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아.”주인혁의 매니저가 반갑게 불렀다.그 이름을 들은 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설마 그 인플루언서 마재경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고은서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 사람은 이미 다가오고 있었고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아는 마재경이었다.그녀는 무척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 얼굴이 한층 밝아 보였다.며칠 전 손을 데었을 때의 창백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아는 사이였던 주인혁의 매니저와 마재경은 친근하게 안부를 주고받았다.“밥 먹으러 왔어? 우연이네. 마침 재경이랑 얘기할 게 있었는데 저쪽에 앉을까? 은서 씨랑 친구분 방해하지 말자.”매니저가 주인혁에게 물었다.주인혁의 매니저인 이지호는 최근 교체된 인물로 더 나은 인맥과 경력을 갖춘 사람이었다.그는 주인혁을 담당하기 전부터 많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주인혁이 앞에 있는 고은서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촬영장에서도 주인혁은 고은서와 관련된 일에 신경을 썼고 촬영이 끝난 후에는 뒤풀이도 가지 않고 곧장 해성으로 달려갔다.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연예인이 스캔들에 휘말리면 팬들을 대거 잃을 수도 있기에 매니저는 절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인혁을 빨리 데려가고 싶었다.그 말을 듣고 주인혁이 잠시 망설이자 마재경이 먼저 고은서에게 인사를 건넸다.“은서 씨, 우리 정말 인연인가 봐요. 여기서도 다 마주치네요.”그녀는 일부러 가방을 눈에 띄게 들어 보였다.그제야 고은서는 마재경이 유명 브랜드의 최신 컬렉션 원피스를 입고 있고 손에는 구하기도 어려운 한정판 명품 가방을 들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그녀의 태도로부터 그 물건들을 누가 선물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마재경의 유치한 행동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고은서가 주인혁에게 말했다.“인혁 씨, 먼저 일 보세요. 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식사해요.”“와, 은서 씨는 정말 매력이 넘치나 보네요.”주인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마재경이 과장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멋지고 성공한 남성이 옆에 있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말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곽승재를 마주하자 고은서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여긴 왜 또 온 거야?’지난번엔 작은 병원에서 마주치고 이번엔 식당에서 다시 만나다니 너무도 기막힌 우연이었다.고은서는 짜증이 밀려왔지만 반대로 마재경은 마치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그녀는 곧장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곽승재를 향해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곽 대표님...”하지만 곽승재는 마재경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신 주인혁과 송민준을 한번 훑어보았다.주인혁도 온라인에서 떠도는 곽승재와 마재경의 소문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에게 그다지 호감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송민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곽 대표님, 우연이네요.”그러자 곽승재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송 대표님과 고 대표님은 최근 협업하나 보죠? 요즘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네요.”송민준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곽 대표님 덕담 감사합니다. 고 대표님의 회사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함께할 기회가 생긴다면 제게는 영광이죠.”비록 송민준이 속한 회사는 해성에 있는 한 지사에 불과했지만 그 영향력은 고은서의 회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럼에도 이렇게까지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녀에 대한 배려였다.곽승재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형식적인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대신 그는 여전히 억울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재경을 바라보며 물었다.“여기서 먹을 거야? 아니면 장소 옮길까.”마재경은 고은서와 주인혁을 의식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긴 싫어요. 아무도 저를 반기지 않잖아요.”직접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그 말투와 분위기에는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그제야 곽승재는 옆에서 계속 눈치를 보고 있던 이지호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소속 연예인이 재경이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매니저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고은서는 처음부터 곽승재와 말다툼을 벌일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주인혁을 빌미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태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곽승재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마재경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지금 저를 개에 비유하신 건가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단지 은서 씨 인기가 부럽다고 했을 뿐인데 주인혁이 일부러 나서면서 은서 씨한테 잘 보이려고 한 건 사실이잖아요. 사과해야 할 일입니다.”“친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나서서 도와주지 않나요? 다른 사람이 하는 말 듣기 싫으면 본인의 언행부터 조심하세요. 괜한 도발이나 억울한 척하는 행동은 하지 말고요.”고은서가 싸늘한 말투로 일갈했다.“저는 그런 적...”얼굴이 붉어진 마재경은 더 이상 반박을 이어 나가지 못했고 그녀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곽 대표님, 다 제 잘못이에요. 은서 씨 인기가 부럽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잘못인 줄 알았으면 사과하세요.”고은서는 비꼬듯 말하고 곧장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곽 대표님이 잘못한 사람이 사과해야 한다고 하셨죠. 이제 와서 편파적으로 행동하진 않으시겠죠?”마재경은 치를 떨었다.‘분명 곽승재의 힘을 빌려 주인혁에게 사과를 받아내려 했는데 왜 내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지? 다 고은서가 능수능란하게 말싸움을 주도한 탓이야.’마재경은 눈물을 글썽이며 곽승재가 나서서 도와주기를 기대했지만 곽승재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고 이 상황 자체에 짜증이 난 듯했다.그녀는 곽승재가 누구 때문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어느 쪽이든 도박을 걸기는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고은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고은서는 처음부터 마재경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다만 곽승재가 주인혁에게 억울한 사과를 강요하려 했기에 기어코 마재경에게 사과를 받아낸 것이다.이미 상대가 물러섰으니 더 따질 필요도 없었다.“멀리 안 나갑니다.”고은서의 축객령에 곽승재의 얼굴은 폭풍전야처럼 어두워졌다.그는
“이대로 가면 이 게임은 틀림없이 대박 날 거야! 우리도 게임 업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어.”송민아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은서야, 네 안목은 정말 대단해. 존경스러울 정도야.”고은서는 왠지 모르게 조금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명운 주류와 제인 제약은 그래도 노력한 결과가 어느 정도 있었지만 world 게임은 단순히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송민아는 깊이 생각하지 않겠지만 송민준이라면 의심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고은서는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투자라는 게 적자 날 때도 있고 흑자 날 때도 있는 거지. 우연히 아이디어를 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기회를 준 것뿐이야.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어.”그녀의 말에 송민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보면 은서 씨의 선의도 꼭 시간 낭비는 아니었군요.”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점심때 갑자기 찾아온 남자에게 십여 분의 시간을 준 것뿐인데 송민준에게는 그럴듯한 이유로 받아들여진 것이다.그 남자를 떠올린 고은서는 문득 한 가지 일이 뇌리를 스쳐 미간을 찌푸렸다.“왜 글? 뭘 걱정하는 거야?”송민아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고은서는 말하려다 송민준이 옆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냥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생각나서. 오빠랑 밥 먹어. 난 먼저 사무실로 돌아갈게.”송민아는 고은서가 업무에 철저한 걸 알기에 더 이상 붙잡지 않고 대신 도시락 두 개를 건넸다.“아무리 바빠도 밥은 꼭 먹어야 해.”“알았어, 고마워.”사무실로 돌아온 고은서는 곧장 world게임 회사의 창립자이자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다.“고 대표님, 내부 테스트 데이터가 엄청 좋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큽니다.”상대방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은서는 몇 마디 축하의 말을 건넨 후 본론을 꺼냈다.“게임의 도용 방지 대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전생에 이 게임은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투자사와의 소송으로 최적의 출시 시기를 놓쳐 뒤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지나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고은서 씨, 잘 지내셨어요? 현재 백유미는 특수 병동에 갇혀있습니다. 비록 간병인이라는 명목으로 배치되었지만 직접 마주할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짧은 몇 차례의 접촉을 통해 본 백유미의 상태는 심각합니다. 멍하니 아무 반응도 없거나 아니면 극도로 난폭해져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병원 측에서는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야 일반 병동으로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갑자기 미쳐버린 거지? 백승엽의 죽음조차 백유미를 완전히 무너뜨리진 못했는데 더 큰 충격은 받은 건가?’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은서는 문득 곽승재를 함정에 빠뜨리기로 결심했던 그날 밤 육현석이 했던 전화가 떠올랐다.그때 곽승재는 한동안 전화를 받지 않다가 박지연의 핸드폰으로 연락해서야 겨우 연결되었는데 전화기 너머로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었다.‘울음소리가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었는데 백유미였던 걸까?’곽승재는 바람둥이와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 그와 특별히 가까운 여자는 백유미뿐이었다.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경찰로부터 백유미가 정말 미쳐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그 울음소리가 정말 백유미였다면 두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한 비서님, 최근에 백유미를 면회하러 온 사람이 있었나요?”한지나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아니요. 아무도 없었습니다.”“곽 대표도 안 갔나요?”“네.”한지나는 뭔가 오해한 듯 급히 덧붙였다.“고은서 씨, 곽 대표님과 백유미 사이에는 사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매번 백유미가 곽 대표님을 찾아온 것도 업무적인 일 때문이었어요. 곽 대표님께서 정말 백유미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백유미도 제게 돈을 주고 대표님의 동선을 알려달라고 할 필요도 없었겠죠.”이생에서 곽승재는 아직 백유미를 사랑하게 되지 못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난 생에서는 결국 결혼까지 하기로 했던 사이였다.고은서는 속으로 냉소했다.고
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좋아. 끝나고 나면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기다려, 내가 데리러 갈게.”“나야, 내가 갈게.”박지연은 의욕이 잔뜩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차 사려고 했잖아. 육현석이 연습용으로 한 대 빌려줬어.”“선물로 준 게 아니라?”“내가 그렇게 비싼 걸 어떻게 받아. 얼른 내려와.”고은서는 자신의 운전 초보 시절이 떠올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지연아, 너 운전면허 대학 때 땄지? 그동안 운전 거의 안 했잖아. 괜찮겠어?”“무슨 뜻이야? 당연히 괜찮지!”박지연은 자신만만했다.“며칠 동안 육현석이 시간 날 때마다 나랑 같이 연습했어. 나 운전 완전 잘해.”“육현석은?”“오늘 바빠서 시간 못 낸대. 헛소리 그만하고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짐을 챙긴 고은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연이 반짝거리는 새 차를 타고 도착했다.그녀는 일부러 경적을 한 번 울리고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자신만만한 모습 좀 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운전이 엄청 어려운 일인 줄 알겠네.’고은서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단단히 맸다.“지연아, 너 혼자 운전하는 거 처음 아니지?”박지연은 의욕이 넘쳤다.“걱정하지 마! 처음 아니야. 오늘 아침에도 혼자 병원 주차장 한 바퀴 돌았어. 그리고 방금도 병원에서 여기까지 잘 왔잖아.”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래도 괜히 초 치지 말고 믿어야지...’그녀는 손잡이를 꽉 잡으며 장엄하게 말했다.“출발하시죠!”박지연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정상적으로 행동해. 나 진짜 운전 잘해.”고은서의 걱정 속에서 박지연은 무사히 목적지까지 운전했다.주차를 마치자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다 고은서는 갑자기 곽승재가 대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고까지 낸 운전자의 조수석에 앉을 용기가 있다니... 내가 실수라도 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을 텐데.’고은서와 박지연은 함께 피부과로 들어갔다.직원이 그들을 맞
“유혜린 씨, 온씨 가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 집안 사람들 인품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셨어요?”고은서는 유혜린을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지연이처럼 남편한테는 가사도우미 취급받고 시부모한테는 학대당하는 거 아니에요?”유혜린이 입을 떼기도 전에 조수연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헛소리 그만해. 누가 학대했대? 쟤 스스로 안하무인으로 승준이랑 잘 살 생각은 안 하고 돈 많은 남자에게 붙으려고 한 거지.”조수연은 차를 가리키며 독설을 퍼부었다.“돈 많은 남자한테 붙지 않고서야 저렇게 비싼 차를 타고 다닐 수나 있겠어?”“지연이 남자 친구 차가 맞긴 해요.”고은서는 박지연의 앞으로 나서며 그녀를 감쌌다.“지연이 남자 친구는 돈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잘생기고 다정해요. 게다가 지연이를 엄청나게 사랑해 주죠. 그쪽 집안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하는 짓은 봉건 시대 노예주 수준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늘도 참다 못해서 이혼하게 했죠. 그러고는 돈 많고 잘생긴 남자를 지연이한테 보내 아끼고 사랑해 주게 한 거고요.”“너... 너!”조수연은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혜린아, 내가 이렇게까지 당하고 있는데 넌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조수연은 유혜린에게 화살을 돌렸다.조수연은 유혜린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며느리라는 사람이 시어머니가 모욕당하고 있는데 한마디도 안 하고 있으니 분노가 치밀었다.유혜린은 화내기는커녕 싱긋 웃으며 선물을 들고 있던 기사를 앞쪽에서 기다리게 했다.그러고는 고은서와 박지연 앞에 다가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두 분 죄송합니다. 오늘은 저희 어머님이 실례하셨네요. 부디 너무 개의치 마세요.”“혜린아,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너도 이런 병원에 오는 여자들은 얼굴이든 가슴이든 손봐서 이혼 위기를 막거나 돈 많은 남자를 잡으려는 거라고 했잖아.”조수연은 분을 삭이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올케야 내가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박지연처럼 허영심 강한 애는 내
“승준이가 2억짜리 보석을 사서 전처에게 주든 다른 여자에게 주든 결국 제 얼굴에 먹칠하는 거잖아요.”유혜린이 날카롭게 말했다.“일을 크게 만들어서 제가 얼마나 불쌍한 여자인지 온 세상에 떠벌리고 싶은 거예요?”조수연은 자신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던 며느리가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반기를 들줄은 꿈에도 몰랐다.“지금 나한테 소리친 거야?”조수연이 날카롭게 외쳤다.“유혜린, 네가 임신했다고 해서 진짜 뭐라도 된 줄 아는 거야? 우리 승준이가 너 버리면 배불뚝이인 널 누가 받아주겠어!”유혜린의 얼굴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그녀는 앞에 서 있던 기사를 손짓해 불렀다.“어머님 차에 모셔다드리고 내려오지 못하게 하세요.”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는 조수연의 욕설과 분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단호하게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조수연이 아무리 버둥거려도 소용없었다.이 광경을 보고 박지연은 경악했다.‘원래 조용하고 지적인 데다 다정하고 온화한 여자가 아니었던가?’그녀는 온승준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임신까지 감수하며 불륜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어떻게 조수연에게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지?’고은서 역시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전생에서 유혜린은 온승준의 부모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덕분에 두 사람은 박지연을 점점 더 못마땅하게 여기며 매일 그녀의 트집을 잡았었다.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조수연이 고작 몇 마디 헛소리를 한 것만으로 유혜린이 이렇게 가차 없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두 분께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유혜린은 여전히 침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그녀는 조수연을 차에 가둔 일이 전혀 과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박지연 씨, 앞으로 어머님이 이런 식으로 이유 없이 당신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보장할게요.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 주실 수 있을까요?”박지연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유혜린은 배를 쓰다듬으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그래도 제 아이의 할머니인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