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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류한나
“우리 집이 널 빈털터리로 내쫓을 만큼 못 살진 않아.”

어리둥절한 고은서를 가뿐히 무시하고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민기한테 협의서를 다시 쓰라고 할게.”

“괜찮아.”

고은서가 거절했다.

“어차피 돈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

사실 그녀는 꽤 유복한 편이다.

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주식은 둘째치고 충분히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다.

곽승재와 기어코 결혼한 이유는 단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을 뿐이었다.

“그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곽승재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냈다.

“다만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내 말대로 협의서를 다시 써.”

고은서는 굳이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 알아서 해. 내일 구청에서 봐.”

말을 마친 고은서는 뒤로 물러나 방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문밖에 덩그러니 남은 곽승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이혼 얘기만 하려고 그를 불렀단 말인가?

일을 보고 나니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아? 심지어 그와 단 한 마디도 더 섞지 않는다니?

그가 집에 돌아오면 고은서는 항상 참새처럼 따라다니며 재잘거리기 바빴다.

같이 산책해달라는 둥, 꽃 보러 가자는 둥 요구가 끝도 없었다.

게다가 일하고 있을 때마저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앞에서 알짱거렸다.

만약 지금처럼 얌전하고 신경이 덜 쓰이게 한다면 집에 돌아가는 걸 꺼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비록 고은서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내일 정말 이혼한다면 한시름 놓게 되는 셈이다.

...

“오빠, 나 외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 딱 하루면 되니까 오빠와 백유미 결혼식에 절대로 훼방 놓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증명해줄게.”

“고은서,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절대로 유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거야.”

푹!

곽승재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

뜨거운 피가 몸속에서 철철 흘러내렸고, 체온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아!”

고은서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주위를 둘러보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로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되었지만, 전생의 기억이 아직도 꿈속에서 떠올랐다.

죽기 전에 느낀 고통과 절망은 숨 막힐 정도로 괴로운 경험이었다.

어쨌거나 예전 생활로 돌아갈 생각은 1도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침대에서 일어난 고은서는 화장을 마치고 구청으로 향했다.

아직 9시가 안 되어 직원들도 출근하기 전이었고, 곽승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밖에는 혼인신고 하러 온 젊은 커플들이 꽤 있었다.

행복한 표정으로 한껏 들뜬 사람을 보자 무의식중으로 곽승재와 혼인신고 할 때가 떠올랐다.

당시 그녀도 잔뜩 흥분한 나머지 아침 일찍 구청에 가서 줄을 섰다.

비록 곽승재는 점심이 지나서야 뒤늦게 나타났고, 게다가 표정도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녀는 너무 기뻤다.

이제부터 행복한 결혼생활이 이어질 거라는 기대와 달리 비극적인 인생의 서막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차에 앉아 있는 곽승재는 칠흑 같은 어두운 눈동자로 의아한 듯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도 고은서가 이혼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수법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심지어 눈 뜨고 코 베일까 봐 사람을 시켜 주변과 내부 상황을 살피라고 했다.

물론 그동안 고은서의 행적도 이미 조사를 마쳤다.

하지만 구청과 고은서 본인도 딱히 의심할 만한 부분이 없다는 보고만 받았다.

이때, 고은서의 주먹만 한 얼굴에 떠오른 자조적인 미소와 언뜻 스쳐 지나간 씁쓸함을 발견한 곽승재는 왠지 모르게 불쾌한 감정이 들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가 살면서 제일 극혐하는 일은 바로 남의 지배를 받거나 협박당하는 것인데, 고은서는 마침 다 해당되었다.

결국 이혼까지 간 것도 자업자득에 불과했다.

구청 직원들의 출근 시간이 다가오자 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문자를 보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난 도착했어. 얼른 와.]

화면에 뜬 문자를 보자 곽승재는 주민기가 미리 프린트해놓은 이혼협의서를 건네받아 긴 다리로 차에서 내렸다.

“곽승재 씨.”

고은서가 자리에 앉자마자 예의 갖춰 인사하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오다니?

혼인신고 할 때 한나절이나 늦은 사람이 이혼한다고 하니 제시간에 나타날 줄이야.

이내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훤칠하고 잘생긴 곽승재의 모습이 눈에 들었다.

다크 퍼플 문양이 들어간 셔츠를 입은 남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머리 위를 비추는 전등 때문에 주위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는데 마치 속세를 벗어난 부처님처럼 신성한 느낌마저 들었다.

비록 마음은 이미 식었지만, 곽승재의 완벽한 비주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생에 그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렸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뭘 봐?”

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바뀐 척해도 결국에는 자기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신세이지 않은가?

고은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조차 안 했다.

“협의서는 챙겼겠지? 이리 줘, 사인할게.”

곽승재는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녀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주었다.

직원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고은서는 협의서를 꺼내 대충 훑어보았다.

내용은 크게 보상으로 20억을 준다는 것이었다.

비록 곽승재가 지닌 재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지만, 20억이나 챙겨준다는 자체가 선심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억지로 결혼해서 그녀를 치를 떨게 싫어하던 사람이지 않은가?

“이혼하고 나서 입단속 잘해. 만약 이걸로 꼬투리 잡고 일을 키운다면 안면 불고해도 내 탓 하지 마.”

곽승재가 싸늘한 말투로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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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13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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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13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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