갑이라고 쓴 거.”

“네.”

“나는 안 샀거든. 그날 장갑.”

할머니가 글씨 옆을 짚었다. 손톱은 종이에 닿기 전에 멎었다.

“손이 텄다고 사 왔어. 자기 용돈에서 사 놓고 여기다 적었더라고.”

다은이 휴지 상자를 가져왔다. 할머니는 한 장을 뽑아 눈 아래를 눌렀다.

“잊어버리고 또 살까 봐 적었다는데. 그걸 왜 여기 적어.”

말 끝에 웃음이 섞였다. 할머니는 휴지를 접어 손에 쥐었다.

나는 가계부를 조금 돌려 드렸다. 할머니의 그림자가 글씨를 가리지 않는 자리였다.

“물이 번진 데는 그대로예요. 더 지우면 글씨도 같이 지워져서요.”

“이 정도면 됐어. 전에는 까맣게 붙어서 하나도 안 보였는데.”

할머니가 다음 장을 넘겼다. 가운데의 실이 팽팽해지기 전에 내가 받침을 옮겼다.

“이 사람이 쓴 걸 내 손으로 버릴 수가 있어야지.”

나는 펼친 장 아래에 손을 받쳤다. 할머니는 한참 그 글씨를 보다가 손수건을 꺼냈다. 다은이 의자 옆에 물컵을 놓았다.

“할머니, 포장은 천천히 해 드릴게요.”

“뒤에 손님 없어?”

“없어요. 다 보고 가세요.”

다은은 자기 의자를 끌어다 조금 떨어져 앉았다. 나는 펼친 장이 닫히지 않도록 가벼운 추를 올렸다.

할머니는 가계부를 끝까지 보지 않았다. 장갑값을 적은 장으로 돌아와 한 번 더 읽었다.

“이제 집에서 볼게.”

“젖은 손으로 만지지만 마세요. 창가에 두지 마시고요.”

나는 보관할 때 덮을 종이를 따로 넣었다. 할머니는 가계부를 장바구니에 세우려다 내 손을 보고 다시 눕혔다.

“누우라고 했지. 잊어먹을 뻔했네.”

“안에 받침을 넣어 드렸어요. 가시는 동안은 괜찮아요.”

할머니가 비용 봉투를 내밀었다. 접수할 때 말씀드린 금액보다 더 들어 있었다. 나는 더 들어온 돈을 빼서 돌려드렸다.

“이건 안 주셔도 돼요.”

“고생했잖아.”

“받기로 한 건 다 받았어요.”

할머니는 돈을 지갑에 넣고, 내 앞치마에 묻은 종이 가루를 보았다. 손을 뻗으려다 말고 장바구니 손잡이를 쥐었다.

“고마워. 글씨 다시 보게 해 줘서.”

나는 문을 잡아 드렸다. 다은이 장바구니를 받아 들고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

작업실로 돌아와 시집을 덮었던 종이를 걷었다.

나는 앞장에 적힌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읽을 수 없는 글씨를 읽게 만드는 일도 있었고, 누군지 모르는 이름을 남겨 두는 일도 있었다.

사진을 고르다 할머니가 놓고 간 휴지를 발견했다. 버리고 손을 씻은 뒤 작업대 앞에 앉았다.

다은이 올라와 식은 물을 마셨다.

“계단 내려가면서도 계속 들여다보셔. 내가 가방 닫아 드렸어.”

“잘했네.”

“나 저녁 사 올까? 너 또 안 먹고 할 거지.”

“아직 안 늦었어.”

다은이 벽시계를 가리켰다. 나는 핀셋을 내려놓았다.

“그럼 간단한 거. 책 없는 쪽에서 먹자.”

다은이 지갑을 챙겨 나갔다. 나는 그사이 이헌에게 보낼 사진을 골랐다. 이름이 보이는 앞장과 끊어진 등, 비껴 꿰맨 실이었다.

『해체 시작했습니다. 앞장 이름은 손대지 않고 남기겠습니다. 등 안쪽에 예전 수선 흔적이 있어 사진 보냅니다.』

전송하고 휴대폰을 작업대 끝에 놓았다.

실의 길을 기록하려고 종이에 구멍 위치를 그렸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선이 문제의 땀 앞에서 어긋났다.

나는 왼손 검지를 폈다. 굳은살 옆에 마른 자국이 있었다. 손을 씻을 때도 잘 보이지 않던 자리가 작업등 아래에서는 선명했다.

대학에서 배운 방식과는 달랐다. 할아버지가 구멍을 짚어 주던 손부터 떠올랐지만, 이 책을 앞에 놓은 기억은 없었다.

시집 표지를 다시 봤다. 안으로 접힌 천의 폭도, 등 아래에 붙인 종이도 낯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고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기록에 짧게 적었다.

『아래쪽 땀, 해체 전 추가 촬영.』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름은 그대로 부탁합니다. 실도 남길 수 있습니까.』

나는 잘라 낸 실을 담을 봉투를 꺼냈다.

『가능합니다. 다만 등 아래쪽은 더 확인한 뒤 풀겠습니다. 급하게 진행하지 않을게요.』

답을 보내고 봉투에 접수 번호를 적었다. 곧 문자가 하나 더 왔다.

『기다리겠습니다.』

토요일 노점 앞에서도 들었던 말이었다. 나는 화면이 꺼질 때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작은 가위를 들었다. 끊어진 끝을 정리한 뒤 온전한 땀은 남겼다. 가위를 벌린 채 실 아래로 넣으려다 멈췄다.

지금 자르면 돌아간 방향을 다시 볼 수 없었다.

나는 카메라를 가져와 아래쪽을 한 번 더 찍었다. 뒤집어서도 찍고, 구멍 안으로 들어간 실이 보이도록 받침을 바꿨다. 작업 기록 옆에 사진 번호를 적으니 빈칸이 거의 찼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는 시집을 받침 위에 그대로 두고 도구만 안쪽으로 밀었다. 다은이 양손에 음식을 들고 왔을 수도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려 있어.”

내가 말하자 손잡이가 내려갔다. 들어온 사람은 문턱에서 작업실 안을 둘러봤다.

코트보다 먼저 진한 향수 냄새가 들어왔다. 나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원이 문을 닫았다.

“나경 씨, 아직 일해?”

(1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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