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재가 다쳤다고 해서 한 번 와봤어. 오해하지 마, 은서 씨.”백유미는 뭔가 떠오른 것처럼 황급히 설명했다.“승재가 사인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승재 사무실에 갔다가 주 비서에게서 승재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어. 승재가 먼저 얘기해준 건 아니야!”‘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오해하지 말라는 건지.’고은서는 입꼬리를 당겼다.“백유미 씨, 건의 하나 할게. 오해받고 싶지 않으면 오해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아. 예를 들면, 이 남자에게 아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 그의 아내가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은 상황에 이렇게 집에 찾아오지 마. 집에 오게 됐다고 해도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켜야지. 다른 사람의 남편이랑 같이 앉아있을 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어?”백유미는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히더니 서둘러 소파 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은서 씨, 난...”“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네.”고은서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나랑 고은서 씨는 성 떼고 이름만 부를 정도로 친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날 사모님이라고 부를 생각이 없다면 고은서 씨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는데.”“고은서, 적당히 해.”곽승재가 경고했다.‘벌써 편을 들어준다고?’고은서는 피식 웃었다.“내가 뭐 틀린 얘기 했어? 왜 적당히 하라는 건데?”“승재야, 은서 씨... 고은서 씨 말이 맞아. 내가 그런 것까지는 신경을 못 썼어.”백유미는 무안함을 느끼면서도 부드럽게 화를 내려는 곽승재를 달랬다.“고은서 씨, 언짢게 했다면 미안해. 나 지금 당장 갈게.”백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고은서가 그녀를 말렸다.“가야 할 사람은 나니까.”“고은서!”곽승재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그러나 고은서는 그를 무시하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이틀 전 있었던 교통사고 때문에 고은서는 택시를 탔다.외할아버지 고준석은 교외 쪽에서 살고 있어서 차로 한 시간 반은 가야 했다.마당에서 정정한 모습으로 꽃에 물을 주고 있는 외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검은색 정장에 훤칠한 키를 가진 곽승재가 안으로 들어왔다.‘곽승재가 여긴 웬일이지?’고은서를 본 곽승재의 눈빛이 살짝 차가웠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이 말이다.‘왜 저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걸까? 설마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건가?’“외할아버님.”고은서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곽승재가 예의 바르게 고준석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승재 왔니? 배고프지? 얼른 앉아서 밥 먹거라. 안 그래도 널 기다리고 있었다.”고준석은 너그럽게 그를 불렀다.“넌 은서 옆에 앉거라. 네가 좋아하는 갈치찜이 마침 거기에 있네.”그 말에 고은서는 갈치찜을 식탁 중앙에 놓으며 말했다.“맞은편에 앉아.”“은서야, 뭐 하는 거야? 예의 없게.”고준석은 고은서를 나무란 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곽승재에게 말했다.“승재야, 내가 은서를 오냐오냐 키워서 조금 제멋대로다. 평소에는 네가 많이 봐주거라. 따지지 말고. 은서가 그래도 마음씨는 착하니까.”곽승재는 고준석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고은서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도 알고 있습니다, 외할아버님.”곽승재는 어릴 때부터 예의범절 교육을 엄격히 받고 자란 사람이기에 고은서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녀의 외할아버지 앞에서 선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물론 예외도 있었다.전생에 그는 백유미를 위해 고은서를 억지로 정신병원에 보냈고, 고은서의 외할아버지가 사정할 때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었다.“외할아버님께서 제대로 가르치시지 못했으니 제가 가르치겠습니다.”전생의 일을 떠올린 고은서는 순간 입맛이 떨어졌다.그녀는 입맛이 없는 것처럼 음식을 뒤적였다.고준석과 곽승재는 시사에 관해 이야기했다.“참, 은서야.”고준석은 문득 뭔가 떠올랐다.“저번에 네가 만들었던 그 향수 샘플, 많은 고객들이 좋아했어. 나한테 언제부터 양산하냐고 묻더라니까!”“외할아버지, 저 그거 그냥 심심해서 만든 거예요. 그리고 재료도 꽤 보기 드문 것들이잖아요. 어떻게 양산할 수 있겠어요?”
“네가 봐!”곽승재가 그녀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그것을 건네받아 보니 CCTV 영상이었다.장소를 보니 차고였는데 두 명의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구석 쪽에서 수상쩍게 기웃거리고 있었다.잠시 뒤, 정장 차림의 백유미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녀가 차 키를 누르자마자 두 남자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한 명은 백유미의 입을 막고 끌고 갔고 다른 한 명은 차 문을 열고 백유미를 차에 태운 뒤 떠났다.“백유미 씨 어디로 끌려갔는데? 뭘 찾았어?”고은서의 진지한 표정에 곽승재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그들은 백유미를 잡아서 차에 태웠어. CCTV를 보고 있던 경비원이 마침 이상함을 발견하고 그들을 막았어.”고은서는 웃었다.“웃기네. 두 사람이 백유미 씨를 잡으러 갔는데 하필 CCTV가 있는 곳을 골라서 기다리다가 꼬리를 잡혔다고?”“고은서, 너 그게 무슨 태도야?”곽승재는 화를 냈다.“경비원이 백유미를 차에서 구출했을 때 백유미는 입이 테이프로 막아졌고 두 손발이 묶인 상태였어. 제때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곽승재는 말하면서 사진 몇 개를 던졌다.“두 범인은 한 여자가 그들에게 돈과 사진을 건네며 사주했다고 했어. 네가 외할아버지 집에 가던 길에 운전기사는 주유하러 갔고 넌 편의점에 들렀어. 그리고 그 두 남자가 마침 그곳에 나타났어. 이게 다 우연이라고?”사진 속 두 명의 모자를 쓴, CCTV 속 남자들과 비슷한 몸매의 남자들은 그녀와 같은 편의점에 있었다.고은서는 아침을 먹지 않아서 먹을 걸 사러 편의점에 들른 거였기에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백유미가 이런 짓을 하면서 그녀를 모함할 줄은 몰랐다.“아침에 백유미를 모욕한 거로는 부족해서 점심에 사람을 시켜 납치한 거야? 이거 해명해야 하지 않겠어?”곽승재가 차갑게 물었다.고은서는 우스웠다.“내가 점쟁이야? 아니면 예지 능력이라도 있어? 이 두 남자가 거기에 있을지 내가 어떻게 알고 그들에게 백유미를 납치하라고 사주한단 말이야?
그러나 고은서는 웃으면서 곧 눈물을 흘렸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맞고, 욕을 먹고, 시달렸던 화면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를 책임졌던 간병인은 아주 건장해서 단번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그녀를 끌고 갈 수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식사인 묽은 죽도 단번에 엎을 수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약을 먹기를 거부할 때는 그녀의 입을 틀어쥐고 억지로 약을 먹였다.고은서는 정신병원에서 곽승재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간병인을 시켜 괴롭힌 건 줄로 알았다.그런데 전생의 그 악마 같은 여자는 다름 아닌 백유미의 친척이었다.그러니 그녀가 전생에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살아갔던 건 전부 백유미의 짓이었다.자신이 받았던 학대와 위암으로 인한 고통을 떠올린 고은서는 지금 당장 백유미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백유미는 어떻게 그렇게 악랄할 수 있었던 걸까?곽승재의 사랑을 그렇게 듬뿍 받았으면서 말이다.곽승재는 백유미를 위해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기까지 했는데 백유미는 왜 그녀를 가만두지 못하고 괴롭힌 걸까?곽승재는 바닥에 쓰러진 고은서를 바라봤다.비록 고은서가 먼저 음성통화를 할 거라고 했지만 곽승재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그녀를 따라왔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고은서가 백유미의 목을 조르는 게 보였다.엉망으로 흩어진 과일 사이에 누워있는 고은서는 공허한 눈빛으로 마치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나른하게 바닥에 누워있었다.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마치 아주 괴롭고 비참한 일을 겪은 사람처럼 그녀의 작은 얼굴에서 끝없는 증오와 원망이 보였다.이상하게도 곽승재는 그녀의 미친 짓에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승재...”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려고 할 때 백유미가 힘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고은서 때문에 목이 빨개진 백유미를 본 곽승재는 넋이 나가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얼른 가서 약상자 가져오세요.”여자는 서둘러 약상자를 찾으러 갔다.곽승재는 백유미를 부축해
곽승재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고은서는 이미 떠난 뒤였다.“곽 대표님, 사모님께서는 택시를 타고 먼저 가셨습니다.”기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깨물다가 기사에게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자고 했다.현관에서 고은서의 신발을 본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고은서의 방문은 꽉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곽승재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다음 날, 곽승재는 헬스를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이미숙은 아침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그는 식탁 앞에 가서 앉아 위층을 힐끗 보며 말했다.“깨워서 아침 먹으라고 해요.”이미숙이 깍듯이 대답했다.“도련님, 사모님은 이미 외출하셨습니다.”외출했다고?그는 어제 일부러 고은서에게 냉정해질 시간을 주었고 오늘 아침 그녀에게 무슨 상황인지 물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아침 일찍 외출했다니.“어디로 간 거예요?”이미숙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아침도 드시지 않고 나가셨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이미숙이 말을 보탰다.곽승재는 눈썹을 치켜세웠다.“알겠어요. 볼일 보세요.”이미숙은 주방으로 들어갔고 곽승재는 주민기에게 연락했다.“어제 백유미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 조사해 봐요.”어젯밤 고은서의 반응은 너무 이상했다.비록 사과하라고 했을 때 내키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긴 했었다.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백유미를 보자 원수라도 본 듯이 군 걸까?곽승재는 자신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고은서가 백유미를 목 졸라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반응한 걸까?...고은서는 차를 타고 민시후가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화 속에서 그가 알려준 병실에 도착했다.민시후가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침실, 간호실뿐만 아니라 응접실도 있었고 응접실 안에는 초대형 TV, 정수기, 가죽 소파가 있었다.호텔 스위트룸에 비견
민시후는 일부러 뜸을 들다가 말했다.“당신과 협력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저를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겨우 한 번 본 여자가 갑자기 그와 협력하자고 한다. 그것도 라이벌의 아내가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고은서 역시 그를 이해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만약 저희 목표가 일치한다고 하면요?”“네? 고은서 씨 목표도 곽승재를 무너뜨리는 건가요?”민시후는 또 흥미가 생겼다.“곽승재의 다른 사업은 모르겠지만 판주 투자은행은 철저히 쓰러뜨릴 거예요.”판주 투자은행은 백유미가 책임졌었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로 고은서는 자신이 백유미와 싸우지 않는다고 해도 백유미가 절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백유미와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전생에 겪었던 모든 것들을 되갚아줄 것이다.“제가 듣기로 고은서 씨는 곽승재 씨를 몹시 사랑한다면서요? 몇 년이나 짝사랑한 끝에 겨우 결혼했는데 왜 갑자기 그와 척을 진다는 거죠?”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확실히 그녀는 곽승재와 정말 대립해야 할지 망설였었다.그러나 어젯밤 곽승재에게 이혼 후 백유미와 만날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그래서 고은서 또한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전생에 백유미가 정신병원에까지 손을 써서 고은서를 괴롭히게 놔둔 곽승재는 공범이었다.“민시후 씨, 전 오늘 성의를 가지고 찾아온 겁니다.”고은서가 말했다.“200억이 큰 액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대로 민시후 씨 손에 들어갈 거예요. 전 그 뒤로 투자은행 업무만 책임지고 민시후 씨의 영업 기밀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봐도 민시후 씨가 손해볼 일은 없죠. 혹시 민시후 씨는 이게 곽승재가 파놓은 함정일까 봐 저랑 협력할 배짱이 없는 겁니까?”“제 승부욕을 자극하시네요. 재밌군요!”민시후는 흥미를 느꼈다.“고은서 씨, 전 우리의 협력에 관심이 매우 많아요. 그러면 고은서 씨가 명운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달
고은서가 이메일을 열었을 때 안에는 전에 그녀가 이력서를 넣었던 회사에서 답장이 와 있었다.그녀는 대학 시절 금융 투자분석사 자격증을 땄었고 그로 인해 투자회사에서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다.두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고, 다른 두 회사는 그녀를 채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력이 없었기에 월급이 다른 투자자들보다는 조금 낮았다.고은서는 그 회사들에 간단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전에 그녀는 회사에 다니며 자신의 전공을 살려볼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민시후와 협력하기로 했으니 당분간은 다른 회사로 갈 수 없었다.답장을 보낸 뒤 고은서는 명운 자료를 열었다.명운은 최근 몇 년 동안 비교적 빠르게 발전한 고량주 양조장으로 오랜 역사와 무형 문화 유산이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명성을 얻었다.고은서가 기억하기론 전생에 명운은 PE를 통해 상장한 뒤 시가총액이 빠르게 상승하여 이로 인해 판주 투자은행이 큰돈을 벌었었다.좋은 프로젝트를 따고 싶은 회사는 많았다.민시후도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자금이 많고 통도 큰 GS 그룹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전생에 민시후도 아마 경쟁에 참여했지만 패배했을 것이다.고은서는 당시 곽승재에게만 정신이 팔렸었기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신경 써 본 적은 없다.지금 그녀가 이 프로젝트를 얻으려면 판주보다 더 유리한 가격을 제시해야 하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가치를 넘으면 안 되었다.전생에 명운이 상장한 사실은 많은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론 기사에 판주의 투자 금액과 지분 비율이 적혀 있었다.그러나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단지 참고용으로만 써야 했고 구체적인 것은 실제 상황에 따라 분석하고 작성해야 했다.고은서는 열심히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저녁 무렵, 곽승재가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이미숙은 그를 보고 살짝 놀랐다.“도련님, 돌아오셨어요? 저녁을 드시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이미숙은 최근 곽승재가 집으로 돌아오는 횟수가 좀 잦아졌다고 생각했다.전에는 일
곽승재는 그녀가 그날의 일로 화가 나서 이혼을 제안한 것이라고 오해했다.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걸 알고 있음에도 고은서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그날이 우리의 5주년 기념일인 거 알고 있었잖아. 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왜 유미 씨랑 밥 먹으러 간 거야?”곽승재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그날? 나한테는 평소랑 다를 것 없었어.”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기념일을 챙길 필요가 있을까?모든 건 고은서의 일방적인 기대에 불과했다.“언젠가는 봐주겠지 하는 마음 하나로 기다렸던 내가 바보네.”고은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그걸 듣지 못한 곽승재는 줄곧 싸늘한 태도를 유지하며 고은서를 바라봤고 그녀는 어느새 마음을 가다듬었다.“이렇게 말다툼할 기분 아니거든? 이혼은 진심이야.”아직도 이혼으로 왈가왈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곽승재는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다.“고은서, 이혼하는 걸 제멋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정신 차려.”고은서는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왜? 하루라도 빨리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 아니었나? 그러면 여사친이랑 당당하게 만날 수 있잖아.”곽승재는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무관심한 태도가 매우 언짢았다.“이혼할지 말지는 나한테 달려있어. 할머니를 내세워서 결혼을 강요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혼? 헛소리 그만해.”“그럼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네가 날 괴롭힌 만큼 나도 똑같이 돌려줄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드디어 미쳤네.”고은서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할머니 생신까지 30일 남았어. 그날이 지나면 무조건 이혼할 거야. 더 이상 질질 끌고 싶지 않거든.”“고은서, 꿈 깨.”곽승재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너 사모님 되는 거 좋아했잖아. 그럼 내가 질릴 때까지 버티고 있으라고.”말을 마친 그는 젓가락을 뿌리치고 식탁을 떠났다.“곽승재, 너 진짜 미쳤냐?”고은서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집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만 가볼 테니까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말을 마친 고은서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송민준이 입을 열었다.“은서야, 잠시만 기다려 봐.”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부모님이 민아를 보러 곧 해성에 올 것 같아. 민아가 부모님께 네가 평소에 많이 도와준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같이 식사하고 싶다고 하셨어. 혹시 그때 시간이 되면 오지 않을래?”고은서는 송민아의 부모님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라는 말에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북성에서 지냈었고 송민아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었다.고은서는 어머니와 송민아의 아버지가 아는 사이인지 궁금해서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작은 정보라도 얻을 기회였기에 놓칠 수 없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민아를 도와준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친구끼리 서로 도와주면서 사는 거지.”송민준은 부모님이 고은서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서 시간이 되면 꼭 와달라고 부탁했다.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일 민아랑 얘기해 보고 결정할게.”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씻고 잠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가 전화를 걸어왔다. 휴대폰 벨 소리에 잠이 깬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로 연락했어?”“은서야, 설마 자고 있었던 거야? 안 자는 줄 알고 전화했어.”곽승재는 고은서가 이 시간에 자고 있을 줄 몰랐다. 평소에 그녀는 자주 밤을 새웠기 때문이었다.고은서는 눈을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피곤해서 일찍 누웠어.”그녀의 목소리가 곽승재의 귀를 간지럽혔다. 고은서가 무방비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달콤하게 들렸다.곽승재는 지난번에 호텔에서 고은서와 같이 중독된 날을 떠올렸다. 두 번 정도 하고 나니 고은서는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쓰러졌다.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날도 고은서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곽승재를
송민준은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감정은 원래 저도 모르게 생겨나는 거야. 나도 언제부터 너한테 호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네가 나랑 만난 적이 없다고 해서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한 거지. 정확히 그날부터 좋아했다는 건 아니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오빠는 나한테 있어서 그저 친구의 오빠일 뿐이야. 미안하지만 오빠를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오빠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랄게.”송민준이 씁쓸하게 웃었다.“은서야, 나한테 너무 차갑게 구는 거 아니야? 혹시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어?”고은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러나 송민준이 갑자기 호감을 느낀다고 말했을 때부터 고은서는 선을 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녀가 정색하면서 입을 열었다.“민준 오빠, 해성과 북성에서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하지만 나는 오빠가 남자로 보이지 않더라.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송민준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곽 대표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면 민시후 때문인가?”고은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다른 사람과 상관없는 일이야. 오로지 내 생각이니까 이해해 줘.”송민준이 차분하게 말했다.“은서야, 내가 갑자기 호감 있다고 해서 많이 놀랐지? 네가 나를 그저 민아의 오빠로만 보니까 답답해서 그랬던 거야. 나는 아무 감정도 없는 기계가 아니라 사랑을 꿈꾸는 남자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지금 말해봤자 의미 없긴 하지만 그래도 너한테 얘기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그가 말을 이었다.“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라도 너랑 친하게 지내다 보면 호감을 느끼게 될 거야. 만약 내가 부담스럽게 굴었다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 예전처럼 계속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고은서는 송민준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송민준은 너무 완벽한 사람이었고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그녀가 단호하게 거절해도 화내거나 욕하지 않고 이 상황
곽승재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송 대표님은 온화하지만 늘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둔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봐요? 고은서한테 특별히 신경 쓰는 것 같아서요.”그가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송민준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아름다운 여자를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곽 대표님 말대로 은서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그의 말에 곽승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고은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송민준을 쳐다보았다.송민준이 이런 상황에서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 몰랐던 것이다.예전에 송민아와 박지연이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만 송민준이 명확하게 말한 적이 없어서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서 고은서는 송민준이 평소에 잘해줄 때마다 동생의 친구여서 챙겨주는 줄 알았다.오늘 송민준이 갑자기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고 말하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민준 오빠, 그런 장난은 재미없어요. 나처럼 한번 갔다 온 여자가 어떻게 송씨 가문의 며느리를 꿈꾸겠어요?”고은서가 자신을 비꼬자 송민준이 다정하게 말했다.“은서야, 너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곽 대표님과 민시후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내가 낄 자리가 없어.”“낄 자리가 없으면 마음을 접어야죠.”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그리고 고은서는 송 대표님 같은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송민준이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곽 대표님,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곽 대표님이라고 해서 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것도 아니고요.”송민준이 말을 이었다.“은서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제가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서 그래요. 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곽승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고은서는 두 사람이 유치하게 말싸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곽승재를 향해 말했다.“바쁘니까 먼저 가 봐.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곽승재는 떠나기 싫었지만 이곳에 남아있어도 할 수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들어보니 확실히 여시은답지 않은 것 같아. 여재훈이 강박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건 아닐까?”여재훈은 여시은의 뒷배가 되어주었기에 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할 것이다. 곽승재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런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 오늘 마재경을 너무 쉽게 설득해서 그런지 찝찝한 기분이 들어.”그의 말에 고은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그러면 여시은이 지시한 게 아니라 마재경이 우리를 속이려고 그랬다는 거야? 마재경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해.”고은서가 불안해하자 곽승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추측일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경찰 측에서 조사하고 있지만 나도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생각이야. 해외 아이디를 추적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시간이 늦었으니 집까지 데려다줄게.”곽승재와 고은서가 같이 걷고 있을 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고은서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힐끔 쳐다보았다. 발신자는 곽승재의 아버지 곽현수였다.곽현수는 Y 국에 가서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씨 가문의 개업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마 귀국했거나 최근에 일어난 일을 듣게 되어서 곽승재의 책임을 물으려고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고은서가 차분하게 말했다.“나는 괜찮으니까 전화 받아.”곽승재는 굳은 표정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 한 편에서 곽현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나는 기사님한테 연락하면 되니까 먼저 가 봐.”곽승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나를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아버지한테 가보는 게 어때? 괜히 나 때문에 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할까 봐 그래.”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고은서를 혼자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