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이혼 후 마이 라이프

브라보! 이혼 후 마이 라이프

By:  사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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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범벅이 된 심은별이 응급실로 실려 왔을 때, 남편 이준서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첫사랑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날, 은별은 마침내 결심했다. 이 결혼을 끝내기로. 사람들은 모두 은별이 준서에게 집착한다고, 비참할 정도로 매달린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보석 업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천재 디자이너이자, 정체를 감춘 미스터리한 펀드 매니저 ‘L’. 그 인물이 바로 은별이라는 사실을. 심지어 준서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첫사랑을 살릴 특효약 유통망의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씨 가문이 오래전에 철저하게 짓밟아 없애 버렸다고 믿었던 그녀의 본명... 이혼 후, 준서는 은별이 분수도 모르고 날뛴다며 차갑게 비웃었다. 딸조차 엄마를 외면했다. 세상은 모두 은별의 추락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경매장에서는 은별이 무심코 스케치북에 끄적거렸던 결혼반지 설계도가 천문학적인 금액에 낙찰되었고, 국제구호기구의 전용 의료 헬기가 그녀의 집 마당에 직접 내려와 극비 임상 수술을 의뢰했다. 그리고 이준서가 애지중지 키워 온 그 딸은, 병원 진단서와 함께 전달된 단 한 장의 서류를 보고 손끝을 떨었다. 유일한 골수 기증자 일치 확인서. 그 서류 맨 아래에는 분명히 엄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이준서는 달빛을 등진 채 무릎을 꿇었다. 반면 레드카펫 위를 걷는 은별은 사파이어빛 베일 너머로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너무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대표님. 당신 첫사랑 수술비는 LX그룹 지분 51%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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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Chapters
제1화
해안시 센트럴병원 응급실. 심은별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간호사가 자신의 손등에 주삿바늘을 꽂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비켜주세요! 다들 비켜주세요!”진한 피비린내와 휘발유 냄새가 뒤섞인 채, 병상에 누운 환자들이 은별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한 사람의 뒤틀린 종아리에는 아직도 자동차 조각이 박혀 있었고, 옷은 거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의사들의 목소리가 은별의 귓가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끊임없이 환자들이 응급실로 실려 들어왔다. 그리고 울부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주먹을 움켜쥔 은별의 손바닥에는 에어백이 터질 때 튄 하얀 가루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보호자분은요? 아직 안 오셨어요?”순간 응급실 전체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마치 모두가 하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 일은 늘 그렇게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환자분, 다른 분들에 비하면 상처가 심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쇄 추돌 사고였잖아요. 그러니까 보호자분이랑 연락해서 더 정밀한 검사를 받으시는 게 좋겠어요.”간호사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은별은 고개를 끄덕인 뒤,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그런데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은별의 마음은 착 가라앉았다.[지금 대표님께서 회의 중이셔서 전화를 받기 어려우십니다. 무슨 일이신가요?]이준서의 비서였다.준서는 자신들의 결혼은 절대 공개할 수 없고,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그 덕분에 결혼한 지 꼬박 7년이 되었지만, 비서는 언제나 은별을 사모님이 아닌 은별 씨라고 불렀다.은별이 입을 열려는 순간, 핸드폰 너머에서 다른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 비서님, 준서 씨는 준비됐나요? 이제 출발해야 될 것 같아요, 하서가 아래서 기다리다 지쳤어요.][네, 리연 아가씨. 바로 대표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핸드폰을 가리고 말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또렷하게 전달되었다.‘리연 아가씨... 강리연?’준서의 첫사랑이었다.수석비서 임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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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준서는 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갑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미 오후 내내 놀았잖아. 이제 됐어.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으니까 우리가 돌봐 드려야지.”“집에 있는 순영 아주머니가 돌보면 되잖아요. 그리고 아픈 사람을 돌보는 건 원래 의사들이 하는 일이잖아요.”하서는 여전히 쉽사리 납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은별의 숨을 멎게 만들기에 충분했다.“게다가 아빠, 깜빡했어요? 엄마는 슈퍼우먼이니까 아플 리가 없잖아요.”하서의 말과 함께, 기억 속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은별의 머릿속을 스쳐갔다.3년 전, 준서의 비즈니스 라이벌이 이씨 그룹의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우발적인 사고를 가장해서 옥상에서 거대한 유리를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하서를 지키기 위해 은별은 자신의 온몸으로 그 모든 충격을 막아냈다. 유리 조각들이 은별의 살점을 파고들면서 몸속 깊숙이 박혔다.온몸이 피범벅이 된 엄마를 본 하서는 깜짝 놀라 울부짖었고, 무서워하는 딸을 달래기 위해 은별은 엄마는 슈퍼우먼이기에 아프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다.그런데 지금, 그 슈퍼우먼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온몸이 아파서 견딜 수 없을 정도인데도, 딸은 그저 놀이공원에서 보지 못한 불꽃놀이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뭔가를 느꼈는지 준서가 고개를 들었다가 곧 시선이 멈추었다. 하서도 덩달아 작은 고개를 치켜들고는 마침 2층 복도에 서 있는 은별을 보았다.하서는 뭔가 잘못한 듯 이내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고집 센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거 봐요, 제가 말했잖아요. 엄마는 아무 일 없을 거라고요.”‘엄마는 원래 늘 강한 사람이었어. 무슨 일이 닥쳐도 항상 잘 해결하셨는데, 무슨 큰일이 있기나 하겠어?’‘지금 다시 불꽃놀이를 보러 돌아가도 늦지는 않을 거야.’준서가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서는 입술을 내밀었지만 그래도 따라 올라갔다. 하지만 마음속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갔다.‘엄마도 참,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분명 괜찮으면서도 순영 아줌마한테 심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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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아침 안개가 이슬방울로 맺힐 무렵, 은별은 굳어버린 몸을 간신히 움직였다.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준서는 끝내 받지 않았다. 은별의 입가에 비꼬는 듯한 미소가 스쳤다.만약 준서가 자신이 전화를 건 이유가 이혼을 위해서라는 걸 안다면, 지금처럼 전화를 받지 않았을까?은별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자, 왕순영이 앞치마를 꼭 쥐고 부엌에서 뛰어나오며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사모님, 이건...”“순영 아주머니, 저도 이제 일자리를 구해볼까 해요. 아마... 다시는 안 돌아올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은별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작은 상자를 왕순영의 손에 쥐어 주었다.그 안에는 7년 전, 은별이 디자인 대회에 출품하려고 준비했던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은별은 뜻밖에 임신을 하게 되자, 준서가 그 목걸이를 부숴 버렸다.왕순영이 밤늦도록 잠도 자지 않고 보석을 하나하나 주워 붙여서 다시 은별에게 돌려주었던 것이다.은별의 꿈은 그 순간 멈춰 버렸다.지난 세월 동안, 왕순영은 은별에게 관심을 가져준 유일한 사람이었고, 끝까지 ‘사모님’이라 불러준 유일한 사람이었다.추억으로 남겨두려고 했지만 이제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지난 일들은 그냥 과거에 남겨 두기로 했다.“아주머니, 몸조심하세요. 다음에 만나면, 그냥 은별이라고 불러 주세요.”이 말을 듣자 왕순영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호음은 한 번 울리자마자 바로 끊어졌다.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애가 탄 왕순영은 고개를 들고 은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뒷목에 있는 흉터에 시선이 멈추었다.그건 3년 전 섣달 그믐날, 서하가 끓는 냄비를 엎었을 때 은별이 대신 막아내며 생긴 상처였다결국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왕순영은 천천히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은별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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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산하는 은별과 준서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준서는 그를 매우 신뢰했다.산하의 넥타이에 꽂힌 사파이어핀조차, 얼마 전 은별이 직접 정성스럽게 골라서 준서에게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그런데 바로 그 클립 위에, 은별의 뒤편에 있는 대형 스크린 뉴스가 비치고 있었다.“심은별!”은별이 멍하니 있는 사이, 따라잡은 남주가 그녀의 손에 든 서류 봉투를 낚아챘다.“대체 뭘 하려는 거야? 네 유치원 수준 낙서를 오빠한테 가져가서 네가 디자인했다고 속이려는 거지? 오빠가 그걸 믿을 것 같아?”남주의 당황한 모습을 보면서 은별은 감정을 정리했다.“그럼 넌 왜 불안해하는 건데?”“누가 불안해해? 너 이러는 거 그냥 오빠 관심 끌기 위해서잖아. 오빠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믿든 말든, 열어보면 알지 않겠어?”은별이 여전히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 남주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서류 봉투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더니 멈춰 섰다.‘이혼 서류?’‘내가 잘못 본 걸까?’‘심은별이 어떻게 오빠에게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 있지?’어쨌든 디자인 도안만 아니면 됐다.남주는 서류 봉투를 아무렇게나 산하의 품에 던져 넣으며 은별을 비웃듯 바라보았다.“이게 네 새로운 수작이야? 말해두는데, 헛수고하지 마. 오빠 화나게 만들면 집에 안 돌아갈 수도 있어. 그럼 너 울고 싶어도 울 곳도 없을 걸.”“네 맘대로 생각해.”은별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산하를 바라보았다.“빨리 서명해서 보내 달라고 전해 줘요. 기다리고 있을 게요.”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남주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야, 네가 수작 부리는 건 알겠는데, 임 비서까지 끌어들이려는 거야? 만약 오빠가 정말 화내면 임 비서만 욕먹어. 너 왜 이렇게 독한 거야?”그러나 아무리 소리쳐도 은별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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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어머니의 영향으로 은별은 보석 디자인에 일찍부터 깊은 관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발걸음을 따라 그 디자인 스타일을 이어가고 싶다는 꿈을 품어왔다.그래서 은별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학 선배와 함께 회사를 창립했다.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회사는 두 사람의 노력으로 점점 성장해 나갔다.그런데 정작 회사가 더 큰 상장을 준비할 무렵, 은별은 가정으로 돌아가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자녀를 키우는 길을 선택했다.그 결정 때문에 은별의 디자인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많은 협력사업들이 파기되었고, 위약금을 물어야 했다. 회사의 상장도 하마터면 실패할 뻔했다.모두 화가 나고 답답했다. 비록 은별이 여전히 회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와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지난 몇 년간 회사로부터 배당금을 받는 것 외에, 은별은 회사의 다른 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은별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디자인 재능조차, 이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해 버렸다.이대로 회사로 돌아간다 해도,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매년 전시회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모두 그해의 최신 디자인이고, 참가하는 디자이너들 또한 일정한 경력과 경험을 갖추고 있다.외부와 이렇게 오랫동안 단절된 상태에서 업계의 트렌드를 다시 파악하려면, 주얼리 전시회야말로 가장 빠르고도 가장 전면적인 방법이었다.그러니까 이번 전시회는 반드시 가야만 했다.핸드폰 벨소리가 갑자기 울리자 은별은 깜짝 놀랐다.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일정 알림이었다.하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은별은 딸의 위장이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되어 매운 음식을 자주 먹이지 않았다.게다가 준서는 위가 안 좋고 술자리가 잦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집에 없는 점심을 제외한 아침과 저녁 식사는 은별이 직접 요리해 영양 있고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했다.처음에는 매운맛이 간절히 그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감각도 무뎌진 듯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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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제출 완료 안내문을 바라보며, 은별은 그 자리에 오래도록 그대로 앉아 있었다.이렇게 자신의 디자인 작품에 대해 확신을 못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불안하기까지 했다.‘직장 복귀'라는 네 글자는 입 밖으로 내뱉기는 쉽지만, 경제가 고도로 성장한 오늘날, 보석 디자인업계 역시 빠르게 세대교체를 거치고 있었다.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주가 가끔 디자인 도안을 부탁할 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그 외의 시간에는 도화지조차 손에 대지 않았다. 심지어 최근 몇 번은 남주조차도 예전만 못하다고 지적하기 시작했다.그제야 은별은 자신이 도대체 얼마나 추락해 버렸는지 깨달았다.당시 그렇게 단호하게 떠났던 그녀가, 지금 와서 남에게 폐만 끼친다면 무슨 자격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은별은 깜짝 놀랐다.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본 은별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지만,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30분 줄 테니까, 회사 앞 커피숍으로 와.]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 간결하고 명료한 한 마디를 남기고 바로 전화가 끊겼다. 은별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그녀는 가장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정리했다. 마지막 3분을 남겨두고 커피숍에 도착하여, 다소 어색하게 한 남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선배...”부경수가 고개를 들었다. 세련된 금테 안경 너머로 시선은 은별의 얼굴에 정확히 꽂혔다. 마치 뭔가를 살피는 듯한 눈빛이었다.“뭐 마실래?”“과일...”은별은 습관적으로 하서가 좋아하는 주스를 시키려다가 곧바로 생각을 바꾸었다.“아이스 아메리카노, 감사합니다.”경수는 은별을 한 번 바라보았다. 커피가 나오고 웨이터가 떠날 때까지 말없이 기다리더니, 마침내 한 장의 디자인 도안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네 거지?”‘역시, 알아본 건가.’“응.” 은별은 숨기지 않았다.“회사로 돌아올 생각이야?”“응.”다시금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한참 후에야 경수의 담담한 목소리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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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남주는 자신만만했다. 어차피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준서가 싫어한다고 말하기만 하면 은별은 절대 손대지 않았으니까.“그럼 어디...”은별이 말을 꺼내려는 찰나, 남주가 이미 짜증 난 듯 먼저 입을 열었다.“됐어, 너랑 여기서 시간 낭비할 시간 없어. 친구가 기다리고 있거든.”남주의 시선을 따라가자, 은별은 비로소 저쪽 좌석에서 남주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자기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남주는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사흘, 사흘 안에 디자인 원고 안 가져오면, 오늘 일 전부 오빠한테 다 말할 거야.”남주는 은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자리에 앉자, 남주의 친구가 은별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남주야,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이면 같이 부르지 그랬어?”“아는 사람이긴 한데, 친하진 않아. 인사만 하고 왔어.”은별이 가방을 든 손이 멈칫했다.‘친하지 않다고?’‘남주가 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까지, 내 손에서 디자인 도면을 얼마나 많이 받아갔는데, 친하지 않다고?’하지만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다. ‘이준서조차 나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는데, 그 여동생이 어떻게 나를 올케라고 인정하겠어?’예전 같으면 이 일로 마음 아파했을지도 몰랐지만, 더 이상 은별의 마음에 파문이 일지 않았다.은별은 더 이상 자신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은별은 빠른 걸음으로 카페에서 걸어 나왔고, 조금도 미련이 없었다. 오히려 남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계속 은별이 떠나는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미정아, 왜 그래?”남주는 마음이 조금 불안했다.‘설마 심은별이 밖에서 함부로 지껄여서, 자신이 이씨 집안 며느리라는 사실을 공개한 건 아니겠지?’‘만약 사람들이 이씨 집안의 현재 안주인이 아무런 능력도 없는 가정주부에 남자 뒤만 쫓아다니며 아양이나 떠는 바보라는 걸 알게 되면, 이씨 집안의 체면이 다 구겨지지 않겠어?’하미정이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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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한편 하서는 왕순영의 핸드폰 옆에 조그만 머리를 바짝 대고 있었다. 얼굴에는 이미 엄마가 급하게 뛰어와 죽을 끓여줄 모습을 상상한 듯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예전 같으면 자기가 살짝 투정만 부려도 엄마는 하던 일을 전부 내팽개치고 나는 듯이 달려왔으니까.핸드폰을 쥔 은별의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화면에는 경수가 보낸 디자인 도안들이 아직 반짝이고 있었다.그 선들과 곳곳에 숨겨진 창의성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디자이너의 정성이 얼마나 묻어나는지 절로 느껴졌다.문득 은별은 작업실에서 밤새 도안을 그리고 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아직 뜨거운 죽 솥에 덴 손에 흉터도 생기지 않았던 때였고, 손톱에는 기름 냄새가 아닌 물감이 묻어 있던 때였다.은별의 약간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하서한테 엄마 지금 바쁘다고 전해줘요.”전화 너머는 깊은 적막에 휩싸였다. 은별은 바로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컴퓨터 책상 위에 던져두었다.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던 은별은 갑자기 마음이 찡해졌다.한때는 이 두 손으로 수많은 상을 휩쓸었고,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씨 집안에 시집온 이후 그녀는 붓을 내려놓았고, 대신 부엌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세 번이나 타 버린 죽부터, 미슐랭 3성급 수준의 조각 디저트까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면서 겨우 얻은 건, 준서의 죽이 너무 싱겁다는 한마디와 딸의 당연한 듯한 반응뿐이었다.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경수가 보낸 메시지였다. 링크 하나가 공유되어 있었는데, 눌러보니 금박 테두리가 반짝이는 초대장이 떠올랐다.LX그룹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초대된 디자이너들이 모여 집중적으로 토론하고 학습하는 모임이었다.LX그룹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비록 교류 학습이라는 명목이긴 했지만, 몇몇 신예 독립 디자이너들도 참석할 예정이었다.그리고 당연히 주얼리 업계에 관련된 많은 회사들도 참가할 터였다. 협력을 모색하거나, 아니면 마음에 드는 디자이너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였다.‘다만... LX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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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야호, 너무 좋아요!”신나서 환호성을 지르던 하서는 문득 은별이 생각났다.방금 엄마가 돌아오지 않기로 한 게 은근히 다행이었다. ‘만약 엄마가 왔더라면, 또 피아노 연습하라거나 안전에 주의하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거야.’‘게다가 내가 리연 이모랑 친하게 지내는 걸 알면, 화를 내며 아예 못 가게 할지도 몰라.’그런 생각이 들자, 하서는 문득 아빠가 왜 엄마한테 전화를 안 걸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엄마가 밖에서 놀고 싶다면, 그냥 이틀 정도 더 놀게 해 주면 될 일이었다. 주말 동안 충분히 신나게 놀고 난 뒤에, 은별을 부르면 그만이었으니까.이튿날 저녁 무렵, 은별은 경수가 공유해 준 주소를 따라 블루웨일 호텔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호텔 로비로 들어서던 찰나, 은별의 시야에 준서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들어왔다.멀리서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하지만 준서는 재빨리 시선을 외면하더니 차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준서가 차 문을 열고 신사적으로 손을 내밀자, 차 안에서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뻗어 나와 그의 손 위에 얹혔다.리연은 차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저녁 바람이 진주 그레이 톤의 정장 스커트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 틈새로 발목에 두른 다크 실버 톤의 뱀 모양 체인 장식이 은은하게 빛났다.그건 LX그룹 주얼리 전시회의 대미를 장식했던 바로 그 발목 체인이었다. 리연이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체인의 비늘이 살짝 조여 들었고, 차가울 정도로 하얀 피부 위로 살아있는 뱀처럼 감겨 드는 듯했다.하지만 정작 아무도 모를 터였다. 저 작품의 진짜 디자이너가 바로 은별이라는 사실을. 다만 남주의 디자인이라고 세상에 알려졌을 뿐.리연은 자연스럽게 준서의 팔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는 준서의 눈동자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다정함이 가득 흘러 넘치는 듯했다.은별은 초대장을 꽉 움켜쥔 채, 두 사람의 뒤를 조용히 따라 걸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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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은별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죄책감 같은 느낌이 가슴 한쪽을 묵직하게 짓눌렀다.하지만 시선을 돌려 준서 곁에 단아하게 서 있는 리연을 보는 순간, 은별은 자기도 모르게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바람피운 건 내가 아닌데, 이준서가 왜 저런 눈빛으로 쏘아보는 건데?’“은별아?”경수가 하얗게 질린 은별의 손가락을 눈치챘다.“몸이 안 좋으면 먼저 가봐도 돼.” 은별이를 데려온 건 신예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기에, 다 보고 나면 언제든 떠나도 상관없었다.은별은 고개를 저으며 멀리 있는 리연을 응시했다.“괜찮아, 선배. 그냥 내 디자인을 다른 사람이 걸치고, 게다가 그게 자랑거리가 되고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묘하네.”은별은 시선을 거두고 경수를 바라보며 애써 평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난 정말 괜찮아. 만나고 싶다던 디자이너 있다며? 나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까 얼른 가 봐.”경수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그럼 먼저 가볼게.”경수가 자리를 뜬 후, 은별은 작품들을 더 살펴보고 조용히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녁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자 가슴속 답답함을 조금씩 씻어 내리는 듯했다.그때,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은별이 경계하며 돌아선 순간, 준서의 깊고 날카로운 시선과 정확히 마주쳤다.“누가 따라오라고 했어?”준서의 추궁에 은별은 순간 멈칫했다. 테라스의 얇은 시폰 커튼 너머로, 리연이 다른 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때, 은별의 시야가 갑자기 남자에 의해 가로막혔다.“심은별, 네 그 얄팍한 속내는 그만둬.”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은별은 준서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자신이 준서를 따라 이 자리에 나온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틀린 말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정말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 결말은 언제나 준서의 냉담한 시선과 무시뿐이었다.하지만 이제 은별은 이혼을 결심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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