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을 나온 박지연은 조용한 곳을 찾아 육현석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일을 알렸다.육현석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형이 사랑을 강요하는 건가?’“지난번에 곽승재를 설득하겠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됐어요?”박지연이 물었다.박지연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육현석은 고개를 저었다.“잘 안됐어요. 웬만한 일은 그대로 말릴 텐데 이 일은 정말 힘들어요.”“그럼 오늘 일은 더 말리기 힘든 거 아니에요?”“맞아요.”육현석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형은 어려서부터 가문의 후계자로 길러져서 성격이 포악하고 오만해요. 한번 결정을 내리면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을 거라서 저도 도울 수 있는 게 없네요.”“그럼 어떡해요? 은서는 안 그대로 이혼하겠다고 하는데... 곽승재가 계속 이대로 하면 정말 원수가 될 것 같아요.”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육현석이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일단 형한테 연락해 볼게요. 하지만 99.99%의 확률로 소용없을 거예요. 지연 씨랑 형수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해요.”박지연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답했다.“그렇다면 괜히 연락할 거 없어요. 굳이 매를 벌 필요는 없죠.”육현석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위해서라면 한번 해보는 거죠 뭐.”“그럼 행운을 빌어요.”박지연과 통화를 마친 육현석은 바로 곽승재에게 연락했다.“무슨 일이야?”곽승재의 말투는 까칠했다.“형, 형수님한테 아이를 지우로 예원 별장으로 들어가라고 했다면서?”곽승재가 싸늘하게 답했다.“그래서? 뭐가 문제야?”“형수님이 미워할까 봐 무섭지 않아??”“지금은 사랑한대?”육현석은 말문이 막혔다.“형, 형수님과 이혼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알아.”“아쉬워하지 않아!”곽승재는 차갑게 육현석의 말을 끊었다.“이건 은서가 치러야 하는 대가야!”잠시 멈칫한 육현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승재 형...”“다시 한번 고은서 편을 든다면 너도 같이 정리할 거야!”곽승재는 육현석에게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전화를 끊
송민아는 불만으로 가득 찬 표정을 하고 기세등등하게 걸어왔다.“송민아 씨가 여긴 웬일로 오셨어요?”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대체 시후 오빠를 언제까지 해칠 생각이야? 지금 당신 때문에 ZY 그룹이 얼마나 큰 곤경에 처했는지 알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기에서 여유롭게 햇볕이나 쬐고 있냐고!”‘ZY 그룹 일로 온 거구나.’“민시후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어요.”고은서가 담담하게 답했다.“시후 오빠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다고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랑 엮인 후로 시후 오빠한테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 알고 있어요? 밀회한 일로 망신당한 것도 모자라 얼마나 힘겹게 그 일을 처리했는데 또 당신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잖아요!”고은서는 자신도 잘못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한 마디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그러나 송민아는 고은서가 자신을 일부러 무시한다고 오해하면서 계속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지금 무슨 태도에요? 억울하기라도 하다는 거예요? 대체 당신이 어디가 좋다고 시후 오빠가 계속 도와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까. 당신은 시후 오빠 곁에 있을 자격도 없어!”고은서가 차근차근 설명했다.“송민아 씨, 이번 일은 확실히 저 때문에 발생한 일이 맞아요. 그런데 그룹을 운영하면서 이런저런 상황을 피면 할 수 없는 법이에요. 민시후가 그룹을 계승 받은 이상 이런 일쯤은 잘 처리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쓸데없는 소린 집어치워요. 시후 오빠는 속여도 난 못 속여! 조금이나마 양심이 있다면 배 속에 아이 없애고 시후 오빠 곁을 떠나요.”송민아가 배 속의 아이를 타깃으로 삶으려고 하자 고은서는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별다른 일이 없으면 먼저 병실로 돌아갈게요.”“어딜 가려는 거야! 전에도 이미 아이를 없애라고 경고했었는데 언제까지 끌 생각이에요? 내가 직접 손을 쓰기라도 바라는 거예요?”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서의 눈빛이 순간 매
백유미는 숨이 막혀 얼굴이 빨개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발버둥 치는 척하면서 입으로 계속 고은서를 자극했다.“네가 승재랑 자고 임신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야... 아무튼 지키지 못하는데...”“독한 년!”고은서는 미친 듯이 백유미의 목을 졸랐다. 백유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절망과 원망으로 가득했다.“네가 이 아이가 곽승재 아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네가... 운이 나쁜 거지... 누가 너한테 미용실에서... 박지연이랑 그 얘기를 하라고 했어...”고은서는 그제야 그날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옆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걸 떠올렸다.‘백유미도 그날 그 미용실에 있었단 말이야?’고은서는 백유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곽승재랑 곧 이혼할 건데 왜 날 가만두지 않는 건데!”“근원을 없애야지 않겠어? 하하하...”백유미는 숨이 차 하면서도 크게 웃어댔다.“미친년, 너도 죽어!”고은서는 더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지르며 있는 힘껏 백유미를 목을 졸라 죽이려고 했다. 그녀의 손톱이 백유미의 살을 파고들면서 피가 흘렀다. 백유미는 점차 눈동자가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고은서 지금 뭐 하는 거야?”백유미가 곧 질식하려고 할 때 뒤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송민아가 황급히 달려왔다.이를 본 백유미는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면서 한쪽으로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고은서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비웃는 듯했다.“아악! 죽어!”고은서는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한 번 더 뺨을 내리치려고 할 때 곽승재가 다가오며 그녀를 막았다.“고은서, 얼른 손 놓아!”곽승재가 고은서의 손을 강제로 백유미의 목에서 떼어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백유미는 숨을 고르면서도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부축해서 휠체어에 앉히세요.”곽승재는 옆에 있던 의사에게 말했다.“피!”바로 이때,
고은서는 곧 쓰러질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곽승재의 옷소매를 잡고 집요하게 그를 막았다.곽승재는 순간 멈칫했다.반면 백유미는 호수에서 발버둥 치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휠체어는 이미 호수에 잠몰 되었다.“얼른 백유미 씨를 좀 구해주세요! 곧 죽는 다고요!”옆에 있던 간병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의사와 간호사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다들 간병인의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신고하면서 백유미를 호수에서 꺼낼 나무 막대기를 찾았다.“승재야...”백유미가 곽승재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내 버티지 못하고 가라앉으려고 했다.이를 곽승재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고은서의 손을 뿌리치고 호수로 뛰어들었다.백유미를 향해 헤엄치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환자분!”간호사의 부름 소리와 함께 고은서는 그대로 쓰러졌다....고은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박지연이 마침 옆에서 물을 따르고 있었다.“지연아.”그녀는 쉰 목소리로 박지연을 불렀다.“은서야, 깼어? 괜찮아? 불편한 곳은 없어?”박지연은 황급히 물잔을 내려놓고 고은서한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련한 눈빛으로 박지연을 바라보았다.박지연 또한 고은서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은서야, 우린 아직 젊잖아. 기회도 이번뿐만이 아닐 거야...”고은서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았다.사실 그녀도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나 희망을 품고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기적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내 지키지 못한 탓에 아이가 사라졌어.’“은서야, 이러지 마... 우선 네 몸 건강이 첫째야.”박지연은 마음이 아파 오면서 고은서와 같이 눈물이 흐를 뻔했다.똑똑.바로 이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고은서가 다시 눈을 뜨자마자 걸어들어오는
고은서는 수술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를 악물었다.“백유미는 지금 어디 있어?”“곽승재 덕분에 살긴 했는데 폐에 물이 너무 들어간 탓에 응급실에 들어갔어. 아직 깨어나진 않았고.”박지연은 고은서를 부축하며 엄숙하게 말했다.“고은서, 네가 백유미를 증오하는 건 알겠는데 다신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돼. 백유미가 진짜 죽기라도 하면 너도 끝이야. 백유미 같은 인간 때문에 네 인생까지 망칠 필요는 없잖아.”“그런데 내 아이를 죽였잖아!”고은서는 백유미가 자신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알겠어, 알겠어. 우선 진정해.”박지연은 흥분해 하며 몸을 바들바들 떠는 고은서를 달랬다.고은서가 진정이 된 후 박지연은 그녀를 병상에 다시 앉히고 물을 따라줬다.“물이라도 마시면서 분노를 가라앉혀봐.”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면서 거절했다.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박지연은 물잔을 고은서 입가에 가져다 대며 그녀를 달랬다.“조금이라도 마셔. 그러면 위도 덜 아플 거야.”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몇 모금 마셨다. 따뜻한 물을 마시자 몸도 따라 따뜻해지는 듯했다.박지연은 고은서를 부축해서 병상에 눕히면서 말했다.“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우선 몸부터 챙겨. 그리고 흥분해 하지 말고. 모든 게 다 백유미 짓이라면 꼭 널 망가뜨리는 게 목표일 거야.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널 망가뜨리려 할 거야. 넌 절대 그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돼. 알겠어?”고은서는 북받쳐 오르는 살기를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백유미가 더는 연기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고은서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건 바로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녀의 멘탈을 뒤흔들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분명했다.‘그런데 무슨 이유로 곽승재를 타이밍에 맞춰서 불러온 거지?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목적이었던 거야. 악독한 년!’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밥을 부탁한 뒤 민시후에게 연락했다.민시후는 그녀가 변호사 일 때문에 그러는
곽승재 어머니, 서연정 여사였다.고은서와 서연정은 영상통화로만 한두 번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그러나 서연정과 곽현수는 정식으로 이혼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 이혼한 사이와 별다른 점이 없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별거 중이었고 전미자 생일에도 해성으로 돌아오지 않은 걸 보아서는 아마 결혼생활에 대해 이미 마음을 접은 게 분명했다.고은서는 서연정이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 믿고 그녀에게 이혼하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었다.잠시 후, 서연정이 전화를 받았다.고은서는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부터 했다.“어머니, 저 고은서입니다.”서연정은 약간 의아했다.“안녕하세요. 저한텐 무슨 일로 연락한 거죠?”“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겨서 이렇게 연락하게 되었습니다.”고은서의 허약한 목소리로부터 간절함이 느껴졌다.“저 곽승재와 이혼하고 싶습니다.”서연정은 또 한 번 의아했다.“무슨 일 있었나요? 정서가 약간 불안정한 것 같은데.”서연정이 온화한 목소리로 나긋하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교양이 있는 지적인 여자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방금전까지 애써 정서를 억누르고 있던 고은서는 자신을 관심해주는 서연정의 말을 듣자마자 약간 울컥했다.“저...”서연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렸다.“사정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곽승재랑 이혼하려고요.”고은서는 쉰 목소리로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전에 곽승재가 할머니 생신이 지나면 이혼서류에 사인해준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사인해주지 않고 있어요. 심지어 이젠 저를 협박하면서까지 이혼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리고 할머니가 저를 무척 아끼는 건 사실인데 저랑 곽승재 사이에 오해만 존재할 뿐 이혼할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세요. 게다가 할머니도 연세가 있으셔서 이런 일로 할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어요.”서연정은 그녀의 말을
서연정의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온종일 병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녀의 몸이 너무 허약한 탓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 박지연은 그녀의 곁을 계속 지켰다.이튿날, 의사가 회진을 돌면서 그녀에게 주의할 점을 전달하고 떠난 후 고은서는 돌아가 쉬라고 박지연을 달랬다.“나 혼자 누워있어도 돼. 일이 있으면 간병인 부르면 되는 거고.”“나 절대 안 가.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지금 괜찮은 척하지만 어제저녁 내내 자지 못했잖아.”고은서의 눈빛에는 아직도 원망이 남아있었다. 이를 알아본 박지연이 그녀를 달랬다.“날 보내고 백유미 찾으러 가려고 그러는 거지?”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제저녁 그녀는 눈을 감을 때마다 핏덩어리가 되어 사라진 자신의 아이와 백유미의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아른거려 차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녀는 백유미를 향한 원망과 증오를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은서, 잘 생각해 봐. 백유미가 전에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다 모르는 척하면서 억울한 척 연기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이 한 짓을 인정하면서 비아냥거렸겠어.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박지연은 어제저녁 힘겹게 고은서의 입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캐냈다. 그녀는 고은서가 유산한 게 다 백유미 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하마터면 뒤로 쓰러질 뻔했다.박지연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 백유미가 겁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병원에서 고은서를 직접적으로 해치려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백유미가 전에 썼던 수단으로는 더는 널 해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야. 그래서 지금 방법을 바꿔 네 멘탈을 뒤흔들려고 하는 거라고. 고은서, 비통함에 깊이 빠져있어서는 안 돼. 몸 회복 잘하는 게 우선이야. 백유미 같은 악독한 사람도 언젠간 벌을 받게 될 거야.”박지연이 말을 보태었다.“하늘이 벌을 내리지 않으면 내가 직접 벌을 줘야지.”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은서야...”“됐
백승엽의 말을 들은 사람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고은서를 향해 들이밀었다.고은서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허약한 몸을 일으키면서 박지연에게 물었다.“지연아, 괜찮아?”“괜찮아.”병상 옆에 놓인 테이블에 부딪힌 박지연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저으며 애써 고은서 옆으로 다가갔다.“봐봐요. 이 여자가 그런 악독한 일을 저질러 놓고도 나를 무시하면서 사과할 마음도 없어 보이잖아요.”백승엽은 울컥거리면서 말했다.“우리 유미가 어릴 때부터 개미 한 마리조차 밟지 않을 정도로 착했는데 이 악독한 여자 때문에 여러 번이고 죽음의 고비에 처했었다고요. 어제도 마찬가지로 우리 딸이 운이 좋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미 익사했을 거예요.”백승엽의 말을 들은 기자들과 매체인들은 카메라를 더 가까이 들이댔다.“다 저리 꺼지지 못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분명히 당신 딸이 먼저 우리 은서를 유산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당신들도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요. 그렇지 않으면 신고할 거예요!”박지연이 고은서 앞에 막아서면서 그들을 향해 호통쳤다.“신고해!”백승엽은 무서워하기는커녕 큰소리로 울부짖었다.“어제 우리 딸이 호수에 빠질 때 엄청 많은 목격자들이 있었어. 나도 어제부터 신고하고 싶었거든. 우리 딸을 다치게 해놓고 책임은 져야지! 고의상해죄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고의상해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기자들과 매체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야망으로 가득찬 눈길로 고은서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간단한 사랑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기사에 몇 마디만 추가하면 여론을 더 크게 몰고 갈 수도 있었다박지연도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생각했다.현재 백유미가 고은서를 유산하게 만들었다는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투약한 간호사도 찾지 못한 상황이었고 또 그 간호사를 찾았다고 해도 백유미와 꼭 연관이 있다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이 일이 기사로 퍼지게 되면 여론이 고은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쏠리게 될 것이다.“이봐요.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