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만 해도 강제로 초대받아 내가 대신해 방패막이가 되어줬는데... 뭐가 그렇게 오랜만이라는 거야?’고은서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도아름이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은서 씨, 왔구나. 여기 와서 앉아요.”고은서는 도아름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민 대표님께서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그러자 민시후는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웃었다.“조은서 씨가 명운의 명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나와 내기를 했잖아요. 내가 투자하기로 약속했으니 이제 약속을 지키러 왔죠.”도아름은 고은서에게 설명을 덧붙였다.“은서 씨가 나한테 말했던 조건대로 민 대표님께서 명운에 투자할 거예요.”민시후의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명운의 인기가 겨우 어젯밤에 올라갔을 뿐인데 그는 주저하지 않고 투자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다. 게다가 기회를 악용해 지분을 더 높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민 대표님, 정말 괜찮으세요?”고은서는 다시 한번 물었다.“지금은 명운이 조금 반등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민시후는 그녀를 껄끄럽게 쳐다보며 말했다.“조은서 씨는 자기 자신이나 명운에 대해 자신이 없나요?”그러자 고은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저는 제 자신과 명운 모두에 자신이 있어요!”이 말에 민시후도 씩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내가 뭘 더 고민할 게 있겠습니까?”지금 상황으로 봤을 때, 명운이 이렇게 빨리 미래 투자은행의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회사의 성장과 상장에 매우 유리한 일이다.고은서는 도아름에게 물었다.“언니, 언니 생각은 어때요?”민시후의 투자를 받아들인다면 명운이 더 잘 발전하더라도 다른 투자은행을 선택할 기회를 잃게 된다.도아름은 늘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저는 미래 투자은행의 투자를 받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지금 민 대표님께서 이렇게 투자의사를 밝혀주시는 거... 전 당연히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도아름이 동의했으니 고은서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그들은 계약과 관련
이 말을 듣자 백유미의 눈에서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승재야, 내가 그때 찍은 사진 때문에 네가 아직도 마음이 불편해한다는 거 알아.”“인정할게, 그때 사진을 찍을 때 나도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어. 네가 전에 내 면 요리가 어디보다 맛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그걸 찍어서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싶었어.”“하지만 네가 최근 나와 거리를 두려는 걸 느꼈기 때문에 그 사진을 올리면 네가 불편해할까 봐 바로 삭제했어. 근데 은서 씨가 그걸 그렇게 빨리 보고 저장할 줄은 몰랐어.”백유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승재야, 은서 씨의 성격은 나도 잘 알아. 은서 씨가 나를 오해하는 건 상관없지만 너에게 오해받는 건 싫어... 난 어렸을 때의 우리의 정을 지키고 싶어.”백유미의 창백한 얼굴과 슬프게 해명하는 모습을 보며 곽승재는 조금 마음이 움직였다.곧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난 너를 오해한 게 아니니까. 어제 은서가 그 일을 언급했을 때 상황을 잘 몰라서 너에게 물어본 것뿐이야.”“응.”백유미는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으며 조금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날 웃기게 했네. 나도 평소엔 이렇게 감정적이지 않은데 아마 머리를 다쳐서 그런가 봐.”“대표님...”그때 주민기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더니 무언가 보고하려다 백유미가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을 멈칫했다.백유미는 차분하게 말했다.“괜찮아요. 하실 말씀 하세요.”보고할 내용이 판주 투자은행 관련이었기 때문에 주민기는 백유미 앞에서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곽승재에게 보고했다.“방금 소식을 들었는데 미래 투자은행이 명운 기업에 계속 투자하기로 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듣자 곽승재는 즉시 눈썹을 찌푸렸다.“언제 일어난 일인가요?”“오늘 아침 민시후가 직접 명운 기업에 가서 도 대표님과 초보적인 합의를 이뤘다고 들었습니다.”백유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민시후가 왜 갑자기 명운에 투자하는 거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어젯밤 그녀는
민시후는 느긋하게 차를 들고 향을 맡은 후 가볍게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내가 은서 씨를 과소평가했었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민시후가 어젯밤 그녀가 술에 취한 척하면서 명운을 화젯거리로 만든 일을 말하는 걸 알고 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도련님과 같은 명문가 자제들이 남을 과소평가하는 건 흔한 일이니까요.”“말투가 마치 온갖 고난을 겪은 신데렐라 같네요.”민시후는 혀를 차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주로 은서 씨가 너무 꽃병 같아서... 아름다움이 은서 씨의 머리를 망칠까 봐 걱정됐거든요.”고은서는 할 말이 없었다.“도련님, 칭찬 방식이 참 독특하시네요.”“은서 씨에게 특별할 가치가 있으니까 특별하게 칭찬한 거예요.”민시후는 고은서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못 본 척하며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물었다.“어젯밤 그 일, 진짜로 곽승재에게 버림받은 거예요? 아니면 그 사람을 고발하려고 그런 겁니까?”민시후가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고은서는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다.“미안하지만 사적인 일이라 말할 수 없네요.”그러자 민시후는 화를 내지 않고 느긋하게 몸을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판주를 무너뜨리겠다고 했던 은서 씨의 결심을 이제 믿게 되었어요. 앞으로 협력이 잘 되길 바라요.” 이전에 ‘미리 협력의 성공을 기원한다’라고 말한 것과 달리 이제는 협력을 확정 짓는 말이었다.고은서는 솔직하게 말했다. 자신이 미래 투자은행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 200억을 마련할 수 없다고 말이다.하지만 이에 대해 민시후는 전혀 놀라지 않는 듯했다.“그럼 먼저 빚으로 두고 나중에 은서 씨가 성사시킨 프로젝트와 배당금에서 내요.”“그럼 다음 달에 입사할게요.”몇 주 뒤면 할머니의 생신이기도 하고, 그 외에도 이혼 문제를 처리해야 하며 명운의 계약 서명 후에도 처리할 일이 많으니 다음 달에 입사하는 것이 적당했다.“좋아요.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게요.”음식이 상에 차려진 후, 고은서
고은서는 몇 번이고 메시지를 확인한 후에야 그 메시지가 곽승재가 보낸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자기를 조롱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먼저 물어봐?’곽승재가 이렇게 스스로 찾아와서 맞닥뜨리겠다고 하니 고은서도 주저하지 않았다.[의사 선생님께서 당신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고 하더라. 먼저 뇌과를 가보는 게 좋겠대.]곧바로 곽승재가 메시지를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뜨긴 했지만 한참 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그리고 때마침 주인혁이 바비큐 장소의 주소를 보내왔기에 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두었다.도아름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고은서는 차를 몰고 한 식물원에 도착했다.이미 도착해 있던 주인혁과 그의 일행은 잔디 위에 카펫을 깔고 간단한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해 놓았다. 그 위에는 각종 음료수와 과자가 가득했다.근처에는 바비큐 그릴이 설치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불을 피우느라 분주했다.그들은 모두 젊고 활기차며 이런 번거로운 일들을 하면서도 즐거워하며 웃음꽃을 피웠다.“여기예요!”주인혁이 그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그가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와 소년다운 밝은 모습이 고은서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자신도 몇 년은 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바비큐를 준비하던 몇몇 젊은이들도 고은서에게 시선을 돌렸다.“설마 인혁이가 자주 말하는 선량한 마음씨를 가진 그 미모의 여성분이세요?”“진짜 예쁘시네요. 제가 본 많은 연예인들보다도 더 예뻐요!”“당연하지. 우리 인혁이가 매일 얘기하는 사람인데 그 정도는 돼야지!”“그만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주인혁이 급히 나서며 막으려 했다.“얘네들 말은 믿지 마세요. 그냥 장난치고 있는 거니까.”당황한 주인혁이 해명하는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일부러 머리를 살짝 넘기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전 원래 미모와 선량한 마음을 겸비한 작은 요정인데요? 이분들 말이 틀린 게 아니에요!”고은서의 농담 섞인 자기 자랑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고 주인혁은 민
스포츠 웨어를 입고 머리를 윤기 나게 빗은 마치 작은 부잣집 도련님 같은 남자는 바로 원지훈이었다.그는 지금 두 명의 허술해 보이는 남자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대나무 숲 쪽으로 몸을 숨겼다.“그 고씨네 친구 몇 명이 여기서 사진을 찍으려 한다는데 내가 따라오지 않을 수 있겠어?”원지훈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조급해하지 마. 너희들이 내 일을 처리해 주면 내가 클럽 쏠 테니까.”“무슨 일인데?”그중 한 사람이 물었다.“그 애를 어떻게든 호수로 밀어 넣어.”“뭐라고? 사람을 해치는 건 불법이잖아.”“뭐가 불법이야!”원지훈은 그 사람을 발로 차며 말했다.“난 그냥 너희들이 걔를 밀어 넣기만 하면 곧바로 구해낼 거야!”“흐흐, 알겠어. 이거 미녀를 구하는 영웅 연출인 거지? 미녀를 구해낸 후에는 인공호흡도 해주고 호텔에 데려가서 옷도 갈아입히고 몸도 녹여주고...”남자가 점점 더 지나치게 말했지만 원지훈은 부정하지 않고 담배꽁초를 밟아 껐다.“내가 몇 날 며칠을 공을 들였는데 전혀 반응이 없잖아. 그래서 좀 더 강력한 방법을 쓰려고.”“기억해. 반드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인하고 사고처럼 보이게 밀쳐야 해. 그래야 믿을 수 있으니까.”원지훈이 당부했다.“문제없어. 깔끔하게 처리해 줄게.”그들은 계획을 마친 후, 의기양양하게 대나무 숲을 떠났다.고은서는 그제서야 몸을 숨긴 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지난번에 고은혜가 원지훈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을 봤을 때부터 의심스러웠다. 알고 보니 원지훈이 진짜로 속임수를 쓰려 했던 것이다.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면 원지훈에게 들킬까 봐 고은서는 화장실로 다시 돌아갔다.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단은숙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그전에 곽승재가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너 할 말 없어?]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왜 내가 당신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곽승재의 메시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고은서는 단은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때 주인혁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고 고은서는 화장실에서 나왔다.주인혁은 약간 당황한 듯 설명했다.“너무 오래 안 나와서 길을 잃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와봤어요.”고은서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방금 전화 받느라 좀 늦어졌어요. 가요.”촬영 구역과 바비큐 구역이 다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고은서는 원지훈과 고은혜 일행을 마주치지 않았다.그동안 KK와 다른 이들은 고기를 굽고 있었고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과자를 먹고 맥주를 마시며 또 다른 누군가는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분위기는 가볍고 자유로웠다.“맥주 한잔할래요?”주인혁이 묻자 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가 차를 몰고 와서요.”어젯밤의 술 취한 경험이 유쾌하지 않았기에 고은서는 조심하기로 했다.주인혁은 그녀에게 신선한 과일 주스를 건넸고 자신도 한 병을 들고 잔디에 함께 앉았다.고은서는 잠시 감상에 잠겼다.“젊음이란 참 좋네요. 자유롭게 꿈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그러자 주인혁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누님도 충분히 젊어요. 언제든지 자신의 꿈을 추구할 수 있죠.”고은서는 살짝 웃으며 생각했다.‘내 꿈이 뭐였더라?’어릴 땐 그녀의 엄마처럼 조향사가 되고 싶었고 좀 더 커서는 드럼에 관심이 생겨 드러머가 되고 싶었다. 대학에서는 금융을 전공하면서 최고의 투자 전문가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다.하지만 결국 이 모든 꿈을 포기하고 고은서는 곽승재를 쫓아다니며 그가 싫어하는 ‘GS 그룹 사모님'이 되려고 애썼다.그렇게 결국 정신 병원에서 비참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고은서가 잠시 멍해지자 주인혁은 그녀가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다고 오해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관련된 뉴스를 좀 봤는데 정말 마음이 힘들다면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요. 오늘 부른 건 누나가 마음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니까.”고은서는 주인혁의 맑고 순수한 눈빛을 보며 진심 어린 위로에 감사함을 느꼈다.햇살이 나무 틈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고은서는 손을 들어 이마
남자가 마침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는 정장을 입고 있었고 키도 크고 다리도 길어 강력한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다. 남자의 각진 얼굴은 조명 아래에서 더욱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바로 곽승재였다.그의 옆에는 주민기가 함께 정장을 입고 따라오고 있었고 두 사람은 레스토랑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꼈는지 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주민기도 그녀를 보고 예의 있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들은 이곳에서 만찬 약속이 있는 것 같았다.고은서도 주민기에게 미소로 인사했고 곽승재는 무시한 채 젊은이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와, 저 남자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어. 혹시 나한테 말 걸려는 거 아닐까?”옆에 있던 여자가 긴장하면서도 설레는 목소리로 친구에게 말했다.고은서가 보니 곽승재는 정말로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곧 그는 고은서의 앞에 멈춰 섰다.“또 술 마셨어?”곽승재는 기분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러자 고은서는 가볍게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곽승재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까 그 여자는 곽승재가 자신을 보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친구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고은서는 속으로 생각했다.‘뭐가 그렇게 멋지다고... 결국엔 쓰레기 같은 남자인데.’주인혁은 곽승재를 알고 있었고 어젯밤의 소문도 본 터라 오해를 사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말했다.“곽 대표님, 누님은 맥주 두 잔밖에 안 마셨어요. 취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이제 곧 집으로 모셔다드리려고 합니다.”이내 검은 눈동자를 주인혁에게로 돌리더니 곽승재는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는 다른 사람이 데려다줄 필요가 없습니다.”주변에 있던 밴드 멤버들은 곽승재가 ‘내 아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그들은 고은서가 결혼한 줄은 알았지만 그녀의 남편이 이렇게 잘생기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그와 함께 서 있으니 그들은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평소에 온화한 성격의 주인혁이 진심으로 화를 낸 것을 보고 그의 친구들은 서둘러 말을 멈췄다....차 안에서 고은서는 곽승재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등지고 앉았다.곽승재도 아무 말 없이 있었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참으려고 애쓰는 듯이 말이다.아마도 주인혁과 함께 밥을 먹은 이유에 대해 그녀가 설명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제 곧 이혼할 예정이기도 하고 정상적인 부부 관계였더라도 친구를 사귀는 것을 간섭할 수는 없기에 고은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예원 별장에 도착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이미숙은 그녀를 보자마자 안도한 듯 말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대표님께서 나가실 때 얼굴이 너무 안 좋아서 저는 말도 못 걸겠더라고요.”고은서는 말의 핵심을 잡아챘다.“그 사람이 집에 다녀갔었어요?”“네. 한 6시쯤에... 대표님.”이미숙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곽승재가 집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급히 인사했다.고은서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모임에 가야 하지 않아?”‘주 비서님께서 분명히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하지만 곽승재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는커녕 긴 다리를 뻗어 계단을 올라갔다.분명히 고은서의 의견을 무시하고 억지로 그녀를 집에 데려온 건 곽승재였는데 이제는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 같았다.정말 어이가 없었다.“대표님과 함께 오셨나요?”이미숙이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친구들이랑 밥 먹고 나오다가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났어요.”이미숙은 중얼거렸다.“대표님께서 아까 집에 오셨을 때 제가 모임이 있으시냐 물었거든요? 그때는 없다고 하셨는데.”“아마도 급한 일이 생겼겠죠.”고은서는 대답했다.“아줌마, 볼일 보세요. 저는 방으로 가서 쉴게요.”고은서가 침실로 돌아왔을 때, 귀비 의자에 앉아있는 곽승재는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