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재훈은 강성 쪽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음에도 고은서가 걱정돼 잠시 짬을 내어 찾아온 것이었다. 고은서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자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그날 오후 곧바로 강성으로 돌아갔다.그 후 한동안 곽승재는 병원에서 요양하며 상처를 회복했다.고은서는 유일 투자은행에서 업무를 처리하며 바쁜 와중에도 매일 곽승재 보러 병원에 갔다. 하지만 대부분 그가 잠든 시간을 골라 방문했다.곽승재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탓에 고은서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복잡한 심정이었다.지난 생은 고은서에게 온통 고통뿐이었기에 지금 자극을 받아서 안 되는 곽승재에게 혹여 자신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처 주는 말을 쏟아낼까 두려워 의식이 있을 때는 마주치지 않기로 한 것이다.한편 곽현수의 몸도 여전히 회복 중이라 서연정은 두 병원을 오가며 바쁘게 지냈다.여재훈이 강성으로 돌아간 후 여씨 가문을 둘러싼 뉴스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여재훈의 당숙이 주주 신분을 이용해 그룹 내에서 사리사욕을 채우고 권력을 남용한 사실이 드러나 여진 그룹에서 쫓겨났다. 그의 아들이 운영하던 사업들도 탈세 및 경쟁사에 대한 악질적인 탄압 등의 불법행위로 인해 폐업 위기에 처했다.이들은 심지어 암흑 세력과 결탁하여 살인 청부까지 했으며 앞서 해성에서 벌어진 방화 사건의 배후에도 그들이 있다는 정황이 나왔다.그뿐만 아니라 여재훈은 주요 언론을 통해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그는 대외적으로 조사 결과 여시은의 친부모는 다른 사람이며 자신은 여시은과의 부녀 관계를 정식으로 해지한다고 성명했다.이 소식이 퍼지자 강성 언론은 물론 해성 언론까지 발칵 뒤집혔다.해성 언론은 여시은이 저지른 온갖 추문들을 다시 끄집어냈고 그녀의 친부모에 대한 정보까지 파헤쳤다.그 결과, 그녀의 친모는 20여 년 전 유곽의 창녀 출신이었고, 친부는 여자의 돈을 뜯어먹고 사는 기둥서방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네티즌들은 이 소식을 듣고 거침없는 반응을 보였다.[어쩐지, 명문가 출신이라더니 성격은 그야말로 악독하더라.
곽승재의 눈빛에는 순간 기쁨과 감격이 번뜩이더니 곧이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죄책감과 후회스러운 표정에 휩싸였다. 고은서는 곽승재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지금 곽승재는 말할 기력도 부족했고 감정적으로 큰 동요가 있어선 안 되는 상태였다.“움직이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은 몸이 좀 더 회복된 다음에 해.”고은서의 말에 곽승재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고,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고은서를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기 곁으로 다가와 주길, 그래서 지금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확인하길 바라는 눈빛이었다.고은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곽승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고은서의 머릿속에 전생에서 곽승재가 냉정한 얼굴로 자신에게 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했던 장면이 번쩍 떠올랐다.가슴 속 깊이 쌓인 억울함과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되살아났고 고은서는 결국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마침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왔고, 고은서는 조용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곽승재의 눈빛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눈가까지 촉촉해졌다. 고은서의 행동에서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서연정과 여재훈은 두 사람의 반응을 모두 눈여겨보고 있었다.서연정은 고은서가 감정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자신을 찾아와 이혼을 부탁하진 않았을 것이다.어머니의 입장으로서 서연정은 고은서가 자기 아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길 바라지만 같은 여자의 입장으로선 고은서가 너무나 안쓰러워 어떤 강요도 하고 싶지 않았다.여재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세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보기만 해도 누가 잘못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상처를 주었고 지금 그걸 만회하려고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여재훈은 곽승재를 높이 평가하지만 고은서가 그와 함께하고 싶지 않다면 아버지로서 언제나 딸 편에 설 생각이었다.그래서 서연정과 여재훈 두 사람 모두 아무 말 없이 모른 척 지나갔다.곽승재는 여
고은서는 퇴원을 앞둔 곽승재에게 이런 뜻밖의 사고가 생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어머니...”고은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서연정은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은서 왔구나.”그녀는 피곤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승재가 아까 점심에 잠깐 깨어나더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잠들었어.”고은서는 이미 의사에게서 그 얘기를 전해 들은 터였다.의사는 곽승재의 상처가 너무 깊어 깨어나더라도 금방 다시 의식을 잃기 일쑤였고 완전히 의식을 되찾으려면 아마 내일은 되어야 가능할 거라고 했다.“어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지난번 다치신 곳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잖아요. 건강부터 챙기셔야 해요.”고은서가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서연정은 붉어진 눈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괜찮아.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래. 승재가 어릴 때도 성격은 차가웠지만 나랑은 사이가 좋아서 무슨 일이든 나와 이야기했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승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어.”서연정의 눈은 더욱 붉어졌다.“정말 후회돼. 왜 그때 승재를 혼자 두고 떠났을까... 이혼이 어렵다는 걸 알면서 왜 굳이 외국으로 나갔던 걸까... 국내에 있었더라면 그 아이 곁을 지켜줄 수 있었을 텐데... 충분한 모정을 주었더라면 백씨 가문 약간의 은혜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았을 거고 이렇게 많은 고통도 겪지 않았을 거야...”고은서는 죄책감으로 가득 찬 서연정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서연정은 곽승재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해 지금의 불행한 상황이 생겼다고 생각하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고은서는 다가가 서연정의 손을 조용히 잡고 말없이 위로했다.한참이 지나서야 서연정의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은서야, 미안하다. 승재가 저렇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미안하고 속이 상해서... 내가 오늘 말이 좀 많았지?”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승재 씨가 이렇게 된 건 어머니 탓이 아니에요. 그리고 걱
주민기는 계속해서 고은서에게 곽승재가 정말로 이혼을 원했다면 그에게 이혼 협의에 관한 일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도 그럴 것이 GS 그룹에는 확실히 전문적인 변호사팀이 따로 있고 그 어떤 변호사도 주민기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니 말이다.“사모님, 곽 대표님이 겉으로는 사모님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사모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더 긴장하고 걱정해요.”주민기가 말을 이었다.“지난번 사모님이 민 대표님의 차를 들이받았을 때 대표님은 소식을 듣자마자 하던 일을 제쳐두고 바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사모님이 갑자기 백유미의 목을 조른 그 일도 대표님께서는 걱정돼서 제게 전말을 조사하라 했어요.”“사모님, 곽 대표님은 두 분이 이혼한 뒤로 줄곧 후회하며 괴로워했고 어떻게든 사모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했어요.”이미 말을 꺼낸 김에 주민기는 전부 털어놓기로 했다.“지난번에 사모님이 대표님께 하얀색 목베개 하나를 선물했었죠? 대표님께서 그걸 하도 아끼는 바람에 지금은 사무실 직원들 전부가 그 목베개가 사모님의 선물이라는 걸 알 정도예요.”주민기가 언급하지 않았다면 고은서는 그 일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대충 건넨 물건을 곽승재가 그렇게까지 아낀다니... 그렇다면 예전에 그녀가 건넸던 선물들을 그는 왜 그렇게 싫어하며 받지도 않았을까? 고은서의 마음을 읽은 듯 주민기가 계속하여 말했다.“예전에 사모님이 준 선물들도 곽 대표님이 말로는 싫다며 불평했지만 사실은 전부 따로 보관해 뒀어요.”“그 프런트 직원은 곽 대표님이 사모님을 싫어한다고 착각해서 제멋대로 처분한 것뿐이죠. 나중에 곽 대표님께서 그 직원이 사모님을 오해했단 걸 알고는 당장에 해고했고 프런트 전체를 재교육시켰어요. 그래서 지금은 프런트 직원 전원이 사모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됐고요.”고은서가 나중에 GS 그룹에 몇 번 들렀을 때 프런트 직원들의 태도가 지나치게 공손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주민기가 말을 이었다.“솔직히 곽 대표님이 왜
하지만 만약 곽승재가 정말 고은서를 사랑했다면 왜 그렇게 잔인하게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2년 넘게 관심이 없었을까?얼마 지나지 않아 육현석과 주민기는 소식을 듣고 왔다.간호사 한 명이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곽승재는 고강도 진정제가 투여되어 손발이 자유롭지 못했다. 칼이 심장에서 약간 빗나가 의사가 신속히 응급 처치한 덕분에 현재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모두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불행 중 다행이다.고은서의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이후 곽승재는 응급실로 옮겨져 계속 치료를 받았다. 그들은 모두 따라가서 밖에서 기다렸다.의사의 검진 후 곽승재의 몸 상태는 거의 정상에 가까웠으나 상처가 심해 앞으로 이틀 정도는 거의 깨어 있지 못할 거라고 했다.육현석은 고은서에게 집에 가서 쉬라고 권했다. 그때 경찰이 고은서에게 어젯밤 관련된 진술 조사를 요청했다. 고은서는 정신을 차리고 적극 협조했다.그 후 주민기는 경찰에게 백유미의 현재 상황을 물었다. 경찰은 백유미가 체포 당시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고 곽승재를 찾아가 복수하려던 과정을 모두 자백했다고 했다.백유미는 정신병원에 있을 때도 다량의 진정제를 숨겨 두었다. 어젯밤 간호사 복장을 하고 병원에 몰래 들어가 곽승재의 간병인을 따라 화장실에 가서 기습적으로 기절시키고 곽승재의 병실로 몰래 들어가 약을 주입했다.백유미는 곽승재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투여량을 줄였다.그러다 고은서의 전화에 백유미는 그녀까지 끌어들이려고 병원으로 유인했다.백유미는 어젯밤 일을 솔직하게 자백했고 T국의 폐쇄된 창고에서 자신이 약한 척하여 원지훈을 속여 풀려난 후 칼로 그를 죽인 사실도 자백했다. 또한 서인수가 고은서를 납치한 것도 자신의 지시였다고 했다.이 모든 죄행이 판결된다면 백유미는 반드시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백을 마친 백유미는 힘이 빠져 경찰서에서 쓰러졌고 병원에 이송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는 사망을 선언했다.백유미의 소식을 들은 고은서는
병상에 누워 있던 곽승재가 갑자기 백유미의 칼을 잡아 자기 심장을 향해 찔렀다!“곽승재!”고은서는 놀라 소리를 외치며 곽승재에게 달려갔다.하지만 곽승재는 너무 빨랐고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날카로운 칼끝이 이미 그의 가슴을 깊이 찔렀고 손끝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곽승재가 자신을 찌른 순간, 창문 쪽에서 경찰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왔다. 눈 깜짝할 새에 백유미를 제압했다.백유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마치 기운이 다 빠진 허수아비처럼 주저앉으며 입에서 광기 어리게 웃었다.“하하하. 곽승재, 너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꼴좋다. 죽어라, 죽어!”곧이어 병실 밖에 대기하던 경호원과 의사가 들어왔고 곽승재의 상태를 보고 의사는 급히 응급조치를 시작했다.간호사들은 병실 안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지만 고은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금 침대 옆으로 엎드렸을 때 곽승재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곽승재는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며 말했다.“은서야, 칼이...가슴을 찌르면... 이렇게 아픈 거였어...”고은서는 곽승재가 너무 아파서 그런 줄만 알았다.“바보야? 내가 진짜로 찌르려는 게 아니었어. 창문 밖에 경찰이 보였어. 널 구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야. 백유미 방심하게 하려고...”의사는 계속해서 지혈하였고 간호사들은 수혈 장비와 기기를 가져왔다. 간호사들이 고은서한테 밖으로 나가 달라고 재촉했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검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슬프게 바라보았다.“하지만 난 무서웠어... 은서야, 이번 생... 더 이상 널... 잃고 싶지 않아...”고은서는 그의 말을 듣고 멍하니 얼어붙었다.뭐라고 말했지?이번 생에는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고?그 말의 의미는 뭐지?하지만 그녀가 물어볼 새도 없이 곽승재는 의식을 잃었고 고은서는 간호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 밖으로 나왔다.복도엔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고은서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곽승재의 말을 곱씹었다.첫 번째 말은 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