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강무진이 말로 허점을 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연은 오전 수업이 끝난 후 점심 시간에 짬을 내어 연씨 집안의 어르신, 연수호 장군에게 침을 놓기로 했다.일부러 무진과 부딪히지 않을 시간을 정해서 마침내 완벽하게 피할 수 있었다.덕분에 며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그러나 연경훈과 이야기하는 건 괜찮았다.처음 봤을 때처럼 싫어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의 병세가 조금씩 호전됨에 따라 성연에 대한 인상도 달라졌기 때문이다.지금은 집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성연을 돕고 있었다.점심 때 마침 연경훈이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왔다.부친 연강휼과 모친 하지연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성연이 보이지 않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코트를 벗어 한쪽편에 툭 던진 연경훈이 넥타이 매듭을 풀며 모친에게 물었다.“고 선생은 오늘 안 오나요?”그런 그의 모습을 본 연경훈의 모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집에 오자마자 고 선생은 왜 찾아?”“편하게 묻지도 못해요?” 시큰둥하게 대꾸한 연경훈이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방에 있는 성연을 보고는 왠지 모를 안도감마저 들었다.올라온 김에 내처 방 안으로 들어간 연경훈이 물었다.“내가 도울 일이 필요해요?”연경훈의 음성을 들은 성연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지시했다.“마침 잘 왔어요. 뜨거운 물을 받아와서 수건을 적셔 줘요.”“알았어요.”연경훈이 두말없이 소매를 걷어붙인 채 욕실로 들어갔다.곧이어 수건과 뜨거운 물을 받아서 돌아왔다.수건을 건네받은 성연이 온도를 확인한 후 어르신에게 찜질을 했다.어르신의 몸에 침이 가득 꽂히고 나서야 성연은 옆에 앉아 잠시 쉬었다.매번 시침이 끝날 때면 언제나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연경훈이 성연에게 물잔과 휴지 한 장을 건넸다.휴지를 받아 땀을 닦은 성연이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옆에다 잔을 내려 놓았다.“많이 힘들어요?” 연경훈이 친절하게 물었다.“견딜만해요.” 성연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대충 대답했다.
“경훈이 어떻게 된 거지? 쟤가 저런 살뜰한 모습으로 누굴 대하는 것 본 적 있어요?” 경훈의 모친 하지연이 자스민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목소리를 낮춰 남편에게 말했다.“녀석, 얼굴에 다 드러내고 있는데 그걸 눈치 못 채겠소? 음, 분명 고 선생을 마음에 둔 것 같아.”남편 연강휼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그러나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하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 치료가 끝난 후, 성연은 오후 수업 시간에 맞추어 돌아가야 했다.경훈과 성연이 차례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하지연이 일어나며 말했다.“고 선생님, 벌써 돌아가게요? 좀 더 있다 가지 않고요?”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오후에 일이 있어서 돌아가야 해요.”일이 있다고 하니 하지연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식사 시간도 이미 지났고 말이다.그래서 성연에게 케익이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집에서 직접 만든 거예요. 주방장의 솜씨가 괜찮아요. 가지고 가서 맛 한번 봐요.”예쁘게 포장된 상자에 담긴 케익은 흐트러지지 않게 단단히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끼 식사로 넘칠 정도의 양이었다.하지연은 매번 성연에게 먹을 것들을 포장해 주었는데, 마치 성연을 먹이지 못해 한이 맺힌 듯 보일 정도였다.성연이 상자를 드니 꽤 묵직한 것이 또 얼마나 담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케익이야 뭐 그리 비싸겠는가. 어찌 되었든 주는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다만, 성연은 이 사람들을 이처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케익 상자를 든 채 어쩔 수 없이 말했다.“사모님, 다음에는 이렇게 준비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실 케익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요.”여자아이들은 모두 달콤한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하지연은 성연이 싫어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그녀의 입에서 안타까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아, 안 좋아했구나. 다음에는 다른 것을 준비하도록 할게요.”자신의 말을 아예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하지연을 보니 성연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라 다급해진 성연은 더는 말
오후에 성연이 떠난 후, 부모님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한 경훈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화가 나서 문을 쾅, 하고 닫았다.그러거나 말거나 연강휼과 하지연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우아한 모습으로 차를 마시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자신들의 아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 알았다.저 어린애 같이 팩, 하는 성질은 잠시 그대로 두면 곧 괜찮아질 터였다.눈을 감고 차를 한 모금 마시던 하지연은 진한 자스민 향에 취한 듯 탄성을 뱉었다.“아, 정말 좋다.”“마음에 들면, 다음 번에 출장 갈 때 또 사다 줄게.” 미소 띈 얼굴로 하지연을 바라보는 연강훌의 눈에 은근 다정한 빛이 넘실거렸다.진정한 사랑을 담은 눈빛이다.남편의 말에 별 대답 없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하지연은 위층으로 올라가 아들의 방문을 가볍게 노크했다.곧이어 안에서 아들의 볼멘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지금은 저를 부르지 마세요!”아들의 대답에 하지연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을 뻔했다.“너 잊었지? 오늘 무진이와 계약 체결할 게 있는 거. 무진이 지각하는 것을 제일 싫어해. 그러니 알아서 해.”무진이를 언급하자,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경훈이 튕기듯 일어나며 소리쳤다.“잠깐만요. 옷 갈아 입고 나갈게요.”경훈은 강무진을 존경하면서도 무서워했다. 그래서 때로 무진의 말이 부모인 두 사람보다 더 효과가 있었다.어릴 때의 무진은 그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고, 경훈이 늘 숭앙하던 대상이었다.나중에 무진의 부모가 죽었을 때, 경훈은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무진은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고 일어섰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진심으로 탄복한 경훈은 기꺼이 아우가 되어 무진을 따르고자 했다.그래서 매번 무진이 올 때면 최대한 예를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훈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하지연이 아들의 옷 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잊지 않고 당부했다.“우리가 강씨 집안과 관계가 좋긴 하지만 너도 열심히 해야 해. 무진이에게 폐 끼치지 말고, 알았지?”“당연
성연은 반 달 동안 계속해서 연수호 어르신을 치료하였다.어르신의 병세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호전되었으며, 체내에 남은 독도 거의 사라졌다.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걸을 수도 있었다.비록 좀 느리긴 하지만, 이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부지런히 단련하기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 터였다.어르신의 변화를 연씨 일가족 모두 눈으로 확인하며, 성연의 능력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그전에 많은 의사들을 만나봤던 연씨 가족은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전설 같은 실력을 가진 의사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제자가 이런 실력을 가졌다면, 그 스승은 말해 무엇하랴.하지연이 시아버지 연수호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었다.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던 연수호가 말했다.“얘야, 정말 고맙구나.”원래 연수호는 남은 생을 침대에 누워 고통 속에 지낼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그런데 자신을 수렁에서 끌어올릴 사람이 있을 줄이야.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의 성연은 대답이 없었다.잠시 후, 어르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얘야, 우리 연씨 집안이 너에게 큰 신세를 졌다. 앞으로 언제든 네가 찾아오면 우리 집안은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연씨 집안의 최고 어른인 연수호의 한 마디는 천금과도 같았다. 군인이었던 연수호의 말은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연수호의 입에서 나온 약속은 성연이 감당기에는 너무 무거웠다.처음 왔을 때에도 어르신이 이와 비슷한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르신이 정말 신세를 졌다는 생각이 드시면 다음에 사부님께 돌려 드리면 됩니다.”연씨 집안의 보은은 솔직히 말해서 성연의 입장에서는 별 필요가 없는 것이다.요 며칠 이곳에 왔지만, 가족 모두가 자신에게 잘해 주었다.그러나 어르신의 치료가 끝나면 자신과 연씨 집안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잘 알았다.어찌 되었든 자신은 가면을 쓴 것이다.맨 처음 왔을 때부터 연씨 집과는 스치고 지나가는 인연으로 정해져
이날, 성연은 평소대로 연수호에게 침을 놓으러 연씨 저택에 가기 위해 교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교문에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저지당한 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바로 교무주임 선생님이 교문 앞을 지키고 선 까닭이었다.눈살을 찡그린 성연이 주변에 있던 한 학생의 옷을 잡아당기며 물었다.“무슨 일이니?”성연에게 옷을 잡힌 남학생은 성연의 얼굴을 보고는 흡, 하고 숨을 들이키더니 이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대답했다.“최, 최근에 교무주임 샘이 학생행동 규정을 담당하면서 한동안 점심 시간에 외출을 할 수 없게 됐어.”“그래? 고마워.” 성연이 머리가 아픈 듯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왠지 매우 초조해 보이는 성연의 모습을 본 남학생이 몰래 흘깃거리며 말했다.“너, 너 나가려면 선생님에게 결석계 써달라고 하면 돼.”“아니, 됐어. 고마워.” 성연이 손을 흔들며 교실로 돌아왔다.자신이 정말 나가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심지어 담을 넘을 수도 있고.하지만 성연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다른 사람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녀였지만, 선생님들에게 심어진 이미지가 이제야 간신히 조금씩 바뀌고 있는 있는 참이라 조용히 있기로 했다.연씨 저택에 가는 일도 서두를 필요 없었고.그래서 성연은 어르신 위한 치료시간을 다시 저녁으로 바꾸었다.오후 늦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성연은 연씨 저택으로 쫓아갔다.그런데 집사가 아니라 하지연이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성연의 눈에 놀란 빛이 들어찼다.“사모님…….”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하지연이 성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고 선생이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어요.”서로 카톡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지만, 평소 하지연은 성연을 귀찮게 해서 싫어할까 봐 일절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순간 성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하지연의 말을 들은 성연은 마음이 복잡했다. 연씨 가족이 진심으로 자신을 이 집의 일원처럼 대하고 있는 듯해서.이들의 과분한 애정이 놀랍고 고마우면서도 연씨 집안 사람들과 너무
돌아가려는 성연을 경훈이 배웅하겠다고 적극 나섰다.성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 오고 간 지 그렇게 오래 되었건만 경훈이 배웅하겠다고 나선 적은 처음이었다. 오늘 갑자기 배웅하겠다는 게 꼭 까닭 없이 잘 보이려 하는 느낌이 다.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데리러 오는 차가 있어요.”경훈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경훈은 다소 실망했지만 또 예상했던 대답이었다.그가 배웅하겠다고 하면 성연이 분명 거절할 거라고 짐작했었다.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고 농담했다.“정말 기회는 일도 주지 않네요.”성연은 경훈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다른 방향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양팔을 겹쳐 두른 성연이 입을 삐죽거렸다.“기회를 왜 줘요? 나에게 구애하는 것도 아니고?”경훈이 떠보듯이 성연을 힐끔 쳐다보았다.“만약 그렇다면요?”눈을 동그랗게 뜬 성연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어쨌든 연씨 집안 가족들이 모두 있는 자리였다. 평소 경훈 좀 철없이 굴기는 하지만 이런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게다가 성연은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으로 해서 정말 평범 그 자체의 모습이다. 예쁘다고는 전혀 할 수 없는, 기껏해야 순수해 보인다는 정도인데.평소 상류층 모임에서 숱한 미녀들을 보았을 경훈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성연은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설마 미녀들만 보다 지겨워진 경훈이 자신의 평범하고 순수해 보이는 모습에 흥미를 느낀 것은 아니겠지?이런 생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아직 무슨 말로 대꾸해야 할 지 결정하지 못했을 때, 현관 입구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성연과 경훈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보았다.현관 입구에 선 강무진이 눈에 들어왔다.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무진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성연은 알아챘다.무진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도 모른다.이때 성연은 속으로 희망을 품었다.왠지
저녁에 무진이 집에 돌아오니, 성연은 이미 소파에 틀어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연씨 어르신의 병세는 이미 많이 호전되어 성연의 침 치료 시간도 점차 단축되었다. 그래서 무진이 왔을 때 성연의 치료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그리고 딱 그 장면에서 무진과 맞닥뜨렸던 것이다.그 당시 장면을 생각하니 어떤 태도로 무진을 대해야 할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그러나 무진이 들어오는 걸 보고도 성연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게임만 했다.성연의 옆에 말도 없이 앉아 있는 무진은 성연의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리려는 것 같았다.하지만 심리적 압박감이 배가 된 성연은 마음 놓고 계속 게임을 할 수가 없었다.얼른 하던 스테이지를 마무리한 성연이 고개를 돌려 무진을 보았다.“나에게 할 말이 있어요?”게임 화면을 힐끗 본 무진은 ‘게임 종료’라는 글자가 위에 떠 있는 게 보이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동아리 활동이 왜 그렇게 많아? 너희 동아리에 무슨 공연이 필요하다고?”타이밍이 정말 절묘했다.특히 연씨 집안에서 치료하는 고 선생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앞에 선 사람이 송성연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비록 얼굴을 바꾸긴 했지만, 성연이라는 생각이 집요하게 드는 것이다.성연도 알아차렸다. 무진이 의심하기 시작한 이상, 개교기념일이 더 이상 최선의 핑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하지만 성연은 이 또한 이미 대책을 세워 놓았다.성연이 느릿느릿하게 대답했다.“그건 아니지만, 떠들썩한 분위기에 함께 하는 거예요. 무진 씨도 알다시피, 시골의 예전 학교에는 개교기념일 같은 게 없었어요. 처음 경험하는 거라 그런지 좀 신기해요.”“이제 많이 참석해서 이미 질릴 때도 되지 않았어? 넌 공연에 참가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 리허설을 보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성연의 핑계는 꽤 합리적으로 들리긴 한다.그러나 성연에게 놓고 보자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느껴졌다.‘성연은 이런 데 관심 있는 것 같지 않아.’‘게다가 그저 옆에서 어울리
이튿날, 앞으로 무진이 자신을 데리러 올까 걱정한 성연은 점심 시간에 아이디어 하나를 생각해냈다.전날은 모범학생이 되어 보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결국 다음 날 스스로 체면을 구긴 셈이 되었다. 계획에 변수가 생겼던 탓이다.성연은 집사를 따라 연씨 저택의 거실로 들어갔다.거실에서 연강휼, 하지연과 함께 대화 중인 무진을 본 성연은 일순 정신이 멍해지며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성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강무진, 오늘 고의로 온 거지?’시간을 조정하고 또 조정해서 맞닥뜨리지 않을 시간을 간신히 찾았건만, 어떻게 지금 이 시간에 이 사람과 부딪힐 수 있단 말인가?성연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소파에 앉아 있던 하지연이 먼저 성연을 보고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넸다.“고 선생님, 왔어요?”성연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했다.무진을 보는 순간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곧바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그리고 바로 별다른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가 어르신에게 침을 놓았다.오늘 성연의 동작은 눈에 띄게 빨랐다.무진이 이곳에 등장하리라는 의외의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에 성연은 진짜 당황하고 말았다.침 치료를 끝낸 성연이 땀을 닦으며 하지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죄송하지만 사모님, 저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막 주방에서 성연에게 줄 간식을 준비할 생각이었던 하지연은 이미 시간 계산을 했었다. 치료가 끝나면 성연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간식 준비가 얼추 끝날 터였다.그런데 오늘 성연이 이렇게 급하게 돌아갈 줄은 몰랐다.“힘들게 왔는데 잠시 앉아요. 주방에서 간식거리를 준비하고 있어요.” 하지연이 성연을 만류했다.“아니에요, 사모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만 돌아가야 해요.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해요.” 무진이 봤는지는 모르겠다.다만 여기 계속 머무른다면 머지않아 무진에게 들키고 말 거라는 걸 짐작할 뿐이다.“남도 아니고 무슨 그런 말을 해? 좀 더 있어요.” 하지연이 다정하게 권했다.아마도 평소라
‘그런 예민주가 이렇게 몰락할 줄 누가 알았겠어?’‘결국 5년 동안이나 무진 씨 애인 노릇에 만족해 있었다니!’‘심지어는 오늘 같은 이런 악랄한 짓까지 저지를 정도가 되었으니. 스승님이 아시면 얼마나 섭섭하시겠어.’“송성연, 너 지금 미쳤어! 완전히 미쳤어!”예민주가 언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을까? 연거푸 따귀를 맞은 데다가, 지금은 또 성연의 냉소와 신랄한 조롱을 들어야 했다.큰 소리로 호통을 치는 예민주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원래의 정돈된 헤어 스타일과 잘 차려 입은 옷차림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온몸에 지금 낭패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회의실. 두 시간의 긴 회의가 마침내 끝났다. 무진이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당황한 표정의 손건호가 휴대전화를 들고 다가왔다.무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평소라면 손건호가 절대 이렇게 침착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텐데...’“보스, 예민주 씨가 맞았습니다!”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손건호가 급히 보고했다.“뭐라고?” 무진이 되물었다.“보스, 빨리 사무실로 가 보십시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방금 회의가 끝나갈 때, 손건호는 자료를 찾으러 먼저 회의실에서 나왔다.뜻밖에도 부리나케 달려온 비서실의 비서가 이 일을 알려주었다.무진의 눈동자가 어두워지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아무도 막지 않았어?”무진이 왜 아무도 막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손건호도 대답하기가 곤란했다.‘막고 싶어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지요!’ ‘대표실은 원래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게다가 사모님(!)이 갑자기 뛰어들어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대비도 하지 못했어요.’‘안에서 예민주의 비명 소리가 들려서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안에서 문을 잠궜기에 들어갈 수도 없었어요!’그러나 결국 손건호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표실 앞으로 다가간 무진의 귀에 울음 소리와 함께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리게 되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아이의 몸에 난 상처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그리고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성연은 범인이 바로 예민주라고 생각했다.‘방금 전에도 애들 앞에서 그렇게 헛소리를 지껄였어. 눈앞에 두 아이만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지.’‘그런 여자가 뭘 못하겠어?’‘이 순하기만 한 두 녀석은 엉뚱한 짓을 한 적이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어.’‘충분히 사랑을 받았지만, 그걸 믿고 교만했던 적은 없었어.’‘밖에서는 더 영리하고 깜찍해서 누구나 좋아해. 척 봐도 좋아할 수밖에 없어.’‘그런데 여기에 와서 온몸에 멍이 들다니!’성연의 가슴에서 다시 분노가 폭발했다.딸아이를 가볍게 내려 놓은 성연은,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사무를 보면서 말했다.“동생을 잘 보고 있어. 너희가 당한 억울한 일을 엄마는 절대 그냥 넘기지 않을 거야!”“엄마, 저 아줌마는 나쁜 사람이야! 엄마가 반드시 혼내줘!”여전히 품에 안긴 채, 사진은 재빨리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두 눈에 가득한 억울함을 지금 열심히 엄마에게 표현하려고 했다.“걱정 마. 엄마가 저 여자를 혼내줄게!”바로 일어선 성연이 성큼성큼 예민주 쪽으로 걸어갔다.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예민주는 성연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서한기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쳤지만, 예민주가 어떻게 훈련으로 단련된 남자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놔! 너희들 뭐 하려는 거야?”예민주의 눈빛에는 걱정과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불안한 마음에 가슴은 두근거리면서 발걸음마저 비틀거렸다.짝! 짝!“이건 네게 주는 교훈이자 경고야. 내 아이는 절대 네가 건드릴 수 없어!”“네가 뭔데? 무진 씨 옆에 이미 5년이나 있었지만, 아직도 내 자리를 대신하지 못했지.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겠어!”“이건 첫 번째이자 마지막 경고야! 아이들은 바로 내 마지노선이야. 네가 또 손을 대면 절대 지금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성연은 목소리는 마치 서릿발 같았다. 온몸에서 뿜어내는 싸늘한 기운에 무더운 날씨조차 얼음 세상으로 변하는 듯했
“오빠, 아빠가 정말, 정말로 우리를 안 받아들일까? 우리가 방금 아빠를 찾았는데.”작은 얼굴에 슬픔을 가득 담은 채, 사진은 간절한 시선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예민주는 지금 자신의 말을 자화자찬하며 한껏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팔짱을 낀 채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승자의 기운이 가득했다.잠시 후 자신에게 벌어질 참상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겠지만...대표 집무실 바깥.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성연은 결연한 눈빛으로 대표실을 향해 다가갔다.쾅-단숨에 집무실 문 앞에 선 성연은 아무런 노크도 없이 바로 방문을 열었다.“너 이 새끼, 정말...”아이 앞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예민주의 말이 성연의 귀에 몹시 거슬렸다.“예민주, 뭐 하는 거야!”자신의 아이들이 눈물 자국이 가득한 채 구석에서 서로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 엄마의 본능이 단숨에 뿜어져 나왔다.“내 애들에게 무슨 짓을 했어!”단숨에 앞으로 나아간 성연은 두 손으로 예민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한 손으로 멱살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바로 예민주의 따귀를 때렸다.“네가 뭔데 내 아이를 혼을 내? 너는 그럴 자격이 없어!”성연의 차가운 눈빛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온몸의 분노가 곧 폭발할 듯이!잇달아 따귀를 때렸지만 때리는 소리는 오히려 점점 더 커져갔다.“엄마!” 성연이 다시 손을 들고 예민주의 뺨을 때리려고 할 때, 문득 익숙한 여린 목소리가 들렸다.순간 성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잠시 멈칫하던 성연은 계속 두드려 맞느라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예민주를 밀쳐낸 뒤 딸아이를 품에 안았다.“아가, 엄마가 늦게 와서 미안해.”성연은 두 손으로 사진을 꼭 껴안은 채 자책했다. 지금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방금 전 예민주를 때릴 때의 그 무시무시한 기세도 모두 사라졌다.슬퍼하는 성연을 보면서, 사무는 두 주먹을 꼭 쥔 채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그러나 엄마가 온 뒤에는 그래도 많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자신이 든든한 후원자가 있기에.성연이
사진은 눈앞의 이 여자가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고,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 예민주의 말은 걸러서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역시 어린아이였다.“오빠, 우리 아빠가 정말 우리를 이렇게 싫어해?”눈물이 그렁그렁한 여동생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당신은 어른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어린아이와 말다툼을 하는 겁니까? 당신이 뭔데, 여기서 우리 아버지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는 겁니까?”지금 예민주 때문에 완전히 분통이 터진 사무는, 온몸에 철갑을 두른 듯한 기세로 똑바로 예민주를 노려보았다.사무의 눈빛에 대해서 예민주는 처음부터 아주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매번 저 자식의 눈을 볼 때마다, 정말 무진 오빠의 눈빛과 너무나도 닮았어. 무진 오빠하고 그야말로 판박이야.’사무가 거기에 서 있을 때는 그야말로 무진의 축소판이었다. 무진의 모습뿐만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에도 성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몇 번 사무 저 새끼와 눈이 마주쳤을 때도 정말 아이러니했어.’‘처음 만났을 때 빨리 도망칠 걸. 정말 후회가 되네.’‘5년 전에 분명히 전혀 상관이 없는 사이가 됐는데, 왜 두 사람 사이에 애가 있는 거야?’‘송성연은 왜 이 두 아이를 낳았지? 무진 씨에게 이미 버림받았는데, 해외에서 편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아?’‘그 여자의 능력이라면 낯선 나라에서도 여전히 잘 지낼 수 있어.’‘왜 운성시에 미련이 남은 거야?’“나를 보지 말고 고개를 돌려!” 결국 예민주는 참을 수가 없었다.사무는 아직 그런 내막을 잘 몰랐기 때문에 여전히 분노한 상태였다.“내 여동생에게 사과하세요!”“이 새끼, 너 지금 나한테 농담하는 거야?”예민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사무를 조롱했다.“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생아 주제에, 아직도 여기서 나한테 이렇게 날뛰다니!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것 아니야?”“이 못된 아줌마!”사진은 지금 지쳤지만 이 여자와 오빠가 이렇게 싸우는 소리를 듣자,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따라서 외쳤다.
예민주는 곧바로 기분이 나빠졌다.원래 길을 잃은 두 아이가 펑펑 울게 만든 다음에, 무진에게 아이들이 그다지 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었다.그러나 예상 외로 아이들은 영리한 데다가 일찌감치 철도 들었다. 졸지도 떠들지도 않은 데다가 얌전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 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무진은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점심 휴식 시간이 제한적이었다.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여기에 좀 더 머물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예민주도 아직 좋은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두 아이가 이렇게 영리한 핑계를 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들 부자 세 사람만 지낼 기회를 절대 줄 수가 없었기에.결국 세 사람이 대표 집무실에 함께 있게 되었다.“어떻게 된 거야? 이건 그렇게 둘러댈 일이 아니야.”“너 계속 큰소리로 말하지 마! 이렇게 시끄러운 것도 몰라?”이제 세 사람은 이미 오후 내내 함께 있게 되었다. 특히 지금 무진은 회의를 하러 갔기에, 대표실에는 그들 세 사람밖에 없었다. 예민주는 이미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나른한 자태로 소파에 기댄 예민주의 얼굴에는 온통 경멸하는 표정만 가득했다.집에서도 이렇게 엄하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사진은 정말 억울해서 입을 열었다가 다시 예민주에게 말려들곤 했다.사진이 낮은 소리로 울먹이면서 말했다.“그런데 아줌마, 우리는 그냥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예민주는 이제 숨기지 않고 냉담한 목소리로 바로 호통을 쳤다. “조용히 해! 아무도 너희들 응석을 받아주지 않아!”예민주의 말투는 아주 야박해서 두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전혀 꺼리지 않았다.역시나 예민주의 말이 막 떨어지자, 사진은 이미 엉엉 울기 시작했다.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초롱초롱한 사진의 두 눈은 지금 완전히 눈물에 젖은 가련한 모습이었다.사무는 평소 집에서는 여동생을 싫어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사실은 몹시 마음이 아팠다.한 손으로 여동생을 가볍게 안고 달래면서 말했다.“괜찮아, 괜찮아. 좀 있다가 아
“예민주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 성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었다. 예민주의 모습을 떠올리자, 한바탕 구역질이 났다.클래식한 파텍필립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서, 다음 순간 성연은 이미 성큼성큼 방문을 나섰다.“빨리 안 따라오고 뭐 해!” 문 앞에 도착한 성연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서한기를 보면서 소리쳤다.10여 분 후, WS그룹 1층.두 손으로 운전대를 꼭 잡은 채, 성연은 아주 멋진 드리프트 솜씨로 차를 건물 입구에 세웠다.주차 도우미 직원과는 불과 1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만 남았기에, 직원은 이미 쓰러질 지경이었다.“무즌 주차를 이렇게 해요?” 이렇게 거친 주차 방식을 보자, 직원은 마음속으로 화가 났다.무의식적으로 차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한바탕 퍼부으려고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운전석의 차문이 열리고 성연이 차에서 내렸다.자신에게 다가온 직원의 눈길을 마주하고서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한바탕 퍼부으려던 직원은 성연의 깊은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말문이 막혔다.“차는 주차장으로 옮기지 말고 여기에 그래도 놔 둬요!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 차가 다른 곳에 있다면, 당신은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겁니다!”“하지만 아가씨, 이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성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거리낌 없이 말했다.“나를 믿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말이 끝나자, 성연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갔다. 마치 뒤에 천군만마가 있는 것처럼 당당하고 기세 등등한 걸음걸이였다.성연의 곁에는 아무도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1층의 안내 데스크.“대표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데스크의 여직원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기에, 방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한눈에 볼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억누른 채 최선을 다해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약속을 하셨습니까?”성연은 입술을 오므린 채 가볍게 웃었다.“대표님은 어디 계세요?”“죄송합니다만, 대표
‘그 여자는 분명히 그 다른 쪽이라고 했어. 즉, 그 여자가 알려준 건 잘못된 방향이었어.’‘만약 그 여자가 방향을 몰랐다면, 위치를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그 여자는 그렇게 자신있게 위치를 말했어.’‘그건 자신이 있다는 말이야!’이렇게 생각하자, 예민주에 대한 사무의 인상은 더욱 좋지 않았다.다음 순간, 턱을 살짝 든 사무가 두 여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제 여동생이 아직 저쪽에 있어요. 잠깐만요, 제가 가서 여동생을 데리고 올게요.”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듣자 좀 놀랐지만, 소년이 돌아서는 걸 보자 그제서야 비로소 대답했다.“아, 여동생! 그래, 그래.”화장실에 간 후, 사무와 사진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못된 여자가 혹시 함정이라도 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기에.하지만 아버지가 아직 거기에 있다는 걸 떠올리자,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한다는 첫 교훈도 얻게 되었다. 이 놀이는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한편 다른 한쪽. 시재 백화점에 갔다가 별장으로 돌아온 성연은 양 손에 큰 봉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온갖 장난감이 가득했다.이것들은 모두 성연이 업무를 마친 뒤에 특별히 아이들을 위해 고른 장난감이다. ‘요 며칠 동안 정말 너무 바빴어. 집에 돌아오면 이미 늦은 밤이거나, 좀 일찍 집에 돌아와도 저녁을 먹고 다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성연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빚을 진 듯한 느낌이었다.집을 열자 거실은 조용했다. 위층에서도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우리 사진이, 사무? 엄마가 돌아왔어!”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성연이 말했지만, 아이들의 열정적인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사진아? 사무야? 너희들 집에 있니?”“사무야?”아래층에서 계속 몇 번이나 소리쳐도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 큰 집에 성연 자신의 목소리만 울릴 뿐.“보스, 아이들은 지금 집에 없습니다.”이때 서한기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집에 없다니?” 성연이 눈썹을 바짝 세웠다. 순간 마음속에
“그 여자는 이전에 엄마하고 알고 지냈던 것 같아. 다만 아직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르겠어.”“그럼 이따가 우리 어떡하지?” 사진이 약간 지친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오전 내내 이곳을 왔다갔다했으니 아이에게는 에너지 소모가 컸다.그리고 방금 위층으로 올라갈 때, 아이들은 여전히 아주 자신있게 서한기보고 먼저 가라고 했다. 그때는 자신감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후회막심’이다.‘지금 아직 한기 아저씨가 있다면. 바로 집에 가서 편하게 누워서 쉴 텐데.’“일단은 우리 계획대로 그 여자한테 엄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온 건 그 여자하고 상관이 없어.”원래 신중한 사무지만, 지금 사무의 말은 오빠라는 사무의 입장과 아주 딱 맞게 진지했다.두 아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전에 화장실에 가겠다고 한 건 핑계였지만, 막상 바깥에 나오자 화장실에 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한참을 가도 식당 창문이나 작은 방은 곳곳에 있는데, 예민주가 말한 화장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 여자가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지?”억울한 듯이 분홍색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사진은 움직이기도 귀찮았다.여동생의 이런 모습을 보자, 사무는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반짝이며 한 바퀴 둘러보았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딴 데 가지 말고. 알았지?”말을 마친 사무는 왔던 길을 다시 달려갔다.“오늘 가지는 좀 맛이 없어.”“그래도 괜찮은데. 먹기 싫으면 나한테 줘.”사무는 식사 중이던 두 아가씨의 앞으로 갔다.“누나, 실례합니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에 있어요?”목소리는 여리지만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밥을 먹고 있던 두 아가씨는 그 말을 듣자 먹던 동작을 멈췄다. 사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눈빛을 반짝였다.‘어디서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온 거야?’ ‘뚜렷한 이목구비에 심플한 검은색 스웨터만 입었는데도 잘 어울리는 걸.’‘얼굴의 통통한 젖살이 큐티 작살인데!’‘그야말로 너무나 귀여운 아이야!’사무는
두 아이를 보면서 예민주는 더욱 초조했다.마음속에 잘 기억해 놓은 뒤, 예민주의 노기는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다시 아이들을 바라볼 때는 이미 이전의 온화한 모습을 회복했다.“사진아, 너희들은 이전에 외국에서 잘 살았다면서? 그런데 왜 갑자기 귀국한 거야?”마치 큰 언니가 아이들을 배려하는 듯 예민주는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지금 두 아이는 이미 이 여자의 목적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엄마의 집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엄마가 한번 가보자고 해서 돌아왔어요.”목소리는 아직 어린 티가 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해맑은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하는 사진의 대답은 가히 ‘예술의 경지’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아까까지만 해도 술술 잘 말하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빈틈이 없어진 거야?’예민주는 기분이 좀 꿀꿀했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이번에 돌아와서 낯선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니? 너희들이 오늘 이곳에 와서 아빠를 찾는 것 같은데, 누가 너희들에게 뭔가 말한 거 아니야?”예민주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계속 집요하게 물었다. 무진이 자신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진에게 등을 진 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사진은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눈썹을 찌푸린 채 예민주를 쳐다보았다.“아줌마, 우리하고 함께 여기서 논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계속 그런 거만 물어봐요?”“맞다. 아줌마, 우리 엄마 알지요? 우리 엄마한테 지금 데리러 오라고 하면 안 돼요?” “오늘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을 엄마가 꼭 혼내 주게요!”“맞아요, 맞아요! 누가 우리를 괴롭힌 걸 알면, 엄마가 반드시 호되게 혼을 내줄 거예요.”두 아이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한 마디씩 하는데, 호흡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예민주는 표정이 붉어졌다는 것도, 심지어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이 두 녀석의 말을 들으니, 송성연이 이 두 녀석을 아주 진지하게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