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벌벌 떨고 있는 웨이터와 달리 백유미는 술병을 들고 곽승재를 도와주려고 했다.“옆에 물러서. 네가 낄 데가 아니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호통했다.그러나 연약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견고함이 담겨 있었다.“안 돼. 상대가 사람이 너무 많잖아. 네가 다치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어!”바로 이때, 싸움꾼 한 명이 백유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곽승재는 놀라 비명을 지르는 백유미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오면서 발로 싸움꾼을 차버렸다.그다지 좋은 타이밍은 아니지만 이 장면을 본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갔다.곽승재가 지키는 사람은 그녀 한 명뿐이 아니었다. 백유미가 위험에 처하거든 그 또한 방금전처럼 나설 것이다.그러나 곽승재가 못 본 사이, 아까 술병에 머리를 맞았던 남자가 땅에서 일어나 흉측한 표정을 한 채 그녀에게 다시 덮쳤다.고은서는 재빨리 그를 향해 쇠방망이를 휘둘렀다.그러나 체격 차이가 꽤 있을 뿐만 아니라 고은서가 있는 힘껏 휘두르지 않은 탓에 남자는 뒷걸음을 치다가 이마에 피를 닦고 더 흉악한 표정으로 또다시 덮쳤다.악에 받친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고은서가 들고 있던 쇠방망이를 내팽개쳤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쇠방망이가 땅에 떨어졌다.무기를 잃은 고은서는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땅에 있던 방망이를 들고 그녀를 내리치려고 했다.“피해!”고은서가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로 남자의 발을 공격하려고 할 때 귀가에 백유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어 자신과 부딪치는 커다란 힘을 못 이긴 고은서는 옆으로 넘어졌다. 그녀 몸 위로 덮친 사람은 다름 아닌 백유미였다.“으윽!”남자가 내리친 방망이를 대신 막아낸 백유미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고은서도 큰 충격 때문에 배가 아파오면서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바로 이때, 문이 열리면서 주민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얼른 처리해!”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적
무언갈 떠올린 민시후는 재빨리 그녀를 안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곽승재가 민시후를 밀어냈다.“저리 비켜!”그는 주민기에게 백유미를 맡기고 두 손으로 땅에 있는 고은서를 안아 올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임신한 사실을 들킬까 봐 아픔을 참고 발버둥을 쳤다.“상관하지 말고 나 내려줘! 민시후, 나 병원까지 데려다줘...”“고은서!”저녁 내내 참았던 곽승재는 더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또 룸에서 민시후가 그녀를 위해 자신의 부하를 꾸지람하는 것까지 보게 되었었다.그러나 현재 거의 쓰러짐에도 불구하고 고은서는 계속 민시후만 부르고 있었다.“내가 네 남편이라는 걸 잊었어?”고은서는 입술을 꼭 깨물면서도 여전히 민시후를 불렀다.“민시후 보고 데려다 달라면 돼...”“너!”곽승재는 얼굴빛이 무척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더는 상관하지 않고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가 급하게 소리 냈다.“민시... 읍!”그녀가 민시후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곽승재가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화가 난 고은서는 숨이 차고 복통까지 더 심해져 끝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가 깨났다.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병실에 있다는 걸 발견했다. 주변은 차가운 벽뿐이었고 손에는 링거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병실과 이어진 베란다에서는 담배를 피고있는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고은서는 담배 피우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전과 같이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와는 달리 그의 주변에서는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졌고 베란다에 기대어 내뿜는 담배 연기마저도 한기가 느껴지는 듯했다.쓰러지기 전에 심각한 복통을 느꼈던 고은서는 갑자기 배 속의 아이가 생각났다.‘아이는 어떻게 되었지?’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물으려고 했는데 링거 주삿바늘을 건드린 탓에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곽승재도 그녀가 깨났을 감지하고 병실로 들어왔다.“어디 가려고
한기뿐만이 아니라 억울함, 분노... 그리고 좌절감이 느껴졌다.곽승재가 말하는 새 남자가 민시후일 가능성이 있었다.‘곽승재가 나랑 민시후 사이를 오해하고 있다는 건 내 배 속의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의미하겠지?’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고은서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몇 번이고 말했다시피 전에는 내가 어리석어서 잘못된 결정을 내렸고 지금은 그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는 것뿐이야.”“이게 네가 잘못을 바로잡는 방법이야?”곽승재는 고은서와 민시후가 함께 호텔로 들어가고 또 같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그녀 앞에 던졌다.사진 속 민시후는 그녀와 팔짱을 끼고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아주 다정해 보였다.전에 일부러 송민아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건데 이 사진들이 곽승재 손에까지 들어가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고은서는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그것 또한 잠시뿐이었다.민시후가 자신의 아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곽승재가 두 사람 사이를 철저히 조사할 게 뻔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오해하게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고은서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이혼한다고 해놓고 번복한 사람은 당신이야. 내 탓이 아니란 말이야.”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그녀의 턱을 잡고 한기가 서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그 짧은 시간도 못 견디겠단 말이야?”고은서는 전혀 꿀리지 않고 담담하게 그를 쳐다보며 답했다.“난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너!”곽승재는 이를 갈았다.“그래서 대체 누구 아이야?”“이미 속에 답이 있으면서 왜 자꾸 물어보는 거야?”그녀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이 더 강해졌다.“네 입으로 직접 말해.”턱이 아파온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직접 말한다고 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아. 일은 이미 일어났고 어떻게 해결할지 당신 용건이나 말해.”
고은서의 입가에서 냉소가 흘러나왔다.“그때는 확실히 안 샀어. 그런데 다음날 당신이 나를 두고 출장 갔을 때, 도저히 당신을 믿을 수 없어서 지연이에게서 피임약을 받아 먹었어. 72시간 안에 먹으면 피임 효과는 있겠지만 자주 먹으면 생리 주기가 불규칙해지고 몸에 해롭다며 적당히 먹으라는 충고까지 받았어. 나도 더 이상 피임약을 먹을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어. 믿지 못하겠다면 지연이를 불러와서 확인해 봐.”고은서는 피임약을 먹지는 않았지만 전에 피임약에 관해 찾아본 적은 있었다. 게다가 박지연도 자신을 위해 사실을 숨겨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곽승재는 구체적인 부분까지 흐트러짐 없이 일일이 다 말하는 고은서를 보면서 자신의 추측을 의심했다. 전에 고은서는 피임약을 먹을 일이 전혀 없었기에 직접 먹어보지 않고서야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곽승재는 더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할 것 같았다.“나랑 아이를 가지는 건 무섭고 민시후랑 가지는 건 괜찮다는 얘기야?”고은서는 그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다 무섭긴 하지. 그런데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별로 없었어. 또 이튿날 할머니가 부르셔서 본가로 갔다가 부랴부랴 M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에 약 챙겨 먹는 거 까먹었어. 게다가 피임약을 먹은 지 이틀도 되지 않아서 설마설마하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곽승재는 고은서가 술에 취해 자신의 허리를 둘러안고 같이 자자고 애교 부리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그러나 고은서가 다른 남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게 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녀의 턱을 더 꽉 잡았다.“그래서 M국까지 와서 날 보살펴준 게 다 죄책감 때문이라는 거야?”“아파!”턱이 부서질 것 같은 아픔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썼다.곽승재는 아픔 때문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고은서를 보면서도 전혀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반면 분노의 불길이 점점 더 타오르는 것 같았다.“고은서, 대체 왜 그런 거야?”고은서는 애
“마침 야간 당직 서고 있는데 네가 다친 채 병원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지만, 네가 계속 자고 있어서 다시 돌아가서 당직 서다가 왔어. 그런데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어.”박지연은 면봉을 버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혈은 되었어. 조금만 기다려, 연고 가져다줄게.”박지연이 나간 후, 고은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라 밖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이내 박지연이 연고를 가지고 들어와 그녀의 입술에 발라줬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갑자기 다쳐서 쓰러진 건데?”박지연이 캐물었다.“곽승재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차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어.”고은서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알려주었다.“민시후는 병원에 다녀갔어?”박지연이 답했다.“내가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이미 네가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겨진 후였어. 그래서인지 곽승재만 보았지 민시후는 보지 못했어...”민시후가 왔었는지는 나중에 전화를 걸어보면 알 수 있었다. 지금 고은서가 가장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내 배 속에 아이는... 괜찮아?”곽승재의 태도로부터 간단히 추측해낼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박지연한테서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괜찮았으면 좋겠어? 아니면 안 괜찮았으면 좋겠어?”박지연은 대답 대신 그녀에게 되물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이 있기 전에는 이 아이를 별로 가지고 싶지 않았었다.그런데 복통을 느낄 때마다 아이를 잃을까 봐 무섭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박지연은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그녀는 고은서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지금까진 별문제 없어. 출혈 현상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강하게 잘 버텨내 줘서 괜찮아. 의사 선생님 말로는 자극받지 않고 푹 쉬면 별일 없을 거래.”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지연아, 이런 일을 겪고도 내 배 속에
백유미의 이름을 들은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백유미는 왜 여기에 있는 건데?”‘분명히 구급차를 부른 거로 기억하고 있는데, 설마 나처럼 이 병원에 온 건가?’박지연의 말은 그녀의 추측을 사실로 만들었다.“우리 병원이 클럽이랑 가까우니까 구급차도 자연스레 여기로 데려온 거겠지.”“지금 백유미 상황은 어때?”고은서가 물었다.“다른 층 병실에 있는데 등이 심하게 다친 것 같아. 근육도 상하고 척수도 상해서 아마 한참 동안 걷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다녀야 할 거야.”박지연이 대답했다.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대체 무슨 심보지? 왜 심하게 상하면서까지 대신 막아주려 했던 거지?’“듣기로는 주민기 씨가 데려왔다던데, 수속도 주민기 씨가 하고. 설마 같은 시간 때에 같이 상한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박지연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전에 고은서는 클럽에서 있었던 일만 간단히 얘기해줬을 뿐 백유미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지연도 물어본 이상 그녀는 숨길 생각이 없었다.“백유미가 달려와서 너 대신 쇠방망이에 맞았다는 거지? 대체 왜 그랬대?”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도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차라리 곽승재를 대신해 맞았다면 이해가 가겠는데 왜 굳이 날 대신해 맞은 걸까? 내가 다치면 도리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러니까. 아무리 곽승재한테 잘 보이려고 해도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곽승재도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빤히 알고 있을 텐데.”박지연은 말하면서 갑자기 무언갈 떠올렸다.“혹시 백유미가 널 넘어뜨리려고 일부러 너한테 덮친 건 아닐까?”박지연의 뜻을 깨달은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그러니까 백유미가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일부러 날 구하는 것처럼 하다가 날 유산시키려 했다는 거지?”“그래야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되잖아. 설마 갑자기 선심을 써가면서 자신의 안부 따위 상관하지 않고 널 구했겠어?”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였
민시후에게 여러 번이고 연락해보았지만 잠잠무소식이었다.고은서는 그에게 할 말이 있다고 시간이 되면 병원에 들르라고 메시지를 남겼다.폰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박지연이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공주님, 아침 드세요.”박지연은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고은서는 박지연이 행여나 자신이 또 흥분해 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박지연을 달랬다.“나 진짜 괜찮아. 밤새 당직 서면서 힘들었을 텐데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쉬어.”박지연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럼 오후에 다시 보러 올게. 너 대신 괜찮은 간병인 한 명 청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수시로 말하면 돼.”“내가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간병인까지 청할 필요 없어.”“그냥 내 말 들어.”박지연이 고집부렸다.“여자는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너도 계속 말했었잖아.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라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여.”“네네, 아름다운 미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아침 식사 후, 박지연이 청한 간병인이 도착했다.고은서는 간병인에게 일상용품 구매를 부탁한 뒤 창가에 가서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다. 너무 오래 누워있은 탓에 몸이 뻐근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었다.그러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어젯밤에 다친 발등이 아파왔다. 양말을 벗어보니 발등에는 큰 멍이 들어 있었다.“사모님, 발등도 다치셨어요?”바로 이때, 주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어제저녁 제때 나타난 주민기에게 은근히 고마웠다. 그래서 그를 대하는 태도도 저도 모르게 온화해졌다.“괜찮아요. 나중에 약 바르면 돼요.”주민기는 손에 있던 도시락통을 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사모님, 이건 아줌마가 사모님을 위해 끓인 죽과 디저트들이에요.”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어제 화내면서 문을 박차고 나간 사람이 오늘 아줌마한테 이런 걸 부탁한다고?’“아줌마가 다 사모님께
고은서가 말했다.“곽승재가 사인한 이혼서류를 저한테 전해주라고 안 하던가요?”“그런 명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주민기는 아주 담담해 보였다.“그럼 직접 구청으로 가겠단 뜻인가요?”고은서가 캐물었다.주민기는 여전히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대표님의 결정은 저도 잘 모릅니다.”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모욕을 느낀 적이 없는 곽승재가 흔쾌히 이혼해줄 리가 없다는 것을 고은서는 이내 깨달았다.“실장님!”고은서가 주민기에게 무언갈 부탁하려고 할 때 간병인 같은 사람 한 명이 달려오면서 그를 찾았다.“백유미 씨께서 상처가 너무 아프다면서 실수로 아침을 엎어버렸어요. 그리고 지금은 진통제를 달라고 하시는데 제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물어보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역시 곽승재가 아줌마한테 내 아침까지 부탁할 리가 없지. 백유미 아침을 준비하면서 겸사겸사 내 아침까지 준비한 거였네.’고은서는 헛웃음을 쳤다.방금전까지 담담하던 주민기가 얼굴빛이 확 변하더니 간병인을 질책하기 시작했다.“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잖아요. 왜 직접 찾아오고 난리세요.”간병인이 황급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실장님. 백유미 씨가 계속 재촉하시고 또 폰 배터리가 다 나가는 바람에 간호사한테 물어보고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어요.”“볼 일이 있으시면 먼저 가보세요. 그리고 아침도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세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고은서가 오해했다는 걸 알고 황급히 설명했다.“사모님, 아침은 대표님께서 직접 아주머니한테 부탁하셔서 준비한 거예요. 게다가 다 사모님께서 좋아하시는 거로...”“알겠으니까 더는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제가 어떻게 감히 이런 아침을 먹겠어요.”어떤 설명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주민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편히 쉬세요”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간병인과 함께 병실에서 나갔다....GS 그룹 대표 사무실.주민기는 어두운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