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 아래, 곽승재의 피부가 여느 때보다 더 하얘 보였고 넓은 어깨와 튼튼해 보이는 근육, 그리고 매끈한 몸선이 유독 눈에 띄었다.마치 명장이 직접 조각해낸 작품처럼 매혹적인 몸매였다.그는 어깨에 붕대를 두른 채 허리에는 흰 이불을 덮고 병상에 앉아 있었는데 허약한 모습이지만 나름 매력적이었다.허약함은 그의 매력을 한 층 더 가할 뿐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그의 이런 모습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언제까지 쳐다볼 생각이야?”곽승재가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말투가 여전히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방금전처럼 차갑지는 않았다.고은서는 덤덤하게 눈길을 돌리며 애써 어색함을 감추려고 했다.‘내 탓은 아니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고.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걸 어떡해.’고은서는 곽승재 옆에 다가가서야 그가 셔츠를 완전히 벗은 게 아니라 주삿바늘을 꽂은 오른손 밑에 깔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아직도 링거를 꽤 맞아야 해서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는데 셔츠는 왜 벗은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피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떻게 계속 입고 있어.”곽승재가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깨끗한 옷을 건네주었다.“먼저 걸치고 있지 그래?”곽승재는 반박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왼쪽 팔을 내뻗었다.튼튼한 팔이 그녀의 눈 가까이 확 들어오면서 피부결까지 선명히 보였다.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하다는 듯 물었다.“어쩌라는 거야?”“입혀주지 않고 나 혼자 어떻게 입어?”“벗는 건 혼자 할 수 있고 입는 건 혼자 할 수 없다고?”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네가 계속 보고 싶거든 안 입어도 괜찮아.”곽승재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내가 언제 계속 더 보고 싶다고 했는데? 스스로 옷을 벗
고은서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왜 혼자야? 병원에 의사 선생님들도 있고 간호사 선생님들도 있잖아. 게다가 기사님이 계속 아래에서 대기 중이기도 하고. 아니면 주민기 씨한테 간병인 두 명 정도 모셔달라고 하든가.”“그러니까 네 마음속에서 난 주민기보다도 못하다는 거야?”곽승재가 갑자기 엉뚱한 물음을 제기하는 바람에 고은서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되물었다.“주민기 씨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언제 당신을 주민기 씨랑 비겼어?”‘난 그저 간병인을 모셔달라고 주민기한테 부탁하라고 말했을 뿐인데.’“전에 바에서 술병을 대신 막아준 거 나한테 주민기였어도 막아줬을 거라고 했잖아.”곽승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널 구하기 위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넌 날 간병해주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잖아.”‘기억력은 좋은데 대체 저 이상한 결론은 뭘까? 너무 어이없는데.’전에 대신 술병을 막아준 건 진짜 무의식인 반응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곽승재 앞에 막아선 후였다. 행여나 곽승재가 그 일로 그녀에게 집착이라도 할까 봐 일부러 주민기 같은 다른 사람이었어도 대신 막아줬을 거라고 말했는데 지금까지 그 일로 트집을 잡을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곽승재, 잘 들어. 사람은 계속 변하는 거야. 전에는 당신의 안전이 항상 최우선이었던 건 맞아. 당신이 다치면 내 마음도 함께 아파왔을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당신보다 내가 우선이야. 더는 당신을 위해 칼이나 술병을 막아줄 용기가 없다고. 그러니까 더는 이런 일로 날 시험하려고 하지마.”그때 이름 모를 남자가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을 때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주의를 주었었다. 사실 곽승재의 실력으로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다치게 했다.곽승재가 다쳤을 때의 반응과 방금전 그가 한 말들을 돌이켜본 고은서는 그가 자신이 전처럼 그를 관심하는지 안 하는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무표정한 얼굴과 덤덤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속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마치 그녀가 달갑지 않아 한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말한 대로 약속 지켜야 해. 얼버무리며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고은서는 약간 기가 막혔다.‘왜 전에는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 걸 몰랐을까?’“나 목말라. 물 따라줘.”곽승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고은서에게 지시를 내렸다.고은서는 화를 꾹 참고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수기에서 미온수를 받아 그에게 건네주었다.곽승재는 물컵을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곽승재가 물을 먹여달라면서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순간 그가 정신 차리게끔 그의 얼굴에 물을 뿌릴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물컵을 받아들었다.물을 마신 후 그는 더는 다른 요구를 제기하지 않고 병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고은서도 병상 옆에 의자에 앉아서 그를 지켰다. 종일 새로운 일을 인계받고 유성준을 만나고 또 방금전과 같은 사고를 당하고 나니 피곤함이 물살처럼 밀려왔다.눈을 감고 휴식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고은서도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따뜻한 보일러 때문에 잠이 솔솔 몰려왔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따뜻한 무언가가 자신의 입가를 어루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전에 이름 모를 남자가 입에 붙인 테이프를 떼내면서 다친 입가를 어루만져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에 고은서는 눈을 뜨기 더 싫어졌다.그러나 그 따뜻한 촉감이 입가에서부터 볼살로 이어지더니 이내 이마에서까지 느껴졌다.고은서는 약간 불편했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이마를 어루만지던 동작은 이내 멈추고 그저 따뜻한 온기만 남았다.고은서가 깊이 잠들려고 할 때 그녀는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 이내 입가로부터 촉촉한 감각이 느껴졌다.너무 피곤한 탓에 그냥 무시하고 계속 자려고 했으나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호텔이 아닌 곽승재의 병실에 있다는 걸 감지하고 번쩍 눈을
주민기가 공손하게 답했다.“이미 성씨 집안 성아연이 지시한 일이라고 다 자백했습니다. 그리고 성아연도 이미 경찰 측에 넘겨졌고요.”고은서는 성아연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멈칫했다.전에 성아연이 고준석한테 잘 보이려고 고씨 가문 저택에 찾아갔다가 쫓겨난 후로 고은서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서로 연락한 적도 없었다.‘왜 날 해치려 하는 거지?’고은서의 의문을 알아본 주민기가 입을 열었다.“사모님도 성아연 씨가 MQ 세금 문제와 큰 연관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거라 믿습니다.”‘연관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성아연이 한 짓이 확실한 거겠지. 그저 증거가 없을 뿐이지.’“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성아연이 저를 해치려는 이유가 뭐죠?”고은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일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숙모님께서 성씨 집안까지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다고 합니다. 성아연 씨는 아마 사모님께서 시킨 일이라고 오해하고 사모님께 원망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람 시켜서 사모님을 혼쭐을 내주려 했던 거고요.”단은숙이 성씨 집안까지 찾아가 난동을 부린 일은 이미 유성준한테서 전해 들었는데 성아연이 그 일을 고은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할 줄은 그녀 또한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민기 씨, 성아연을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성아연이 고은서를 해치려고 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숨까지 위협하는 일까지 꾸밀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라 그녀는 성아연을 찾아가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주민기는 곽승재의 표정을 힐끔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됩니다, 사모님. 피해자로서 자초지종을 알 권리는 항상 있는 법이니까요.”“그럼 바로 출발하죠?”“나도 같이 가.”곽승재가 갑자기 병상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필요 없어.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는데 움직이지 말고 누워서 쉬어.”그러나 고은서는 거절했다.“상처가 심해져서 날 지금보다 더 오래 간병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확실히 이 부분을 고려했었던 그녀는 입을
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찔렸다.그러나 민시후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했다.“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회사에서 봐.”그녀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이미 병실 밖으로 나갔고 주민기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어제 호텔 블랙박스를 확인해 봤는데 폰을 방에 두고 오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가져오라고 할까요?”“네, 수고해주세요. 그리고 저 이젠 그쪽 대표님 아내가 아니니까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주민기는 입을 꾹 다물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두 사람이 이혼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칭을 바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잘못하면 곽승재 눈 밖에 나면서 다음 달 보너스까지 잃게 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정말 먹고 살기 힘드네.’곽승재의 비서 자리가 겉으로는 엄청 훌륭한 직위 같아 보이지만 사실 시시각각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주민기는 속으로 눈물을 머금었다.고은서와 주민기가 병원에서 나왔을 때 곽승재는 이미 차 안에 앉아있었다.주민기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는 바람에 고은서 어쩔 수 없이 곽승재와 함께 뒷좌석에 앉게 되었다.곽승재는 아이패드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의사 선생님이 전에 다쳐서 푹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 왜 따라가려고 그래?”곽승재는 그녀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며. 왜 갑자기 날 관심하는 건데?”‘내가 걱정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혹시 더 심하게 다치면서 내 책임이라고 트집이라도 잡을까 봐 무서워 그래.”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경찰서.곽승재가 경찰서까지 찾아온 이유를 전해 들은 책임자가 직접 마중하러 나왔다.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는 피해자로서 규정대로 경찰 조사에 협조했다.그녀가 조사를 끝마치고 나올 때 마침 강인한 태도로 심문을 거부하는 성아연을 보았다.“변호사가 오기 전까지 당신들의 물음에 한
“물론이죠.”상대방은 곽승재의 요구를 아주 흔쾌히 받아줬다.아직 간단한 심문 단계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대화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이를 본 성아연은 더 긴장되었다.“난 저 사람이랑 할 얘기가 없어요. 내가 시킨 일이 아니라니까요. 저는 억울하다고요! 저 사람 저를 해치려 하는 게 분명해요. 경찰로서 제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잖아요!”“곽 대표님은 법과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정직한 사업가입니다. 성아연 씨를 해칠 일도 없고요. 그저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다고 하셔서 그러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가시죠, 성아연 씨.”곽승재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성아연은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다시 들어갔고 고은서와 곽승재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안에 있던 직원은 자리를 비켜주면서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심문실은 아주 깔끔했는데 책상 외에 티 테이블과 소파도 있었다.주민기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곽승재는 고은서를 끌고 함께 소파에 앉았다.“성아연 씨도 앉으시죠.”성아연은 곽승재가 무슨 속셈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쉽게 경각심을 풀지 않았고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곽승재는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성아연 씨, 말해보시죠. 왜 사람 찾아 고은서를 해치려 했는지.”그의 담담한 목소리에서 무언의 위압감이 느껴졌다.성아연은 애써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뗐다.“내가 지시한 일이 아니에요. 그 두 사람이 저를 모함하려고 거짓말하는 거라고요!”“계좌 이체 기록이 없다고 우리가 널 조사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새 번호로 두 사람한테 연락하고 현금으로 거래를 했다며? 그 두 사람 이미 거래장소까지 다 자백했어. 네가 아무리 모자랑 마스크를 쓰고 갔다고 해도 소용없어. 경찰들의 조사능력을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너 이젠 빠져나갈 곳이 없단 말이야.”사실 이 모든 건 주민기한테서 들은 것이다. 경찰들이 이 모든 걸 조사하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성아연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내 순간 정신이 나갔었나 봐. 난 두 사람한테 그저 너에게 겁만 주라고 시켰어. 절대 널 해칠 생각은 없었어.”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때 당시 두 사람을 모습을 보아서는 나한테 겁만 주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 같았는데.”“은서야, 난 진짜 너에게 겁만 주라고 했어. 그냥 너한테 쌓인 화를 풀고 싶었을 뿐이야. 요즘 더러 날 전처럼 친하게 대해주지 않은 데다가 네 할아버지랑 얘기 나누는 것조차 못하게 했잖아. 그래서 네 숙모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난동을 부린 게 다 네 아이디어인 줄 알고 오해했던 거야. 나도 네 숙모 시달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계획을 세운 거야.”성아연은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아련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사과하라면 하고 보상금도 얼마든지 줄게.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용서해준다고 했잖아.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고은서는 자신을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성아연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약간 속이 불편했다.전에 그녀는 성아연을 베프라고 생각하면서 뭐든지 그녀에게 공유했었다. 비록 욕심이 많긴 했으나 다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었다.특히 그녀가 곽승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서 곽승재와 백유미를 대신 욕해줄 때 감동 받기도 했다. 심지어 성아연이 그 어떤 일을 해도 다 용서해줄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었다.그러나 이번 생에 다시 눈을 뜬 후, 고은서는 성아연의 모든 모습이 다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면서 해치려 했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고은서는 성아연의 각종 행위가 너무 혐오스러웠으나 그녀와 인연만 끊고 살려고 했지 절대 그녀를 해치려고 한 적은 없었다.그러나 성아연은 도를 넘는 행위를 계속 지속해왔다.GS 그룹 연회에서 성아연은 일부러 그녀를 여론의 중심으로 몰아넣었고 또 MQ를 모함하기 위해 고준석을 온갖 감언이설로 홀리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이내 타깃을 단은숙으로 바꾸었다.
“네가 싫으니까!”성아연의 원망이 담긴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걸 발견했다.성아연은 자신의 속마음을 너무 직설적으로 드러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이 말을 내뱉은 이상 더는 돌아설 길이 없었다.“내가 널 좋아해서 너랑 친구 한 줄 알아? 다 아빠가 강요한 거야! 네 할아버지가 널 제일 아낀다고 너한테만 잘해주면 할아버지가 나한테도 잘해줄 거라고 날 강요한 탓이라고!”성아연이 분노가 들끓은 눈빛으로 고은서를 쏘아보며 말했다.“같은 여자인데 왜 넌 항상 공주 대우를 받고 난 마치 하인처럼 네 시중을 들어야 하는 건데? 무슨 일이든 네가 했다면 다들 칭찬하기 일쑤였고 난 그저 너의 배경판처럼 네 뒤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나한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내가 너보다 못난 곳이 어딘데? 능력도 너보다 차하지 않잖아. 그런데 학교에 있는 남자애들은 네 연락처를 얻기 위해 나한테 다가올 뿐 날 좋아해서 다가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던 남자애들도 너만 보면 다 너한테로 몰려들잖아. 네가 나였어 봐. 어떤 느낌인지!”고은서는 눈을 부라리고 자신을 향해 호통치는 성아연을 보며 무슨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성아연이 자신을 이토록 미워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고작 그까짓 일로 나와 우리 집안을 망치려 했던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그래!”성아연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변명하고도 싶지 않았다.“고은서, 넌 네가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모를 거야. 난 시시각각 널 짓밟아버리고 싶었다고. 너도 나처럼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혼자 고독하게 아등바등하는 걸 느껴봐야 한다고!”성아연은 갑자기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네가 곽승재 때문에 자존심을 꺾을 때마다 내가 속으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지? 너도 더는 도도한 공주가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자의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 남자는 너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고 내가 얼마나 속 시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