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면서도 억울한 감정을 느낀 민시후는 고은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나도 좀 봐주면 안 될까? 나도 조금이나마 좋아해 주면 안 돼?”마음이 약해진 고은서는 민시후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유성준이 나한테 몇 번 고백하긴 했지만 다 거절했어. 방금전에 얘기하길 점차 내려놓고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애를 찾을 거래.”그 말을 들은 민시후는 이내 희망으로 가득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날 위해서 유성준의 고백을 거절한 거야?”고은서는 전에도 유성준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명확하게 거절한 이유는 민시후한테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아마도?”“맞으면 맞다고 하면 되는 거지. 아마도가 뭐야.”민시후는 그녀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은근히 만족했다.“고은서, 다들 널 은서라고 부르던데 나도 그렇게 불러도 돼?”고은서는 조마조마해 하는 민시후의 눈빛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냥 칭호일 뿐인데 네 마음대로 해.”“은서야.”민시후가 새로운 칭호를 그녀를 불렀다.“응.”고은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줬다.“은서야.”민시후는 또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꽉 잡았다.둘 외에 아무 사람도 없는 이 시간, 달빛과 유유히 불어오는 밤바람 때문인지 민시후의 목소리가 매우 유혹적이고 부드럽게 느껴졌다.사랑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는 민시후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이내 진한 키스라도 할 것 같았다.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술기운 때문일까. 고은서는 민시후를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갑자기 멀리서 차 경보 소리가 들려왔다.소리가 하도 커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사삭 깨졌다.고은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려던 생각을 접었다.고은서는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러 오는 아파트 경호원을 보며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민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서 쉬어.”민시후는 약간 실망하기는 했지만
곽승재는 고은서를 꼭 끌어안은 채 말을 이어갔다.“은서야, 네가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나도 알고 있어. 나도 너한테 더 잘해주지 못한 내가, 너를 향한 내 감정을 더 빨리 발견하지 못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워. 내가 다 잘못했어. 이후로 너를 더 아껴줄게. 그러니까 제발 날 버리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될까? 나에게도 사죄할 수는 기회를 주면 안 될까?”곽승재의 품에 안긴 고은서의 귓가에는 온통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그의 목소리뿐이었다.이미 곽승재를 향한 사랑을 다 거두어들였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씁쓸한 감정이 느껴졌다.“모든 상처가 다 사죄한다고 나아질 수 있는 게 아니야.”고은서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사과는 받아줄게. 하지만 나 당신한테 이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기회를 준다는 것도 불가능하단 말이야.”“민시후 때문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들고 아주 쓸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민시후가 아니더라도 언젠간 또다른 남자가 생길 거야. 당신한테서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더는 사랑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나도 언젠간 새로운 사랑을 찾는 날이 올거야. 자존심 때문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내려놔. 계속 집착한다고 해도 더 비호감으로 느껴질 뿐이니까.”곽승재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은서야, 나 일시적인 승부욕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네가 누구랑 사귀든 난 절대 포기 못 해.”고은서는 끝까지 고집부리는 곽승재를 보며 순간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포기하든 말든 당신 일이야. 아무튼 난 더는 당신이랑 함께 할 생각이 없어. 그리고 경고하는데 ZY그룹이나 민시후를 해치려는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민씨 가문의 힘을 빌리는 걸 싫어한다고 해도 당신이 손을 쓰는 순간 민시후 아버지랑 형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고은서를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지금 내 뜻을 오해한 것도 모자라 내가 민시후를 해칠
“승재야, 제발 이러지 마. 전에 나한테 잘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승재야...”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범가온은 백유미를 머리채를 잡은 채 침대에 박기 시작했다.“쓰레기 년. X발 년. 내 아들 돌려내!”“그만해.”백유미가 정신을 잃으려는 순간 휠체어에 앉은 백승엽이 병실로 들어왔다.“당장 그 놓지 못해? 이 배은망덕한 년. 그 손 당장 놓으라고!”범가온은 백승엽을 보자마자 백유미를 놓고 눈을 부릅뜨고 그에게 덮쳤다.“짐승 같은 놈. 당신도 딸이랑 함께 죗값을 치러야 해!”그러나 범가온은 백승엽에게 손을 대기도 전에 그와 함께 온 사람한테 잡혔다.“백씨 집안 인간들 다 죽어야 해! 다 죽어야 한다고!”범가온이 발버둥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데리고 나가.”백승엽을 명령을 들은 두 사람이 범가온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아주 튼실하게 생긴 경호원 두 명이 그들의 앞에 막아섰다.곽승재가 데려온 경호원들이었는데 그들은 곽승재의 명령이 없이는 전혀 길을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백승엽은 순간 사그라들었다.“승재야, 아저씨가 빌게. 우리 유미 제발 좀 놔줘. 저 미친년이랑 함께 있다가 우리 유미 진짜 죽을 수도 있어.”애원하는 백승엽과 달리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상황을 본 범가온은 방금전보다 더 강하게 발버둥을 쳤다.백승엽이 데려온 두 사람은 두리번거리면서 범가온을 놓아줘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모든 걸 깨달은 백승엽은 이내 다리의 상처도 마다하지 않고 곽승재 앞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승재야, 다 내 탓이야. 유미를 잘못 가르친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유미는 그만 놔줘. 제발...”“아버지!”산발이 된 백유미가 허겁지겁 백승엽한테로 기어갔다.“얼른 일어나세요. 다리도 다 낫지 않으셨는데 꿇으시면 안 된단 말이에요.”그러나 백승엽은 감히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곽승재를 향해 빌었다.“승재야, 유미를 더는 괴롭히지 말아줘. 내가 고은서한테
백유미는 사실 범가온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곽승재가 범가온을 위해 나서주지만 않았더라면 백유미는 애초에 그녀를 T국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그러나 백유미는 그가 정신질환 감정까지 도와주면서 범가온을 자신과 같은 정신병원에 들여보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백승엽이 간병인을 고용했다고 해도 범가온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 앞에 나타나 욕설을 퍼부으며 심할 때는 미친 듯이 그녀를 때리기도 했다.전에 고은서 일 때문에 몇 번이고 곽현수한테 도움을 청했는데 형사 처벌을 피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그 이상은 도우려고 해도 곽승재가 오랫동안 GS그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바람에 함부로 그와 맞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백유미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협조하지 않는 한 곽승재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걸 며칠 동안 깊이 깨달았으니까 말이다.“승재야, 내가 모든 걸 다 털어놓기 전에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백유미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들어줄 생각 없어.”곽승재가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그런데 물어보지 않고서 차마 내가 알고 있는 걸 제대로 털어놓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그냥 범가온 손에 죽게 내버려 둬. 대신 넌 누가 고은서를 해치려 하는지 영원히 모르게 될 거야.”백유미는 용기가 생긴 듯 턱을 빳빳이 치켜올리면서 비아냥거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물어보고 싶은 게 대체 뭔데?”곽승재가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백유미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애원하는 말투로 물었다.“왜 T국에서 날 구한 거야? 날 죽게 내버려 두어도 됐었잖아.”곽승재는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널 구하려던 게 아니었어. 나도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어.”곽승재가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백유미는 그가 진심으로 후회하며 지금이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곽승재는 점차 인내심이 바닥났다.“변명 그만해. 어쩔 수 없었다고? 어쩔 수 없어서 우리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귀국한 거야? 전에도 몇 번이고 너한테 돈 주면서 일해달라고 부탁한 거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런데 T국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 아버지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잖아. 심지어 네가 이런 일을 꾸몄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잖아!”곽현수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려던 백유미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녀는 곽승재가 사건이 터지자마자 자신의 아버지부터 조사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T국에서 있었던 납치 사건을 주도한 사람 너 말고 대체 누가 더 있는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백유미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 파일을 확인하자마자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조사해 보았는데 출저를 찾을 수가 없었다.당사자 백유미에게 캐물어도 끝까지 부인하는 바람에 배후에 대체 누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정상인이라면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죄를 씻어내려고 하겠는데 백유미는 처음부터 단연코 거절해버렸다.그 덕분에 곽승재는 백유미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고은서를 해치려 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곽현수가 백유미를 도우려 한다고 해도 사실상 그녀를 감옥으로 보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배후에 있는 사람을 끄집어내지 않고서는 그는 도무지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숨긴다고 소용없어. 고은서를 납치할 때 녹음되었던 파일들이 유출된 이상 넌 이미 희생양이 된 셈이야. 그 누구도 널 구하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지.”백유미는 곽승재가 한 말들이 다 사실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T국에 들어서자부터 원지훈의 배신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나타난 곽승재까지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는데 그 때문에 그녀의 정체와 계획도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원지훈을 죽이고 자살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했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관건적인 시각에 녹음 파일까지 유출되었다.모든 책임을 그녀와 원지훈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 뻔했다.백유미에게는
얼마 후, 병실에서는 귀가 째지는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그러나 정신병원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자극을 받은 환자들이 유사한 소리를 내곤 했다.오늘 밤은 유달리 시끄럽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이튿날.고은서는 칫솔하고 세수를 마치자마자 민시후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곧 아파트 밑에 도착하니까 함께 아침 먹으러 가자고 내려오라는 전화였다.옆에서 듣고 있던 박지연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누가 들으면 두 사람이 서로 못 본 지 몇 년은 되는 줄 알겠어.”고은서는 그녀를 쏘아보면서 답했다.“어제 집 들어오면서 다 들었거든. 육현석이랑 통화하고 있었지?”그러나 박지연은 아주 태연하게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평소에도 자주 연락하는데. 별다른 의미가 없어. 그보다 삼촌 생신 쇠주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은 왜 안 알려주는 거야?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어제 곽승재 때문에 기분을 망친 데다가 박지연이 육현석이 한창 즐겁게 통화하고 있는 바람에 그녀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미처 말해주지 못하고 씻자마자 잠에 들었다.그래서 이 기회에 박지연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다.“곽승재는 밥 안 먹고 갔단 말이야?”박지연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쌤통이야.”박지연이 콧방귀를 뀌면서 속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네가 민시후한테 더 잘해주니까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서 참지 못하고 먼저 간 게 분명해. 그런데 사실 민시후도 곽승재보다 못한 곳은 없잖아. 그럼 삼촌이랑 숙모도 더는 곽승재랑 재결합하라고 너한테 조르지 않겠네.”“아마 말해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요즘에는 잔소리가 전보다 많이 뜸해졌어.”고은서는 무언갈 떠올린 듯 말을 보태었다.“그런데 어제 외숙모가 민시후에 관해 많이 묻던데 조금 이따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둬야겠어.”“삼촌이랑 숙모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다들 거리 두는 데는 이유가 있다니까. 그런데 민시후가 껄렁대는 것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네 삼촌
아침은 홍콩식 딤섬집에서 먹기로 했다.민시후가 미리 예약해놓은 덕분에 자리에 앉자마자 각종 딤섬이 오르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그중에서 새우만두를 맛보았는데 아주 맛있었다.반면 민시후는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고은서가 그를 재촉했다.“빨리 먹어. 조금 이따 투자 은행 직원들이랑 미팅해야 하잖아.”“비서한테 미팅을 내일로 미루라고 말해두었어.”민시후가 그녀에게 군만두를 집어주면서 말했다.“왜?”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백씨 집안 기업에 엄중한 문제가 생겼잖아. 네가 원지훈한테 알려줬던 그 프로젝트가 망하는 바람에 백씨 집안 기업이 곧 파산하게 생겼어. 그 말인즉슨 지금이야말로 백씨 집안 기업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딱 좋은 타이밍이란 뜻이지.”‘벌써 파산한다고? 곽현수가 뒤에서 계속 도와주고 있는 거로 아는데. 게다가 그 프로젝트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백유미는 가만있었단 말이야?’고은서는 약간 의아해했다.“아침에 소식 전해 들었는데 웬일인지 백유미가 어젯밤에 손가락 하나가 단절되어서 수술실로 들어갔다가 우연하게 임신한 지 두 주일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대.”‘백유미가 임신했다고? 두 주일이라면 T국에 있을 때 그 남자들이 한 짓인가?’그녀의 의문을 알아본 민시후가 말을 이어갔다.“백유미 임신 소식을 전해 들은 범가온이 기어코 원지훈 애라면서 죽어도 그 애를 낳아야 한다고 고집부리고 있대.”고은서는 놀라움을 머금지 못했다.‘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야? 백유미가 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약을 썼는데 그 애가 성하겠어? 애가 성하다고 해도 꼭 원지훈 애라는 보장은 없잖아. 게다가 두 사람 사촌 오누이 아니야?’“친척 관계로 따지면 사촌 오누이가 맞는데 사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혈연관계도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범가온이 더 악을 쓰고 고집부리는 거야.”“그런데 전에는 범가온이 원지훈 일 때문에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지 않았어? 백유미가 범가온 말을 들어줄 리가 없잖아.”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가 했다는 확실한
다름 아닌 송민준과 송민아였다.송민아는 예전의 부잣집 아가씨 모습과 달리 간단한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직장 여성의 기품이 느껴졌다.옆에 있는 송민준은 맞춤 제작 정장을 입고 아주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만 보아도 상위자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고은서를 본 송민아는 약간 의아해하긴 했지만 먼저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은서야, 너도 여기 밥 먹으러 온 거야? 이렇게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러게 말이야.”고은서가 나긋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반면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물었다.“오빠 따라온 거 아니거든요. 우리 오빠가 밥 사준대서 온 것뿐이에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고요.”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시후야, 내가 고른 곳이야. 민아랑 상관없어.”송민준이 옆에서 설명했다.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랜만이에요, 은서 씨.”송민준이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인사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오랜만입니다, 민준 씨.”“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할까요?”송민준이 먼저 요청을 보냈다.“오빠, 그냥 우리끼리 먹어.”송민아는 민시후가 병원에 있을 때 고은서가 매일 찾아가서 함께 시간 보낼 정도로 두 사람이 가까이 지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행여나 민시후가 자신이 일부러 쫓아온 거라고 오해라도 할까 봐 황급히 송민준을 막았다.송민아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본 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여기서 만난 데다가 다 서로 아는 사이인데 같이 식사해요.”민시후는 두 사람과 같이 밥 먹기 싫었지만 고은서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레스토랑에 들어간 후 네 사람은 웨이터를 따라 한 룸으로 들어갔다.송민준은 매너 있게 메뉴판을 고은서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은서 씨가 좋아하는 메뉴로 주문하세요.”“저는 다 괜찮으니까 민준 씨가 하세요.”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