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 씨!”여시은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인사했다.고은서는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 씨.”“은서 씨,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여시은이 고은서한테로 다가오면서 생긋 웃으며 말했다.“혼자 왔어요?”“아니요. 친구 두 명이랑 같이 왔어요.”고은서는 채소밭이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여시은 씨는 농장 체험하러 온 건가요?”“오랜만에 만나는 아줌마 한 분이 해성에 왔는데 도시에 오래 있다 보니 시골 생활도 체험시켜 드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은서 씨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시선을 한 정자를 바라보았다.정자에는 녹색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중년 여성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부잣집 귀부인 출신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민시후 비서가 준 조사자료에 의하면 여시은이 확실히 가까이 지내는 아줌마 한 분이 있다고 했는데 여시은 어머니의 절친이라고 했지. 여시은 보러 자주 해성에 온다더니 그분인가?’그러나 상대방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탓에 고은서는 그녀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다.“은서 씨, 저한테 마침 금붕어 먹이가 있는데 같이 뿌려주지 않을래요?”여시은은 금붕어 먹이를 들고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시은을 보면서 차마 그녀가 마재경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위해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은서 씨, 저한테 할 말이 있는 거죠? 그럼 같이 먹이를 주면서 얘기 나누지 않을래요?”여시은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래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전에는 만날 기회가 없어 물어보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그녀가 대체 무슨 속셈인지 확실하게 알아볼 생각이었다.연못 옆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고 손님들이 편하게 앉으라고 둔 큰 돌덩이도 여러 개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각자 하나씩 차지해 앉았다.여시은
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손에 있던 먹이를 한꺼번에 연못에 던지고는 손을 털며 말했다.“먼저 가볼게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여시은은 멀어지는 금붕어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은서 씨, 이러고 어떻게 즐거운 시간이 돼라는 거죠?”고은서는 그제야 여시은의 연기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다.‘분명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나를 다른 사물에 비유하면서 천진한 척하기는.’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떠났다.나무다리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어느새 정자에 여재훈까지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여재훈과 중년 여성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외감이 느껴졌다.마치 어쩌다 한 번 장모님 집에 간 사위처럼 서로 웃으면서 예의를 갖추어 대화하고 있었지만 어색함은 여전한 분위기처럼 와닿았다.고은서가 여재훈에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송민준이 정원으로 걸어 들어왔다.그는 나무 다리 위에 있는 고은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은서 씨라고 부르면서 다가왔다.정자에 있던 여재훈과 중년 여성도 그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는데 고은서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중년 여성의 표정이 왠지 이상하게 바뀐 것 같았다.그러나 선글라스 때문에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은서 씨, 저랑 짜릿하고 재밌는 게임 한 번 하지 않을래요?”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귓가에서 갑자기 여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러나 고은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그녀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몸을 뒤로 젖혔다.두 사람이 서있는 나무다리는 아무런 난간이 존재하지 않았는 데다가 여시은이 갑자기 뒤로 젖히는 바람에 고은서는 그녀의 손을 뿌리칠 새도 없이 그대로 고꾸라졌다.“아악!”여시은의 비명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연못으로 떨어졌다.풍덩!커다란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사방이 튕겼다.그 찰나, 차가운 연못 물이 콧구멍과 입속으로 들어가면서
고은서는 여재훈이 말하면서 자신을 힐끔힐끔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그러나 고은서 또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 여시은이 그렇게 좋은 사람일 리가. 짜릿한 게임이라는 게 바로 이거였어?’고은서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여시은이 왜 자신을 잡고 연못에 빠지려 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여재훈의 반응을 보고서 모든 걸 깨달았다.여재훈은 여시은이 비명을 지르고서야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에게는 여시은이 자신을 잡고 떨어진 게 아니라 그녀가 여시은을 밀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고은서는 샤워 타올을 쓰고서도 밀려오는 추위 때문에 몸이 떨렸다.더 섬뜩한 건 여시은이 이토록 악랄한 사람일 줄 생각 못 했다는 것이다.‘곽현수 하나만으로도 힘겨워 죽겠는데 여재훈까지 날 해치려 한다면 절대 감당하지 못할 거야.’놀란 고은서와 달리 여시은은 아직도 방금전의 공포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여재훈의 물음을 들은 여시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고은서를 향해 돌렸다.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고은서는 그녀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어 여시은은 여재훈의 품에 얼굴을 숨기고 엉엉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재훈은 이내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고은서를 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 씨, 방금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고은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되물었다.“여 대표님, 저도 제가 왜 물에 빠졌는지 모른다고 하면 믿어주실 건가요?”고은서는 샤워 타올을 쓰고도 추위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물 범벅이 되어 있었고 머리카락도 다 젖어 얼굴에 이리저리 달라붙어 있었다. 심지어 눈초리에마저도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약간 화나면서도 이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눈빛은 또 얼마나 결연했는지 평소와 달리 아주 연약해 보였다.여재훈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오면서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여재훈은 딸을 일으켜 세우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은서 씨도 얼른 가서 옷을 갈아입어요. 감기 걸리겠어요.”여재훈과 여시은이 떠난 후 송민준은 예의를 지키며 고은서에게 물었다.“은서 씨, 괜찮아요? 제가 부축해드릴까요?”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일어섰다.여시은이 말한 대로 연못은 깊지 않았고 고은서도 제때 자구책을 취했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은서는 휴게실에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송민아와 주인혁은 이제야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은서야, 괜찮아?”송민아가 걱정하며 물었다.“나 인혁 씨랑 옥수수밭에서 옥수수 따느라 이제야 네가 물에 빠졌다는 걸 알았어.”“누나, 미안해...”주인혁도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고은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괜찮아. 그러니까 너무 속상하지 마. 그냥 연못에 빠졌던 것뿐이야. 물도 그리 깊지 않았어.”송민아는 고은서의 몸에 외상이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마음이 놓였다.“그렇게 넓은 다리에서 어쩌다가 물에 빠진 거야?”송민아가 이상해서 묻자 고은서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운이 없었던 거지. 시은 씨가 발을 헛디뎌 물어 빠지면서 나도 같이 빠졌어.”두 사람이 함께 물에 빠졌다는 말을 듣자 송민아는 더 의아해했다.“여시은 씨 균형감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다리에 물도 없는데 어떻게 미끄러져서 너까지 같이 끌어내린 거야?”“오빠도 그 자리에 있었어? 어떻게 된 건지 얘기 좀 해봐. 뭐 이상한 점 없었어?”송민아는 쭉 말이 없는 송민준에게 물었다.송민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그때 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어.”“됐어. 사고가 다 이런 거지. 이상할 게 뭐 있어.”고은서는 송민아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화제를 돌려 송민아에게 오늘 수확한 작물이 어떤지 물었다.송민아는 바로 주의를 돌려 자신이 어떤 작물을 수확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했다.“은서야, 우리 계속 여기 남아서 밥까지 먹
오늘 송민준은 평소보다 말이 적으며 가끔 멍하니 딴생각을 하기도 했다.송민아의 말을 듣고 고은서도 송민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민준 씨, 일이 너무 힘드신가요?”송민준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힘들진 않아요. 그냥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걱정이네요.”“오빠는 어떻게 종일 일 생각만 해.”송민아는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오빠, 농장 분위기가 이렇게 좋고 재미있는 활동도 얼마나 많은데 제대로 휴식 좀 하면 안 돼?”송민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송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네가 좀 더 분발해. 네가 앞가림 잘해서 내 일을 덜어주면 나도 제대로 쉴 수 있을 거야.”송민준이 ST 그룹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회사 규모가 많이 발전했지만, 송민아는 부모 밑에서 한 번도 회사 일에 대해 야망을 품어본 적이 없다.여자에게 사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송민아는 집안 사업에 손대고 싶지 않았다.오빠인 송민준은 겉으로 보기엔 다정하고 점잖아 보이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주 컸다. 그녀는 자기 눈으로 직접 자신의 사촌 형제들이 어떻게 오빠를 오만하게 대하던 데로부터 공손하게 모시는지를 보았다.그래서 송민아는 ST 그룹의 사업에 손댈 생각이 전혀 없었다.“난 회사 일에 관심 없어. 오빠, 나한테 기댈 생각하지 마.”송민아가 서둘러 말했다.“민준 씨, 먼저 일 보세요. 저와 인혁 씨가 민아 곁에 있을게요.”고은서가 나서서 얘기했다.송민준은 거절하지 않고 주인혁에게 예의상 한마디 물었다.“인혁 씨, 지난번 문제는 잘 해결되셨나요?”“네.”주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누나한테서 들었어요. 민준 씨가 저를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고마웠어요.”송민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제가 도운 게 별로 없었어요.”간단히 대화를 나눈 후 송민준은 자리를 떠나려 했고 송민아는 그를 차까지 배웅했다.“왜? 사과하는 의미로 선물이라도 사줘?”송민준은 송민아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물
송민준이 말했다.“내가 성격이 차갑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니까 은서 씨가 나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너도 계속 날 무서워했잖아.”송민아는 말문이 막혔다.송민아는 확실히 어릴 때부터 송민준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송민준은 늘 부모보다 엄격했기에 송민아는 송민준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해성에 온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가 많이 가까워졌고, 송민아도 점점 송민준을 신뢰하게 되었다.지금 송민준이 이렇게 자신을 조롱하자 송민아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오빠, 어릴 때는 내가 철이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오빠를 완전히 이해해. 걱정하지 마. 은서 쪽에는 내가 기회를 봐서 좋은 얘기 많이 해줄게. 은서가 오빠에 관한 생각을 바꾸는 날이 올 거야.”송민준은 송민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괜찮아. 너무 애쓰지 마.”...송민준을 배웅한 후 송민아는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다.이때 고은서는 나무로 만든 그네 의자에 앉아 살랑살랑 흔들거리며 싱싱한 토마토를 깨작거리고 있었다.“인혁 씨는?”송민아는 고은서의 옆에 앉아 함께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너희들이 전에 딴 채소를 부엌으로 나르고 있어.”고은서는 토마토를 먹으며 물었다.“민준 씨 갔어?”송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빠도 더 있고 싶은데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일부터 처리해야지.”“우리 오빠가 ST 그룹을 총괄하고 있어서 때때로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잘 따라주지 않아.”송민아가 덧붙였다.“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다가가기 힘들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우리 오빠도 알아 봐주는 사람이 있길 원해.”고은서는 계속 토마토를 먹으며 얘기를 들었지만 들을수록 기분이 이상했다.“민아야, 어떻게 배웅 한 번 하더니 태도가 180도 바뀌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회사에 몹시 어려운 일이 생긴 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야.”송민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답답했다. 그녀는 머리를 긁
곽승재를 보자 고은서는 미간을 찡그렸다.‘이 농장이 이렇게 유명한 장소인가? 시은에 이어 곽승재까지 만나다니.’송민아는 곽승재를 보자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그녀는 곽승재가 고은서에 대해 마음을 접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방금의 행동이 약간 마음에 걸렸다.하지만 송민아는 여전히 용기를 내어 곽승재에게 대답했다.“곽 대표님, 저의 오빠가 주견이 있는 건 오빠 일이고 오빠를 도와주는 건 제 마음이죠.”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말했다.“고 대표님은 참 인기가 많으시네요.”고은서는 멀리서 뛰어오는 여자의 모습을 힐끗 보고는 비웃는 말투로 대꾸했다.“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곽 대표님, 한참 찾았잖아요. 여기에 계셨네요.”마재경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고은서 씨가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마재경의 얼굴에는 실망과 원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은서는 곽승재를 힐끗 보며 말했다.“곽 대표님,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곽승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재경이 친근하게 그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고은서 씨, 곽 대표님은 제가 교외 나들이를 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온 거예요. 혹시 저희 일정을 수소문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신 건 아니죠?”“머리가 나쁘면 병원에 가봐요. 마침 여기에도 의사가 있어요.”송민아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우리가 여기에 온 지 반나절도 지났어요. 일부러 쫓아온 게 누군지 뻔하지 않아요?”마침 주인혁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그는 재빨리 고은서와 송민아 앞으로 다가갔다.지난번 레스토랑과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 마재경은 더 이상 고은서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그녀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애처롭게 말했다.“곽 대표님, 아무도 저를 반겨주지 않네요. 다른 곳으로 가볼까요?”곽승재는 머루처럼 검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흘겨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마재경이 만족스럽게 말했다.“곽 대
주인혁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송민아 씨, 사실 드라마 촬영할 때는 다 와이어를 사용...”“푸하하.”송민아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농담이에요. 인혁 씨는 참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요.”주인혁의 잘생긴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다.고은서는 결국 주인혁이 불쌍해 보여 나섰다.“민아야, 인혁이를 그만 좀 놀려.”송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저를 구해줬으니 그 보답으로 장난은 그만 칠게요. 저기 가서 손 좀 씻을까요?”주인혁과 송민아가 화장실에 간 동안 고은서는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여재훈의 명함을 꺼냈다.번호를 저장하자마자 카톡에 새 친구 알림이 떴다.여재훈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해 보니 풍경 사진이었다. 사진은 약간 흐릿했지만 아주 분위기 있는 꽃밭이었다.고은서는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왠지 모를 충동에 친구 추가를 눌렀다.추가 요청이 보내진 후에야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내가 병원비를 받아내려고 친구 추가를 보낸 줄 알면 어떡하지? 내 이름을 입력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를 스팸으로 생각할 수도 있잖아.’“머리가 왜 젖었어?”뒤에서 갑자기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은서는 흠칫 놀라며 핸드폰을 덮고 곽승재를 노려보았다.“같이 온 여성 친구를 내버려 두고 왜 나한테 와서 존재감을 과시해?”곽승재는 말이 없이 그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려 손을 뻗었다.고은서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경계했다.“뭐 하려는 거야?”그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손을 거두며 담담히 물었다.“머리는 왜 젖은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고은서는 옷을 갈아입을 때 잠깐 머리를 말렸지만, 앞머리 부분이 덜 말랐다. 그걸 곽승재가 눈치챌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여시은이 자신을 연못에 빠뜨린 것과 전에 고의로 손을 데운 일을 떠올리자 고은서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당신 나 좀 내버려 둬. 제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래야만 내가 평화롭게 살 수 있어.”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