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이도현은 병부 앞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안후부는 여전히 있었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텅 빈 그곳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는 주루로 가서 별실 하나를 잡고 홀로 앉아 술을 마셨다.술맛은 별다를 것이 없고 밋밋해서, 몇 잔을 마셔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막 자리를 뜨려는데 아래층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이도현은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래층을 지나가고 있었고, 맨 앞에는 박시헌이 있었다.박시헌은 남색 장포를 입고 허리에는 옥대를 두르고 있었다. 안색은 좋아 보였고 삼 년 전보다 살이 조금 올라 있었다. 그의 곁에는 윤서하가 걷고 있었다.윤서하는 연자주빛 의복을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백옥 비녀 하나를 꽂고 있었다. 배는 살짝 불러 있었고 걸음도 느렸으며, 한 손은 박시헌의 팔에 얹고 있었다.박시헌은 한 걸음 걷고 한 번 멈춰 서서 윤서하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걸었고, 서두르지도 조급해하지도 않았다.윤서하가 고개를 돌려 박시헌에게 무언가 말하자, 박시헌은 고개를 숙여 끝까지 듣고는 웃으며 손을 뻗어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한 가닥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윤서하도 웃었다.이도현은 창가에 서서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아주 오래전, 윤서하가 자신에게도 그렇게 웃어 주었던 때가 떠올랐다.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성루 위에서, 자신의 병상 앞에서.아래층의 소란은 점점 멀어졌다. 박시헌과 윤서하는 옆 골목으로 들어갔고 이내 보이지 않았다.이도현은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손에 든 술잔을 한참 동안 움켜쥔 채, 술이 쏟아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이도현은 다시 자리에 앉아 술을 더 가져오라 일렀다.이번에 가져온 술은 제법 독해 목을 따갑게 훑고 내려갔다.이도현은 혀가 얼얼해지고 눈앞이 흐릿해질 때까지 한 잔, 또 한 잔 연거푸 마셨다.몽롱한 가운데, 자신도 그 골목에 서 있는 듯했다. 곁에는 누군가 함께 걷고 있었다.연자주빛 의복을 입고
양주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이도현은 이곳에서 삼 년을 보냈다.삼 년 전, 성지를 받은 그는 경성을 떠나 서쪽으로 꼬박 사십 일을 갔다.양주에 도착한 날도 겨울이었다. 모래바람이 온 하늘을 뒤덮었고, 입안에는 온통 흙냄새가 맴돌았다.그는 성 서쪽의 위소에 배치되었다.그에게 주어진 것은 흙벽돌로 지은 방 한 칸과 나무 침상 하나, 얇은 이불 한 채, 화로 하나가 전부였다.화로에 넣는 숯은 질이 나빠 불을 피우면 연기가 피어올랐고, 매캐한 연기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그렇게 삼 년이 흘렀다.낮에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밤에는 성을 순찰했다.하루하루 똑같은 나날이 이어졌다.양주의 성벽을 셀 수 없이 많이 걸었다.동쪽에서 서쪽까지 천삼백 보, 서쪽에서 동쪽까지도 천삼백 보였다.이제는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어느 벽돌이 헐거워졌는지, 어느 성가퀴가 무너졌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단 하루도 경성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윤서하를 생각했다.윤서하가 몹시 생각나는 날이면 순찰을 나가지 않고 흙벽돌집 안에 앉아 누런 흙벽만 바라보며 홀로 멍하니 있곤 했다.지난날을 떠올렸다.윤서하가 여덟 살이던 해, 처음으로 영안후부에 왔다.머리를 양쪽으로 동그랗게 묶고 연한 황색 치마를 입은 채 문 앞에 서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었다.이도현의 어머니가 몸을 낮춰 윤서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얘가 도현이란다. 앞으로 둘이 함께 놀거라."윤서하는 고개를 들어 이도현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도현 오라버니."윤서하가 아홉 살 생일을 맞았을 때, 이도현은 붓 한 자루를 선물했다.은전 두 닢을 주고 산 것이었다.붓을 받은 윤서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나중에 다은에게 들으니 윤서하는 그 붓을 몇 년이나 썼고, 붓대가 갈라지고 나서도 천으로 감아 계속 썼다고 했다.윤서하가 열 살이던 해 여름, 두 사람은 윤씨 집안 후원의 대추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윤서하는 이도현의 어깨에 기대 잠이
바람이 귓가를 세차게 스쳐 지나갔다.머리에 쓴 봉관이 바람에 비뚤어졌고, 흩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혼례복의 치맛자락도 바람에 날려 온통 붉게 나부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말은 영안후부 후문 앞에 멈춰 섰다.윤서하는 뜰에 서서 그 물독으로 시선을 옮겼다.물독에는 물이 절반쯤 차 있었고, 수면에는 마른 잎 몇 장이 떠 있었다.그날 밤이 떠올랐다. 바로 이 물독에 강제로 머리를 처박혔었다.한 번, 또 한 번 머리가 물속으로 눌려 들어갔고, 물을 잔뜩 들이마셨다.이도현도 그 물독을 보았다.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윤서하를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뒤, 와락 끌어안았다.아주 세게 끌어안았다.윤서하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닿아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쿵쿵쿵쿵.빠르고 어지럽게 뛰고 있었다."윤서하."이도현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먹먹하게 울렸다."저 사람과 혼인하지 마라."윤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안다. 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저 사람과 혼인하지 마라. 나와 혼인해라. 나를 미워해도 좋고, 내게 복수해도 좋다.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러니 가지 마라."윤서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도현은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온몸을 떨었다.그의 눈물에 어깨를 덮은 혼례복이 조금 젖어 서늘해졌다."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그의 목소리는 먹먹했다."서린이가 죽지 않았으면 했다. 어머니도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네가 아직 열네 살의 윤서하였으면 했다. 복숭아나무 아래 서서 내게 예쁘냐고 묻던 그때의 너였으면 했다. 나도 열일곱 살의 이도현으로 돌아가, 네게 좋다고 대답하고 싶었다."그의 눈물이 더욱 거세게 흘러내렸다."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무 일도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 다시 시
4팔월 초아흐레, 혼인하기 좋은 길일이었다.소부에는 등불과 비단 장식이 화려하게 내걸렸다.붉은 비단이 대문 위에서 정청까지 길게 이어졌고, 회랑 아래에는 새빨간 등롱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뜰에는 붉은 융단이 깔렸고, 계화 향기가 가을바람에 실려 소부 곳곳에 퍼졌다.하객은 많지 않았다. 박정환이 두 사람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쉽지 않았으니 조용히 치르고 크게 벌일 필요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윤서하는 동경 앞에 앉아 있었고, 다은이 뒤에서 머리를 빗겨 주었다."첫 빗질은 머리끝까지, 두 번째 빗질은 백발이 될 때까지 해로하고, 세 번째 빗질은 자손이 가득하기를."다은은 말을 읊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쉬었고 눈시울도 붉어졌지만, 손만큼은 흔들리지 않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아가씨,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윤서하는 동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봉관하피를 갖추고 있었고, 새빨간 혼례복에는 금실로 원앙이 수놓아져 있었다. 깃과 소맷부리에는 진주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박시헌이 사람을 시켜 보름 동안 서둘러 만든 옷이었다.한 번 입어 보았을 때 허리 품이 조금 커서 한 차례 고쳤고, 지금은 몸에 꼭 맞았다.윤서하는 고개를 숙여 허리에 찬 백옥을 어루만졌다.옥패를 찾아낸 것이었다.박시헌은 물에 능한 호위 십여 명을 보내 이틀 동안 호수 바닥을 샅샅이 더듬게 했다. 마지막에는 젊은 호위 하나가 진흙 속에서 옥패를 찾아냈다.윤서하의 손에 돌아왔을 때도 옥패에서는 호수 바닥의 진흙 냄새가 났다. 윤서하는 그것을 깨끗이 씻어 손수건에 싼 뒤 가슴에 품고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 날부터는 허리에 차고 다녔다.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문 앞에는 새빨간 혼례복을 입고 가슴에 붉은 비단꽃을 단 박시헌이 서 있었다.평소 희푸른 색이나 옅은 청색 계열의 수수한 옷을 즐겨 입던 그가 온통 붉은 옷을 차려입으니, 오히려 옥처럼 빛나는 얼굴이 더욱 돋보였고 눈썹과 눈매에는 평소보다 한층 늠름한 기운이 더해졌다.박시헌은 윤서하를 보자 한참 동안
이도현은 박씨 저택에서 사흘을 머물렀다.사흘째 되던 날, 이도현은 겨우 침상에서 내려와 벽을 짚고 한 걸음씩 천천히 뜰로 나갔다.무릎의 상처는 이제 막 딱지가 앉은 터라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상처가 당겨 아팠다.윤서하의 방문 앞까지 간 그는 잠시 서 있다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윤서하는 창가에 앉아 책을 들고 있다가 이도현을 한 번 바라보았다. 시선은 잠시 그의 무릎에 머물렀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향했다."무슨 일입니까?""부인께 향을 올리고 싶습니다."윤서하는 책을 내려놓고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그러세요."성 서쪽 작은 산비탈, 김씨의 묘 앞.윤서하는 쪼그려 앉아 가져온 계화떡을 비석 앞에 놓았다.이어 향 세 대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다.푸른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다가 바람에 흩어졌다.이도현은 뒤에 서서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윤서하는 잠시 그렇게 있다가 일어나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향을 올리러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이도현은 비석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부인."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쉬어 있었다."죄송합니다."윤서하는 곁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았다."저희 어머니께 무엇이 죄송하십니까?"이도현은 고개를 숙였다."돌아가신 줄 몰랐다. 채원이가 독을 탄 것도, 그날이 장례를 치르는 날인 것도 몰랐다."윤서하는 아무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렇게 무릎을 꿇고 계신다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이도현은 고개를 들어 윤서하를 바라보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미안해."윤서하는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산비탈을 따라 내려갔다."그렇게 무릎 꿇고 싶으시면 마음대로 하세요."이도현은 비석 앞에 무릎 꿇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날이 저물고 달이 떠올라도 이도현은 계속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무릎의 상처는 진작 터져 피가 붕대 밖으로 배어 나오고 있었다.한밤중이 되자 다은이 등롱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세자 저하, 아가씨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도현이 박씨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자 문이 열리고 다은이 모습을 드러냈다.다은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이도현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입술을 꾹 다물다가 결국 몸을 옆으로 비켰다."들어오십시오. 아가씨께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윤서하는 후원의 회랑 아래에 앉아 있었고, 무릎에는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다.이도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도현은 뜰 한가운데에 서서 더 다가가지 않았다."앉으십시오."윤서하가 말했다.이도현은 그녀 맞은편 돌의자에 앉았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이도현은 윤서하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서하야, 미안하다."이도현은 뜰 한가운데로 걸어가 멈춰 섰다."세자, 뭐 하시는 겁니까?"이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이도현은 쪼그려 앉아 바닥에서 사금파리 하나를 주워 내려놓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사금파리가 무릎을 파고드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도현의 몸이 크게 떨렸다.입술에서는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고, 이도현은 이를 악물었다.윤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정녕 미치셨습니까?"이도현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깨진 기왓조각 위에 무릎 꿇은 채 이마를 땅에 댔다."하나."그가 머리를 한 번 조아렸다.단단한 청석 바닥에 이마가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둘."윤서하는 회랑 아래에 서서 문틀을 꽉 움켜쥐었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이도현의 이마는 이미 터져 있었고, 피가 콧등을 타고 흘러 청석 바닥에 떨어지며 작게 번졌다.사금파리 위에 무릎이 계속 짓눌리면서 옷감은 진작 찢어졌고, 바짓단 안으로 피가 배어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이마는 짓이겨져 피와 살이 뒤엉켰다.머리를 조아릴 때마다 청석 바닥에 핏자국이 하나씩 늘어났다."일흔. 일흔하나. 일흔둘."이도현의 목소리는 점점 쉬어 거의 들리지 않았다.윤서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눈가에서 흘러내렸다.마지막으로 머리를 조아린 뒤에도 이도현은 일어나지 못하고, 이마를 청석 바닥에 댄 채 온몸을 떨었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