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정왕 전하?”소리를 들은 제성은 고개를 돌렸다가 북진연을 알아보고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신지요?”북진연은 위에서 아래로 제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데.”그러자 머리털이 곤두선 제성이 재빨리 답했다.“성녀 전하께 생신 선물을 전하러 왔습니다.”생일 선물이라는 말에 북진연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싸늘히 말했다.“무우 사태의 생일은 지난지 오래인데 왜 이제야 찾아온 거지?”이유 모를 압박감에 제성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굳어졌다.“조금 늦었긴 하지만 이건 사죄 선물이기도 합니다. 전에 성녀 전하께 불경한 말을 한 적 있는데 용서를 구할 기회를 얻고 싶어서요.”온사는 어이가 없어서 입만 뻐금거렸다.‘난 분명히 괜찮다고 했는데?’하지만 그 마음이 기특해서 그냥 받을까 고민하던 찰나, 말에서 내린 북진연이 성큼 다가오더니 옥여설화고가 든 상자를 닫아 버렸다.“선물을 할 거면 좀 좋은 걸 선물할 것이지. 이런 건 무우 사태한테 많아. 네가 선물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야.”그 말을 들은 제성은 인상을 찌푸렸다.“그런가요? 하긴, 성녀 전하께서도 한때 진국공 가문의 적녀였으니 옥여설화고는 흔히 봐왓겠네요.”그러자 북진연의 뜻을 오해한 제성이 말했다. 그는 온사가 가진 옥여설화고가 모두 예전에 갖고 있던 것인 줄 알았지, 북진연이 선물한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북진연이 잔뜩 화난 얼굴로 뭐라고 하려는데 제성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성녀 전하께서 필요하지도 않은데 이런 선물을 갖고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전 정말 멍청이예요… 이런 걸 간과하고 있었다니!”제성은 짜증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고는 온사에게 말했다.“성녀 전하,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다시 새 선물을 준비해 오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급기야 하인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산을 내려갔다.그리고 도망가기 전, 그는 섭정왕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
그는 온사에게 그런 망나니로 각인되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오늘은 날씨가 별로 좋지 않군.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이만 안으로 들어가지.”북진연은 얇은 법복을 입고 있는 온사를 보고 있자니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입혀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결국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온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에게 물었다.“경 들으러 오셨나요?”며칠 전에는 일이 많아서 북진연에게 경을 별로 읊어주지 못했기에 온사는 괜히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북진연은 그녀의 눈빛에 스쳐간 감정을 알아본 순간 안 좋았던 기분이 싹 사라졌다.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되었소. 요즘은 몸 상태가 꽤 괜찮으니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오겠소.”사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찾아온 게 아니라 그냥 온사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마침 자신의 무우 사태에게 작업을 거는 녀석을 보게 된 것이다.같은 사내로서 그가 제성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반면 나이도 어리고 미성숙한 제성은 북진연의 속을 꿰뚫어봤을 리 만무했다.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밉보였다는 사실도 그는 모르고 있었다.“그… 어찌 할 생각이오?”북진연은 눈짓으로 산아래를 가리켰다.온사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저와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있을까요?”북진연도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그럼 안으로 들어가 보시오. 내 사람을 보내 저자를 감시하라고 하겠으니. 혹시라도 이상한 짓하면 추월에게 소식을 전하게 하지.”“예, 감사합니다, 섭정왕 전하.”온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감사인사를 했다.그러자 사내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그녀가 고개를 들자 북진연은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내리고는 말했다.“앞으로 나에게는 감사하다는 인사 좀 그만하시오. 계속 이렇게 거리를 두니, 나 참 섭섭하오”온사는 그의 의중을 알 수 없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북진연은 애써 담담한 척을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알고 지
큰비는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보슬비가 온자신의 몸에 떨어지며 천천히 그의 의복을 적시기 시작했다.“둘째 오라버니, 일년 사계절 날씨 변화 중에 어떤 날씨가 가장 좋나요?”온자신은 마치 어린 시절 온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그때 집에 여동생이라고는 온사 한명뿐이었다.그 어린아이는 늘 오라버니들을 따라다니기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온자신을 따랐다.온사는 마치 강아지처럼 매번 그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그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말도 어찌나 잘하는지 입이 쉴 새가 없었다.그때의 그는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무척이나 아꼈다. 여동생이 뭘 물어보든 정성 들여 답을 해주었고 짜증을 낸 적도 한 번도 없었다.“당연히 맑은 날씨가 좋지! 맑은 날이면 나가서 애들이랑 싸움하며 놀 수 있으니까! 아주 신나!”“난 땀 때문에 냄새가 나던데. 매번 싸움하고 돌아오면 오라버니 몸에서 악취가 났다고요!”어린 여동생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말에 반박했다.“온사 많이 컸네? 감히 오라버니한테 그런 말을 다 하고? 냄새 나도 나랑 붙어 있어야지!”“하하하, 오라버니 저리 가요!”온자신은 여동생을 놀리는 걸 가장 좋아했다. 매번 짖꿎은 장난을 쳐도 항상 꺄르르 웃어주던 그녀였다.그때의 그는 여동생의 웃음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라고 생각했다.“됐어, 그만 뛰고 이리 와서 좀 앉아.”장난을 치고 난 후면 그는 동생을 옆에 앉히고 부채질을 해주며 이야기를 나눴다.“오라버니가 답해줬으니까 이제 온사 차례야. 온사는 어떤 날씨가 가장 좋아?”그때의 온사는 짤막한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맑은 날도 좋고 흐린 날도 좋은데 비 오는 날은 싫어요!”“비 오는 날은 왜 싫어?”“어머니가 그러셨는데 비 오는 날은 누가 울고 있어서래요. 사람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하느님이 울고 있는 사람들을 감춰주느라 비가 내리는 거래요.”수월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온자신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얼굴에서 축축한 촉감이 느껴지자 그는
곧이어 온사는 새로운 독약 처방이 떠올랐다.그녀는 독경에 쓰여진 대로 조심스레 약초를 캐고 같은 비율로 배합했고, 이내 검은색의 알약이 완성되었다.온사는 그것을 약병에 집어넣었다.이 약은 그녀가 지난번에 개량한 약과 완전히 상반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최면제가 무색무취이었다면 이 약은 향이 아주 짙었다.그리고 독성은 약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진한 향에 들어 있었다.온사는 약을 배합하다가 냄새를 맡았는데, 약간 맡았을 뿐인데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며 갑자기 슬픔이 찾아왔다.다행히 공간 안이라서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바로 냇가로 달려가서 냇물에 몸을 담갔다.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영기가 가득 담긴 냇물이 온사의 몸을 감쌌다.영기로 독을 씻어내고 나서야 가슴이 갑갑하던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정말 대단한 독성이네. 앞으로 사용할 때 조심해야겠어.”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 온사는 약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이번에 제작한 독약은 정말로 독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예전에 온옥지가 했던 말이 그녀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사부가 독으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하였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최면제의 작용을 알게 된 이후로 그녀는 어떻게 온모를 상대해야 할지 방법이 떠올랐다.이 약도 온모를 위해 만든 약이었다.온사는 약병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입술을 깨물었다.‘온모, 지난번 오십 대가 끝이라고 착각하지 마. 내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똑똑!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온사는 약을 잘 숨겨둔 후에 공간에서 나갔다.문을 열자 막수 사부가 밖에 서 있었다.“사부님이 어쩐 일이세요? 무슨 일 있어요?”온사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 막수를 안으로 들였다.막수는 주저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네 둘째 오라비… 아니, 온자신이 수월관 밖에 쓰러졌어. 열이 펄펄 끓고 있어서 일단 데리고 들어와서 치료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열이 내리면 진국공부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데려
“그래.”막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가볼 거니?”막수는 아직까지 온자신을 불러드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온사가 허락을 안 한다면 그냥 내버려둘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쉽게 허락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온사가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막수도 그런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경성의 진국공 저택에 사람을 보낸 후, 막수는 온자신을 끌고 수월관 내부 대전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어차피 가족들이 오면 데려가는데도 편리하다고 생각하며 치료를 시작했다.하지만 열이 다 내린 후에도 진국공부의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날씨가 점점 어두워지는데 이대로 문밖으로 내쫓을 수도 없었기에 결국 막수는 그를 위한 방을 하나 따로 내주기로 했다.그날 밤, 가녀린 여인의 그림자가 방 문 앞에 드리웠다.모두가 자러 가고 문 앞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온사는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온자신이 잠든 침대 앞에 서서 왕년의 둘째 오라버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온자신은 인상을 찌푸리며 가끔 신음을 내뱉기도 했는데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또 열이 나나?’온사는 엉겁결에 손을 뻗어 온자신의 이마를 만졌는데, 미열이 조금 느껴졌다.그녀는 침상 앞에 기대어 젖은 손수건을 온자신의 이마에 올려주었다.모든 걸 마친 온사가 뒤돌아선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온사는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손의 주인은 마치 그녀가 도망치기라도 할까 두려운 것처럼 엄청난 힘으로 잡고 있었다.온자신은 애써 눈을 뜨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거워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그는 그저 누군가가 자신을 보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기에, 놓치지 않으려고 온사를 더욱 꽉 붙잡았다.“가지 마… 온사, 내 동생… 집에 가자….”온사는 그의 말을 알아듣고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에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둘째 오라버니.”너무 오랜만에 부르는
수월관을 나온 온자신의 손에는 감기약과 외상약이 들려 있었다.온자신은 약봉지를 꼭 끌어안고 산을 내려가다가 온장온의 목소리를 들었다.“둘째야!”하루 사이에 온자신은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온장온은 하인의 손에서 우산을 빼앗고 재빨리 온자신의 옆으로 다가갔다.동생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온장온이 분노한 목소리로 호통쳤다.“너 요즘 왜 그러니? 고민 있으면 나와 상의하면 되잖아? 지금 네 모습을 봐. 아버지에게 말대꾸하고 아무것도 안 챙겨서 가출하다니! 정말 철이 없어도 너무 없어! 네가 세 살 어린애니?”“가출한 거 아닙니다.”온자신은 평온한 목소리로 온장온에게 말했다.“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온장온이 간곡하게 그를 만류했다.“진국공 가문 셋째 공자 자리를 마다하고 밖에서 평민으로 살겠다는 거니?”“평민이 뭐 어때서요?!”온자신은 품에 안은 약봉지를 내려다보고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형님, 저를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저는 이미 가문을 떠났고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이토록 고집을 부리는 동생의 모습에서 지난날 온사의 모습이 겹쳐졌다.“그래, 굳이 밖에서 살겠다면 나도 만류하지 않겠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그러셨어. 가문과 연을 끊겠으면 앞으로 그 어떤 지원도 바라지 말라고!”온장온은 고집부리는 동생의 태도에 더욱 세게 나가기로 결심했다.‘밖에서 고생 좀 해봐야 집 소중한 줄 알지!’어쩌면 그렇게 고생하다가 후회하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온장온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온자신에게 전했다.그런데 예전의 온사도 그랬지만 온자신도 집을 떠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후회는 없었다.온사는 가문에 완전히 실망했고 온자신은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 없었다.예전에 자신이 여동생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면 수치스럽고 미안해서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진국공 저택은 온사에게 지옥이었을 것이고, 지금의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온자신은 그저 여동생을 되찾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알겠어요.”
산을 내려간 그는 남산과 비교적 가까이 있는 마을을 찾았다.그리고 입고 있는 비싼 옷을 돈과 허름한 면 소재의 옷으로 바꾸었다.경성 성밖에 있는 외딴 마을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큰 편이었기에, 물건을 볼 줄 아는 점포 주인은 흔쾌히 그와 물건을 교환했다.온자신은 그렇게 받아온 돈으로 산아래에 땅을 사고 동생을 지키기 위한 집을 짓기 시작했다.“정말 산아래에 집을 지을 생각인가 봐요?”소식을 들은 온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래. 난 그냥 한 말이었는데 널 위해서 정말 그렇게 할 줄은 몰랐구나.”막수 사태도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온사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온자신이 자신을 위해 집을 나왔다는 말은 더욱 듣기 싫었다.그녀는 온자신의 생각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그가 후회해서 이러고 있든, 아니면 순간의 충동이든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이미 멀리 떠났는데 그들이 갑자기 깨우치고 후회한다고 하면 그녀의 복수는 뭐가 될까?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온사는 길게 심호흡하고 말했다.“사부님, 앞으로 그 인간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마세요. 저에 관한 거라면 더더욱이요.”막수도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했다.“무우야, 미안하구나. 내가 네 기분을 배려하지 못하고….”“아니에요, 사부님. 저 다 이해해요. 사부님 잘못이 아니니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온사는 억지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뒷산에 심은 약초에 물을 주는 걸 깜빡했네요. 사부님은 여기 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물통을 들고 뒷산을 향해 갔다.막수는 도망치듯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안쓰러워서 쫓아가고 싶었지만 대문까지 쫓아갔을 때, 온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사는 약초 밭을 향해 걸어가다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사부님이 어머니의 옛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 때문에 그녀를 각별히 돌봐준 분이니 어머니의 다른 자식들도 걱정됐을
추월에게 위로를 받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온사는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추월아. 안 그래도 위로가 필요했어.”추월은 온사를 따라 냇가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온사는 흐르는 냇물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추월 너는 황실에서 교육받은 그림자 호위니까 언젠가는 다른 사람을 지켜주라는 명령을 받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그날이 왔을 때 내가 가지 말라고, 앞으로 나만 지켜달라고 부탁한다면 내가 이기적인 걸까?”그녀는 혹시라도 추월이 오해할까 봐 다급히 덧붙였다.“정말 못 가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오늘….”“그게 진심이었으면 좋겠네요.”온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추월은 갑자기 냉담한 얼굴로 온사에게 말했다.“무우 사태, 제가 비록 황실 소속 그림자 호위의 신분이긴 하지만 평생 한 분만 모신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태가 저에게 이름을 준 그 순간부터 당신은 제가 충심을 갖고 지켜야 할 유일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영원히 당신만 지킬 것입니다.”추월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짓더니 온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쩌면 언젠가는 또 다른 곳으로 발령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날이 왔을 때 당신이 가지 말라고 한다면 저에게는 큰 영광일 것 같습니다.”‘그러니 스스로 이기적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저의 유일한 주인입니다.’그림자 호위로서 가장 두려운 것은 주인에게 버려지는 것이었다.주인의 확고한 선택은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도 아깝지 않은 것이었다.온사는 추월의 말에 적잖이 놀랐지만 마음속에 자리잡았던 두려움과 고통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이지 안심이 되네.”그녀는 손을 뻗어 추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걱정 마. 내가 너를 버릴 일은 없어.”이렇게나 확고하게 자신을 선택한 사람을 어찌 버릴 수 있을까?전생에도 가져본 적 없는 오로지 그녀의 사람인데 말이다.그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