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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놓쳐버린 혼례 시각

그대가 놓쳐버린 혼례 시각

By:  별일없음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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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 시각까지는 이제 한 식경도 남지 않았다. 임지헌이 마침내 내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하온아, 데리러 왔다." 방 안 가득 모인 친척들이 곧장 떠들썩해졌다. "신랑이 늦었으니 술을 벌로 받아야지!" "그만들 하십시오. 혼례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서 신부를 가마에 태워야 합니다!" 막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으려던 찰나, 등 뒤에서 나의 시집길을 배웅하러 왔던 서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마에 그린 꽃무늬가 번졌으니 조금 손봐야겠습니다." 나는 몸을 굳혔으나, 임지헌은 도리어 손을 거두었다. "그래. 급할 것 없다." 서민주는 화장함을 뒤적이며 나를 향해 웃었다. "하온아, 근심 말거라. 이내 끝내마." "다 네 혼례를 빛내기 위해서다." 그러고는 임지헌에게 동경을 내밀었다. "이것을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 임지헌은 아무렇지 않게 동경을 받아 들었다. 방 안에 감돌던 소란이 문득 잦아들었다. 어머니의 낯빛은 조금씩 창백해졌고, 나는 창가에 놓인 물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세자 저하." "관상감에서 정한 출발 시각은 진시 삼각입니다." "지금 나서시면 제때 맞춰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지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고치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러느냐." "내가 이미 왔고, 혼서도 오갔으며, 육례까지 모두 갖추었거늘 설마 혼례를 그르치기라도 하겠느냐?" 나는 임지헌의 손에 들린 화장함을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어젯밤, 누군가 내 규방에 숨어들어 오늘 나를 데리러 와 혼례를 깨겠다면 그를 따라나설 것인지 물었다. 그때 나는 거절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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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물시계가 또 한 칸 내려앉았다.

혼례 준비를 돕던 시녀가 초조한 낯으로 말했다.

"세자 저하, 이제 한 식경도 남지 않았습니다."

"신부께서는 집을 나서기 전에 어른들께 작별을 올리고, 불화로를 넘어 가마에도 오르셔야 합니다."

"더 늦으면 정해진 시각을 맞추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임지헌은 물시계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알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를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동경을 마주한 채 미간의 꽃무늬를 다시 그리고 있는 서민주를 보고 있었다.

서민주는 가는 붓으로 미간을 두어 번 더 다듬더니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왼쪽이 오른쪽보다 조금 높구나."

외숙모가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임 세자, 오늘 혼례를 치를 이는 그대와 하온입니다."

"민주는 하온이의 시집길을 함께할 벗일 뿐이니, 한 사람이 빠진다고 예가 어그러질 리 없지 않겠습니까."

"하온이를 데리고 먼저 나서십시오. 민주는 뒤따라오면 됩니다."

서민주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외숙모님께서는 제가 거추장스럽다는 말씀이십니까?"

"저와 하온이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벗입니다."

"하온이가 시집가는 날인데, 혹 하온이에게 누가 될까 하여 치장을 단정히 하려던 것뿐입니다."

"헌데 어른들 말씀을 듣고 있자니, 제가 일부러 좋은 시각을 늦추려 드는 사람처럼 여겨질까 두렵습니다."

임지헌의 얼굴빛이 이내 싸늘해졌다.

"외숙모님, 민주의 화장을 고치라 한 이는 접니다."

"불만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어찌 처자 하나를 이리 몰아세우십니까?"

외숙모는 말문이 막혔고, 어머니의 낯빛도 한층 더 창백해졌지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지난 세월, 임지헌은 늘 그러했다.

정월 대보름날, 우리는 함께 도성 거리를 거닐기로 약조했으나 서민주가 놀잇배에서 크게 놀랐다는 소식이 들리자, 임지헌은 나를 두고 그 길로 서민주에게 달려가 밤이 깊도록 곁을 지키다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내 계례를 올리던 날에도 배정무는 나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복을 빌어주겠다고 약조했지만 서민주가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 한마디에 서민주의 집에서 밤을 새웠다.

혼례복을 입어 보던 날도 다르지 않았다.

서민주가 발목을 살짝 삐었을 뿐인데도 그는 뜰을 가득 메운 몸종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업어 곁채로 데려갔다.

나라고 묻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서민주는 내 팔을 다정히 붙잡고,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하온아, 우리는 누구보다 가까운 벗이지 않느냐."

"지헌 오라버니도 늘 나를 친누이처럼 여기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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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물시계가 또 한 칸 내려앉았다.혼례 준비를 돕던 시녀가 초조한 낯으로 말했다."세자 저하, 이제 한 식경도 남지 않았습니다.""신부께서는 집을 나서기 전에 어른들께 작별을 올리고, 불화로를 넘어 가마에도 오르셔야 합니다.""더 늦으면 정해진 시각을 맞추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임지헌은 물시계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알고 있다."그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고개를 숙였다.나를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동경을 마주한 채 미간의 꽃무늬를 다시 그리고 있는 서민주를 보고 있었다.서민주는 가는 붓으로 미간을 두어 번 더 다듬더니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래도 안 되겠다.""왼쪽이 오른쪽보다 조금 높구나."외숙모가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 세자, 오늘 혼례를 치를 이는 그대와 하온입니다.""민주는 하온이의 시집길을 함께할 벗일 뿐이니, 한 사람이 빠진다고 예가 어그러질 리 없지 않겠습니까.""하온이를 데리고 먼저 나서십시오. 민주는 뒤따라오면 됩니다."서민주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외숙모님께서는 제가 거추장스럽다는 말씀이십니까?""저와 하온이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벗입니다.""하온이가 시집가는 날인데, 혹 하온이에게 누가 될까 하여 치장을 단정히 하려던 것뿐입니다.""헌데 어른들 말씀을 듣고 있자니, 제가 일부러 좋은 시각을 늦추려 드는 사람처럼 여겨질까 두렵습니다."임지헌의 얼굴빛이 이내 싸늘해졌다."외숙모님, 민주의 화장을 고치라 한 이는 접니다.""불만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십시오.""어찌 처자 하나를 이리 몰아세우십니까?"외숙모는 말문이 막혔고, 어머니의 낯빛도 한층 더 창백해졌지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지난 세월, 임지헌은 늘 그러했다.정월 대보름날, 우리는 함께 도성 거리를 거닐기로 약조했으나 서민주가 놀잇배에서 크게 놀랐다는 소식이 들리자, 임지헌은 나를 두고 그 길로 서민주에게 달려가 밤이 깊도록 곁을 지키다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내 계례를 올리던 날에도 배정무는 나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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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어찌 우리를 의심하느냐."임지헌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타일렀다."민주는 어릴 적부터 친오라비가 없었으니, 내게 조금 의지할 뿐이다.""성정이 곧고 악의도 없으니, 매사 그리 따지지 말거라."전에는 나도 믿었다.하지만 혼례복을 입은 오늘, 서민주는 미간의 꽃무늬가 비뚤어졌다는 말 한마디로 온 친척을 붙들어 두었다.더 우스운 것은 임지헌이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조모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임 세자, 하온이가 시집가는 일은 우리 집안의 큰일이다.""온 집안이 인시부터 일어나 채비한 것도 정해진 시각을 맞추고자 함이었지.""젊은이들이 신명을 공경하지 않는다 해도, 두 가문의 체면은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임지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서민주가 먼저 붓을 내려놓았다."조모님, 정한 때가 중요한 줄은 저도 잘 압니다.""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끌려던 것은 아닙니다."서민주는 내게 시선을 돌려 부드럽게 말했다."하온아, 어서 조모님을 달래 보아라.""큰 경삿날에 어찌 이리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느냐."임지헌도 나를 바라보았다."그래, 하온아. 민주는 화장을 조금 고칠 뿐이다.""오늘 이리 많은 손님이 와 계신데, 모두가 난처해지게 하지 말거라."나는 잠시 멍하니 임지헌을 바라보았다."제가 소란을 피운다고 하시는 겁니까?"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목소리에는 못마땅함이 묻어났다."민주는 그저 단정히 꾸미고자 할 뿐이다.""네가 하필 이때 나가라며 그 아이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 소란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나는 헛웃음이 났다.온 집안을 붙들어 두고 꽃무늬를 고치는 일은 소란이 아니었고, 내가 시집갈 때를 일깨우는 일은 철없는 짓이 되었다.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집사가 급히 들어섰다."대감님, 마님. 신랑 측 행렬이 이미 대문 앞에 늘어서 있습니다.""악대와 꽃가마, 복돈을 뿌릴 이들까지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더 지체하면 거리의 행렬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방 안의 공기가 팽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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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시녀가 낮은 목소리로 알렸다."혼례 시각까지 반각도 남지 않았습니다."나는 임지헌을 바라보았다."세자 저하, 들으셨습니까?""혹 혼례 시각은 중요치 않다 여기시는 겁니까?"임지헌은 단호히 말했다."네가 내게 시집오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예전 같았으면 마음이 흔들렸을 말이었다.하지만 이제는 어처구니없었다.그는 내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혼서와 예물이 오간 이상 내가 임지헌에게 시집갈 일은 이미 정해졌다고 여길 뿐이었다.그러니 내가 기다리고 서러움을 삼키며 구씨 가문의 체면이 깎이는 일쯤은 상관없었다.서민주는 마침내 알맞은 연지를 골랐다.그러나 가는 붓으로 미간의 꽃무늬를 반쯤 그리다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빛이 너무 짙구나.""지우고 다시 그려야겠어."어머니가 분을 이기지 못해 휘청였다."서민주, 오늘 혼례를 치를 이는 하온이지 네가 아니다!"서민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주머님, 저도 잘 압니다.""그러하기에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지요."그녀는 내게 물었다."하온아, 네 생각도 그러하지?"나는 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이미 내 침묵에 익숙했다.내가 함께 자란 정을 외면하지 못하고, 임지헌은 제 편을 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미간의 꽃무늬를 다시 지웠다."그만 재촉하십시오.""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번에는 제대로 그리겠습니다."나는 임지헌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지금 저와 함께 나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곳에 남아 서민주를 기다리시겠습니까?"임지헌의 낯빛이 굳었다."하필 오늘 나더러 선택하라는 것이냐?""민주는 네 오랜 벗이기도 하고, 내 의누이이기도 하다.""그저 화장을 고치는 일인데, 어찌 그리 못마땅해하느냐?"서민주는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었다."하온아, 오늘 네 마음이 조급한 줄은 안다.""그렇다고 모든 화를 내게 쏟아서는 아니 되지."나는 두 사람을 바라본 채 담담히 말했다."좋다.""천천히 그리거라. 더는 재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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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체면이라?""신부는 곁에 세워 두고, 신랑 될 사람은 다른 여인의 화장함을 들어 주는 것이 임씨 가문의 체면이더냐?""얼굴의 꽃무늬 하나 때문에 구씨 가문을 도성의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자네 체면이고?"임지헌은 대답하지 못하자 서민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아저씨, 지헌 오라버니를 그리 탓하지 마세요.""시간을 끈 건 저이니, 제 잘못입니다.""저도 하온의 혼사가 흠 없이 치러지길 바랐을 뿐입니다."아버지가 더 말하려 하자, 나는 소매를 붙잡았다."아버지."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늘 강직하던 아버지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하온아..."나는 옅게 웃었다."괜찮습니다.""무슨 일이 있어도 진시 삼각에는 집을 나서겠습니다."임지헌의 낯빛이 달라졌다."하온아,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민주가 아직 채비를 마치지 못했는데, 어찌 먼저 나서겠다는 것이냐?"내가 대답하지 않자 임지헌은 나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두 가문의 손님이 모두 기다리고 있고, 도성 사람들 또한 오늘이 너와 나의 혼례 날임을 알고 있다.""그런데도 네 혼사를 망치겠다고?""우리의 여섯 해 정을 저버리겠다는 것이냐?""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온 도성의 웃음거리로 만들 셈이냐?"말이 이어질수록 내 마음은 차갑게 식어 갔다.임지헌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내가 그를 여섯 해나 마음에 두었다는 것도, 구씨 가문이 체면을 중히 여긴다는 것도.오늘 혼례가 어그러지면 수많은 이의 웃음거리가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내가 참을 것이고, 감히 떠나지는 못하리라 여긴 것이다.나는 임지헌을 바라보았다."세자 저하 말씀이 맞습니다.""예전의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임지헌의 입가에 안도의 웃음이 스쳤다.나는 말을 이었다."하지만 그것은 예전 일입니다."그의 웃음이 굳었다."하온아, 적당히 해라."그때 시녀가 비틀거리며 뛰어 들어왔다."대감님,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진시 삼각까지 차 반 잔 마실 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꽃가마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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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임지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하온아,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나는 거의 바닥난 물시계를 바라보았다."말씀드렸습니다. 혼례 시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요.""이제 저는 집을 나서야 합니다."임지헌이 손을 뻗어 나를 막아섰다."허튼짓하지 마라!""내가 네 손을 잡지 않으면, 누가 너를 꽃가마에 태우겠느냐?"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그럼 세자 저하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나는 둥근 부채를 들고 곧장 문밖으로 나섰다.등 뒤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하온이가 혼자 나선다고?""신랑은 아직 방 안에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서민주도 뒤따라 나왔다."하온아, 난 그저 화장을 조금 고쳤을 뿐인데 네가 이토록 일을 키울 줄은 몰랐다."나는 돌아보지 않았다.막 회랑에 이르렀을 때, 임지헌이 성큼 다가와 내 손목을 붙잡았다."구하온! 오늘은 두 가문의 혼례 날이다.""국공부에는 손님이 가득하고, 폐하와 황후마마께서도 하사품을 내리셨다.""그런데 홀로 대문을 나서서, 온 도성의 웃음거리가 되자는 것이냐?"나는 임지헌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온 도성이 우리를 비웃게 만든 이가, 정말 접니까?"임지헌은 숨을 삼키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어머니가 눈시울을 붉힌 채 뒤따라 나왔다.아버지는 그 곁에 선 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하온아.""정말 생각을 굳힌 것이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조모가 지팡이를 짚고 회랑 아래로 나오셨다."생각을 굳혔으면 가거라.""구씨 가문의 딸이라면 고생은 견딜지언정, 남에게 체면을 짓밟히게 둘 수는 없다.""혼례 시각이 되었으니, 당당히 집을 나서거라."눈시울이 뜨거워졌다."예."나는 다시 발을 내디뎠다.대문 밖에는 붉은 비단이 길게 깔리고, 풍악이 울려 퍼졌다.긴 거리는 국공부 세자가 구씨 가문의 적녀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가득했다.임지헌이 뒤따라왔다."하온아, 일을 꼭 이 지경까지 몰고 가야겠느냐?"나는 대문 앞에 멈춰 섰다.몇 걸음 앞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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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사내의 정체를 알아본 거리의 백성들은 잇달아 무릎을 꿇었다."진북왕을 뵙습니다!""왕야 만세!"임지헌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진북왕?"말발굽이 구씨 저택 앞에 멈췄다.배정무가 말에서 내려서자 수행 내시가 폐하의 교지를 펼쳐 들고 큰 소리로 읽었다."폐하의 명을 받들어 조서를 내린다.""구씨 가문의 적녀 구하온과 임씨 가문은 이미 혼약을 맺었으나, 임씨 가문이 혼례를 지연시켜 구씨 가문을 욕보인다면 구씨 가문은 임씨 가문에 혼서를 돌려보내고 혼약을 파기해도 좋다.""또한 진북왕 배정무가 구씨 가문에 혼인을 청하는 것을 윤허한다. 구하온이 원한다면 오늘 진시 삼각에 진북왕부로 맞아들여도 좋다.""이를 명한다."거리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임지헌이 나를 홱 돌아보았다."그럴 리가 없다!"그러나 배정무는 임지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는 바닥에 깔린 붉은 비단을 밟고 한 걸음씩 내 앞에 다가왔다.여섯 해 전, 그가 북방으로 떠나던 날에도 내게 이렇게 손을 내밀었었다.그때 그가 말했다."하온아, 언젠가 후회하는 날이 오면 뒤를 돌아보아라.""나는 항상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그때 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그러다 오늘 그는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손바닥을 위로 향한 그의 손은 내 앞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하온아.""진시 삼각이다. 네가 원한다면 나와 혼례를 치르자.""원치 않는다면, 나는 곧장 떠나겠다."나는 내 앞에 내밀어진 배정무의 손을 바라보았다.넓은 손바닥과 범의 입에는 얇은 굳은살이 배어 있었다.오랫동안 칼을 쥐고 살아온 흔적이었다.여섯 해 전, 그가 북방으로 떠날 때도 그는 내게 이렇게 손을 내밀었다.그해 그는 열다섯, 나는 열넷이었다.배정무는 본래 진북후부의 막내아들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도성에 왔고, 진북후부와 구씨 저택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훗날 북방에 전란이 일자 아버지와 형들은 차례로 전사했고, 그는 작위를 이어받은 뒤 군공을 세워 진북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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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혼서는 확실히 주고받았지.""허나 혼례 시각을 세 번이나 재촉했는데도 자네는 신부를 맞이하지 않았으니, 먼저 혼약을 저버리고 구씨 가문을 욕보인 것은 임씨 가문이다.""이제 폐하의 교지로 구씨 가문이 혼서를 돌려줄 수 있게 되었으니, 구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혼약은 이미 끝났다."아버지는 몸을 돌려 집사에게 일렀다."임씨 가문의 예물은 봉해 두었다가 혼서와 함께 국공부로 돌려보내거라.""또한 하온이의 혼수는 진북왕부로 보내거라."임지헌이 다급히 말했다."저는 하온이와 혼인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그저 잠시 기다리라 했을 뿐입니다!"배정무가 문득 웃음을 흘렸다."임 세자.""하온이에게 기다리라 한 것이 오늘뿐이오?"임지헌의 낯빛이 굳었다.배정무는 내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으나, 긴 거리에 모인 모든 이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등불 축제 날, 자네는 하온이을 홀로 남겨 둔 채 서민주한테 갔소.""하온이가 계례를 올리고 복을 빌던 날에는 서민주 댁에서 밤을 새웠지.""하온이가 혼례복을 입어 보던 날에도, 자네는 수많은 몸종 앞에서 서민주를 업어 방으로 데려갔소.""오늘은 자네와 하온이의 혼례 날이오.""하온이는 혼례복을 입고 이 자리에 서 있는데도, 자네는 다른 여인이 화장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라 했소."임지헌은 입술만 달싹일 뿐,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서민주가 집 안에서 뛰쳐나왔다.미간의 꽃무늬는 여전히 반밖에 그리지 못했고, 달려오는 바람에 머리카락도 흐트러져 있었다."지헌 오라버니!""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서민주는 배정무를 보고, 이어 나와 그가 맞잡은 손을 보더니 낯빛이 확 변했다."하온아, 정녕 진북왕을 따라가려는 것이냐?""지헌 오라버니와 여섯 해나 쌓은 정을, 내가 잠시 화장을 고쳤다는 이유로 모두 저버리겠다는 것이냐?"나는 서민주를 돌아보았다."서민주.""정말 미간의 꽃무늬 하나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이냐?"서민주는 잠시 굳어졌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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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떨리십니까?""아니다."배정무는 태연한 얼굴이었다.마차가 돌을 밟아 흔들리자, 그의 소매 속 얇은 종이가 떨어졌다.주워 보니 오늘 신부를 맞이할 순서가 적혀 있었다.진시 일각, 왕부의 의장 행렬은 거리 밖에서 대기한다.진시 이각, 궁의 내시가 도착한다.진시 삼각, 교지를 내리고 혼인을 청한다.그 아래에는 이런 글도 적혀 있었다.‘구하온이 원치 않으면 강요하지 말 것.’‘구씨 가문이 끝내 기존 혼약을 지키기로 하면 즉시 물러날 것.’‘하객들을 놀라게 하지 말 것.’나는 고개를 들어 배정무를 보았다."처음부터 준비하고 계셨습니까?"배정무는 잠시 침묵하다가 마침내 인정했다."보름 전, 내가 도성에 돌아와 복명하던 때 네가 혼인한다는 말을 들었다.""그래서 폐하께 혼인을 허락하는 교지를 내려 달라 청했다.""폐하께서는 내가 북방에서는 거침없이 적을 베면서, 네 앞에서는 쓸모없는 자가 된다며 꾸짖으셨다."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배정무의 귓불이 붉어졌다.그가 말을 이었다."나는 교지로 너를 얽매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 교지는 두 가문의 혼약이 풀린 뒤에만 내가 네게 혼인을 청하도록 했을 뿐, 네 뜻을 대신 정한 것은 아니다.""네가 임지헌에게 시집가길 바랐다면, 이 교지는 영영 나오지 않았을 테지.""혼약이 깨지고, 네가 원한다면...."그가 나를 보았다."너를 데리러 오려 했다."나는 손에 든 종이를 바라보았다."오늘 저를 데리러 오셨는데, 제가 따라가지 않았다면 어찌하셨겠습니까?"배정무가 마차 벽에 기댄 채 낮게 말했다."처음에는 그저 네 명예가 상할까 염려했다.""하지만 구씨 저택에서 있었던 일과 임지헌이 네게 한 일을 듣고는, 참지 못해 왔다."마차 안이 잠시 고요해졌다.잠시 뒤, 내가 물었다."왕부에 혼례청도 마련했습니까?""그렇다.""하객은요?""궁에서 내린 하사품도 이미 도착했고, 종친부의 수장과 예부시랑, 몇몇 왕실 종친들, 그리고 북방에서 나를 따라 도성에 온 장수들이 와 있다.""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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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국공부의 혼례 행렬은 그 자리에 멈춰 있었고 풍악도 그쳤다.백성들은 감히 수군대지 못했지만, 임지헌을 바라보는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신랑은 의누이의 화장을 기다리느라 혼례 시각을 놓쳤고, 신부는 돌아서서 진북왕에게 시집갔다.이 기이한 일은 반나절도 되기 전에 온 도성에 퍼질 터였다.임지헌은 붉은 비단 끝에 선 채,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지 못한 듯했다.그는 그저 구하온에게 조금 더 기다리라 했을 뿐이었다.‘예전의 하온이는 늘 기다려 주지 않았던가.’등불 축제 날, 임지헌이 서민주를 데리러 간 사이 구하온은 거리에서 한 시진이나 홀로 서 있었다. 돌아와 토끼 등불 하나를 사 주자, 구하온은 더는 화내지 않았다.구하온이 계례를 올리던 날, 임지헌은 서씨 저택에서 밤을 새웠으나 다음 날 백옥 비녀를 보내자 구하온은 그것을 받았다.혼례복을 입어 보던 날에는 서민주를 업어 방으로 데려갔지만, 구하온은 눈시울을 붉혔을 뿐 혼약을 깨지는 않았다.임지헌은 오늘도 같을 줄 알았다.구하온은 그저 화가 난 것뿐이고, 달래면 곧 풀릴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말 떠났다."지헌 오라버니."서민주가 임지헌의 소매를 붙잡았다."하온이가 너무 성급했습니다.""다들 보는 앞에서 다른 사내를 따라가다니요?""오늘 일이 퍼지면 국공부의 체면은 어찌합니까?"임지헌이 고개를 홱 돌렸다."입 다물어라."서민주가 굳어졌다."예?"임지헌의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입 다물라고 했다!"임지헌은 어려서부터 지금껏 서민주에게 이런 말투를 쓴 적이 없었다.서민주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왜 제게 화를 내십니까?""제가 하온이를 진북왕에게 시집가라고 했습니까?""저는 그저 미간의 꽃무늬를 고쳤을 뿐입니다!"서민주의 미간에 반쯤 그려진 해당화 무늬를 바라보고 있자니, 임지헌은 가슴 한쪽이 아팠다.그저 화장 하나를 고친 일이라, 임지헌도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여겼다.하지만 그에겐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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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임지헌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하온이를 데려오겠습니다."진북왕부는 붉은 비단으로 단장돼 있었고, 활짝 열린 대문에는 붉은 금등 아홉 개가 걸려 있었다.마차가 멈추자 시녀가 나를 부축해 내렸다.구씨 가문 사람들이 미처 오지 못했으리라 여겼다.그러나 부모님은 곧 뒤따라오셨고, 조모도 외숙모들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셨다.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셨다."하온아."가슴이 시큰해졌다."어머니."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정말 생각을 굳힌 것이냐?""비록 교지가 내려졌어도, 시집갈지 말지는 네가 정하는 것이다.""원치 않으면 구씨 저택으로 돌아가자. 누구도 네가 원치 않는 혼인을 강요할 수는 없다."나는 고개를 저었다."어머니, 저는 원합니다."한참 말이 없던 아버지가 배정무를 바라보았다."진북왕.""하온이가 오늘 큰일을 겪었으니,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을 수도 있소.""혹여 그 틈을 타려는 것이라면..."배정무가 몸을 숙여 예를 올렸다."장인어른, 염려 마십시오.""하온이도 원하기에 혼인하는 것입니다.""하온이가 원치 않는다면, 절대 억지로 곁에 붙들어 두지 않겠습니다."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예를 올리지도 않았으니, 함부로 부르지 마시게."배정무가 곧장 말을 고쳤다."대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아버지는 코웃음을 쳤지만, 낯빛은 조금 누그러지셨다.왕부의 혼례청은 국공부 달리 금은보화도 화려한 모란도 없었다.붉은 비단 사이로 흰 매화나무 한 그루가 환히 피어 있었다.매화 철이 아닐 텐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꽃송이 하나하나가 백옥을 깎아 빚은 것이었다.배정무가 내게 말했다."북방은 겨울이 혹독해 꽃을 보기 어렵다.""처음 승전을 거둔 해, 진영 밖에 흰 매화 한 그루가 피었다. 그때 네가 예전에 그린 매화가 생각났지.""그 뒤로 승전을 거둘 때마다 백옥 한 조각씩 모아 두었다.""다 모이면 그럴듯한 선물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나는 만개한 매화나무를 바라보았다."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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