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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류한나
“펜 이리 줘요.”

“대표님, 거래처 분들이 계약 체결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주민기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는 GS 그룹에서 오랫동안 논의해온 중요한 협력 건이었는데, 자칫 고은서 때문에 망칠 뻔했다.

곽승재는 고은서를 무시하고 주민기와 함께 급히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곽승재!”

고은서가 뒤쫓아갔다.

“저 여자 끌어내.”

곽승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호원들이 고은서를 에워쌌다.

고은서는 곽승재가 워커홀릭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바빠지기 시작하면 오늘은 이혼하기 글렀기에 일방적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내일 오전 9시, 구청에서 봐!”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쌩하니 떠났다.

대체 간다는 건가? 만다는 건가?

하루빨리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곽승재라면 무조건 올 텐데...

이런 생각에 고은서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곧이어 별장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메일에 접속했다.

메일함에는 여러 투자은행에서 보낸 채용 제의가 들어 있었는데, 예전처럼 바로 메일을 삭제하는 대신 하나씩 클릭해 봤다.

그러나 전부 기한이 지난 메일로 심지어 난다긴다하는 금융권 엘리트들이 앞다투어 입사하고 싶어 하는 유명한 투자은행도 있었다.

정작 그녀는 쓰레기 같은 곽승재의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제 발로 뻥 걷어차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지경이었다.

따라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계획을 잘 세워서 절대로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삶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다짐했다.

몇 군데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나서 내일이면 곽승재와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내 PC 전원을 끄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혼 절차를 밟으면 곧바로 떠날 작정이다.

한창 열심히 짐을 싸고 있을 때 이미숙이 걸어 들어왔다.

“사모님, 짐을 왜 싸는 거죠? 여행 가시게요?”

이미숙은 곽승재가 임시 고용한 도우미로 혹시라도 두 사람의 상황을 전미자에게 보고하는 불상사를 막으려고 일부러 본가의 도우미를 들이지 않았다.

비록 전생의 고은서는 성질도 까다롭고, 툭하면 소란을 피웠지만 이미숙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케어해주었다.

단지 이미숙이 백유미에게 매수당했다는 친한 친구의 말을 듣고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태클 건 적이 꽤 있었다.

“아줌마, 저 내일부터 나가서 살 거예요.”

고은서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저한테 맞춰 주느라 마음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세요.”

이미숙은 깜짝 놀랐다. 늘 불평불만하고 의심과 짜증이 끊이질 않던 사모님이 차분한 모습으로 사과까지 한다니?

그날 2층에서 뛰어내리고 나서 깨어난 이후로 그녀는 180도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닙니다, 사모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데 왜 갑자기 이사하신다는 거예요?”

고은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곽승재와 이혼할 생각이거든요. 내일 이혼하러 가려고요.”

이미숙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록 그녀를 돌본 지 1년도 채 안 되었지만, 도련님에 대한 사모님의 마음이 어떤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려 도련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일매일 머리를 쥐어짜 내며 고민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가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면 집에 명화를 가득 걸어놓았고, 책을 즐겨 본다고 하면 위층 아래층 가리지 않고 심지어 온실마저 책을 수두룩하게 진열했다.

또한, 먹고 입고 쓰는 것도 전부 도련님의 취향이 반영되었는데 그런 분이 지금 이혼한다니?

“사모님에게 오로지 도련님뿐이었잖아요. 왜 갑자기 이혼하고 싶으신데요?”

이미숙은 당최 이해가 안 갔다.

고은서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했는데도 마음을 얻지 못했으니 포기하려고요. 그래서 그냥 놓아주기로 했어요.”

그래도 납득이 안 가는 듯 한마디 보태려던 찰나, 복도에 서 있는 곽승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련님, 오셨어요? 식사는 하셨나요? 얼른 준비해드릴게요.”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서류 가지러 와서 금방 갈 거예요.”

말을 마치고 나서 서재로 향하려는 순간 고은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이미숙이 서둘러 말했다.

“도련님, 사모님, 그럼 얘기 나누세요.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미숙이 떠난 뒤 곽승재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나 바빠, 쓸데없는 일이면 혼날 줄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바쁘거든? 너랑 실랑이할 시간 없어.”

고은서는 물건이 가득 쌓인 테이블 위에서 이혼협의서를 꺼내 곽승재에게 다가갔다.

“1분만 지체할게. 여기 사인하면 내일 그냥 구청 가서 확인서만 받아오면 돼.”

곽승재는 고은서를 힐긋 쳐다보았다.

방금 2층으로 올라오면서 마침 이미숙이 고은서에게 왜 이혼하냐고 묻는 말을 듣게 되었다.

사실 고은서가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로 확신했지만, 마음을 얻지 못해 포기했다는 대답과 유난히 홀가분한 말투는 절대로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혼협의서를 들고 있는 고은서의 생얼은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했고, 박시한 옷차림도 캐주얼한 느낌이라 그동안의 세련되고 완벽한 이미지와 사뭇 달랐다.

설마 진짜 마음을 접었단 말인가?

협의서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필요 없고 빈털터리 신세로 곽씨 일가에서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그녀의 정교한 사인이 적혀 있었다.

“문제없으면 얼른 사인해.”

고은서가 재촉했다.

곽승재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정말 이혼할 의향 있는 거야?”

“당연하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고은서가 물었다.

“펜 있어? 없으면 가져다줄게.”

곽승재는 대답하는 대신 이혼협의서를 고은서에게 건넸다.

“왜 그래? 뭐가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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