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더 이상 대화를 끌지 않고 말했다.“곽승재에게 임신 소식을 전할 생각 없어. 아이를 지울 생각이지만 지우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 만약 곽승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네가 그 어떤 것도 부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어젯밤에 곽승재는 그녀에게 마음이 생겼다면서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해왔다.임신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혼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었다. 어쩌면 양가 어르신들을 내세워 그녀를 다시 예원 별장으로 들어가게 할지도 몰랐다.그래서 고은서는 민시후가 이 상황을 도와주길 바랐다.“쯧. 이렇게까지 이혼하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아이까지 생겼는데 곽승재에게 알리지 않는 거야?”“그래서 도와줄 거야? 말 거야?”고은서가 물었다.“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을 거야. 나한테 좋은 점은 뭐야?”민시후가 흥미롭게 물었다.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답했다.“좋은 점은 없어. 하지만 네가 날 도와주지 않는다면 난 송민아에게 솔직하게 네 아이가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할 거야.”“고은서, 지금 협박하는 거야?”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지금 누가 누굴 도와주는지는 분명히 해야 하지 않아?”고은서도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민 도련님, 서로한테 나쁠 게 없는 제안 아니야? 지금까지 계속 나를 이용해서 송민아를 밀어내고 있잖아. 전에 이혼하는 거 도와주겠다며? 이런 비슷한 방법을 사용할 생각 아니었어?”민시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정말 교활한 여자네. 분명 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서 주도권을 잡고 있네.’민시후도 그럴 계획이었다.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민시후는 더 이상 고은서와 말싸움하지 않고 답했다.“알았어. 그럼 큰마음 먹고 이번만 도와주도록 하지.”“미리 말할 게 있어.”고은서가 요구했다.“송민아가 혼자 오해하는 건 해명하지 않을 거지만 네 다른 가족이나 친구들이 찾아와서 묻는다면 거짓말할 수는 없어.”‘송민아가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한다면 더
GS 그룹의 몇몇 임원들의 얼굴에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곽승재는 지금까지 회의 중간에 멈춘 적이 없었다. 답답해하는 그의 표정으로 임원들은 얼마나 큰 문제에 봉착한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다.주민기 만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컴퓨터와 서류를 챙겨 곽승재를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주민기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곽승재가 고은서의 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어제 오후, 스케줄이 많던 곽승재는 전화 한 통 한 후 기사도 대동하지 않고 직접 운전하여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갈 때는 절박한 표정이었지만 오늘 아침 사무실에 온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로 인해 주민기는 혹시나 괜한 화를 입을까 봐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안색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큰 화는 내지 않으셔서 다행이네. 심적으로는 큰 동요가 없으신가 보네.’곽승재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며 주민기가 차분하게 말했다.“대표님, 잠시 밖에 다녀와야겠습니다.”곽승재가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얼마나 걸리는데요? 어디 가요?”“XX 호텔이요.”익숙한 호텔 이름에 곽승재는 손을 떼고 주민기를 돌아보며 물었다.“민기 씨가 거긴 왜 가죠?”주민기가 시선을 떨구며 답했다.“사모님께서 지난번에 M국에서 물건을 많이 사 오셨는데 노숙자들을 피하느라 전부 바닥에 떨어뜨리셨습니다. 그때 제가 물건을 챙겨서 사모님한테 돌려드렸는데 오늘 짐을 정리하다 보니 빠진 물건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사모님한테 전달해 드리려고요.”“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많지 않나요?”곽승재는 별다른 표정의 동요 없이 물었다.“네. 야근해도 못 끝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 급하게 필요하신 물건이면 어떡하죠?”곽승재의 얼굴에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무슨 물건인데 오늘 꼭 전해줘야 하죠?”“포장을 보니 세안기 아니면 미용기기 같습니다. 여자들은 미용에 관심이 많지 않습니까. 사셨으니 급하게 쓰실 물건인 것 같아 오늘 전달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훤칠한 키에 복도의 불빛이 곽승재 머리 위에 비치자 그의 이목구비는 한결 더 깊어 보였다.그는 어젯밤 그녀가 가져다준 검은색 양복에 셔츠를 입고 있었다. 구석에 오래 눌려 있어서 그런지 옷깃이 평소보다는 빳빳하지 않았다.‘평소 이미지에 엄청 신경 쓰지 않았나? 사무실에 드레스룸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다른 옷으로 안 갈아입은 거지?’“뭐했길래 이 시간까지 자?”곽승재의 낮은 목소리가 고은서의 주의를 끌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물었다.“무슨 일이야?”곽승재는 잘 포장된 쇼핑백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민기 씨가 M국에 있을 때 이걸 당신한테 전해주는 걸 빼먹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해주러 왔어.”고은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출발할 때 다 주지 않았나? 뭔가 빠진 게 있었나?’쇼핑백을 받아본 고은서는 그 물건을 샀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날 뭘 많이 샀는데 증정품인가?’고은서는 물건을 건네받고 답했다.“고마워. 물건은 잘 받았으니 당신도 잘 가.”고은서의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곽승재는 방에 들어가 버젓이 소파에 앉았다.“자기만 하느라 저녁도 못 먹었지? 나도 마침 배고프니 같이 뭐라도 먹자.”“그럴 필요 없어. 조금 있다 룸서비스 부르면 돼.”“그럼 하나 더 주문해. 나도 여기서 같이 먹게.”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지금 뭐 하자는 거야?”곽승재는 동요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저녁 먹으려고. 뭘 더 할 게 있어?”“좋아. 그렇게 한가하면 이혼 서류에 사인이나 해.”고은서가 다시 말을 꺼냈다.“고은서, 그거 말고는 나한테 할 말 없어?”곽승재가 싸늘히 물었다.“우리가 원수야? 나한테 시선조차 주지 않네?”고은서가 답했다.“지금은 아니지. 하지만 계속 이렇게 미루기만 한다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고은서의 말에 곽승재는 말문이 막혔다.“집 사려고 한다면서? 시그니엘도 GS 그룹 산업이야. 같이 밥 먹으면서 한 채 골라.”곽승재가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
고은서는 빠른 걸음으로 곽승재에게 다가가서 그가 들고 있던 종이를 홱 낚아챘다.“왜 남의 물건을 뒤적거려! 정말 교양 없어!”서슬 퍼런 고은서의 반응에 곽승재 눈가에는 의심이 서렸다.“전단지 본 것뿐인데 왜 그래? 뭐 못 볼 거라도 있어?”고은서는 그제야 손에 든 종이가 불임 치료 광고지라는 것을 눈치챘다.병원에서 나올 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에 쥐여준 전단지 같았다.혼란스러웠던 고은서는 손에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 신경 쓰지 않고 돌아와서 바로 탁자 위에 내동댕이쳤다.곽승재가 본 것이 전단지라는것을 안 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곽승재는 그녀의 가방을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반응이 왜 이렇게 날카로워? 내가 본 게 뭔 줄 알았는데?”곽승재는 고은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고은서도 자신의 반응이 조금 과격했다는 것을 알고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답했다.“아무 생각도 안 했어. 그냥 당신이 내 물건 함부로 만지는 게 싫었어.”곽승재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이런 불임 치료 전단지는 병원 주위에서 나눠주는데 오늘 병원 갔었어? 어디 아파?”“지연이 찾으러 간 것뿐이야. 됐지?”고은서는 약간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밥 먹자며? 가자!”곽승재는 고은서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어디가 이상하냐 물으면 정확히 답하기 어려웠다.고은서의 찌푸린 얼굴에 곽승재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와 함께 방을 나섰다.곽승재는 골목에 숨겨진 한정식집을 찾아갔다.작은 다리 아래 물이 흐르고 주위에는 각종 화초가 즐비했다. 방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지붕은 볏짚으로 쌓아뒀는데 아늑한 전원 스타일의 가게였다.두 사람은 반개방형 룸으로 향했다. 밥을 먹으면서 냇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볼 수 있는 룸이었다.물고기들에게 관심을 가진 고은서는 미끼를 던지며 먹이를 주었다.곽승재는 여유롭게 그녀의 옆에 서서 입을 열었다.“전에 고객이랑 한 번 왔었는데 음식이 괜찮더라고. 너도 좋아할 거야.”고은서가 한 발 앞
“고은서, 네가 선물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날 외숙모가 꺼냈을 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은 거야?”곽승재는 넥타이핀을 처음 착용한 날을 떠올렸다. 당시 육현석은 고은서의 취향이 아닌 것 같다 했지만 날카로운 그의 시선에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었다.‘육현석의 말이 맞았네. 이 넥타이핀은 고은서가 직접 고른 게 아니네. 하긴, 나한테 선물 사준 적도 없는데... 나만 바보처럼 은서가 기뻐할 줄 알고 어젯밤 가져다준 셔츠를 입고 은서가 선물했다고 생각한 넥타이핀을 한 거네.’“굳이 나서서 해명할 필요 있어?”고은서가 싸늘히 말을 이었다.“전에도 당신한테 많이 보냈는데 한 번도 받은 적 없잖아. 비서가 거절하게 하든 아니면 프런트 데스크에서 처리하게 해놓고 당신이 정말 이 핀을 사용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말문이 막혔다.예전에 그는 고은서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그녀가 선물한 물건을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고은서의 말에 그는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곽승재의 안색이 변했지만 고은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곽승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곽승재가 룸을 나와 마당에 도착할 때까지 고은서는 그를 다시 부르지도 붙잡지도 않았다.얼굴을 굳힌 곽승재는 그대로 운전하여 자리를 벗어났다.고은서는 그 후 며칠동안 곽승재를 볼 수 없었다.오히려 주민기가 전화를 걸어 혹시 곽승재와 싸웠는지 조심스레 물어보며 기분이 매우 좋지 않으니 혹시 한번 와주면 안 되냐고 묻기도 했다.고은서는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기분 나빠야 할 사람이 누군데. 이혼 서류에 사인 안 한 건 그렇다 치고 시그니엘도 물 건너갔잖아!’뱃속에는 처리해야 할 시한폭탄도 있었다.월요일, 고은서는 ZY 그룹에서 입사 절차를 밟고 있었다.민시후는 그녀에게 굳이 매일 출근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투자은행 프로젝트만 담당하면 된다고 했다.마음이 상한 송민아는 며칠 휴가를 내어 자리
서인수가 사람을 시켜 고은서를 미행하고 납치했던 일로 인해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각별히 경계하고 있었다.하여 고은서는 프런트에 가서 CCTV를 통해 그 남자가 자신을 본 게 맞는지 어느 룸에서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직원은 CCTV 확인하는 것은 허락했지만 그 남자가 어느 룸으로 가는지는 고객의 프라이버시라는 이유로 밝힐 수 없다고 했다.직원과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민시후가 걸어왔다.“왜 그래? 레스토랑에서 밥 먹고 있던 거 아니었어? 여기서 뭐 해?”고은서는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민시후에게 얘기했다.민시후가 답했다.“일단 로비 CCTV 보고 결정하자.”고은서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영상 속, 주류 구역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고 이내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지나갔다.그 남자는 술 한 잔을 꺼내 무심하게 식당을 훑어보고는 이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눈에 띄게 고은서에게 머물러 있었다.“이 사람이야.”고은서가 부랴부랴 말했다.민시후는 영상을 확인하고는 의아함을 드러내며 직원에게 화면을 확대하라고 했다.잘못 본 게 아님을 확인한 민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끄셔도 됩니다.”고은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왜 끄라고 해? 아는 사람이야?”민시후는 그녀에게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시후야.”맞은편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비록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고은서는 조금 전 그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해성에 왔어?”민시후가 물었다.“응. 볼일이 있어서.”“어느 룸에 있어?”상대방이 룸 번호를 알려주자 민시후를 전화를 끊고 고은서에게 말했다.“가자. 같이 가서 만나.”“누군데?”고은서가 물었다.“송민아의 오빠, 송민준.”송민아의 오빠라는 말에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적어도 다른 원수는 아니었으니 말이다.“너무 일찍 마음 놓지 말고.”민시후가 평소와는 다르게 일깨워주었다.“송민아랑은 다르게 만만치 않은 사람이야. 마음의
송민준이 민시후의 제안을 거절했다.“됐어. 일이 있어서 먼저 가야 돼.”민시후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답했다.“그럼 다음에 봐.”송민준이 고은서를 한번 보고는 민시후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몇 번이나 나한테 네가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소연하더라. 혹시 은서 씨야?”고은서는 송민준과 민시후의 사이가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감정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물을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송민아 앞에서는 연기할 수 있었지만 송민준 앞에서는 뭔가 내키지 않았다.“민준 씨, 저랑 시후는...”“맞아.”고은서가 해명하기도 전에 민시후가 입을 열었다.“아직 완전히 받아준 건 아니지만 너도 잘 알잖아. 이 사람한테 마음 없었으면 내 옆에 두지도 않았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있기 부끄러웠다.“민준아, 양가 어르신들한테 잘 좀 얘기해줘. 난 정말 네 동생한테 이성적인 감정이 없어. 얼른 이 정략결혼을 포기하게 만들어줘.”민시후는 조금 짜증 섞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송민준의 시선이 고은서에게로 향했다.“은서 씨, 시후 마음 알고 있어요?”송민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은 곽승재 못지않았다.비록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민시후에게 미움을 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거짓으로 말을 꾸몄다.“시후 마음 받아주지 않았어요. 시후랑 민아 씨 사이에 끼고 싶지도 않아요.”민시후의 말을 부인하지도 않으면서 본인의 입장을 밝힌 고은서였다.송민준은 별다른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민시후에게 말했다.“돌아가서 민아 설득해 볼게. 어려서부터 오냐오냐하면서 키우고 어른들의 지지를 받는 혼약이다 보니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네. 먼저 갈게.”말을 마친 송민준이 자리를 뜨자 밖에 있던 두 경호원도 그의 뒤를 따랐다.고은서와 민시후도 예약한 룸으로 돌아가려 했다.“전에 송민준 만난 적 있어?”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만난 적 있었으면 CCTV 확인할 리가 있었겠어?
익숙한 우드향이 코끝으로 밀려왔다. 고은서가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곽승재였다.“괜찮아?”곽승재의 깊은 눈동자에는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지만 그의 말투에는 알아채기 힘든 관심이 어려있었다.고은서가 몸을 바로 세우며 답했다.“괜찮아.”“어이구, 곽 대표 아닌가. 우연이네. 놀러 왔어?”민시후가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곽승재는 고은서와 불과 반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민시후를 보며 그녀를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대표님. 얼른 와서 한잔하셔야죠!”마침 룸 쪽에서 동료가 고개를 내밀며 민시후를 불렀다.“가요.”민시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같이 갈래?”“그래.”고은서가 막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 곽승재가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어깨를 감싸안으며 차가운 말투로 민시후에게 말했다.“은서는 술 못 마시니 너랑 같이 안 갈 거야.”“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퉁명스럽게 곽승재를 뿌리쳤다.“상관하지 마. 누가 멋대로 결정하래.”곽승재는 자신을 피하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마음의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지난번 같이 밥 먹으려고 한 자리에서 그를 화나게 하고 그녀는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런데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더니 민시후와 함께 가기 위해 그를 밀어내고 있었으니 화가 안 날 리 없었다.“고은서, 네 주량을 몰라? 나한테 화풀이하려고 굳이 낯선 사람들이랑 술 마셔야 해?”“곽 대표, 그건 아니야.”민시후가 도발적인 말투로 답했다.“오늘 부서 모임이야. 고 매니저도 미래 투자은행의 일원으로 참석한 건데 낯선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네가 네 와이프를 아낀다면 우리랑 함께해도 돼. 누가 술을 권하면 네가 대신 마시면 되잖아. 어때?”‘지금 강 건너 불구경하겠다는 건가? 곽승재더러 나 대신 술을 마시라고 하다니. 정말 민시후 답네.’고은서가 거절하려고 할 때 곽승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러지 뭐.”“가시죠.”민시후가 곽승재를 안내했다.“승재야.”그때 등 뒤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