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씻고 1층으로 내려갔을 때, 곽승재는 자료를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흰 셔츠를 입고있는 그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아침햇살이 그의 흠 잡을 데 없는 얼굴에 비쳐 표정마저 부드러워 보였다.어느 각도로 보든 고은서의 스타일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고은서는 그와 시선이 마주쳐서야 정신을 차렸다.‘아무리 잘생겨봤자 싫은 짓만 골라 하잖아!’고은서는 차가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갔다.“어젯밤 오빠가 나를 침대로 옮겼어?”쨍그랑!이때 주방에서 젓가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깜짝 놀란 표정의 주민기가 보였다.주민기는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젓가락을 주우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주방으로 물러갔다.“사모님...”그러면서 주방에서 나오려는 이미숙을 말렸다.이미숙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왜 그러세요. 사모님께 아침 식사로 뭘 드실지 물어봐야 하는데!”주민기는 여전히 이미숙을 끌고 주방으로 들어갔다.“아줌마, 젓가락에 기름기가 묻어있어서 미끄러운 거 아니에요?”“분명 깨끗한데...”주민기와 이미숙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고은서는 자신이 한 말이 오해를 샀다는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졌다.“내가 그랬어.”곽승재는 일부러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고은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를 냈다.“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기로 했잖아!”곽승재는 자료를 내려놓고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부부 사이에는 한잠 자면 화가 풀린다고 하잖아. 이제 냉전도 끝날 때가 된 것 같은데?”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이건 또 무슨 도리지?’고은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말했다.“나갈 준비나 해. 내일 GS 그룹 파티에 같이 참석해.”“미안한데 난 시간 없어.”고은서가 단칼에 거절했다.판주 투자은행 매수를 축하하는 파티라 이사인 백유미가 나댈 거란 생각에 별로 가고싶지 않았다.“곽 사모님으로서 남편이랑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잖아.”곽승재는 은행 카드 두 장을
곽승재는 어느 정도 싫증 섞인 눈빛으로 고은서를 쳐다보았다.“고씨 가문에서 귀하게 컸겠는데 왜 이렇게 돈을 좋아해?”“돈을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돈이 있어야 자신감도 생기는 거지!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오빠도 돈이 많으면서 맨날 GS 그룹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잖아. 뭐, 당연히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있겠지. 재벌가는 일반인 세계를 모를 수도 있어.”곽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주방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주민기는 내심 부러웠다.‘사모님은 좋겠어. 이렇게나 많은 돈을 받고. 판주 투자은행 최고 보너스가 분명 2,000만 원이었는데 대표님께서 2억 원을 드렸어. 뭐, 어차피 대표님 돈이 사모님 돈이긴 하지만. 그저 한 주머니에서 다른 주머니로 흘러 들어갈 뿐이지. 사모님도 기분이 좋고, 돈이 다른 사람 주머니에 흘러 들어갈 일도 없고. 일거양득이네. 대표님은 역시 현명하셔.’“민기 씨, 언제까지 막고 있을 거예요? 저 이제 나가도 되죠?”이미숙이 급한 마음에 물었다.“사모님 아직 아침도 못 드셨는데.”곽승재와 고은서의 대화가 슬슬 마무리되자 주민기는 그제야 길을 비켰다.“아줌마께서도 힘드시면 며칠 쉬세요.”‘이러면 대표님이 사모님께서 해주시는 요리를 드실 수 있잖아?’이미숙은 순식간에 긴장하기 시작했다.“민기 씨,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대표님께서 저를 해고하래요?”“아니요, 오해하지 마세요.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이미숙은 주민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아침 식사 후, 곽승재와 주민기는 회사로 향했고, 고은서는 쇼핑하러 갈 준비를 했다. 이참에 할머니 선물도 알아보려고 했다.1층에서는 이미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아줌마, 무슨 일 있으세요?”“사모님, 아까 민기 씨가 저보고 며칠 쉬라고 하던데... 혹시 제가 무슨 잘못한 거 있나 해서요.”고은서가 위로했다.“아니에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이미숙은 그래도 불안했다.“그런데 어제저녁 대표님한테 약을 드렸더니
이때, 며칠 전 성북구 쇼핑물에서 범가온한테 명품 시계를 사지 말았어야 한다고 꾸지람을 듣던 남자가 떠올랐다.생김새며, 말투를 보니 범가온의 아들인 것 같았다.그때 범가온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여자 집안이 돈 많는 집안이에요. 제가 꾸미지 않으면 어떻게 꼬시겠어요.”‘설마 그 타깃이 은혜는 아니겠지? 이제 재밌어지려고 하네.’범가온의 조건을 보면 아들에게 이런 명품을 사줄 리가 없었다.딱 봐도 백유미가 도와준 것으로 보였다.백유미가 정신병원은 물론 주위 사람들한테 손을 뻗을 줄 몰았다.“재벌가로 시집간 사촌 언니예요. 이 차는 형부 거고요.”조은혜가 자랑하는 식으로 말했다.“전 세계에서 얼마 없는 메르세데스를 저희 형부가 가지고 있어요. 돈 있어도 못사는 거 알죠? 그 정도의 신분이 받쳐줘야 하거든요.”남자는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더니 다시 표정 관리하기 시작했다.“은혜 씨, 형부라는 분 그렇게 대단해요? 언제 저희한테도 소개해 줘요!”이때 다른 남자가 말했다.곽승재의 쌀쌀한 표정이 떠올랐는지 조은혜는 흔쾌히 대답하지 못했다.“엄청 바쁘신 분이라 나중에 기회 되면 소개해 줄게요. 노래방 가기로 했잖아요. 얼른 가요!”남자가 탐욕스럽게 메르세데스를 쳐다보더니 말했다.“몇 명 안 되는데 사촌 언니랑 함께 노는 거 어때요?”“됐어요. 그러면 무슨 재미에요. 저희끼리 놀아요.”조은혜는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남자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똑같은 젊은이인데 같이 놀면 더 재미있을지도 몰라요!”조은혜는 여태까지 말이 없던 고은서를 보더니 무성의로 물었다.“갈래?”저번 생에는 조은혜가 조건이 괜찮은 남자를 만났다고 했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 상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나중에 정신병원에서 간호사의 대화를 통해 조은혜가 가정폭력을 당한 것도 모자라 남편이 다른 남자한테 보내 야동까지 찍었다고 했다. 삼촌은 조은혜를 그 집에서 빼내기 위해 전 재산을 털었다고 했다.원해 하향세를 타고 있던 M•Q는 그 이후로 다시는 살
한 여자가 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반인은 못사는 핸드백인데. VIP만 살 수 있는 건데!”높은 목소리에 원지훈도 이쪽을 쳐다보았다.“돈 많으니까 사는 거죠!”조은혜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재벌가에 시집간 것도 모자라 결혼할 때 할아버지가 혼수로 200억 원이나 줬는데.”고은서는 돈 많은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때 웨이터 한 명이 들어오자 곽승재가 준 블랙카드를 꺼냈다.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웨이터한테 블랙카드를 꺼냈다.“이 카드로 계산해 주세요. 오늘은 제가 사는 거거든요.”원지훈이 다가와서 말렸다.“안 돼요. 오늘은 제가 사기로 했잖아요.”“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은혜 언니인데 너희들 돈을 쓸 순 없잖아.”고은서는 마치 장난감을 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블랙카드를 꺼냈다.원지훈은 계속 말리면 눈치 없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동작을 멈췄다.“고마워요.”고은서는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미안,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빡했네. 즐겁게들 놀아.”조은혜는 그녀가 꼴보기 싫어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고은서가 밖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원지훈이 쫓아 나왔다.“누나, 혹시 연락처 좀 추가해도 될까요?”고은서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원지훈을 쳐다보았다.이에 원지훈이 바쁘게 설명했다.“다른 뜻은 없어요. 은혜 씨 언니면 은혜 씨에 대해 잘 알 것 같아서요. 은혜 씨랑 빨리 친해지고 싶은데...”고은서가 태연하게 물었다.“은혜가 마음에 들어?”원지훈이 사실대로 인정했다.“네. 은혜 씨랑 서로 안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많이 좋아해요. 한번 노력해 보려고요.”고은서가 고개를 쳐들면서 말했다.“우리 집안은 아무나 들이지 않아. 우리 외삼촌한테 자식은 은혜 하나뿐이야. 딸을 엄청 아끼시는 분이라 아무한테나 못 줘.”“알아요. 근데 그래도 조건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은혜 씨를 쫓아다니는 거예요. 저희 아빠가 고향에서 커다란 농산품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거든요. 조건이
고은서는 핸드폰을 거두었다.아까 자랑하는 척 블랙카드를 꺼낸 이유는 바로 원지훈에게 경제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탐욕스러운 그는 절대 고은서와 친해질 기회를 놓치지 않을 사람이었다.그러면 조은혜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그리고 원지훈은 딱 봐도 백유미 라인인데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쇼핑몰에서 최신상 드레스, 액세서리와 금을 샀다.예전에는 금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금의 가치를 알아버렸다.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기도 좋고 가치도 있고. 돈이 필요할 때는 팔 수도 있고.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이 없었다.쇼핑이 끝나고, 곽승재한테서 연락이 왔다.고은서는 발신인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전화를 별로 받지도 않던 사람이 주동적으로 전화를 하다니!“무슨 일인데? 설마 금 몇 덩어리를 샀다고 나를 탓할 건 아니지? 아침에 분명 마음대로 쇼핑하라고 했잖아.”사레 걸린 곽승재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외할아버지께서 벼루 좋아하시잖아. 하나 좋은 거 얻어놨거든. 내가 지금 바빠서 그러는데 네가 할아버지께 갖다드려.”곽승재가 외할아버지의 취향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알았어.”고은서가 흔쾌히 대답했다.“지금 쇼핑몰에 있는 거야?”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곽승재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응. 인제 가려고.”곽승재가 또 물었다.“무슨 물건을 샀는데?”“옷이랑 액세서리랑 금이랑.”“저번에도 이런 가게에 들렀어?”“아니. 저번에는 지연이가 온 의사 선생님께 옷을 선물하고 싶대서 남성 옷 전문점을 들렀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은서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왜 묻는데? 사고 싶은 거 있어?”곽승재의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알아서 사. 난 회의가 있어서.”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어차피 옷을 사줘도 입지 않는데 돈 낭비할 바에 사지 않는 것이 나아.’고은서는 쇼핑한 물건들을 들고 GS 그룹으로 향했다.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했다.고은서는 갑자기
‘왜 바쁜 줄 알았더니, 이러고 있느라고 바쁜 거였네. 업무가 바쁜 와중에도 일을 찾아서 하다니.’“은서 씨.”백유미가 먼저 고은서를 발견하고 인사했다.그러고는 눈치껏 곽승재에게 이렇게 말했다.“승재야, 다른 일 없으면 먼저 판주 투자은행으로 가볼게.”“응.”백유미가 떠나고, 곽승재는 고은서의 텅 빈 두 손을 쳐다보았다. 마치 왜 자기 물건은 사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듯했다.고은서는 모른 척하면서 물었다.“벼루는?”전화할 때는 괜찮더니 갑자기 말투가 바뀐 고은서의 모습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떠난 백유미가 생각나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유미는 내일 파티 관련해서 보고하러 온 것뿐이야...”“나랑 상관없는 일이야.”고은서가 곽승재의 말을 끊었다.“줄 거면 빨리 줘. 나도 바쁘니까.”침묵을 지키던 곽승재가 서랍에서 벼루가 담긴 선물 박스를 꺼냈다.“회의 취소하고 같이 외할아버지한테 다녀올까?”“안 그래도 돼.”고은서는 벼루를 받아쥐고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떠났다.‘이 이혼, 하고야 말겠어! 내가 왜 대충 살아야 하는데? 오빠 말고 다른 남자를 찾지 못할 정도로 내가 별로인 것도 아니고.’육현석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고은서를 마주치고 인사를 할까 말까 하고 고민하고 있다가, 고은서가 차가운 얼굴로 옆을 쓱 지나가는 바람에 머쓱해서 코를 만졌다.‘왜 갑자기 안하무인이 된 거지?’육현석은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곽승재의 표정도 안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형, 은서 씨가 또 화를 돋우고 갔어?”곽승재가 짜증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은서 씨? 네가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야? 버릇도 없이.”육현석은 할 말을 잃었다.‘계속 이렇게 불러도 뭐라고 하지 않더니.’하지만 연애 경험이 많은 윤현석은 단번에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은서 씨가 좋아져서 이런 호칭까지도 신경 쓰이는 거지.’그래서 눈치껏 호칭을 이렇게 정리했다.“형, 아까 형수님이랑 마주쳤는데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둘이 싸웠어?”
‘늦었으면 늦었지. 내가 왜 화를 풀어줘야 하는데?’곽승재는 육현석의 충고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계획서는 완성했어? 지금 회의실에 가서 브리핑할 수 있을 정도야?”“...”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육현석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형, 좀 봐주면 안 돼?”곽승재의 태도는 단호하기만 했다.“안 돼.”윤현석이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형, 형수님한테서 받은 화를 나한테 풀면 안 되지!”곽승재가 째려보면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할 거면 꺼져.”육현석은 바로 입을 닫았다....고은서는 외할아버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곽승재가 준비한 벼루를 선물했다.외할아버지는 선물을 보자마자 미소가 활짝 폈다.“승재 안목이 괜찮네. 이런 고급 벼루는 보기 힘들어. 내가 얼마나 갖고 싶었는데! 은서야, 너도 한번 볼래?”“아니요.”고은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한테 선물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가지러 가지도 않았다.“할아버지, 저 작업실에 가서 향초를 좀 만들게요.”저번에 할머니한테 염주 팔찌만 선물해서 다른 선물도 드리고 싶었다.곽승재가 외할아버지한테 벼루를 선물하고 싶다고 할 때부터 할머니한테 잠이 잘 오는 향초를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고은서는 늘 집에서 향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고준석은 습관 된 지 오래였다.그는 벼루를 감상하면서 말했다.“그래, 가봐.”마당 제일 끝에 있는 작업실은 공간이 넓고 조용했다. 이곳은 엄마가 살아생전 가장 즐겨 찾던 곳이었다.고은서는 어릴 때부터 향에 민감한 엄마를 닮아 향초 제작을 배우곤 했다.전문적인 퍼퓨머가 되려면 엄격한 향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엄마는 고은서가 고생할까 봐 그저 취미 삼아 만들어 보라고 했다.외할아버지 빼고는 누구도 그녀의 제대로 된 실력을 몰랐다.향초를 만들다 보니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그냥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어떤 향은 오랫동안 정제해야 할 정도로 과정이 번거로웠다.“매일 청소해서 방이 깨끗해. 그냥 쓰면 돼. 온 오후 힘들었는데 얼른 밥이나 먹어.”고은
“아, 맞다. 할아버지, 은혜가 외국에 가고 싶어 하던데. 외삼촌한테 유학 보내자고 말해보는 거 어때요?”고은서는 오전에 조은혜를 만났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지금 성적이 안 좋은데. 환경을 바꾸면 성적이 좋아질지 어떻게 알아요?”조은혜가 외국에 나가면 원지훈이 더는 따라다니지 않을 것이고, 이러면 전생의 비극을 방지할 수도 있었다.고준석이 말했다.“외숙모가 예전에 하나뿐인 딸을 외국에 보내기 싫다고 말한 적 있어. 지금 이미 은혜한테 짝을 찾아주는 것 같던데?”조은혜를 끔찍이 생각하는 단은숙은 절대 고준석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산책을 마치고, 고은서는 고준석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고 그가 잠에 들어서야 다시 작업실로 향했다.그러고 또 몇 시간 뒤, 고은서는 할머니의 취향에 맞춰 베티베르, 베르가모트 등 방향유로 수면에 좋은 향초를 완성했다.저번에 주민기 엄마한테 선물한 향초가 효과 있다고 해서 또 만든 것이다.고은서는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고은서는 기지를 쭉 폈다.‘역시 어릴때부터 사용한 침대가 제일 편하네.’고은서는 이혼하고 집에서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차려주는 밥만 먹고, 고준석과 함께하는 시간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고은서는 세수를 마치고 머리가 부스스한 상태로 1층으로 내려갔다.이때 마당에서 고준석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아침부터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 거지?’밖으로 나가자, 고준석이 곽승재와 주민기에게 태극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정장 차림의 곽승재와 주민기가 진지한 표정으로 서툴게 태극권을 연습하는 모습은 웃기기만 했다.“풉!”고은서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째려보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주민기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사모님.”“민기 씨, 제가 향초 좀 만들었는데 이따 가져다드릴게요.”“감사합니다. 사모님.”“은서야, 일어났어? 승재도 온 지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