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에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낯선 사이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곽승재가 계속 캐물었다.‘이혼 한 마당에 무슨 관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거야?’고은서는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상관없어.”“고은서, 우리가 결혼한 지 벌써 오 년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혼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부정하려고 할 수가 있어?”곽승재는 순간 화가 났다. 그러나 고은서 눈에는 이 상황이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정확히 말하자면 오 년 동안 당신이 나한테 퍼부은 감정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우리 사이엔 원래부터 아무런 감정이 없었잖아.”“감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전에 없었다고 해도 지금 생겼다잖아. 나도 널 좋아하게 됐다고. 그런데 왜 자꾸 날 거절하려고 하는 건데?”“왜 거절하면 안 되는 건데?”고은서가 되물었다.“전에 내가 당신을 좋아할 때는 내가 당신 눈앞에 더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날 싫어했잖아. 그런데 내가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갑자기 날 곁에 잡아두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당신 감정을 꼭 받아줘야 하는 법은 없잖아.”“왜 갑자기 날 좋아하지 않게 된 건데? 적어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곽승재는 화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좋아하지 않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오 년 동안 나를 극혐해 하다가 내가 이혼하려고 하니까 날 좋아하게 되었다고? 너무 어이없지 않아?”곽승재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이혼하기 싫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혼하기 점점 더 싫어졌다. 이젠 이혼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역겨울 정도였다.“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은 단 한 번도 날 존중해준 적이 없어.”고은서가 그를 대신해 답해줬다.“당신은 내가 평생 당신 곁에 붙어서 안 떠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지?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는 건 모든 게 다 내 탓이고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고 당신이 날 좋아하
이혼 증명서를 들고 구청 문 앞에 선 고은서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곽승재가 진짜 사인해주다니. 우리 정말 이혼한 거야? 나 이젠 자유의 몸인 거야?’“시그니엘 집문서와 열쇠야.”곽승재는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지난번에 그가 병원에 이 서류들을 놓고 가는 바람에 고은서는 퀵 서비스를 불러 그에게 돌려준 적이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 주겠다고 고집부릴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안에 금액을 기입하지 않은 수표 한 장도 넣었어. 너랑 할아버지는 아무 재산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오 년 동안 함께 결혼생활을 해온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곽승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예전의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돌아왔다.“나한테 빚진 것도 없는 데 필요 없어.”고은서는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그녀가 이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곽승재는 그녀에게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지금 그저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뿐이다.이혼하기 전에는 곽승재한테서 백억 정도는 떼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지만 이혼 증명서를 손에 쥐고 나니 너무 홀가분한 나머지 그에게서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그와 멀리하고 싶었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군가가 곽씨 집안에서 널 홀대했다는 소릴 듣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고은서가 반박했다.“돈은 나 스스로 벌면 돼. 나도 우리 고씨 집안에서 딸을 판다는 소릴 듣기 싫어.”곽승재는 이를 악물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차에 올랐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한테 거절당한 것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현재 자유의 몸이 되었다.푸른 하늘 아래 서 있는 그녀는 공기가 이토록 상큼하고 햇살이 이토록 밝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행복 지수가 순간 높아진 것 같았다.‘마침내 이혼했어! 지금부터
고은서는 길옆에 주차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고준석을 향해 걸어갔다.“수속 다 끝났어?”고준석이 물었다.“네.”이혼 증명서를 들고 있는 고은서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고준석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이혼하고서도 결혼할 때처럼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고은서는 부끄럽다는 듯 고준석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제가 또 말썽부려서 미안해요, 할아버지.”고준석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답했다.“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네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상처만 받는 것보다 나으니까. 할아버지는 네가 말썽을 부려도 행복하기만 하다면 다 괜찮아.”“고마워요, 할아버지.”마음이 따뜻해 난 고은서는 고준석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아, 할아버지, 오늘 예원 별장은 왜 오신 거예요?”고은서의 물음을 들은 고준석은 순간 표정이 엄숙해졌다.고준석은 오전에 MQ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친구한테 연락했는데 우연히 곽승재와 고은서에 관해 묻기에 조사해보니 두 사람 사이에 관한 소문이 자자한 걸 발견했다고 말했다.“은서야, 이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왜 할아버지한테 얘기하지 않았어?”고준석이 그녀를 꾸짖었다.“그리고 입원했다는 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동영상에서 네 친구가 네가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하던데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이미 지나간 일로 고준석을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애교 섞인 말투로 답했다.“별로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지연이가 과장해서 말한 거예요.”그러나 고준석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계속 캐물었다.“너랑 곽승재 사이에 진짜 제삼자가 존재하는 거야? 이혼하겠다고 고집부리고 그 여자를 호수로 밀어 넣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야?”고은서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전부는 아니지만 그 이유도 있어요.”그녀의 말을 들은 고준석은 이내 자초지종을 깨달았다. 그는 전부터 곽승재라면 환장하는 고은서가 왜 갑자기 이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제야 그 의문이 풀렸
박지연은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은서야.”고은서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박지연의 목소리를 듣고 걱정이 되었다.“지연아, 왜 그래? 전화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무슨 일 있어?”“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본가에 가자마자 시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해서 먼저 나왔어. 그리고 이것저것 하면서 분주히 보내다 보니까 미처 너한테 연락하지도 못했고.”“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당연히 네 일을 먼저 처리해야지. 맞다, 좋은 소식 하나 있는데 나 오늘 이혼했어!”고은서가 그녀에게 마음에 두지 말라고 말했다.“진짜 이혼했어?”박지연은 깜짝 놀랐다.“응!”고은서는 이혼한 얘기를 꺼낼 때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이혼 증명서도 금방 가졌는데 아직도 따끈따끈하다. 다 네가 본가로 가서 할머니한테 소식을 전해준 덕분이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순리롭게 이혼도 못 했을 거야.”비록 곽승재가 스스로 동의한 일이지만 전미자가 옆에서 그녀를 지지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사실 내가 오늘 찾아가지 않아도 할머니랑 사모님께서 예원 별장으로 갔을 거야. 내가 본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고은서는 순간 의아했다. 그녀는 전미자가 박지연이 본가까지 찾아간 덕분에 예원 별장으로 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전에 이미 찾아가리라고 마음먹었다고는 미처 생각도 못 했다.‘아줌마가 곽승재를 타이르다가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할머니를 찾아가신 건가? 이러고 보면 아줌마가 약속을 어긴 게 아니네. 며칠 쉬다가 직접 가서 감사하다고 인사해야겠어.’“지연아, 나 먼저 할아버지 집에 가서 쉬고 있을게. 시어머님 몸도 괜찮아지고 하면 우리 만나서 축하파티라도 열자.”“그래, 알겠어.”박지연이 답했다.고은서는 박지연과 통화를 마친 후 민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아버지는 괜찮으셔? 아직도 북제에 있는 거야?]메시지가 발송된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민시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은서가 전
똑똑.곽현수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말했다.“승재야, 내가 말하는 거 들었어?”곽승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는 담배를 끄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세요?”“할머니가 말씀하시길 고은서랑 이혼했다며?”곽현수가 물었다.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어루만졌다.“왜 이러는 거야? 멍 때리며 피우지 않던 담배도 피우고. 사내가 그까짓 이혼을 했다고 이렇게 기죽어 있어서 쓰겠니?”“지금 절 훈계하러 들어오신 거예요?”곽승재가 물었다.“너...”곽현수는 잠깐 말문이 막혀 하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허 교수가 개발한 약품 대리권은 왜 유미한테 주지 않은 거야? 그리고 융자에 관한 일은 왜 유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긴 거지?”곽승재는 미간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놓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답했다.“백 이사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이런 일을 책임질 여력이 되지 않아요. 이처럼 중요한 일을 맡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요.”“뭐가 적절하지 않다는 거야? 융자에 관한 일을 고은서에게 맡기고 유미를 밀어내려고 그러는 거지?”곽현수는 불만만 점점 더 쌓여갔다. 그러나 곽승재는 부인하지 않고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듯 말했다.“아버지. 회사 일을 저한테 전적으로 맡기셨으면 저도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운영하도록 할 테니 제 결정에 간섭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곽승재, 너 지금 그 자리에 앉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곽현수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너 요즘 고은서 때문에 골탕을 먹은 게 한두 번이야? 심지어 GS그룹 주식까지 영향받게 했잖아. 내가 제때 귀국하고 이사회에서 네 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면 넌 지금 이 자리에 못 있어!”곽현수는 점점 더 흥분해 했다.“그런데 나한테 감사하기는커녕 내가 안배한 일까지 거역하려는 거야?”곽승재는 이마를 짚고 담담하게 말했다.“귀국하시지 않아도 이사회 주주들은 제가
폰을 들고 확인해 보니 육현석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아마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 파악을 하려고 전화를 건 모양인 것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육현석이 자신의 기쁨을 함께 공감해 줄 적합한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그녀가 전화를 끊고 다시 자려고 할 때 육현석한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웬 고집이래?’요즘 육현석의 태도가 꽤 마음에 들었던 고은서는 고민하다가 끝내는 전화를 받았다.“육현석 씨,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 형이랑 다퉜어요? 형이 오늘따라 좀 이상해 보여서 걱정되는데 혹시 형한테 전화 한 통만 걸어줄 수 있을까요?”‘아직 이혼한 사실을 모르는 건가?’“죄송하지만 저 곽승재랑 이혼했어요. 더는 곽승재 일로 저한테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니까요.”육현석은 고은서의 말에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이내 조용한 곳을 찾아 그녀에게 자세히 물었다.“형수님, 거짓말이죠? 이혼했다뇨? 형이 왜 형수님이랑 이혼해요? 지금 장난치는 거죠?”육현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복해서 물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요 며칠 두 사람에 관한 기사를 보았었다. 그러나 기사의 여론이 곽승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확인한 그는 이내 기사를 퍼뜨린 사람이 고은서라는 걸 깨달았다.그 누구의 편을 들어도 합당하지 않은 타이밍이었기에 그는 그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기사가 올라온 지 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벌써 이혼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제가 이런 일로 장난칠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 이젠 육현석 씨 형수가 아니니까 호칭을 바꿔줬으면 좋겠어요. 이후로 은서 씨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형...”육현석은 차마 은서 씨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갑자기 이혼한 거예요? 설마 배 속의 아이 때문이에요?”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고은서의 아이를 강제로 없애려고 한
현재 낯선 여자의 터치도 거절하지 않는 걸 보아서는 곽승재가 큰 충격을 받은 게 확실했다.육현석은 한숨을 내쉬었다,평소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마다 약간 밉상이긴 했지만 막상 상처를 받고도 웃으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를 보게 되니 육현석도 따라 기분이 시원찮았다.“가, 다 저리 나가. 다 옆 방에서 가서 놀아. 비용은 내가 낼게.”육현석은 룸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기 시작했다. 그는 곽승재 옆에 있는 여자를 강제로 밀어내고 그의 옆에 앉았다.그 여자는 불만스럽다는 눈길로 육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곽 대표님도 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뭐라고 날 쫓아요?”“가라면 갈 것이지 뭔 쓸데없는 소리가 그렇게 많아.”육현석은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계속 내쫓으려 했다.“그리고 헛된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우리 형 아내가 있는 몸이라고!”“누가 아내가 있다고 그래!”여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불쾌하다는 듯 육현석을 반박했다.그런데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취했는지 그는 평소와 달리 말을 또박또박 하지 못했다.“이리 와서 계속 마셔!”곽승재는 여자를 향해 손짓했다.그의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에는 순간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이내 곽승재의 곁에 다가가 그의 팔에 딱 붙을 정도로 가까이 앉았다.육현석은 순간 다급해 났다.“똑바로 앉아, 뼈 없는 사람처럼 앉지 말고!”“대체 왜 그래요? 대표님께서 같이 술 마시자고 해서 앉은 건데 뭐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왜 자꾸 절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세요?”여자가 그를 반박했다.“너...”“술 마실 생각 없으면 나가. 분위기 망치지 말고.”곽승재가 차가운 눈길로 육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여자도 육현석을 향해 콧방귀를 뀌고는 계속해서 곽승재에게 술을 따랐다.“...”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나도 이젠 지친다. 형이 알아서 하겠지 뭐.’육현석은 그와 멀리 떨어진 자리를 찾아 앉고서는 홀로 술을 마시면서 여자와 함께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는 그를 바라
곽승재의 기분이 최악에 달했다는 걸 느낀 육현석은 더는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육현석은 술잔을 들고 곽승재 옆에 앉으며 말했다.“전에는 형수님이 형을 평생 원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이혼을 동의한 거야?”술잔을 들고 있는 곽승재의 얼굴빛이 엄청 어두웠다.“누가 이혼하지 않는다고 했어? 이 세상에 여자가 고은서 한 명밖에 없어? 전에는 그저 벌을 준 것뿐이야.”“...”육현석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암튼 이혼도 이미 다 했는데 고집부려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육현석은 그를 반박하는 대신 그에게 물었다.“그럼 벌도 다 주고 했는데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어?”곽승재는 술을 들이켜면서 답하지 않았다.육현석은 그를 보면서 갑자기 겁도 없이 장난치기 시작했다.“형, 세상에 여자가 형수님 하나뿐인 건 아니지만 남자도 형 하나뿐인 게 아니잖아. 형이 잡지 않으면 형수님 다른 남자 찾을지도... 아악!”육현석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다름이 아니라 옆에서 듣고 있던 곽승재가 그의 무릎을 힘껏 차버린 것이다.“닥쳐!”“형,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이혼해서 기분이 안 좋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왜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야? 전에도 형수님이 형을 원망할 거라고 말했었는데 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잖아. 형수님이 떠난 게 다 형 탓이야!”육현석은 말하면서 행여나 곽승재에게 또 한 번 맞을까 봐 그와 일 미터가량 떨어진 자리로 피신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입을 꾹 다물고 제자리에 앉아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자극이라도 받은 듯 방금전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살기가 사그라들면서 어두웠던 얼굴빛도 변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쓸쓸해 하는 듯했다.육현석은 순간 자신이 말을 너무 심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방금전까지만 해도 애써 참고 있었던 모양이네. 내가 한 말 때문에 더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형, 나...”육현석이 그를 위안하려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