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옥지가 말했다.“그런 건 나중에 얘기하죠. 오늘 온 목적을 잊지 마세요.”아버지에게 따지려던 온장온은 그제야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다.‘그래, 오늘은 온사의 생일을 축복해 주러 온 거였지.’“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는 급할 거 없거든요.”온사가 웃으며 말했다.“그러니 여러분들끼리 따질 얘기가 있으면 여기서 명확히 짚고 넘어가시죠.”그녀는 팔짱 끼고 구경할 생각이었지만, 물론 온모의 입장은 달랐다.지금 말리지 않으면 온장온마저 통제를 벗어날 상황이었다.온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떤 것도 언니의 생일보다 중요하지 않죠. 안 그래요, 큰 오라버니?”온장온은 분위기에 휩쓸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막내 말이 맞지.”“그래요.”구경거리가 사라지자 온사는 온권승 일행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그럼 이리 주세요.”“뭐라고?”상황 파악이 채 안 된 온장온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선물이요.”온사는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일부러 제 생일을 축하해 준다고 여기까지 온 것 아니었나요? 설마 빈손으로 오신 건가요?”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온장온의 얼굴이 이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툭!온자신이 들고 있던 물통을 떨어뜨렸다.큰 형님은 물론이고 그 마저도 선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두 형제는 당황한 눈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미안해, 온사야. 우리가 올 때 너무 급하게 오느라….”“온사야, 화내지 마. 둘째 오라버니가 잘못했어. 이렇게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다니. 지금 바로 하산해서 선물 사러 갔다올게!”“그래, 그래! 큰 오라버니도 갔다올게!”“됐습니다.”온사가 담담한 어조로 그들을 불러세웠다.처음부터 선물을 바랐던 게 아니라 가식적인 그들의 모습이 질려서 창피를 줬을 뿐이었다.반면 온자월과 온옥지는 잠깐 흠칫하나 싶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선물 정도는 온사가 굳이 달라고 한다면 나중에 해주면 그만이었다.온권승도 미간을 찌푸렸지만 딱히 미안한 표정은 없었고 선심을 베풀듯이 말했다.
“막내야, 셋째 말이 맞아.”온장온도 온모가 자신의 선물을 온사에게 양보하는 건 싫었다.“하지만 오늘은 언니의 생일인데 선물을 하나도 못 받으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온모는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하면서도 몰래 온사에게 도발의 눈빛을 보냈다.“어차피 처음도 아니고 속상할 게 뭐가 있겠어? 지난번 성인식 때 꽃 한송이 못 받았었잖아.”온자월이 냉소를 지으며 상처를 후벼파는 얘기를 했다.“그러니까 온사 넌 좀 얌전히 살아. 네가 말만 잘 들었어도 아버지와 우리가 너한테 선물 하나 안 해주겠어?”온사는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래서 원치 않는다고….”“진국공부에서는 남의 생일에 빈손으로 와서는, 이제 선물 가지고 협박까지 하는군.”바로 그때,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고개를 돌린 온권승 일행의 눈에 두 손에 선물을 가득 들고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섭정왕 북진연의 모습이 보였다.“왕야께서 여긴 어쩐 일입니까?” 온권승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진국공께서 일깨워 주신 덕분에 폐하께서 내게 대신 선물을 전해달라시더군. 그런데 오자마자 자네들이 복명 성녀에게 특별한 생일 선물을 준비한 걸 알았지.”온사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참으로 돌려서 욕하기를 잘하는 사람 같이 느껴졌다.특별한 생일 선물이라고 비꼬아서 진국공부 사람들이 교양이 없다고 지적한 셈이었으니 말이다.그 말의 뜻을 알아챈 온권승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북진연은 그를 무시하고 온사의 앞으로 다가갔다.“무우 사태, 생일 축하하오. 내가 늦은 건 아니지?”“아닙니다. 마침 잘 오셨어요.”온사의 얼굴에는 어느새 싸늘함이 사라지고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그런데 선물은 왜 두 개인가요?”온사는 딱 봐도 정성 들여 준비한 선물을 보고 큰 감동을 느꼈다.하나는 폐하께서 준비한 거라면 아마 남은 하나는 눈앞의 사람이 준비한 것일 터였지만,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은 그의 입에서 답을 듣고 싶었다.북진연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상자 안에는 아주 호화로운 금 장신구가 들어 있었는데, 온씨네 사형제가 온사를 위해 특별 제작한 장신구보다 더 화려했다.온사뿐만 아니라 옆에서 내용물을 확인한 온씨 일가도 화들짝 놀랐다.온모는 질투에 이를 갈았다.‘만약 내가 성녀였더라면 저 머리 장신구는 내 것이었을 텐데!’그런 생각을 하니 온사가 더욱 얄미워졌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저런 걸 받아?’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이것도 열어 보시오.”북진연은 다른 상자를 온사의 앞으로 건넸다.온사는 조심스레 장신구를 내려놓고는 북진연의 선물을 열었다.열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화려하고 아름다운 비단 치마에 사람들은 또 한번 놀랐다.가장 놀라운 것은 비단옷 위에 매화 한 송이가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화려한 옷과 장신구, 그리고 꽃까지!온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감동을 금치 못했다.“이건 폐하와 내가 성녀에게 드리는 생일 선물이자 성인식 선물이오. 너무 늦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군.”“늦지 않았습니다. 정말 때마침 주셨네요.”그러자 그녀는 두 번의 삶을 살며 쌓아온 서러움이 순식간에 사라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한때는 그녀가 정말로 바랐지만 못 가진 것들이었으니 말이다.온사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었다.혈연관계가 없는 타인마저 그녀의 가족들보다 나았다.그런데 아버지와 오라버니라는 사람들은 그녀가 선물만 욕심낸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온씨 일가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온자신은 멍하니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북진연이 선물을 가지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스스로를 위안할 핑계라도 있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도 미처 준비하지 못했으니 너무 큰 죄책감을 가지지는 않았다.그런데 북진연이 공들여 고른 선물을 들고 나타났을 때,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게 되었다.온장온도 마음이 착잡해졌다.집안의 장남으로서 그는 줄곧 생전 어머니의 부탁에 따라 동생들을 잘 이끌고 보살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가 막내에게는 애
결국에 그녀는 그 모든 역경을 뒤로하고 탐스러운 꽃을 피울 것이었다.온사는 그 말속에 숨은 뜻을 이해하고 감격에 겨워서 말했다.“섭정왕 전하의 축복에 감사드립니다.”“섭정왕 전하는 꽃에 대해서도 잘 아시네요. 매화가 언니에게 어울리는 꽃이긴 하죠.”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깼다.온모는 온사의 앞으로 다가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아직 계절도 아닌데 피어난 매화는 정말 흔치 않네요. 너무 예뻐요. 언니, 내가 한번 봐도 돼?”“안 돼.”온사가 싸늘한 눈을 하고 단박에 거절했다.“역시 언니는 날 싫어하는구나. 됐어. 언니, 화내지 마. 그렇게 기분 나쁘면 안 볼게.”온모는 금세 상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기대에 찬 눈을 하고 북진연에게 말했다.“왕야, 혹시 장원에 남은 매화가 있나요? 언니의 것을 빼앗기는 싫은데 너무 예뻐서요. 왕야께서 저에게 한송이만 선물해 주신다면 제가 다른 걸 드릴게요!”‘또 시작이네.’온사의 좋아졌던 기분이 온모의 약아빠진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그녀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올라왔고 그건 표정에서도 드러났다.처음부터 온모는 이런 얼굴로 온가의 모두를 속이고 그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온사를 심보 고약하고 질투심 많은 악녀로 만들었다.저 모습을 보니 온모가 또 새로운 사냥감을 정한 모양 같았다.온사는 불안한 마음에 꽃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잠시 고민됐지만 결국 그녀는 온모를 반박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온모의 이런 모습을 보고 섭정왕 북진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그런데 걱정이 무색하게 북진연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리 천해도 진국공부의 양녀인데 네 양부는 너에게 다른 사람이 대화할 때 끼어들지 말라는 예의도 안 가르쳤어?”순간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온모의 표정이 굳어버렸다.온사도 멈칫했다가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온모의
“섭정왕 전하께서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일 겁니다.”온권승이 입을 열었다.“온모의 생일은 사실 진짜 생일이 아니라 저 아이 모친의 기일입니다.”“정말?!”북진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못 믿겠다는 얼굴로 말했다.“어머니의 기일을 왜 생일로 바꾼 거지?”“온모가 앞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생일을 두 달 앞당긴 겁니다. 진짜 생일로 따지면 온모는 온사보다 나이가 어린 게 맞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막내가 된 것이지요.”“그게 다인가?”“그럼요.”온권승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자, 온모도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버지께서는 저를 위해서 그렇게 정한 것인데 섭정왕 전하께서 오해하실 줄은 몰랐네요. 제 진짜 생일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 맞아요.”온장온 일행은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 눈치만 보았다.그들은 오늘에야 막내의 생일에 그런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물론 그건 다 거짓말이었지만 말이다.온모의 모친이 죽은 날도 그 날이 아니었다. 온권승은 그저 북진연을 속이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온모는 바로 화제를 돌려 온사에게 말했다.“언니가 신경 쓰인다면 내가 호칭을 바꿀게.”“그럴 필요 없어.”온사는 단박에 거절했다.“난 온씨 가문 사람도 아닌데 굳이 호칭을 바꿀 필요도 없지. 아니, 그냥 앞으로 언니라고 부르지 마.”북진연은 듣고 있는 것마저도 역겨웠다.두 사람의 거짓말에 속을 그가 아니었다.“정말 그런 거면 왜 무우 사태의 생일까지 저 여인이랑 같은 날로 앞당긴 거지? 내 기억에 진국공 부인의 기일은 그날이 아닌 걸로 아는데?”“당연히 아니죠. 제 어머니의 기일은 이미 지난지 오래입니다.”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온사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물론 그건 눈앞의 북진연이 아닌 온권승을 향한 것이었다.온권승이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예, 그렇지요. 단지 그때는 온모가 우리 집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고 자매의 정을 키우라고 배려해서 그렇게 안배했습니다.”“친딸을
그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린 온장온 일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들은 그제야 눈앞의 이 사내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섭정왕 전하이며, 전장에서 수많은 적군의 목을 벤 백전백승 무장이라는 것을 떠올렸다.저런 사람에게 밉보이는 건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막내와 셋째가 북진연의 대화에 끼어들고 반발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은 것이었다.아버지를 대신해서 그들을 가르친다는 말은 분명한 협박이었다.사실을 알고 있는 온자월도 화는 났지만 그저 주먹을 꽉 쥘 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짝! 짝! 짝!온권승은 아들이라고 봐주지 않았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힘을 주어 아들의 얼굴을 가격했고, 얼마 안 가 온자월의 입가에서 피가 스며나왔다.그 모습을 본 온모는 저도 모르게 뒤로 뒷걸음질쳤다.‘섭정왕 전하라는 사람 왜 이렇게 속이 좁아? 까탈스럽기는!’지금에 와서야 온모는 북진연이라는 사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다.항상 고고하고 위엄 있던 아버지마저 감히 그를 상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그녀가 함부로 건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왜, 무섭니?”온사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놀란 온모는 사람들이 안 보는 틈을 타 그녀를 힘껏 노려보았다.“무슨 소릴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네. 뭐가 무섭다는 거야?”그녀의 속을 훤히 꿰뚫어본 온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차라리 겁먹은 게 나아. 너 같은 신분을 가진 애가 건들 수 없는 상대도 있는 법이니까.”온모는 순간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로 온사를 바라보았다.‘이년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야?’‘아니지! 그럴 리 없어!’아버지는 진작에 그녀의 과거 흔적들을 깨끗이 지웠고 그녀의 출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다.‘온사 저년, 날 겁주는 거야!’그런 생각을 하며 온모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언니가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언니 말이 맞겠지. 섭정왕 전하는 아무나 쉽게 건들 수 없는 분이니까.
“되었네, 진국공. 이제 그만하시게.”온자월이 아버지에게 서른대를 맞은 후에야 북진연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성격 포악한 사람도 아니고 아들들에게 예의 좀 가르치려고 한 건데 왜 그리 성을 내시오? 아들 얼굴이 엉망이 됐네. 불쌍해라.”진심이 전혀 안 느껴지는 그의 말에 온권승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오늘 북진연의 불만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아마 온자월은 평생 순탄치 못한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었다.온권승은 아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그러자 온자월은 부어서 엉망이 된 얼굴로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소인이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섭정왕 전하.”온자월이 이토록 자존심을 굽히는 상황은 드물었기에 온사는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이때, 북진연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온사가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왜 그러십니까?”북진연이 눈을 찡긋하며 물었다.“사태는 용서할 의향이 있소?”온권승 일행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특히나 온자월은 더욱 모멸감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분명 북진연에게 죄를 사하여 달라고 빌었는데 왜 질문이 온사에게로 돌아간단 말인가!본능적으로 반박하려던 온자월은 입가에서 느껴지는 아린 통증에 말도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장남 온장온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얌전히 무릎 꿇고 있어.”온장온은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섭정왕 북진연은 철두철미한 황제파였다. 어쩌면 온사가 폐하가 친히 책봉한 복명 성녀이기에 섭정왕은 진국공부와 온사 사이에서 그녀를 택한 것이다.그리고 북진연이 진국공을 시켜 온자월을 때리게 한 것도 온자월이 몇번이고 온사를 모욕하는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냥 온사가 셋째를 용서하면 넘어갈 일이네.’하지만 온장온의 바람과는 다르게 온사의 반응이 미묘했다.“용서요?”온사는 시선을 내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온자월을 바라보았다.온장온만큼 생각이 깊지 않은 온자월이기에 북진연이
‘설마 아까 일하다가 먼지라도 끼었나? 그런데 난 왜 아무 느낌도 없지?’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북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제는 사라졌소. 방금 사태가 온자월을 바라볼 때 많은 감정을 담고 있더군. 분노, 증오, 그리고 슬픔, 고통까지…!”그 말을 들은 온사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북진연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사태는 온씨 가문에서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이오?”온사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그녀는 한참의 침묵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섭정왕 전하께서 이리도 눈썰미가 좋은 줄은 몰랐습니다.”“눈썰미가 좋은 게 아니라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군. 아까 사태의 눈빛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는지.”그 깊이가 너무 깊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였다.북진연을 제외하고 또다른 누군가도 그 눈빛을 읽어버렸다.온사는 주먹을 꽉 쥐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했다.“그동안 소인을 보살펴 주시고 지켜주신 전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우리 사이가 그런 깊은 사정까지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북진연은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도 맞는 것 같군. 아직 그럴 사이는 아니지.”말을 마친 그는 바로 뒤돌아섰다.“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푹 쉬시오. 만약 진국공부 인간들이 또 찾아오면 추월을 시켜서 실컷 두들겨패고 내쫓아도 되오.”온사는 떠나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그녀는 뭐라도 해명하고 싶었지만 북진연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대문을 나갔다.온사는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북진연이 가져온 선물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것들을 매만졌다. 맨 마지막에 그녀의 손길이 매화꽃가지에서 멈추었다.그 시각, 북진연이 수월관을 나서자 고요 일행이 그에게 다가왔다.“왕야, 오늘은 어떠셨나요? 성녀께 드린 선물이 마음에 든답니까?”북진연은 선물을 받았을 때 미소를 짓던 온사의 얼굴을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
온모는 뒷담화 하다가 본인에게 들켰는데도 그들이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너희 어느 가문 애들이야? 왜 한 번도 본 적 없지? 어디 일반 관료네 딸인가 본데 어딜 감히 내 뒷담화를 하고 있어?”온모는 그제야 여기 있는 아가씨들 모두 못 보던 얼굴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진국공가로 들어온 뒤, 온모가 만난 사람들은 다 온권승의 부하 관원들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다들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온권승에게 아부하는 입장이기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하지만 눈앞의 소녀들은 그들 중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서 온모는 그들이 관직이 낮은 집안 자식들이라 평소에 진국공 가문에 방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내 아버지 체면을 봐서 너희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줄 것이다. 거부할 시, 너희들이 방금 한 말을 모두 아버지한테 알릴 거야. 그럼 너희도 곤란해질 건 물론이고 너희들의 아버지한테까지 피해가 가겠지!”온모는 턱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그러나 그런 협박의 말은 소녀들의 비웃음만 자아낼 뿐이었다.“세상에나, 쟤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역시 비천한 사생아야. 여자들끼리 한 말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대.”이소은은 경멸의 눈빛으로 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일러바쳐서 뭐 하게? 설마 우리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온사였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봤겠지만 너는… 그럴 가치가 없어.”이소은은 팔짱을 끼고 온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너!”이소은의 도발에 넘어간 온모가 도끼눈을 뜨고 상대에게 소리쳤다.“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다른 소녀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야.”온모는 그 말을 듣고 더 부아가 치밀었다.“너희 죽고 싶어? 내 아버지가 진국공이야!”“알아! 우리 다 알아!”“경성에 네
이번 제사에는 성녀가 필요 없었기에 온사와 수월관 사태들은 참석하지 않았다.제사가 끝난 후,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관원들은 처자식을 대동하고 입장했다.명절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 오늘의 연회는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어린 황제는 태후와 함께 공연을 감상했고 각 집안의 부인, 아가씨들은 떼를 지어 수다를 떨었다.줄곧 방에만 갇혀 있던 온모도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래서 부하와 얘기 중인 온권승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아가씨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갔다.“다들 여기서….”온모가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녀를 등진 한 아가씨가 말했다.“온사는 왜 오늘 연회에 안 왔지?”“못 온 거겠지. 걔 지금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잖아. 우리 어머니 말로는 절 생활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대. 아무 때나 하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그래? 너무 아쉽네. 올해는 어떤 가야금 곡을 연주하려나 듣고 싶었는데.”“우리들 중에 걔가 가야금 연주를 가장 잘하지 않아?”“당연한 소릴. 가야금뿐이겠어? 바둑 좀 못하는 거 말고 서예나 그림 실력 모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아쉽네. 앞으로는 걸작을 감상할 기회가 없겠어.”“진국공부에서 온모라는 애가 왔잖ㅇ라. 뭐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귀에 피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어. 요즘은 뭐 다른 소문 없어?”“있지! 최근에 그런 소문이 들리잖아. 걔 진국공 나리의 양녀가 아니라 사생아라고.”“세상에나, 그게 사실이야?”“사실이래!”“설마… 그런데 뻔뻔하게 연회에 왔어?”“난 저렇게 밖에서 태어난 애가 제일 싫어. 첩이나 이랑이 낳은 서자, 서녀들보다 더 얄미워!”“걔네 어미와 진국공 어르신은 일찍부터 연인이었대. 그런데 진국공부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인을 버리고 란씨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한 거지.”“그럼 왜 첩이나 이랑으로 들어오지 않고 굳이 밖에서 애를 낳았을까?”“주제도 모르고 자존심만 센 거지.”“맞아,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첩이 되길 거부하는 여자들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언제 널 버린다고 했어?”온권승은 홧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최근에 친 사고들을 생각해 봐. 그거 수습해 준 사람이 누구야? 다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이제 나도 너 못 지켜준다. 네 어미한테 간다는 말로 날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온모는 다급히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아니… 아니에요, 아버지. 협박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순간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화 푸세요, 아버지.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그녀는 울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어릴 적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죽은 어미와 너무 닮았으며 우는 모습까지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해주었다.어린 시절 풋풋한 설렘을 온권승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우는 온모를 보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어차피 너도 교훈을 얻었고 잘못을 알면 된 거야….”온권승의 어투가 드디어 누그러지자 온모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온권승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다만 이번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만일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방에서 나가지 말고 네 어미의 측근들도 만나지 마. 안 그럼 나도 다신 널 돕지 않겠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괜한 걱정이세요, 아버지. 온사의 어머니 시신도 이미 돌려줬잖아요. 걔가 뭘 더 어쩌겠어요?”온권승은 고개를 돌리고 한심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온사랑만 연관된 줄 아니? 란씨 가문이 이미 멸문했지만 조정에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만약 걱정해야 할 상대가 온사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였다.안타깝게도 온모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그녀는 온권승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어쩌
온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세 오라버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들, 어차피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온장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하지만 너와 관련 있는 자들이 우리 어머니의 시신을 관 채로 도굴해서 가져간 걸 봤어. 정말 이 일이 너랑 관련이 없다고?”온모는 이 일에서 완전히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와 관련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한 게 아니라고 한 이유는 큰 오라버니께서 본 그 세 사람은 제 친어머니께서 저를 지켜주라고 남겨주고 가신 사람들이에요. 다만 아버지께서 저를 진국공부 양녀로 들이면서 그들은 경성에 같이 따라오지 않은 거고요.”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거짓말을 이어갔다.“얼마 전에 제가 곤장을 맞은 이후로 너무 서러워서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하소연한 적 있어요. 경성으로 와서 날 좀 지켜달라고요. 그런데 그 일을 듣고 그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도굴한 거예요….”“정말 죄송해요, 큰 오라버니… 믿기 힘든 걸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온모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흐느꼈다.겉으로 보기에는 절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졌다.처음에는 온모를 탓하던 온장온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온사는 왜 네가 사람을 시켜서 그 짓을 했다고 하지? 게다가 보복한다고 시신을 훼손한다고까지 했다며?”온모는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그건… 저는 그 일을 알고 당장 양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놓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날 밤에 온사 언니가 저를 납치해 간 거예요. 언니는 저를 때리고 독까지 먹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가 시킨 거라고, 날 안 내보내 주면 다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거래가 성사된 거예요.”“내가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