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아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이전에 병원에서 영양사 붙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병원을 나가버리셔서 그럴 겨를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그 비용을 현금으로 준비했어요.”봉투를 만져본 고은서는 안에 돈이 두툼하게 차 있는 것을 확인했다.천만 원은 족히 될 법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돈이 적다고 생각하는 줄 알고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최근 오빠가 카드를 다 막아버려서 현금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적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카드가 풀리면 나중에 더 줄게요.”고은서가 봉투를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민아 씨가 저지른 일도 아니니 굳이 보상해 줄 필요 없어요.”송민아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물었다.“정말 절 믿으시는 거예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진숙희는 제 가정부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은서 씨를 해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혹시 제가 뒤에서 시킨 거라고 의심하지는 않아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민시후가 그러더라고요. 민아 씨는 그럴 머리도 그럴 용기도 없다고요.”송민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시후 오빠가 말하는 건 다 믿는 거예요?”송민아의 모습에 고은서는 자신과 민시후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설명은 생략하고 말을 이었다.“어쨌든 민아 씨와 무관하다고 믿어요.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돈은 챙기고 나가보세요.”하지만 송민아는 고은서에게 돈을 밀어주며 말했다.“받으세요. 은서 씨가 받아야 빚진 기분이 덜할 것 같아요.”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봉투를 집어 들며 무심히 물었다.“가정부는 북성에서 민아 씨 따라 해성에 온 거예요?”송민아는 고은서가 왜 묻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전부터 절 돌봐주시던 분이에요. 제가 해성에 온다고 하니 따라온 거죠.”“그럼 민아 씨 오빠도 가정부랑 꽤 친하겠네요?”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오빠는 따로 살고 있어서 제 집에는 거의 오지 않거든요. 근데 그건 왜 물어요?”송민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냥 궁금
다정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등에서 땀이 났다.“나가서 밥 먹어.”“좋네. 같이 가자. 배고파 죽겠어.”민시후가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고은서가 살짝 피하며 말했다.“미안, 약속 있어.”민시후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누구랑? 하루 종일 못 봤는데 같이 있어 주면 안 돼?”민시후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가끔은 민시후가 두 얼굴의 사나이 같았다.옆에 있던 송민아의 쓸쓸한 모습을 힐끔 본 고은서는 전생의 자신이 떠올라 마음이 약해졌다.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민아 씨는 시간 있대. 민아 씨랑 같이 밥 먹으면 되겠네.”민시후가 발끈했다.“고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내가 송민아와 파혼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거야? 지금 투정 부리는 거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나 진짜 약속 있어. 먼저 갈게.”고은서가 자리를 뜨려 하자 민시후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세웠다.“아직 집 보러 안 갔지? 내일 같이 가서 보자.”송민아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자 고은서는 미안하면서도 난감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에 답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잠시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식당이라기보단 관광지 같았다.넓은 식당 정원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못 옆에는 작은 다리와 정자들이 있어 편안하면서도 자연적인 느낌이 가득했다.얼마 가지 않아 고은서는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유성준을 발견했다.유성준은 캐주얼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훤칠한 모습은 시크함과 더불어 온화함도 느껴졌다.“성준 오빠, 오래 기다렸죠?”고은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야. 나도 금방 도착했어.”유성준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했다.“회사에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빠듯하더라고.”“괜찮아요. 운전하면 금방이던데요.”“이거 받아.”유성준은 마술처럼 뒤에서 귀엽고 아기자기한 판다 인형을 내밀었다.고은서는 귀여운 인형을 건네받으면서도 정신이 멍해졌다.유성준이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어릴
정원의 따뜻한 조명 아래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분했으며 마치 겨울밤의 바다처럼 차갑고 알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식당으로 들어갔다.“사모님, 정말 우연이네요. 저도 대표님이랑 함께 식하라러 온 건데 여기서 다 뵙네요.”주민기는 바로 곽승재를 따라 들어가는 대신 고은서에게 말을 건넸다.고은서는 주민기가 그녀의 이혼 소식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여전히 나한테 예의 갖추는 건 아마 체면 때문이겠지.’“그러게요. 우연이네요. 다만 앞으로는 주 비서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네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시선을 내리며 대화를 잇지 않았다.“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주민기가 자리를 뜨자 유성준은 고은서를 배려하며 물었다.“장소를 바꿀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 사람은 저 사람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먹으면 되죠. 곽승재가 있는 자리를 매번 피할 수는 없잖아요.”유성준은 고은서의 결정을 존중했다.“그럼 연못가의 자리에서 먹자. 풍경 보며 먹으면 좋잖아. 곽승재 씨 일행은 비즈니스 이야기를 룸에서 할 테니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좋아요.”연못가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넓은 연못에 다양한 색상의 연꽃과 수련이 자라며 조명 아래 그림처럼 드리웠다.유성준은 고은서의 의견을 묻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주문했고 신선한 과일 주스도 함께 주문했다.“오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잘 아세요?”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유성준이 웃으며 답했다.“네 인스타에서 봤어.”고은서는 가끔 인스타에 일상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유성준이 그녀를 계속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웠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민시후가 오이 만찬으로 곽승재를 골탕 먹인 사건이 생각났다.그녀와 곽승재가 룸으로 향하는 중, 곽승재는 그녀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었었다.선물하기 전 먼저 취향 조사를
“하지만 아주머니가 상황을 아시고 나서 성씨 일가에 찾아가 크게 소란을 피웠어. 성씨 일가 사람들도 화가 나서 경찰을 부를 뻔했어.”유성준이 말하자 고은서가 웃었다.단은숙의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녀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친가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고국성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기적이고 인색한 면은 변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이제 성아연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릴지도 몰랐다.세무 문제로 속이 답답했지만 단은숙이 성아연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회사에서 모든 세무 자료를 자진 제출했으니 며칠 후 구체적인 결론이 나올 거야. 우리는 결과가 나온 후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설명하며 영향을 최소화할 생각이야.”유성준이 말했다.“고마워요, 오빠.”고은서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은서의 미소를 보며 유성준도 미소를 지었다.“MQ에 들어왔으니 나도 MQ 일원이야. 이런 걸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그래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오빠, 주스로 건배해요.”고은서가 유리잔을 들었다.유성준도 잔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부딪쳤다.고은서는 음료를 마실 때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고개를 돌려봤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MQ의 현재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성준 오빠, 지난 번에 MQ에 문제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해결 방안 있을까요?”유성준이 논리정연하게 답했다.“MQ는 향수를 주력으로 하는 만큼 이 방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향수를 개발해야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좋은 조향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장에서는 제품에 대한 품질 요구가 높아졌고 수많은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오며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조제한 향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전화기 너머의 원지훈은 이전의 가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뭘 원하는 건데요?”고은서는 원지훈의 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며칠 사이 끊임없이 악재가 퍼져나가며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백유미도 그 사실을 알고 원지훈을 추궁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겠지. 아니면 원지훈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리 없어.’어차피 협력할 사이라면 더 이상 목적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고은서가 태연하게 말했다.“간단해. 어머니를 백유미 집 가정부로 보내서 그쪽 상황을 언제든지 보고하게 해. 너는 백씨 가문 회사로 출근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협조해 주면 돼.”지난 생에서 백유미는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 위암에 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을 시켜 고은혜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조씨 가문을 파산시켰다.이번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가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할 작정이었다.원지훈이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면 그녀와 내외로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다.범가온이 백유미의 가정부가 되면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유미의 풍족한 생활을 지켜보며 분노와 질투심이 일것이다.범가온은 같은 고향 출신인데 왜 백씨 가문은 그렇게 잘나가고 자신은 하찮은 가정부 노릇을 하는가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다.고은서는 자신을 2년 넘게 괴롭혀 온 범가온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원지훈에게 일정한 힘이 있으면 범가온은 어떻게든 원지훈을 통해 백유미가 누리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전생에 범가온 모자가 괴롭히던 수단을 생각해 보면 백유미가 그들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생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단지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고은서의 요구를 들은 원지훈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당신과 협력하면 백유미와 틀어질 텐데 이런 상황에서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것 같아요?”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그건 지훈 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이렇게 작은 일
백유미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미리 말해주면 협조할게.”말을 마친 고은서가 싸늘하게 덧붙였다.“양쪽에서 이득 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날 속이고 양쪽에서 이득을 보려 한다면 지훈 씨는 솟아날 구멍조차 없을 거야.”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은 흠칫했다.‘내 생각을 눈치챘나 보네. 내가 고은서를 너무 얕봤어. 돈 많고 외로운 귀부인 타입은 아니야.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이야.’통화를 마친 원지훈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범가온이 물었다.“지훈아, 믿을만한 사람이야? 네가 말했잖아. 회사에 문제 생긴 것도 그 여자 때문이라고. 또 우리를 끌어드리려는 게 결국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야?”원지훈이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며 답했다.“고은서가 미워하는 건 백유미지 우리가 아니야. 어차피 백유미 밑에서 총알받이 취급을 받으면서 백유미 눈치를 봐야 하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이 기회에 물 흐리면서 고은서랑 백유미가 싸우는 걸 보자고. 나는 그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고. 좋은 기회잖아.”말은 그럴듯했지만 범가온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하지만 백유미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잖아. 고은서가 실패하고 백유미가 우리가 도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원지훈도 백유미의 수완을 잘 알고 있었다.이번 스마트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백유미는 백씨 가문의 자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쉽게 외부 자금을 유치해 프로젝트를 성사했다.만약 고은서가 정말로 백유미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그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었다.원지훈은 담배를 비벼 끄며 결심을 굳혔다.“달콤한 보답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지. 이번 기회를 놓칠 순 없어.”고은서 역시 원지훈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로서는 그가 백유미를 견제할 가장 좋은 무기였다.그의 결심을 더욱 굳히기 위해 고은서는 원지훈에게 돈을 추가로 송금했다.이내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백유미도 진행하던
탁하는 소리와 함께 고은서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고개를 들자 놀란 고은서는 자신을 덮친 사람이 모자와 마스크를 쓴 깡마른 남자임을 알아차렸다.그 옆에는 같은 복장을 한 키가 크고 마른 동료가 서 있었다.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깡마른 남자는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고 키 큰 남자는 빠르게 방문을 닫고 동료와 함께 그녀를 비상구로 끌고 갔다.두 남자의 행동은 빠르고도 다급했다.고은서는 목이 조여 매우 괴로웠지만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두 남자를 공격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비상구에 다다랐을 때 고은서는 복도에서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다.“읍! 읍!”고은서가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이미 두 남자는 그녀를 비상구로 끌고 갔다.‘벨은 이미 멈췄고 직원들이 상황을 점검하러 올지도 몰라.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상함을 눈치챌 때쯤이면 나는 더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겠지.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이 두 사람인가? 대체 누가 보낸 거지?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두 남자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은서를 끌고 가는 것이 불편했는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테이프를 꺼내 그녀의 입을 막았다.양한겸은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피가 머리로 쏠려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입이 막힌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고은서는 지난번 서인수 일당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1층까지 내려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니 그동안 방법을 찾아야 해. 호텔을 벗어나면 위험해.’고은서가 머물던 층은 높지 않았고 양한겸과 신현준은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구에 도달할 것이다.고은서는 매달려 있는 동안 느껴지는 불편함을 참으며 양한겸이 코너 쪽 난간으로 다가갔을 때 발끝으로 힘껏 난간을 걸었다.방심한 양한겸은 무게에 이끌려 뒤로 무게 중심이 쏠리며 계단에 엉덩방아를 찧었다.고은서는 어지러
그때 온몸에 흰 분말이 묻어 유령 같은 두 남자가 다시 그녀 앞에 다가왔다.“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누가 너희를 보낸 거지?”고은서가 다급하게 물었다.“여기는 호텔이야. 곳곳에 CCTV가 있어 도망치기 힘들 거야. 지금 포기하면 너희 책임을 묻지 않겠어!”“같잖은 말은 집어치워!”양한겸이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이미 돈을 받았으니 널 놓아줄 수는 없어. 상황 파악이 됐으면 순순히 따라와.”양한겸은 말하며 고은서를 잡으려 다가왔다.“악!”“멈춰!”고은서가 다리를 들어 양한겸을 차는 동시에 위쪽 계단에서 차가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곽승재가 서 있었다.두 남자도 자연스레 빼어난 옷차림에 차가운 눈빛을 한 곽승재를 발견했다.두 사람의 시선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하지만 싸움 실력이 있고 두 사람이다 보니 곽승재의 출현에 두 사람은 겁먹고 도망치지 않았다.“쓸데없는 참견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가만두지 않겠다.”양한겸이 위협하며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고은서에게로 주의를 돌렸다.“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신현준이 고은서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고은서도 몇 가지 호신술을 배웠기에 위급한 순간에 재빨리 몸을 아래로 굴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악!”고은서가 몸을 숙이자마자 머리 위에서 신현준의 비명이 들려왔다. 곽승재가 그를 발로 차 쓰러뜨린 것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일으켜 자신 뒤에 숨기고 양한겸을 향해 발을 뻗었다.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양한겸은 곽승재의 공격을 피하며 곽승재에게 손을 뻗어 공격해 왔다.쓰러져있던 신현준도 다시 일어나 싸움에 가세했다.비록 2대 1의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이 우세를 점하지는 못했다.곽승재의 공격은 정교하고 매서웠으며 훈련된 자의 실력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봤던 터라 그의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고은서가 위층으로 올라가 도움을 청할지 고민하던 중 양한겸이 주머니에서 스프링 나이프를 꺼내 곽승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