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혜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내가 뭘 해야 할 것 같아? 할아버지께서 설마 나를 함부로 대할까?”“게다가 내가 정말 하려고 하는 게 있다면, 네가 국내에 있든 없든 별 차이가 있을까? 네가 비즈니스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아니면 M-Q에 관해 이야기할 수를 가?”“너!”고은혜는 기가 차서 잠시 얼굴이 붉어졌다.“원지훈한테서 들었는데, 당신이 그와 사적인 대화를 나눈다면서요, 혹시 그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니죠?”원지훈이 물론 아무렇지 않게 언급한 사실이지만, 그녀는 고은서와 원지훈의 채팅 기록을 엿보았다.주차장에서의 그날을 떠올리며 원지훈은 그녀와 함께 놀자고 권했고,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은서는 결국 동의하며 블랙카드를 꺼내 계산하겠다고 나섰다.원지훈이 체육관에 갔을 때 고은서도 그곳에 있었다.고은혜는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니?”고은서는 비웃었다.“뇌는 생각하는 데 쓰이는 것이지, 남이 뭐라고 해서 그대로 믿는 건 아니야.”“원지훈과 곽승재가 비길 가치라도 있을까? 내가 사적으로 연락을 할 가치가 있냐고?”이렇게 말하며 고은서는 그녀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건네며 물었다.“잘 봐, 내가 무슨 얘기를 했지?”고은혜는 화면을 흘끗 보았다. 매번 원지훈이 먼저 연락을 보내는 것을 그녀는 확인할 수 있었다.채팅 내용은 평범하고 정중해 보였지만, 조금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일부러 그녀를 흥분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은서가 고은혜보다 더 부유하고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다.고은혜는 고은서의 말투가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원지훈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이 그를 쫓아다녔고, 전에 피로연에서 그는 당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나갔어! 그리고 당신은 그 과정에서 그를 짜증 나게 할 남자를 함부로 찾은 거고, 안 그래?”고은서는 기가 차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고은서의 눈썹과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본 곽승재의 첫 반응은 의외로 화가 나지 않았다.지난번에 그를 놀렸던 그녀의 차가운 미소와 비웃음, 승리의 웃음을 제외하면 곽승재는 오랫동안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물론 지어낸 웃음이지만, 곽승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마치 너무나 흔한 일이 이제는 드문 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그의 마음이 막연해지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카드를 가지진 않았어도, 어차피 네 것이니까 근심하지 마.”곽승재는 반나절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을 본 고은서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고은서, 너 유치하다.”곽승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방금 다 말했어, 너한테 준 물건은 이미 네 것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먼저 자리를 떠난다고 너한테 알려주러 왔어,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주민기가 이미 처리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그렇게 말한 후 곽승재는 긴 다리로 발걸음을 옮겼다.고은서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곽승재는 오늘 조금 이상했다.두 번이나 그녀를 위해 대변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고의적인 도발에 화도 내지 않았다.어쨌든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어젯밤 일이 해결되었다는 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마음속으로 안도했다.마침, 아름 언니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에게도 좋은 소식을 전했다.“그래!”도아름이 말했다.“서인수의 와이너리가 오늘 공식적으로 개업했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리본 커팅식을 가졌어. 근데 리본 커팅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경찰에 연행되었어.”“지금 커뮤니티에 소문이 퍼져 모두가 그가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망했다며, 후에는 더 잘 안될 거라고 비웃고 있어.”“은서, 곽 총무의 업무 효율이 정말 죽이는데,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오늘 처리했으니 아직도 널 아끼긴 하나 봐.”도아름은 지난날 칵테일파티에서 고은서가 술에 취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연민을 느꼈다.물론 고은서의 술 취
고국성은 분에 차서 말했다. "만약 고씨 가문의 두 여식이 모두 곽승재한테 시집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비웃을까. 이혼은 꿈도 꾸지 말거라! 너의 외할아버지가 널 어여뻐해 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지만 난 아니란다." "...... " 고은서도 식당에서까지 그들과 언쟁을 펼치고 싶진 않았다. 그들이 받아들인다면야 좋겠지만 설사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여도 고은서는 따로 뭐 어찌할 생각따위는 없다. 어차피 그녀는 이미 입장발표를 확실하게 하였고 외할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으셨으니 이젠 그 누구도 고은서를 막을 수 없다. ...... 오후에 고은서는 명운에 들렸다. 고은서는 인터넷에서 명운이 품질이 떨어지는 술을 고급술로 둔갑하여 판매했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그건 오해였음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사람은 명운의 술이 아닌 다른 술을 마시고 알코올중독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 술은 그 사람 스스로 담근 술이었기에 술의 안전 여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명운의 술이 문제 있다고 오해하였다. "아마도 인수 씨가 경찰의 협조조사를 받았다는 소식에 놀라서 더 이상 행패 부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거예요." 도아름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졌으니 골칫거리 하나 사라진 셈이네요." 기분이 좋아진 고은서가 말했다. "전 아름언니가 시장을 크게 키우기를 기다리면서 출시 준비를 도모할게요!" 이말에 도아름 역시 두말없이 약조하였다.도아름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와중 고은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번호를 보니 그건 바로 며칠간 연락이 없던 주인혁이였다. "누나, 저희 초보 오디션을 순조롭게 통과했어요. 이제 방송녹화단계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어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주인혁은 들뜬 목소리로 이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 말에 고은서도 덩달아 기뻐났다. "이건 첫걸음일 뿐이에요. 인혁씬 꼭 경쟁에서 이겨서 결승전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누나, 저녁에 시간 있나요?" 주인혁이 물었다.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 "나이는 많지 않지만 경력만은 풍부하네요."무대쪽으로 다가가니 kk와 그의 무리가 고은서를 발견하곤 너도나도 그녀와 인사를 하였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주인혁의 팀이 무대에 올라 공연할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여유 넘치면서도 이 순간을 즐기는 듯한 기색으로 무대위의 각자의 위치에 앉고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메인보컬인 주인혁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들중에서 제일 빛나보였다. 심플하지만 포인트 있는 검정색 티셔츠에 잘생긴 이마를 살짝 들어낸 헤어스타일, 노래 부를 때 깔끔하고도 깊은 보이스와 맑고 깔끔한 눈빛은 주인혁이 마치 동화속 왕자님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부르던 두 곡의 느린 절주의 사랑노래는 드럼소리와 함께 격정적인 반주곡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노래를 듣다보니 고은서의 지난 몇년간 잠들어 있었던 음악세포마저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하는듯 하였다. 10대시절 그녀는 학업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몇년간 드럼을 배웠었는데 당시 선생님께선 그녀의 학습능력과 리듬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녀는 대학신입생 장기자랑 때 무대에 올랐었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었다. 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가 말괄량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는 소식에 이 취미마저 포기했다. 단정하고도 진취적인 모범생이 되여 곽승재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떠한 노력에도 곽승재의 눈에 그녀따윈 없었다. "누나, 지난번에 저한데 얘기했었던 것 같은데, 드럼 칠줄 아신다고?"고은서가 지난 기억에 빠져있는 사이 주인혁은 어느샌가 노래를 마치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대의 기쁨을 흠뻑 만끽하고 와서인지 주인혁의 잘생긴 얼굴은 여유와 자신감으로 채워졌다. 그 모습에 고은서도 덩달아 흥분되는듯 하였다. "맞아요.""그럼 한 곡조 쳐보시는건 어때요?"무대우의 친근한 드럼과 주인혁의 기대감이 담긴 눈빛을 바라보노라니 고은서도 내심 연주해보고픈 맘이 생겼
고은서는 간지 나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슬쩍 뒤로 넘기며 물었다. "당연하죠, 저 방금 멋있지 않았나요?" 주인혁은 고은서의 행동에 웃음을 금치 못하면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멋져요, 멋있고 말고요. 프로 드럼연주자와도 비겨 볼만한 실력이신데요!" "안목 좋으시네요." 고은서는 주인혁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가요, 누나가 술 사줄게요." "누나, 저희도요, 저희도 술 사주세요!" 밴드멤버들도 몰려왔다. 고은서는 기분이 좋아나서 손을 흔들며 통 크게 말했다. "마셔요, 우리 모두 같이 마셔요!" 무리의 사람들은 고은서를 클럽의 넓은 좌석으로 안배한 후 넉넉한 간식과 술을 주문한 뒤 그녀를 향한 아낌없는 칭찬을 하였다. "누나, 진짜 생각지도 못했어요. 보기엔 연약해 보였는데 드럼 연주할 때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깐요, 드럼스틱으로 끼 부릴 때도 얼마나 멋있던지. 누나, 저희 밴드팀에 들어오실 생각 없으세요?" kk가 물었다. "지민이랑 같이 드럼 연주하면 관객들이 얼마나 난리가 날가요." "예, 맞아요. 만약 누나가 저희 밴드팀에 들어온다면 그땐 분명 주인혁보다 더 인기 있을 거예요." "그렇고 말고요. 제가 어떻게 감히 누나랑 비기겠어요." 주인혁도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열정으로 가득 넘치는 젊은 얼굴들을 보고 있노라니 고은서도 덩달아 흥분되는 듯하였다. 마지막으로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껏 드럼을 쳤던 때는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그때 당시에도 그녀는 많은 동학들의 칭찬을 받았고 심지어 한 유명한 음악교수님마저 그녀를 눈 여겨보아 제자로 삼고 싶어 하였다. 아쉽게도 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싫어할 것을 염려해 그 기회를 거절하였다. 후에 그 교수님의 여러 명 제자들 모두 음악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이룩하였는데 만약 당시 그녀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그들 중의 한 명이 될수 있지 않았을가. "여러분들이 제가 밴드그룹에 참가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밴드팀을
고은서는 인기척이 드문 곳으로 이동한 뒤 전화를 받았다. "지금 클럽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무슨 일 있나요? " 아줌마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지금 11시가 되어가는데 사모님이 언제 오시나 해서요." 예전부터 아줌마는 간혹 자기 전에 고은서한테 돌아오는 시간을 묻곤 했었다. "잘 모르겠는데... 아줌마 먼저 쉬세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요." "사모님, 한 가지 일이 더 있는데요." 아줌마는 다시금 은서에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께서 자주 입으시던 잠옷을 못 찾겠다고 하십니다." "자주 입던 잠옷을 찾지 못했으면 다른 옷으로 바꿔 입으면 되잖아요. 설마 저보고 집으로 돌아가서 찾아줘란 소리인가요? " "도련님께서 다른 옷은 불편하다고, 사모님께서 오늘 아침 도련님보다 후에 일어나셨으니 혹여 그 잠옷을 다른 옷장에 넣으신 건 아닌지 해서요." "전 곽승재의 물건에 손대기조차 귀찮거든요! 곽승재가 어젯밤 잤는지 아닌지조차 모르는데 그의 잠옷이 어디 있는지 알 턱도 없죠. 아줌마도 그만 신경 끄세요. 알아서 찾아 입든 말든." "하지만.... " "거기까지요 아줌마, 친구들이 불러서 이만 끊을게요." "고은서!" 고은서가 막 전화를 끊으려 할 때 귓가에서 곽승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 몇 시인데, 언제까지 클럽에 있을 예정이야." '곽승재도 옆에 있었구나.아줌마가 걸어온 이 전화, 혹여 곽승재가 지시한 건 아닐까?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항상 고은서가 곽승재한테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물어봤었는데 살다 보니 곽승재가 고은서한테 물어보는 날이 오네?'"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 곽승재가 다시금 냉랭하게 말을 했다. 고은서는 과거의 곽승재와 같은 차가운 어투로 답했다. "몰라. 귀찮게 굴지 마." 그러고선 곽승재가 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고은서는 곽승재가 부아가 치밀어 부들부들 떨고 있을 생각에 꽤 즐거워졌다. 드디어 곽승재도 할 말 채 하지 못한 채 전화가 끊기는 고통을
곽승재는 불쾌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잠옷을 못 찾겠어. 돌아가서 잠옷을 찾아줘."고은서는 의아했다. 그녀는 술기운에 머리가 좀 어지럽긴 했지만 정상적인 사고조차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곽승재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그저 자신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서 화가 난 나머지 고의로 그녀한테 시비 거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게 그럴 의무는 없어."고은서는 곽승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술잔 돌려줘!"고은서를 바라보는 곽승재의 미간이 무의식간에 좁혀졌다. "너 너무 많이 마셨어. 그만 마셔."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곽승재와 구면이였다. 지난번 곽승재가 밑도 끝도 없이 고은서를 끌고 나간 것을 보았었기에 이번엔 그녀가 다시 괴롭힘 당하는 것을 그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보세요, 아무리 은서누나가 당신의 아내라지만 술을 마시고 말고의 여부는 그쪽 권한이 아니지 않나요?""그니깐 말이에요. 너무 독단적이시다."그 말들을 들은 곽승재는 추호의 파동도 없는 눈길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워낙 강렬한 아우라를 지닌 곽승재가 무표정으로 있으니 그 압박감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곽승재의 이런 시선에 방금 말을 꺼낸 사람들은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곽승재씨, 은서누나 술 그리 많이 드시지 않으셨어요. 만약 누나가 돌아가려 한다면 저희가 집까지 모셔드릴 겁니다. 당신은 누나를 강제적으로 데려갈 수 없어요." 주인혁이 입을 열었다. 곽승재는 시선은 주인혁으로부터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술잔으로 향했다.그는 두말 않고 고은서를 가로로 안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나머지 고은서는 외마디 고함과 함께 두 팔은 무의식간에 곽승재의 목을 감아 안았다. 그녀의 이 동작은 꽤나 곽승재의 맘에 들었다. 곽승재는 그의 거리감 느껴지는 품위를 유지하면서 그들한테 말했다. "오늘 밤 모든 비용은 제가 쏠게요. 저의 아내와 재밌게 놀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이 말과 함께 곽승재는 블랙 카드를 복무원한테 건네곤 고은서를 안은채 자리를
고은서는 박지연의 뜬금없는 호들갑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뭐가 떠?”‘저번에 술 취했을 때의 주사는 이미 지나간 일 아니었나?’“누군가 네가 엊저녁에 클럽에서 드럼 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다들 네가 예쁘고 멋있다고 난리야!”박지연은 다급하게 이 사실을 고은서와 공유했다.“전화 끊지 말고 빨리 아이패드로 확인해 봐!”“...”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따라 아이패드로 비디오 플랫폼을 열었다. 박지연의 말 대로 고은서가 드럼을 치는 동영상이 많은 인기를 받고 있었다.동영상을 클릭해 보니, 앞뒤가 조금 잘리고 1분가량의 킬링 파트만 남아있었다.영상 속에서 고은서는 음악에 취해 두 팔을 벌리고 능수능란하게 드럼을 치고 있었다.시청자 각도에서 자신을 바라본 고은서도 자신이 확실히 예쁘고 멋있다고 인정했다.동영상 밑의 댓글 창에는 온통 ‘멋있어요’, ‘예뻐요’, ‘반했어요’ 등 칭찬으로 도배되었다.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니, 고은서는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인터넷의 인기는 이삼일만 지나면 줄어드는 거라 그녀는 재미로 여기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박지연은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이 계집애야, 남한테 보여주면서 왜 나는 안 불렀어!”박지연은 고은서보다 2살 많은 데다가 고은서와 같은 대학도 아니었다. 근데 잘생긴 신입생을 만나기 위해 박지연은 고은서가 다니던 대학에 몰래 갔었다.결국, 그곳에서 잘생긴 남자를 만나지 못했고, 오히려 고은서의 멋진 모습에 반해 주동적으로 그녀의 연락처를 받으면서 두 사람이 점차 친구가 되었던 것이었다.다만 그 이후로 고은서는 드럼을 치지 않았기에 박지연도 더는 눈요기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동영상을 보자마자, 박지연은 신이 나서 고은서에게 연락했다.“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 너의 드럼 실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아.”박지연이 말했다.“혹시 클럽에서 매일 공연할 생각 없어? 그럼 내가 매일매일 가서 응원해 줄게!”고은서는 공기에 대고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