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 네가 약 발라줘!”“미안하지만 난 의사가 아니라서 그럴 의무가 없는데.”고은서가 차갑게 거절했다.곽승재는 더욱더 언짢아졌다. 조금 전까지는 초조해하면서 걱정해 주고는 곧바로 태도를 달리하다니.“의무가 없다니? 내가 누구 때문에 다쳤는지 잘 생각해 봐.”고은서는 괜히 네가 화를 내서 차를 들이받지 않았더라면 다칠 일도 없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곽승재는 끝까지 그녀와 따지고 들 태세였고 고은서는 그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겨우 약을 바르는 것이니 시간도 얼마 들지 않을 것이다.이미숙이 약상자를 들고 왔고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면봉과 알코올을 꺼냈다.“도련님, 사모님. 전 먼저 일 보러 가보겠습니다. 분부하실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이미숙이 떠나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상처를 처리해 주기 시작했다.그의 상처는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긁힌 곳이 꽤 많아 피가 많이 흘렀다.알코올을 상처에 바르니 쓰라렸다. 곽승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가만히 있었고 고은서는 살살 움직였다.“됐어.”그의 팔에 약을 다 바른 뒤 고은서는 대충 정리하고 손을 씻을 생각이었다.“이마도 해줘.”곽승재는 고은서의 불성실한 태도가 조금 불쾌했다.예전이었다면 손톱 끝이 조금 상한 거로도 야단법석을 떨었는데 오늘 이렇게 많이 다쳤는데도 고은서는 발견하지 못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이마를 힐끗 보았다. 확실히 관자놀이와 구레나룻 쪽에 상처가 있었다.유리 조각이 튀어서 난 상처인 듯했는데 이미 딱지가 앉아있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그의 상처를 치료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고은서는 그의 상처를 처리하기 쉽도록 그의 옆에 서 있었다.고은서는 그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혔고 그녀의 향기가 곽승재의 코를 간질였다.곽승재는 순간 답답함이 느껴져서 손을 뻗어 목 언저리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움직이지 마.”고은서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고정했다.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에 닿자 곽승재는
“승재가 다쳤다고 해서 한 번 와봤어. 오해하지 마, 은서 씨.”백유미는 뭔가 떠오른 것처럼 황급히 설명했다.“승재가 사인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승재 사무실에 갔다가 주 비서에게서 승재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어. 승재가 먼저 얘기해준 건 아니야!”‘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오해하지 말라는 건지.’고은서는 입꼬리를 당겼다.“백유미 씨, 건의 하나 할게. 오해받고 싶지 않으면 오해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아. 예를 들면, 이 남자에게 아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 그의 아내가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은 상황에 이렇게 집에 찾아오지 마. 집에 오게 됐다고 해도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켜야지. 다른 사람의 남편이랑 같이 앉아있을 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어?”백유미는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히더니 서둘러 소파 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은서 씨, 난...”“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네.”고은서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나랑 고은서 씨는 성 떼고 이름만 부를 정도로 친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날 사모님이라고 부를 생각이 없다면 고은서 씨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는데.”“고은서, 적당히 해.”곽승재가 경고했다.‘벌써 편을 들어준다고?’고은서는 피식 웃었다.“내가 뭐 틀린 얘기 했어? 왜 적당히 하라는 건데?”“승재야, 은서 씨... 고은서 씨 말이 맞아. 내가 그런 것까지는 신경을 못 썼어.”백유미는 무안함을 느끼면서도 부드럽게 화를 내려는 곽승재를 달랬다.“고은서 씨, 언짢게 했다면 미안해. 나 지금 당장 갈게.”백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고은서가 그녀를 말렸다.“가야 할 사람은 나니까.”“고은서!”곽승재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그러나 고은서는 그를 무시하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이틀 전 있었던 교통사고 때문에 고은서는 택시를 탔다.외할아버지 고준석은 교외 쪽에서 살고 있어서 차로 한 시간 반은 가야 했다.마당에서 정정한 모습으로 꽃에 물을 주고 있는 외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검은색 정장에 훤칠한 키를 가진 곽승재가 안으로 들어왔다.‘곽승재가 여긴 웬일이지?’고은서를 본 곽승재의 눈빛이 살짝 차가웠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이 말이다.‘왜 저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걸까? 설마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건가?’“외할아버님.”고은서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곽승재가 예의 바르게 고준석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승재 왔니? 배고프지? 얼른 앉아서 밥 먹거라. 안 그래도 널 기다리고 있었다.”고준석은 너그럽게 그를 불렀다.“넌 은서 옆에 앉거라. 네가 좋아하는 갈치찜이 마침 거기에 있네.”그 말에 고은서는 갈치찜을 식탁 중앙에 놓으며 말했다.“맞은편에 앉아.”“은서야, 뭐 하는 거야? 예의 없게.”고준석은 고은서를 나무란 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곽승재에게 말했다.“승재야, 내가 은서를 오냐오냐 키워서 조금 제멋대로다. 평소에는 네가 많이 봐주거라. 따지지 말고. 은서가 그래도 마음씨는 착하니까.”곽승재는 고준석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고은서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도 알고 있습니다, 외할아버님.”곽승재는 어릴 때부터 예의범절 교육을 엄격히 받고 자란 사람이기에 고은서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녀의 외할아버지 앞에서 선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물론 예외도 있었다.전생에 그는 백유미를 위해 고은서를 억지로 정신병원에 보냈고, 고은서의 외할아버지가 사정할 때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었다.“외할아버님께서 제대로 가르치시지 못했으니 제가 가르치겠습니다.”전생의 일을 떠올린 고은서는 순간 입맛이 떨어졌다.그녀는 입맛이 없는 것처럼 음식을 뒤적였다.고준석과 곽승재는 시사에 관해 이야기했다.“참, 은서야.”고준석은 문득 뭔가 떠올랐다.“저번에 네가 만들었던 그 향수 샘플, 많은 고객들이 좋아했어. 나한테 언제부터 양산하냐고 묻더라니까!”“외할아버지, 저 그거 그냥 심심해서 만든 거예요. 그리고 재료도 꽤 보기 드문 것들이잖아요. 어떻게 양산할 수 있겠어요?”
“네가 봐!”곽승재가 그녀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그것을 건네받아 보니 CCTV 영상이었다.장소를 보니 차고였는데 두 명의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구석 쪽에서 수상쩍게 기웃거리고 있었다.잠시 뒤, 정장 차림의 백유미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녀가 차 키를 누르자마자 두 남자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한 명은 백유미의 입을 막고 끌고 갔고 다른 한 명은 차 문을 열고 백유미를 차에 태운 뒤 떠났다.“백유미 씨 어디로 끌려갔는데? 뭘 찾았어?”고은서의 진지한 표정에 곽승재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그들은 백유미를 잡아서 차에 태웠어. CCTV를 보고 있던 경비원이 마침 이상함을 발견하고 그들을 막았어.”고은서는 웃었다.“웃기네. 두 사람이 백유미 씨를 잡으러 갔는데 하필 CCTV가 있는 곳을 골라서 기다리다가 꼬리를 잡혔다고?”“고은서, 너 그게 무슨 태도야?”곽승재는 화를 냈다.“경비원이 백유미를 차에서 구출했을 때 백유미는 입이 테이프로 막아졌고 두 손발이 묶인 상태였어. 제때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곽승재는 말하면서 사진 몇 개를 던졌다.“두 범인은 한 여자가 그들에게 돈과 사진을 건네며 사주했다고 했어. 네가 외할아버지 집에 가던 길에 운전기사는 주유하러 갔고 넌 편의점에 들렀어. 그리고 그 두 남자가 마침 그곳에 나타났어. 이게 다 우연이라고?”사진 속 두 명의 모자를 쓴, CCTV 속 남자들과 비슷한 몸매의 남자들은 그녀와 같은 편의점에 있었다.고은서는 아침을 먹지 않아서 먹을 걸 사러 편의점에 들른 거였기에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백유미가 이런 짓을 하면서 그녀를 모함할 줄은 몰랐다.“아침에 백유미를 모욕한 거로는 부족해서 점심에 사람을 시켜 납치한 거야? 이거 해명해야 하지 않겠어?”곽승재가 차갑게 물었다.고은서는 우스웠다.“내가 점쟁이야? 아니면 예지 능력이라도 있어? 이 두 남자가 거기에 있을지 내가 어떻게 알고 그들에게 백유미를 납치하라고 사주한단 말이야?
그러나 고은서는 웃으면서 곧 눈물을 흘렸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맞고, 욕을 먹고, 시달렸던 화면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를 책임졌던 간병인은 아주 건장해서 단번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그녀를 끌고 갈 수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식사인 묽은 죽도 단번에 엎을 수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약을 먹기를 거부할 때는 그녀의 입을 틀어쥐고 억지로 약을 먹였다.고은서는 정신병원에서 곽승재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간병인을 시켜 괴롭힌 건 줄로 알았다.그런데 전생의 그 악마 같은 여자는 다름 아닌 백유미의 친척이었다.그러니 그녀가 전생에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살아갔던 건 전부 백유미의 짓이었다.자신이 받았던 학대와 위암으로 인한 고통을 떠올린 고은서는 지금 당장 백유미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백유미는 어떻게 그렇게 악랄할 수 있었던 걸까?곽승재의 사랑을 그렇게 듬뿍 받았으면서 말이다.곽승재는 백유미를 위해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기까지 했는데 백유미는 왜 그녀를 가만두지 못하고 괴롭힌 걸까?곽승재는 바닥에 쓰러진 고은서를 바라봤다.비록 고은서가 먼저 음성통화를 할 거라고 했지만 곽승재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그녀를 따라왔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고은서가 백유미의 목을 조르는 게 보였다.엉망으로 흩어진 과일 사이에 누워있는 고은서는 공허한 눈빛으로 마치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나른하게 바닥에 누워있었다.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마치 아주 괴롭고 비참한 일을 겪은 사람처럼 그녀의 작은 얼굴에서 끝없는 증오와 원망이 보였다.이상하게도 곽승재는 그녀의 미친 짓에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승재...”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려고 할 때 백유미가 힘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고은서 때문에 목이 빨개진 백유미를 본 곽승재는 넋이 나가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얼른 가서 약상자 가져오세요.”여자는 서둘러 약상자를 찾으러 갔다.곽승재는 백유미를 부축해
곽승재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고은서는 이미 떠난 뒤였다.“곽 대표님, 사모님께서는 택시를 타고 먼저 가셨습니다.”기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깨물다가 기사에게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자고 했다.현관에서 고은서의 신발을 본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고은서의 방문은 꽉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곽승재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다음 날, 곽승재는 헬스를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이미숙은 아침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그는 식탁 앞에 가서 앉아 위층을 힐끗 보며 말했다.“깨워서 아침 먹으라고 해요.”이미숙이 깍듯이 대답했다.“도련님, 사모님은 이미 외출하셨습니다.”외출했다고?그는 어제 일부러 고은서에게 냉정해질 시간을 주었고 오늘 아침 그녀에게 무슨 상황인지 물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아침 일찍 외출했다니.“어디로 간 거예요?”이미숙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아침도 드시지 않고 나가셨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이미숙이 말을 보탰다.곽승재는 눈썹을 치켜세웠다.“알겠어요. 볼일 보세요.”이미숙은 주방으로 들어갔고 곽승재는 주민기에게 연락했다.“어제 백유미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 조사해 봐요.”어젯밤 고은서의 반응은 너무 이상했다.비록 사과하라고 했을 때 내키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긴 했었다.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백유미를 보자 원수라도 본 듯이 군 걸까?곽승재는 자신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고은서가 백유미를 목 졸라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반응한 걸까?...고은서는 차를 타고 민시후가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화 속에서 그가 알려준 병실에 도착했다.민시후가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침실, 간호실뿐만 아니라 응접실도 있었고 응접실 안에는 초대형 TV, 정수기, 가죽 소파가 있었다.호텔 스위트룸에 비견
민시후는 일부러 뜸을 들다가 말했다.“당신과 협력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저를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겨우 한 번 본 여자가 갑자기 그와 협력하자고 한다. 그것도 라이벌의 아내가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고은서 역시 그를 이해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만약 저희 목표가 일치한다고 하면요?”“네? 고은서 씨 목표도 곽승재를 무너뜨리는 건가요?”민시후는 또 흥미가 생겼다.“곽승재의 다른 사업은 모르겠지만 판주 투자은행은 철저히 쓰러뜨릴 거예요.”판주 투자은행은 백유미가 책임졌었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로 고은서는 자신이 백유미와 싸우지 않는다고 해도 백유미가 절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백유미와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전생에 겪었던 모든 것들을 되갚아줄 것이다.“제가 듣기로 고은서 씨는 곽승재 씨를 몹시 사랑한다면서요? 몇 년이나 짝사랑한 끝에 겨우 결혼했는데 왜 갑자기 그와 척을 진다는 거죠?”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확실히 그녀는 곽승재와 정말 대립해야 할지 망설였었다.그러나 어젯밤 곽승재에게 이혼 후 백유미와 만날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그래서 고은서 또한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전생에 백유미가 정신병원에까지 손을 써서 고은서를 괴롭히게 놔둔 곽승재는 공범이었다.“민시후 씨, 전 오늘 성의를 가지고 찾아온 겁니다.”고은서가 말했다.“200억이 큰 액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대로 민시후 씨 손에 들어갈 거예요. 전 그 뒤로 투자은행 업무만 책임지고 민시후 씨의 영업 기밀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봐도 민시후 씨가 손해볼 일은 없죠. 혹시 민시후 씨는 이게 곽승재가 파놓은 함정일까 봐 저랑 협력할 배짱이 없는 겁니까?”“제 승부욕을 자극하시네요. 재밌군요!”민시후는 흥미를 느꼈다.“고은서 씨, 전 우리의 협력에 관심이 매우 많아요. 그러면 고은서 씨가 명운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달
고은서가 이메일을 열었을 때 안에는 전에 그녀가 이력서를 넣었던 회사에서 답장이 와 있었다.그녀는 대학 시절 금융 투자분석사 자격증을 땄었고 그로 인해 투자회사에서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다.두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고, 다른 두 회사는 그녀를 채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력이 없었기에 월급이 다른 투자자들보다는 조금 낮았다.고은서는 그 회사들에 간단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전에 그녀는 회사에 다니며 자신의 전공을 살려볼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민시후와 협력하기로 했으니 당분간은 다른 회사로 갈 수 없었다.답장을 보낸 뒤 고은서는 명운 자료를 열었다.명운은 최근 몇 년 동안 비교적 빠르게 발전한 고량주 양조장으로 오랜 역사와 무형 문화 유산이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명성을 얻었다.고은서가 기억하기론 전생에 명운은 PE를 통해 상장한 뒤 시가총액이 빠르게 상승하여 이로 인해 판주 투자은행이 큰돈을 벌었었다.좋은 프로젝트를 따고 싶은 회사는 많았다.민시후도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자금이 많고 통도 큰 GS 그룹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전생에 민시후도 아마 경쟁에 참여했지만 패배했을 것이다.고은서는 당시 곽승재에게만 정신이 팔렸었기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신경 써 본 적은 없다.지금 그녀가 이 프로젝트를 얻으려면 판주보다 더 유리한 가격을 제시해야 하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가치를 넘으면 안 되었다.전생에 명운이 상장한 사실은 많은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론 기사에 판주의 투자 금액과 지분 비율이 적혀 있었다.그러나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단지 참고용으로만 써야 했고 구체적인 것은 실제 상황에 따라 분석하고 작성해야 했다.고은서는 열심히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저녁 무렵, 곽승재가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이미숙은 그를 보고 살짝 놀랐다.“도련님, 돌아오셨어요? 저녁을 드시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이미숙은 최근 곽승재가 집으로 돌아오는 횟수가 좀 잦아졌다고 생각했다.전에는 일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