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허 교수의 손녀가 하교하는 순간 바로 작전 개시할 거고 허 교수는 반드시 순순히 대리권을 넘길 거예요.” 백유미는 차갑게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상황이 바뀌었어.” “네? 갑자기 무슨...”원지훈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게 손녀라면서요, 조금만 위협을 가하면 순순히 대리권을 넘길 거고 GS그룹과의 투자 계획도 해제할 거라고 했잖아요?” 백유미는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이 일은 이미 확정된 거라 어쩔 수 없어. 지금 움직이면 다른 사람의 의심만 사. 어서 다른 목표 프로젝트를 찾아야 해.” “그럼 얼른 찾아봐요! 나는 최대한 빨리 성공적인 사업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은혜 씨는 나를 다시는 쳐다도 안 볼 걸요!” 원지훈의 재촉에 백유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전에 어떤 여자도 네 손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큰소리쳤잖아. 그런데 며칠째 아무런 진전이 없다고? 그러고 지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요구하는 거야? 내가 쉽게 속아 넘어갈 거로 생각해?” “어떻게 감히 누나를 속여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누나의 목표를 더 잘 달성하기 위한 거죠. 요즘 여자들은 엄청 똑똑해요. 내가 아무리 말을 잘해도 실제 성과가 없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원지훈은 도리를 따지며 말했다.“그리고 단순히 그녀만 꼬시면 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과 친척들도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요. 확실한 성과가 없으면 아무도 속일 수 없어요.” 백유미는 물론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원지훈에게 개인 회사를 차려 주려는 계획은 이미 세워 놓았지만 최근 너무 바빠서 실행에 옮길 시간이 없었다. 원지훈이 직접 언급할 정도라면 확실히 급한 상황이었다. “나머진 내가 준비할게, 넌 서둘러서 어떻게든 꼬셔봐!” “알겠어요, 누나. 못 도망가요.” ... 고은서는 정말로 허 교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허 교수는 전화에서 투자와 운영 문제는 그녀에게 맡기겠지
“은서 씨는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서 마음먹고 포기한 거 아니에요?”민시후는 무자비하게 말했다.“뭐, 다른 사람은 멋진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가 은서 씨를 찬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 이 인간과는 도저히 말이 안 통했다.저녁이 되자 항상 바쁘기만 하던 박지연이 드디어 시간을 냈다. “은서야, 새로 열린 라이브바가 정말 좋대. 거기서 한잔하고, 나를 위한 셈 치고 드럼 한 번만 연주해 줘!” 고은서가 대답할 틈도 없이 박지연은 재빠르게 덧붙였다.“너가 약속한 거야, 취소하지 마!” “알겠어, 드럼이 뭐, 문제없어.”고은서가 약속했다.두 사람은 라이브바에서 만났다. 1층은 홀, 2층은 비교적 조용한 좌석 구역이었다. 앞에는 대형 무대가 있었고 누군가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어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박지연과 고은서는 1층의 한쪽 구석 좌석에 앉았다.자리에 앉자 박지연은 고은서 목 뒤쪽에 있는 빨간 점을 발견했다.“키스 마크? 누가 한 거야?”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목을 만졌다. 오늘 아침 곽승재가 목 주변을 건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키스 마크가 아니라 벌레에게 물린 거야.” “내가 바보인 줄 아니?”박지연은 툴툴거리며 말했다.“이거 분명히 키스 마크야.” 고은서는 작은 거울을 꺼내서 그 점을 확인해 보았다. 어제 아침에 본 것과 같았다. “네 눈에 혹시 스캔 기능이라도 있니? 내가 본 다른 키스 마크들은 이보다 훨씬 크고 진했어.” 박지연은 고은서를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이건 상식이잖아. 키스 마크가 항상 크고 선명하지는 않아. 살짝 빨면 이렇게 작은 자국만 남게 돼.” 이 말을 듣고 고은서는 반쯤 잠든 상태에서 느꼈던 목의 촉촉한 감각이 떠올랐다. ‘정말 곽승재가 한 거라고?!’ “최근에 승재 씨와 같은 방에서 자고 있다며, 그가 몰래 키스한 거 아니야?”박지연은 호기심에 물었다.“그 외에 더 나아간 행동은 없었
훤칠하게 생긴 두 젊은 남자가 밀차를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밀차 안에는 로맨틱한 빨간 장미꽃이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다양한 기본 와인과 블렌딩 도구가 있었다.눈앞에 다가와서 두 남자는 각자 꽃다발을 하나씩 꺼내 들고 무릎을 반쯤 꿇고서 고은서와 박지연에게 바쳤다.“공주님들, 오늘 이곳에서 좋은 밤을 보내시길 바랍니다.”촌스러운 건지 새로운 유행어인지 알 수 없는 멘트에 고은서는 웃음이 나고 흥이 올랐다.“고마워요.”고은서는 꽃을 받았다.박지연도 꽃을 받고 나서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말했다.“이분들은 대회에 참가했던 전문 바턴데들이야. 지금 바로 우리를 위해 칵테일을 만들어 줄 거야!”“바텐더였구나. 난 또 네가 날 위해 젊고 잘생긴 술친구를 불러준 줄 알았어.”고은서는 박지연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젊은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닌데, 우리의 기혼 신분에 먹칠할까 봐 걱정되어서 안 불렀지!”박지연은 낮은 목소리로 건의를 제기했다.“아님, 지금이라도 젊은 술친구를 불러줘?”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됐어. 나중에 내가 이혼하고 나면 그때 다시 한 테이블 찾아줘.”“한 테이블이면 되겠어? 두 테이블 찾는 게 어때?”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는 사이, 한 바텐더가 말했다.“두 분 모두 미인이시니 저희가 ‘미인 감취’를 두 잔 타드리죠. 무조건 예쁘고 맛있는 칵테일일 겁니다!”칵테일을 만들기 전에, 두 바텐더는 먼저 화려한 쇼를 시작했다.술병과 술잔이 그들 손에서 놀아나며 술잔에서는 연한 파란색 불꽃이 피어올랐다.두 바텐더는 검은색 셔츠와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늘고 길쭉한 다리에, 웃옷 단추를 두 개 풀어 가슴근육을 살짝 드러냈으며 게다가 현란한 솜씨가 더해져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멋있어 보였다.주변에서도 두 바텐더에게 눈길이 이끌려 그들의 쇼를 감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어쩐지 지연이가 이것이 이 클럽의 스페셜 퍼포먼스라고 하더라니, 확실히 독특하고 눈요기를 부리긴 하네.’분홍색의 ‘미인 감취
“왜 이렇게 화를 내?”육현석은 느긋하게 말했다.“형, 우리 지금 클럽에서 놀고 있어. 형도 쉴 겸 와서 술이나 한잔해.”“싫어. 시간 없어.”곽승재가 거절할 거라는 것을 예상한 육현석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신비한 말투로 말했다.“형, 진짜 안 올 거야? 형이 관심 있는 서프라이즈가 있는걸.”“웬 농간질이야.”말을 마치고 곽승재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육현석은 조금도 성급하지 않고 조금 전에 찍은 고은서의 사진을 곽승재에게 보냈다.아니나 다를까 육현석의 전화가 바로 울렸다.발신자가 곽승재인 걸 보고, 육현석은 무음 버튼을 눌렀다.‘흥. 맘대로 내 전화를 끊을 땐 언제고! 형도 조금만 애간장을 타봐!’육현석은 의기양양하게 카시트로 돌아가 난간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다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그는 아래층에 앉아 있는 고은서가 간단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친구와 술잔을 부딪치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은서는 배를 끌어안고 웃고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육현석의 인상에 고은서는 라이브바 같은 데를 절대 다니지 않고, 늘 자신을 세련되게 꾸미고 언행도 깔끔했다.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니 오히려 영혼이 살아나고 사람이 생기발랄해진 것 같았다.예쁜 여자가 한 명 있어도 쉽게 눈길을 끌 수 있는데, 두 미인이 함께 앉아 있으니, 곧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육현석은 더욱 신났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 이 장면을 찍었다.“도련님, 왜 이리 주춤거리고 있어요? 두 명 중 누가 마음에 드는데요? 제가 내려가서 사람을 모셔올게요!”육현석이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바보처럼 웃고 또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한 친구가 자진해서 말했다.“술이나 마셔.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육현석은 사람을 쫓아버리고 부재중 전화를 보았는데 뜻밖에도 한 통밖에 없었다.그는 또 남자가 고은서에게 말 거는 사진을 곽승재에게 보냈다.‘침착한 척 더 할 수 있나 보자.’사진을 보낸 지
“입 다물어.”육현석이 훈계했다.“저분은 우리 승재 형의 아내, 내 형수님이거든!”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육현석이 말하는 승재 형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었기에 다시 무대 위의 고은서를 바라볼 때 눈빛이 확연하게 달라졌다.GS 그룹의 사모님이 이렇게... 제멋대로일 수 있다니.고은서는 공연을 마치고 대범하게 관객과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박지연은 감격에 겨워 얼굴이 빨개졌다.“은서야, 넌 내 우상이야. 너무 멋있었어! 자, 칵테일 한 잔 더 마시자!”술김이 올라와서인지 고은서도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켰다.“은서야, 아무리 그래도 원샷은 무리야. 이 칵테일이 마시기는 좋지만, 도수가 꽤 높아.”고은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괜찮아. 취하면 취하는 거지.”고은서는 이제 누구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고, 곽승재가 자신이 단정하지 못하다고 여길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에 술에 취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그리고 너 평소에 술 마시러 나올 시간도 없는데 오늘은 너랑 실컷 마실 거야!”박지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요 며칠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너무 힘들었어. 진작에 이렇게 나와서 바람도 쐬고 기분도 풀고 싶었어.”“다연아, 온 닥터와 그 여동창은 어떻게 됐어? 온 닥터의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어?”고은서는 이 일에 계속 신경을 써서 물었더니 박지연이 말했다.“아마 옮기지 않았을 거야. 나 이틀 전에 남편에게 한마디 물었는데 여동창과 연락하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했어.”고은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전생의 타임 라인으로 계산하면, 그 여동창은 지금 이미 귀국해서 병원에 갔었다.‘설마, 이번 생에 지연이가 남편 따라 외국에 가서 그 여동창에게 틈을 주지 않았던 걸까?’“요즘 우리 시어머니께서 자꾸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해서 머리가 아파.”박지연은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내가 이 타이밍에 임신하면 수간호사 자리를 완전히 놓치게 될 거야. 그리고 시어머니의 성격상 나더러 아예 직장
드르륵!술배 남이 손을 쓰기도 전에 그의 몸은 앞으로 홱 기울어 그대로 탁자에 부딪혀 탁자 위의 술병과 술잔을 쓸어내렸다.큰 소란은 일부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육현석도 밑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고 카시트에 앉아 있는 남녀를 향해 한마디 소리쳤다.“얼른 내려가서 도와!”말하고 나서 육현석은 앞장서서 아래층으로 달려갔다.술배 남은 바닥에 쓰러져서 아프다고 연신 호소하였고, 그의 몇몇 동료는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했다.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이 사람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며 옷을 잘 입고 온몸에 소름 끼치는 냉기와 위엄이 배어있었다.“웬 오지랖이야!”두 번이나 손해를 본 술배 남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자기 이미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다들 덤벼! 이 여자를 묶어놓고 남자를 죽도록 패!”이 말을 듣자 술배 남의 동료는 즉시 반응하고 남자에게 달려들었다.아!우!삽시에 비명이 겹쳤다.어질어질한 고은서는 눈앞의 손놀림이 매서운 곽승재를 보고,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곽승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그의 매서운 주먹 날림과 깔끔한 발차기 솜씨를 보아하니 싸움을 잘하는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곽승재는 고귀한 GS 그룹의 대표인 거 아니었어? 돈 벌 줄밖에 모르는 사람이 왜 싸움도 이렇게 잘해?네다섯 명의 남자는 곽승재에게 맞아 뒷걸음질 치면서 조금도 이득을 보지 못했고, 육현석을 비롯한 몇몇 남녀들도 이쪽으로 몰려왔다.왜 다 함께 있는지 몰랐지만, 곽승재가 손해 볼 일이 없을 것 같아 고은서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감히 우리 형수님을 희롱해? 넌 죽도록 맞아야 해!”육현석은 화가 잔뜩 나서 발을 뻗어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술배 남을 걷어차려고 했다.하지만 옆에 있던 술배 남의 동료에게 밀린 육현석은 그대로 옆으로 넘어져 탁자의 상다리에 이마를 부딪쳤다.“피!”육현석은 손을 뻗어 만지더니 피를 보는 순간 바로 기절했다.박지연은 어쨌든, 간호사였기
“은서야!”곽승재는 술배 남을 확 차버리고는 고은서를 품에 안았다.“너 괜찮아?”곽승재의 다급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고은서는 취한 건지 아픈 건지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뜰 수 없었다.반 혼미 상태에서 고은서는 자신의 몸이 곽승재에게 가로로 안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을 느꼈다.그녀의 귓가에는 박지연의 걱정스러운 안부가 은은히 들렸고, 술배 남의 비명과 각종 곡성이 은은히 들렸다....고은서가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의 병실에 누워있었다.주변은 하얀 벽이고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를 맞고 있었다.‘내가 병원에 어떻게 온 거지?’순간, 고은서는 클럽에서 일어났던 사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술배 남이 술병으로 곽승재를 내리치려는 찰나 고은서는 한달음에 곽승재를 밀어내고 대신 어깨를 맞았다.“깼어?”곽승재의 냉랭한 목소리에 고은서는 정신이 돌아왔다.고개를 들자, 역시나 곽승재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었는데 밤새 간호하느라 눈을 붙이지 못해서인지 미간을 찡그리고 안색이 많이 초췌해 보였다.늘 이미지를 중히 여기던 곽승재는 지금 슈트를 의자에 마구 걸어놓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으며 조금 거둔 옷소매는 굳건한 손목을 드러내고 있었다.“어디 불편한 데 없어?”곽승재는 똑바로 앉아서 물었다.고은서는 몸을 살짝 움직여 보았는데 어깨가 조금 아프고 머리가 띵한 것 이외 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몸은 괜찮은 것 같아. 지연은, 잘 들어갔어?”고은서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곽승재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고은서를 바라보며 되물었다.“은서야, 누가 너보고 나서라고 했어? 그 남자가 술을 좀 마셔서 힘이 평소보다 적게 들어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너 어깨 완전히 부러졌을 거야.”고은서도 이 일을 다시 생각하니 몹시 두렵고 후회스러웠다.그리고 어딘가 모를 서글픈 감정이 솟구쳤다.‘난 왜 아직도 남편밖에 모르는 바보인 거야. 어떻게 다시 태어나도 이 버릇을 못 고쳐.’누군가 곽승재를 해치려고 하자, 고은서는 일 초도 생각하지
곽승재가 스스로 여기는 완벽한 해결책을 듣더니 고은서는 어두운 얼굴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곽승재 씨, 우리 사이의 문제는 기념일 한 개 때문이 아니야. 당신도 시시콜콜한 사람이 아니잖아. 죄책감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지 않아도 돼.”“은서야, 넌 내가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곽승재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아니야?”고은서가 되묻자 곽승재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는데 왜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날 보호해준 건데? 너랑 잘 얘기해 보고 싶은데 왜 날 계속 밀어내기만 하는 거야? 사람이 왜 그렇게 모순적인 거야?”고은서가 말했다.“오늘 밤의 일은 사고였어. 당신이 아니라 지연이, 실장님 또는 내가 아는 누구라도 그런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다면 난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내 성격이 그런 거지 당신을 신경 쓰거나 사랑해서 그런 거 아니야.”고은서가 무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하자 곽승재는 또 마음이 답답해졌다.“은서야, 이 말은 너도 믿기 힘들지 않아?”고은서는 곽승재의 주위를 5년이나 맴돌았고 그녀가 곽승재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사랑이 어떻게 한순간에 확 사라져?고은서는 슬슬 인내심이 떨어졌다.“난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할머니의 생신이 지나면 우리는 약속대로 이혼하는 거야. 난 하루도 미루고 싶지 않아!”똑똑.두 사람이 의견 차이로 대치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뒤이어 육현석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형, 형수님, 저 들어가도 돼요?”“들어와.”곽승재는 냉담한 말투로 말했다.육현석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입술이 조금 창백한 것 이외 기운은 곽승재보다 조금 나아 보였다.“형수님, 깨셨어요? 몸은 괜찮아요?”육현석은 곽승재와 고은서의 분위기가 안 좋은 것을 눈치채고 웃으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원래 육현석을 대꾸할 마음이 없었지만, 그가 앞장서서 술배 남을 때렸던 것을 생각해서 고개를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