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박지연의 뜬금없는 호들갑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뭐가 떠?”‘저번에 술 취했을 때의 주사는 이미 지나간 일 아니었나?’“누군가 네가 엊저녁에 클럽에서 드럼 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다들 네가 예쁘고 멋있다고 난리야!”박지연은 다급하게 이 사실을 고은서와 공유했다.“전화 끊지 말고 빨리 아이패드로 확인해 봐!”“...”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따라 아이패드로 비디오 플랫폼을 열었다. 박지연의 말 대로 고은서가 드럼을 치는 동영상이 많은 인기를 받고 있었다.동영상을 클릭해 보니, 앞뒤가 조금 잘리고 1분가량의 킬링 파트만 남아있었다.영상 속에서 고은서는 음악에 취해 두 팔을 벌리고 능수능란하게 드럼을 치고 있었다.시청자 각도에서 자신을 바라본 고은서도 자신이 확실히 예쁘고 멋있다고 인정했다.동영상 밑의 댓글 창에는 온통 ‘멋있어요’, ‘예뻐요’, ‘반했어요’ 등 칭찬으로 도배되었다.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니, 고은서는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인터넷의 인기는 이삼일만 지나면 줄어드는 거라 그녀는 재미로 여기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박지연은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이 계집애야, 남한테 보여주면서 왜 나는 안 불렀어!”박지연은 고은서보다 2살 많은 데다가 고은서와 같은 대학도 아니었다. 근데 잘생긴 신입생을 만나기 위해 박지연은 고은서가 다니던 대학에 몰래 갔었다.결국, 그곳에서 잘생긴 남자를 만나지 못했고, 오히려 고은서의 멋진 모습에 반해 주동적으로 그녀의 연락처를 받으면서 두 사람이 점차 친구가 되었던 것이었다.다만 그 이후로 고은서는 드럼을 치지 않았기에 박지연도 더는 눈요기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동영상을 보자마자, 박지연은 신이 나서 고은서에게 연락했다.“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 너의 드럼 실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아.”박지연이 말했다.“혹시 클럽에서 매일 공연할 생각 없어? 그럼 내가 매일매일 가서 응원해 줄게!”고은서는 공기에 대고
원래는 자신의 늠름한 얼굴을 감상하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부스스한 머리, 얼굴은 깨끗한 편이지만, 눈가에는 메이크업 흔적이 조금 남아있는 모습을 보았다.고은서는 어젯밤 차 안에서 바로 잠들었기에 곽승재가 자신을 안고 방까지 올라왔는데 화장 지우는 법을 모르니까 수건으로 얼굴만 대충 닦아준 모양이었다.그렇다 한들 고은서는 여전히 이 상황이 믿겨 지지 않았다.‘어젯밤, 곽승재가 클럽에 찾아왔을 때 기분이 분명 안 좋아 보였는데, 정색해서 날 책문하지 않았을뿐더러 이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고?’근데 고은서가 감격해야 할 것도 없었다.고은서도 술에 취한 곽승재를 보살피느라 그의 얼굴이랑 몸을 닦아주고 옷도 갈아 입힌 적이 있었다...옷!고은서는 갑자기 자신이 지금 잠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곽승재가 옷도 갈아 입혀준 거야?!’고은서는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신의 목 뒤에 수상쩍은 빨간 점이 있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보았다.빨간 점은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여서 머리카락에 가려졌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불빛에 비치니 아주 눈에 띄었다.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빨간 점을 만져 보았다. 통증도 없고 가려움도 없었다.그녀는 쪼가리를 받아본 적이 없지만, 예전에 룸메이트가 남자친구에게 받은 쪼가리를 본 적이 있었다.진한 빨간 점은 컨실러로 커버되지 않으며 누르면 약간의 통증도 느껴진다고 했었다.고은서의 빨간 점은 쪼가리가 아닌 게 분명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벌레가 물었나 보네. 곽승재는 내가 취했을 때 슬그머니 내 몸에 손댈 정도로 비열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잠옷은...’고은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미숙에게 물었다.“아줌마가 어젯밤에 제 옷을 갈아 입혀준 건가요?”이미숙은 상을 치우면서 대답했다.“네. 사모님이 어제 취해서 깨지 못하니까 도련님이 저보고 잠옷으로 갈아 입히
물음이 입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육현석은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형의 표정을 보니, 형도 형수님이 드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몰랐던 눈치네.’설사 알고 있었다고 해도, 예전에 고은서를 싫어했던 곽승재는 그녀의 일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릴 이유가 없었다.“형수님 너무 예쁘다. 근데 난 왜 예전에 형수님이 이렇게 예쁜 줄 몰랐지? 이상하네...”육현석은 혼잣말했다.“예전에도 예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지금의 이런 늠름함이 없으니까 개성이 좀 덜했다고 해야 하나?”곽승재는 말이 없었다. 동영상 속의 고은서는 밝게 웃고 있었고 한껏 즐기고 있는 표정이었는데, 이는 곽승재가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특히 손가락 사이로 드럼 스틱을 돌릴 때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교만함, 아름다움, 그리고 멋이 담겨있었다.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영혼마저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듯했다.“대박. 형, 이 사람의 댓글 좀 읽어 봐...”[이 영상을 찍은 사람은 분명히 이 여자분에게 관심이 있는 거예요. 보통 사람은 분위기, 기교, 비트에 대한 장악도 등에 중점을 두고 영상을 찍거든요. 근데 이 영상을 찍은 사람은 영상 속 주인공의 웃음과 눈빛만 찍었어요. 그래서 보는 사람도 같이 즐거워지게 만들어요.]“밑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어요!”[이분이 엄청 세심하게 관찰하셨네요. 그러니까 제가 이 동영상을 볼 때 뭔가 달콤하고 입꼬리가 자꾸 올라간다 했어요. 역시나 애정을 듬뿍 담아서 촬영해서였네요!]“형...”육현석은 곽승재에게 아래의 댓글을 더 읽어주려 했지만, 곽승재는 아예 그의 핸드폰을 빼앗아서 동영상을 꺼버렸다.“왜 그래? 설마 네티즌들의 막말을 믿는 건 아니지?”육현석은 곽승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네티즌의 댓글을 더 읽으려 했다. 그러자 곽승재는 또 육현석을 잡지 못해 안달이었다.“프로젝트 기획안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게 아닐 텐데.”육현석은 어이가 없었다.“형, 너무하는 거 아니야?”육현석은 참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육현석의 말을 듣자, 곽승재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그는 이혼이든 재혼이든 모두 저촉했다.한 달 전, 고은서가 이혼을 제기하던 그 날 밤, 곽승재는 분명 아무 느낌도 없었다.이혼하면 그만이고 걱정거리 하나가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왜 한 달 만에 마음이 이렇게 이상하게 변한 거지?’“형?”반나절 동안 대답을 듣지 못하자 육현석은 곽승재를 귀띔했다.“아쉬울 게 뭐 있어.”곽승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냥 결혼한 지 1년이 넘어서 나도 익숙해졌고 할머니도 은서를 마음에 들어 하니 굳이 이혼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거지.”‘알겠다. 이 형 이혼하기 싫은 거 맞네.’“이혼해도 다른 사람이랑 재혼할 생각 안 해봤다는 거지?”육현석이 묻자 곽승재는 언짢은 태도로 말했다.“한번 다녀왔으면 됐지, 결혼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다시 하겠어!”‘다행이다. 형이 형수님에 대한 감정을 잘 모르지만,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품고 있는 건 아니네.’육현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형, 이혼하기 싫으면 형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되돌릴지 생각 좀 해 봐. 여자들은 아주 감성적이어서, 한 가지 일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한 가지 일로 실망해서 한 사람에 대한 마음을 바로 접을 수도 있어.”“실망할 게 뭐가 있어!”곽승재는 육현석의 자만한 말투에 기분이 언짢아졌다.어제까지만 해도 고은서는 곽승재를 생각해서 단은숙에게 그가 매운 걸 안 먹는다고 일깨워 주었다.그리고 고은서가 고은혜와 화장실에 말다툼할 때도 그녀는 곽승재가 다른 남자와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입 말했었다.곽승재는 무심코 자신의 옷깃과 넥타이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아주 정교한 넥타이핀을 보였다.“이 핀은 은서가 어제 나에게 선물한 거야. 나한테 감정이 없는데 왜 이런 걸 선물해줘?”육현석은 넥타이핀을 관찰하더니 의혹을 제기했다.“이 핀, 형수님의 취향이 아닌 것 같은데?”“네가 은서한테서 선물을 받아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은서의 취향을 알아
“은서가 기분 나쁠 게 뭐 있어?”곽승재가 화를 내며 말했다.“은서가 곽씨 사모님의 신분으로 명운의 책임자를 들여보내서 그렇게 심각한 사고를 냈는데도 아무런 수습도 하지 않고 계속 술을 마시고 뉴스를 만들어 자기 소주를 광고했잖아. 내가 이 일로 은서를 탓하지도 않았고, 은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뒀는데 여기서 뭘 더 해명해야 하는데!”육현석은 중점을 콕 집어냈다.“형수님이 뭘 했든 형이 상관하지 않고 다른 여자를 안고 나간 건 사실이지?”곽승재는 육현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시급한 상황이라 은서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건 사실이야. 근데 은서는 다친 곳도 없었잖아. 그런 사람을 알아서 집 가게 내버려 둔 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육현석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형의 이런 사고방식으로 어떻게 형수님의 마음을 되돌릴 건지... 갈 길이 너무 멀다.’“형, 형수님도 여자잖아. 연회에서 뜻밖의 사고가 생겼는데 아무리 다치지 않았다 해도 마음속으로 두려워했을 거야. 홀로 연회장에 남겨진 형수님의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당시 연회장에 얼마나 많은 GS 그룹 직원과 사업상의 파트너가 있었는데, 그들이 홀로 남겨진 곽씨 사모님을 비웃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이 말을 듣자 곽승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그는 곽씨 사모님의 술주정이라는 인기 검색어에서 고은서가 댄스 플로어에 서 있던 사진이 떠올랐다. 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쓸쓸함이 가득했고, 커다란 눈동자는 빛을 잃은 채 사람들 속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게시물의 내용도 많이 지나쳤다. 무슨 외면당했네, 결혼은 억지로 끼워 맞춘 거네, 혼인에 금이 갔네 등이었다.그 당시 곽승재는 명운과 관련된 인기 검색어가 잇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고 앞의 기사도 고은서가 계획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었다.근데 만약 그 술주정이라는 검색어가 고은서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그때 그녀는 정말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받았을 거라는 것을 곽승재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이렇게
“어젯밤, 곽승재 씨가 누나를 데리고 나가서 난감하게 하지는 않았죠?”주인혁이 물었다.고은서는 어젯밤에 곽승재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안고 나갔다는 것을 생각하니 조금 머쓱해서 말했다.“네, 아무 일 없었어요.”“그럼 다행이네요.”이렇게 말하고서 주인혁은 더 말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주인혁이 곧 다가올 첫 시합을 앞두고 긴장하는 줄 알고 웃는 얼굴로 격려의 말을 몇 마디 전했다.그러나 뜻밖에도 주인혁은 아주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누나, 비록 제가 지금은 누나에게 도움이 될 수 없지만, 누나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다 지지해요.”고은서는 주인혁이 자신을 관심하고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따뜻해졌다.“인혁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의 일은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으니까, 인혁 씨는 시합에만 집중하세요.”전화를 끊고 고은서는 복싱관에 도착하여 복싱 훈련과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을 한동안 연습했다.지금 고은서의 주먹은 더는 예전처럼 나른하지 않고 힘이 좀 강해졌다. 코치도 고은서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할 정도로 그녀의 변화는 눈에 띄게 컸다.요즘 고은서는 잘 먹고 잘 자니까 체질이 많이 좋아진 게 확 느껴졌다. 그러나 몸무게는 여전히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고 겨우 두세 근밖에 늘어나지 않았다.‘기운이 좋아지고 얼굴색이 좋아지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조금 말라도 괜찮아.’연습을 마치고 고은서는 간단히 샤워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복싱관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찰나, 마침 복싱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원지훈과 딱 마주쳤다.원지훈은 트리닝 복을 입지 않은 걸 보아하니, 고은서를 찾으러 전문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훈련하러 왔어?”고은서가 일부러 떠본 말에 원지훈이 대답했다.“오늘 훈련 없는 날이에요. 저는 누나와 옆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커피는 됐고 볼 일이 있어서 날 찾으러 온 거라면 그냥 여기서 얘기하자.”원지훈은 휴게실을 가리키며
원지훈은 고은서의 미소를 보고 마음속으로 살짝 기뻐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누나, 저는 은혜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누나도 동생인 은혜 씨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거 아닌가요?”고은서는 원지훈의 번지르르한 말에 토할 것 같았지만, 그의 두꺼운 낯가죽을 비웃지도 않고, 그더러 자기 신세를 제대로 알라고 충고하지도 않고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지훈 씨, 이미 나의 혼인 상황을 잘 알고 있다면 내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겠네?”‘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곽승재를 방패막이로 써야 하네.’“그 누구도 남편에 대한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고은서가 덧붙여 말했다.원지훈은 이 말을 듣고 더 말하지 않았다.비록 백유미는 원지훈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고, 그더러 캐묻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지훈이 스스로 검색해보지 않는다는 것은 장담할 수 없었다.원지훈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은서가 자신을 이용해 곽승재에게 복수하는 동시에 고은혜에게도 상처 주려는 줄 알았다.어쨌든 원지훈은 자신이 그럴 조건이 된다고 여겼다.고은서가 또 입을 열었다.“맞는 말도 있긴 해. 나는 확실히 네가 은혜와 함께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넌 은혜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못 돼.”이 말을 듣더니 원지훈은 얼굴색이 조금 변했다.“제가 어디가 못났는데요?”“해성에 사업하러 왔다는 사람이 일하려는 기색이 조금도 안 보이거든. 넌 그저 종일 먹고 놀기만 하면서 은혜의 주위를 맴돌고 있잖아.”고은서가 말했다.“지난번 주차장에서 너도 은혜가 승재 형부를 얼마나 숭배하는지 봤잖아. 그래서 난 은혜가 사업에 성공한 남자를 진정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해.”고은서는 고의로 이 말을 꺼냈다.왜냐하면, 그녀는 전생에 단은숙에게서 고은혜의 남자친구는 집안도 좋고 사람도 잘나서 해성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약품의 대리를 맡고 투자도 받았다고 자랑하던 것이 어슴푸레 떠올랐다.이번 생에, 백유미는 아직 이
민시후는 건들건들한 말투로 대답했다.“왜? 곽승재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으니까 나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해?”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허공에 대고 눈을 희번덕거렸다.‘방금 뻔뻔한 남자를 한 명 보냈는데, 여기에도 그런 사람 한 명 더 있네.’“걱정하지 마. 나 남자한테 관심 끊었어. 특히 너처럼 뻔뻔하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는 딱 질색이야.”“어구. 말투가 살벌한데?”“너랑 말장난할 시간 없어. 볼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야.”“내 사무실로 와.”고은서는 익숙한 길로 민시후의 사무실에 도착했다.민시후는 여전히 껄렁껄렁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긴 다리를 책상 위에 얹은 채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 고은서는 민시후의 곁으로 걸어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민시후는 고은서의 드럼 치는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고은서는 고의로 조금 전에 민시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민 도련님, 사무실에서 혼자 내 동영상을 보고 있었어? 설마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지?”이 말을 듣자 민시후는 조금도 화내지 않고 심지어 흥미진진하게 말했다.“사실 난 네가 곽 대표와 이혼하고 나랑 같이 있겠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어. 어쨌든 넌 지금 무력도 좀 있잖아.”고은서가 말했다.“고맙긴 한데 난 널 받아들일 수 없어.”민시후가 물었다.“내가 곽 대표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고은서가 대답했다.“너무 뻔뻔해서 싫어.”“나중에 너도 깨닫게 될 거야. 이게 내 장점이라는 것을.”민시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말했다.“말해 봐.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날 찾아온 건데?”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내 그 안에서 자료 하나를 찾아냈다.“이 자료 한번 봐. 눈에 익지 않아?”민시후는 자료를 힐끗 보고 말했다.“이건 곽 대표가 투자하던 그 약물 연구소 아니야?”고은서가 물었다.“너 예전에 일부러 날 데리고 승재 씨와 관계자가 밥 먹는 자리에 나가서 난동을 부렸던 건 이 프로젝트에 관심 있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