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고은서, 나 배고파.”‘배고픈 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고은서였지만 이내 곽승재에게 오늘 병원에서 그를 돌봐주기로 약속한 것이 생각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사실 고은서 입장에서는 굳이 누군가 옆에서 곽승재를 계속 간호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해준 걸 빌미로 간호를 요구하니 인간적으로 거절할 수 없었다.하여 고은서가 말했다.“알아서 뭐 좀 시켜 먹어. 난 조금 있다 갈게.”곽승재가 물었다.“넌 뭐 먹고 싶어?”곽승재의 속내를 알아차린 고은서가 바로 답했다.“나는 이미 먹었어.”“고은서, 이 이른 시간에 어디서 먹었는데?”곽승재가 태연하게 물었다.“그게...”“어깨 아파서 혼자 못 먹겠어. 이미 먹었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도 몇 시간 후 네가 배고플 때 같이 먹을래.”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오늘 나랑 무조건 밥을 먹어야겠다는 건가...’고은서는 예전 별장에 있을 때 매일 곽승재를 위해 한두 가지 요리를 준비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그녀는 고씨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는 귀한 아가씨였다. 하여 요리를 배우는 동안 수없이 칼에 베이고 불에 데며 고생했지만 곽승재가 좋아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모든 게 가치 있다고 여긴 시절도 있었다.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요리를 준비하여 곽승재가 집에 돌아와 함께 식사하기를 기다렸지만 음식이 차갑게 식어갈 때까지 곽승재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그런 그가 이제 와서 부상까지 들먹이며 자신과의 식사를 요구하고 있다.‘정말 웃긴 상황이네.’고은서가 답했다.“매운탕, 매운 닭볶음탕, 마라탕 같은 자극적인 음식이 먹고 싶네.”음식에 관해 굉장히 까다로운 곽승재는 강한 맛이나 매운 음식, 냄새나는 음식 그리고 신선하지 않고 건강하지 않은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흥! 나랑 같이 밥 먹고 싶다고? 이 음식들 먹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그녀의 주문에 곽승재는 반박하지 않
하지만 빨간 국물과 위에 떠다니는 각종 향신료를 보며 곽승재는 마라탕이 도대체 어떤 맛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그의 망설임과 싫어하는 기색을 알아챈 고은서가 일부러 재촉했다.“먹어 봐. 왜 안 먹어?”곽승재는 고은서의 재촉에 결국 마라탕을 한 젓가락 집어 들었다.입가로 가져가자 강렬한 매운 향이 코끝을 찔렀다. 곽승재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됐어.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이건 네가 좋아하는 그런 고급스러운 요리가 아니잖아.”고은서는 말하며 또 한 젓가락을 집어 입에 넣고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곽승재는 꾹 참다가 결국 마라탕을 입에 넣었다.순간 낯선 맛들이 입안에 퍼졌고 그는 식사 예절을 유지하려 애쓰며 간신히 뱉지 않고 견뎠다.고은서가 지켜보는 가운데 억지로 몇 번 씹자 음식물 속에 배어있던 고추기름이 흘러나와 그의 목구멍을 자극했다.갑작스러운 자극에 그는 저도 모르게 기침하기 시작했다.고은서가 근처에 있던 휴지통을 가리키며 말했다.“뱉어. 먹지도 못하면서 왜 억지로 먹으려고 그래?”그 말에 곽승재는 오히려 음식을 꿀꺽 삼켰다.“콜록! 콜록!”음식을 삼키자마자 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고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며 귀 끝까지 빨개졌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물병을 열고 급히 물을 들이켰다.물병의 반 이상을 비운 후에야 그는 겨우 기침을 멈췄고 얼굴의 붉은 기운도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목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었다.고은서가 테이블 위에 놓인 다른 음식들을 가리키며 물었다.“다른 것들도 시도해 볼래? 아마 마라탕보다 더 매울걸?”온몸이 불편했던 곽승재는 더 이상 버티지 않고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대체 뭐가 맛있다는 거야? 언제부터 이런 걸 좋아하게 된 거야?”예원 별장에서 그녀는 이런 종류의 음식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다.그의 말에 고은서는 이해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난 처음부터 이런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했어. 하지만 네가 싫어하니까 예원 별장에서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차갑게 말했다.“이러는 거 정말 구질구질해 보여.”“은서야, 내가 어떻게 하면 만족하겠어?”곽승재의 어두운 눈동자에 깊은 음영이 드리워졌다.“왜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다정하면서 나한텐 이렇게 차가워?”고은서가 답했다.“날 존중한다면 제발 내 앞에 자꾸 나타나지 마.”“내가 왜 네 앞에 나타나는 건지는 너도 잘 알잖아.”곽승재의 눈빛은 더 어두워졌다.“은서야, 내가 이혼에 동의했던 건 외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압박 때문은 아니었어. 그저 네가 또다시 위험을 자초할까 봐 걱정돼서였어. 난 이혼 후에 네가 마음의 짐을 덜고 우리의 관계를 좀 더 평온한 상태에서 생각할 수 있길 바랐어. 더 이상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 그런데 넌 왜 여전히 날 밀어내는 거야? 내가 그렇게까지 싫어?”곽승재의 눈빛에 깃든 고통스러운 감정을 보며 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곽승재, 내가 이혼을 결심한 건 앞으로 너와 어떤 사이로도 엮이고 싶지 않아서야.”“왜 나랑 엮이고 싶지 않은데?”곽승재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쥐며 물었다.“민시후 때문이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이 그렇게 깊어진 거야? 민시후때문에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야?”고은서가 조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곽승재, 네가 이런 말 하는 걸 들으니 내가 더 가엾게 느껴진다.”전생에 8년간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그녀가 몇 달 만에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고 믿는 모습이 너무도 비참했다.‘내가 사랑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믿은 적 없는 건가...’고은서가 곽승재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몸부림쳤지만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놔줘. 안 그러면 약속도 지키지 않을 거야.”곽승재는 싸늘한 그녀의 기운을 느꼈다. 또한 화가 난 그녀가 정말로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품으로 끌어당겨 꽉 껴안으며 낮고
죽을 먹은 곽승재는 노트북을 꺼내 일을 보기 시작했다.고은서도 데이터를 확인한 후 졸음이 몰려와 옆에 있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고른 숨소리를 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수중의 일을 멈췄다조명 아래 그녀의 작은 얼굴은 깨끗하고 뽀얗게 빛났다.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그녀는 입술을 살짝 내민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곽승재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의 찡그린 미간을 살짝 매만져 주려다 그녀가 자신을 꺼리는 것을 떠올리고는 이불을 걷으려던 손을 멈췄다....다음 날 고은서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곽승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 시였다.‘정말 잘도 잤네. 그것도 병실에서 곽승재가 있는데...’고은서는 기지개를 켜고 세면을 마친 뒤 간호사에게 곽승재가 퇴원 절차를 밟았는지 물었다.“그분 상태로 퇴원이라니요?”간호사가 답했다.“어젯밤에 급성 장염으로 응급실에 들어갔어요. 최소 이틀은 더 입원해야 할 겁니다!”고은서가 깜짝 놀라 물었다.“급성 장염이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간호사는 자극적인 음식을 섭취해 장에 자극이 간 것 같다고 설명을 덧붙였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곽승재가 억지로 삼킨 마라탕을 떠올렸다.‘설마 그것 때문인가? 곽승재 장은 정말 여리구나...’고은서는 어제 차려진 음식을 배불리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작 마라탕 한입에 장염이라니... 난 왜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거지? 너무 깊이 잠들었나?’고은서는 간호사에게 병실을 물어 찾아갔다.노크한 후 병실에 들어서니 곽승재가 병상에 누워 있었다.제대로 수지 못한 탓인지 그의 안색은 어젯밤보다 더 초췌해 보였다.하지만 병실 안에는 곽승재뿐만 아니라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전미자와 과일을 깎고 있는 장순이도 있었다.고은서가 노크하자 모든 시선에 그녀에게 쏠렸다.곽승재의 눈빛은 한층 밝아진 듯했다.고은서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반가운 마음으로 전미자를 불렀다.“할머니!”“은서야, 깼어?”전미자가 웃으며 물었다.
전미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자책하지 않아도 돼.”전미자는 그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듯 말했다.“승재가 말하길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 먹었더니 장염에 걸렸다고 하더구나. 쟤는 어릴 때부터 장이 좋지 않았어. 스스로 조심하지 않은 탓이니 너랑은 상관없단다.”전미자는 상황을 짐작하고도 그녀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했다.고은서는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는 곽승재가 단순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줄 알았지 어릴 적부터 위장이 약한 줄은 몰랐다.전미자까지 병원에 온 걸 보면 곽승재의 상태가 꽤 심각한 듯했다.“아침에 할머니께서 전화가 왔는데 우연히 의사와 대화하는 소리를 들으셨어. 제대로 묻지도 않으시고 그대로 병원으로 오신 것뿐이야.”곽승재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무심하게 덧붙였다.“별일 아니야. 링거만 조금 맞으면 괜찮아 질 거야.”고은서가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어젯밤엔 왜 안 불렀어?”곽승재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그만큼 나약하지 않아. 이런 작은 일은 혼자서도 충분해.”고은서는 직접 경험한 적은 없었지만 박지연에게 들은 적은 있었다.장염은 보통 급성으로 발병하며 통증이 극심해서 땀범벅이 되는 건 경증이고 심할 경우 실신하거나 쇼크 하기도 한다고 했다.‘가볍게 말해서 넘기는 건 날 배려하려고 그러는 거겠지...’“은서야, 승재는 여기서 쉬게 놔두고 바쁘지 않으면 나랑 햇볕이나 쬐러 갈까?”전미자가 제안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좋아요.”장순이는 병실에서 곽승재를 돌보겠다며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고은서가 전미자를 부축하며 병동 아래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은서야, 몸은 괜찮아?”전미자가 다정하게 물었다.고은서는 전미자가 이전에 옥상에서 뛰어내려 다친 일을 묻는다는 것을 알고 답했다.“할머니,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사실 크게 다치지도 않았어요.”“너 정말...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일 하면 안 돼! 생명보다 소중한 건 없어. 넌 아직 젊고 널 사랑하는 가족들도 있잖니. 네 목
고은서는 전미자가 갑자기 곽승재 부모의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물론 그녀도 궁금하긴 했지만 이는 어쨌든 어른들의 일이라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었다.전미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자 고은서도 솔직히 답했다.“네, 잘 이해되지 않아요.”서연정은 작은 딸을 데리고 해외로 떠날지언정 곽현수와 이혼하지 않았다.“연정이는 의리가 깊은 사람이야. 옛날에 승재 할아버지에게 큰 도움을 받았거든. 승재 아빠와 결혼한 것도 그녀의 아버지가 원했던 일이었어. 연정이는 아버지께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래서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도 끝까지 약속을 지키려 했던 거야. 지금까지 걔는 이혼 얘기를 꺼낸 적도 없어.”전미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지난번 네 일로 연정이가 한국에 왔을 때 네가 단호하게 이혼하는 걸 보고 연정이한테 말했어. 더 이상 약속 지킬 필요 없으니 현수와 이혼해도 괜찮다고 했지. 아무도 탓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거절하더구나. 지금 삶이 괜찮다며 이혼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구나.”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조금 놀랐다.‘아버님이 강압적인 힘을 써서 어머니가 이혼하지 못하도록 막은 줄 알았는데 어머니께서 이혼을 원하시지 않으셨던 거구나.’“은서야, 승재 부모의 사이가 승재에게 큰 영향을 끼쳤어. 그래서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야.”전미자가 고은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미안하다, 은서야. 너와 승재를 결혼시킨 건 내 욕심이었어. 처음부터 네가 승재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알고 너라면 승재가 결혼에 관한 생각을 바꿀 줄 알았어. 너랑 혼인신고 했을 때 난 정말 기뻤단다. 이제 의미 없는 말들이겠지만 그래도 말해주고 싶구나. 너희의 결혼이 표면적으로는 내 제안이었지만 승재가 너에게 전혀 감정이 없었던 건 아니야.”전미자는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어제 곽승재도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하지만 고은서는 이제 그런 말들에 연연하지 않았다.“할머니, 승재와 저는 이제 이혼했어요. 감정이 있든 없든 이혼
카페 2층은 한적하니 사람이 없었다.2층으로 올라간 고은서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원지훈을 보았다.원지훈은 예전의 자신만만하고 거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후드티를 입은 채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마치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보였다.그럴 만도 한 것이 회사는 이미 파산 상태에 이르러 그를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사람도 많아진 것이다. 그로 인해 원지훈은 더 이상 과시하며 행동할 여유가 없었다.“여기.”그녀를 보자 원지훈이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고은서는 천천히 다가가 자리에 앉아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후 물었다.“무슨 일로 보자 한 거야? 백유미 쪽은 어떻게 됐어?”원지훈은 기분 나쁜 듯한 어조로 말했다.“핸드폰 프로젝트와 관련해 횡령한 사실을 알아챘어요. 욕하면서 받은 돈을 토해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더라고요. 체면도 내려놓고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하겠다고 빌면서 백유미 말을 듣겠다고 했더니 겨우 화를 풀더라고요.”프로젝트와 뇌물 수수 사건은 고은서가 꾸민 일이었으니 원지훈이 기분 나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은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하여 물었다.“그다음은? 백유미가 지훈 씨한테 무슨 요구를 했어?”원지훈은 테이블 위의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말했다.“고은혜를 손에 넣으면 이 일은 그냥 넘어가 주겠대요.”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곽승재와 이혼했는데 왜 백유미는 고씨 가문에 집착하는 걸까? 왜 계속 원지훈을 통해 고씨 가문에 접근하려는 거지? 대체 속셈이 뭘까?’“백유미도 고은혜가 지훈 씨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걸 알 텐데 어떻게 손에 넣겠다는 거야?”원지훈이 테이블에 놓인 생수를 마시고 돌려 말했다.“당연히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긴 하죠.”고은서가 미간을 더 깊이 찌푸리며 물었다.“백마 탄 왕자 놀이라도 하게?”그 수법은 원지훈이 전에 사용했던 것이었다.원지훈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설명했다.“고은혜가 옆 도시에서 디자인 전시에 참가 중이잖아요. 저녁이
고은서는 원지훈이 돈을 요구하고 있음을 한 번에 알아차렸다.‘역시 욕심이 많네. 두 번이나 줬는데 또 요구하다니...’고은서가 답했다.“돈은 부족하지 않게 줄 테니 일이나 제대로 처리해. 모든 과정을 보고하고 백유미의 신임을 얻은 후엔 즉시 내가 말한 일을 처리해야 해.”원지훈의 얼굴에는 다시금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떠올랐다.“걱정하지 마세요. 확실하고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지훈 씨 어머니 쪽은 어때? 무슨 이유로 백유미네 가정부로 들어가게?”고은서가 물었다.원지훈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백유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라고 했어요. 백유미가 매일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 걸 보고 음식 해주고 청소 해주면서 도와주겠다고 하면 돼요. 안 그래도 백유미는 엄마로 저를 통제하고 싶어 했으니 분명 동의할 거예요.”원지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좋네. 백유미가 월급을 주지 않으면 내가 줄게. 두 사람이 헛수고하게 할 수는 없잖아.”그 말을 들은 원지훈은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역시 누나! 시원시원하네요. 백유미는 돈도 짜게 주면서 줄 때마다 생색내거든요. 가끔은 우리가 무릎 꿇고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 분위기에요.”원지훈의 아첨에도 고은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럼 난 먼저 갈게. 바로 은혜한테 연락할 테니 시시각각 보고해 줘.”말을 마친 고은혜가 카페를 나섰다.차에 올라탄 고은서는 먼저 박지연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고은혜의 번호를 눌렀다.“무슨 일이야?”고은혜가 물었다.“며칠이나 있었는데 전시는 아직도 안 끝난 거야?”“거의 끝났어. 여기서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고 몇몇 디자이너들과 연락처도 주고받아서 조금 더 교류하고 배우고 싶어서.”고은서가 계속 물었다.“아직도 밤마다 술집 가서 놀아?”잠시 멈칫하며 당황한 고은혜가 곧 화를 냈다.“고은서! 무슨 뜻이야? 나한테 사람이라도 붙인 거야?”고은서는 고은혜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원지훈을 통해 알게 된 일과 그가 계획 중인 일을 설명했다.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