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가 내려지자 복명 성녀가 이틀 후에 금주로 가서 기우제를 지낸다는 사실을 경성 모두가 알게 되었다.관료들은 의견이 분분했지만 적어도 백성들은 진심으로 선량한 복명 성녀가 무사히 다녀오기를 기원했다.이 시점에 재난 지역에 가기를 꺼려하는 관원들도 많은데 여린 여자의 몸으로 그곳까지 간다고 하는 자체가 대단했다.사람들은 어려운 시기에 발 벗고 나서준 성녀가 용기 있고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이건 백성을 마음에 품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결단이었다.한편, 마차에 탄 온사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마차 밖에서 북진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기분이 언짢은 거요?”북진연의 물음에 온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언짢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폐하께서 얘기하신 중서령의 딸이 오래전 제 친구였어서요.”“안란심?”“예, 맞습니다.”그동안 틈만 나면 수월관에 드나들었기에 북진연은 온사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상대가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온사가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부하들이 예전에 알아온 소식에 따르면 안란심과 온사 사이에는 분명한 사건이 있었다.“반년 전에 누군가가 사태를 밀쳐서 호수에 빠뜨린 일이 있었다더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지. 그날 이후로 진국공은 조정에서 중서령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탄핵까지 제안했었지. 설마 범인이 안란심이란 말이오?”그러자 온사는 그렇다고 짤막하게 답했다.그때는 온모가 진국공부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녀에 대한 가족들의 태도가 바뀌기 전이었기에, 온사가 물에 빠졌었다는 얘기에 온권승은 매우 분노했었다.온사가 온권승에게 안란심을 처벌해 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온권승은 당연하게 중서령을 탄압했다.안란심의 삶이 힘들어진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온사의 답을 들은 북진연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감히 사람을 죽이려고 물에 빠뜨리다니. 간덩이가 부었군.”온사는 잔뜩 화가 나 있는 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온사는 자기도 모르게 온모가 떠올랐다.그녀를 제외하고 또 누가 이번 기회를 빌어 해를 가하려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안란심을 이용한 것도 절묘했다.온사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막수 사태는 수월관으로 돌아온 온사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무우야, 굳이 금주로 가야겠어? 예전에도 기우 대전을 치렀지만 모두 경성에서 치렀는데.”막수도 북진연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온사는 웃으며 막수 사태의 손을 잡았다.“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번 금주 가뭄이 예전보다 심각하다고 해요. 금주로 가는 것도 민심을 위로하기 위해서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께서는 섭정왕 전하께 제 호송을 맡으라고 지시하셨어요. 그러니 아무 위험 없을 거예요.”온사는 굳이 막수에게 기우 대전 역시 누군가가 일부러 개입했다는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았다.어차피 기우 대전에는 그녀가 꼭 가야했지만, 배후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누군가의 뜻대로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막수 사태를 안심시킨 후, 처소로 돌아온 온사는 바로 옥패 공간으로 들어가서 준비를 시작했다.그녀는 밤새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에 공간에서 나왔다.마당으로 나간 그녀는 쓸 수 있는 약초들을 모두 캐서 공간에 담았다.아쉽지만 뒷산의 약초들은 시간상 가져갈 수 없었다.소박한 옷으로 갈아입은 온사는 추월을 불러 경성으로 가서 약재를 구매하게 했다. 그녀는 모든 약재를 성밖으로 운송하게 했다.추월과 둘만 남게 되자 온사는 결심을 내렸다.“추월아, 잠깐 뒤돌아 있어.”온사가 말했다.그러자 추월은 아무런 의심없이 순순히 뒤돌아섰다.“됐으니까 다시 돌아봐.”뒤돌아선 추월은 눈 앞의 광경에 순간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그녀의 경악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추월은 온사가 원래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그리고 방금 전에 가득했던 약재들도 이미 같이 사라진 뒤였다.그 많은 약재를 온사가 순식간에 다른곳에 감추었을 리는 없었다.그냥
돌아가는 길에 온사는 추월의 등에 업혀 그녀의 목을 꽉 껴안았다.두 사람은 그 뒤로 방금 전 비밀에 대해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온사는 있는 그대로 추월에게 비밀을 보여주었고 추월은 영원히 그 비밀을 지켜줄 것이다.수월관으로 돌아오자 날이 밝았다.온사는 잠을 자는 대신, 공간에 있는 영수를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북진연이 당도하기 전에 다시 추월을 불렀다.그녀는 추월에게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추월아, 전에 진국공 신변의 그림자 호위는 너도 봤지? 어떤 것 같았어?”추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실력이 괜찮은 것 같았어요.”“그래, 그럼 나와 섭정왕 전하께서 마차를 타고 떠난 후에 넌 진국공 저택으로 가서 사람을 한명 납치해 줘.”“예.”추월은 상대가 누군지 묻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온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도 많이 봤던 사람이야. 온모 알지? 걔 지금 부상 때문에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하고 있을 거야.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걔를 납치해 줘.”“걱정 마세요.”추월이 자리를 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진연이 천명이 되는 흑기군을 이끌고 당도했다.온사가 타는 마차 외에도 재난 지역에 보내는 보급 물자도 있었다.“가지, 이제 출발할 시간이오.”그들이 수월관 대문에 도착할 무렵, 막수 사태가 다급히 쫓아왔다.“무우야, 이거 갖고 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막수 사태가 건넨 보따리 안에는 그녀가 직접 조각한 평안 부적이 있었다.온사는 물건을 받고 막수 사태와 한번 포옹한 후에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사부님. 곧 다녀올게요.”“그래, 그래… 안전에 주의하고 다녀오거라.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마.”막수 사태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그녀는 못내 아쉬운 마음에 온사의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마치 아이를 물가에 처음 내보내는 어머니의 모습과도 같았다.“알겠어요, 사부님. 저 이만 가볼게요.”온사는 다시 막수와 포옹을 나눈 뒤에 마차에 올랐다.“무우야, 빨리 돌
온장온의 얼굴에 비친 걱정의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그는 진심으로 먼 곳에 가는 온사를 걱정하고 있긴 했지만, 이번 여정이 온사의 선택이라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었다.“공자,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이번 금주행은 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제가 꼭 가야겠다고 해서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거지요. 아무도 제 결심을 흔들 수는 없습니다.”“온사야, 너 미쳤니?”예전이나 지금이나 온장온은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렇게 위험한 곳에 왜 굳이 가려는 게야? 넌 왜 항상 말을 안 들어?! 내가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네가 성녀가 돼서 여승들만 사는 곳에 와서 고생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 하지만 이건 목숨이 달린 일이야. 금주가 지금 얼마나 혼잡한지 알기나 해?”“온사야, 고집 그만 피우고 오라버니랑 돌아가자!”온장온은 온사가 금주에 가는 것만은 꼭 막고 싶어서 간곡히 말했다. 하지만 그가 말할수록 온사의 표정은 점점 싸늘해질 뿐이었다.“저는 이미 결정했고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 집에 저는 다시 안 돌아가요.”말을 마친 온사는 가림막을 내리고 북진연에게 말했다.“섭정왕 전하, 출발하시지요.”“온사야, 오라비 말 한 번만 들어!”온사는 결국 짜증이 치밀어 북진연에게 냉정하게 말했다.“누가 또 대오의 앞을 가로막으면 재난 지원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잡아들이면 됩니다.”북진연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소.”그는 온장온에게 담담히 경고의 눈빛을 보내고는 명을 내렸다.“출발!”“예!”“온사야, 가지마! 온사야!”흑기군에 의해 뒤로 밀려난 온장온이 뒤에서 애타게 불렀지만 여동생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온장온은 진국공 가문을 떠나던 그 순간부터 온사는 되돌아올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대오가 멀어진 후, 온장온은 자신을 제외하고도 온사를 보러 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둘째야, 여기서 뭐 하니?”말에서 내린 온장온은 마차를 뒤따라가다가
온사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기에 나중에 온사를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흑기군에 의해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했다.마차 안의 온사는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제성이 다녀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최소택도 다녀갔고 안란심도 다녀갔다.안란심은 시종과 함께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멀어지는 마차와 군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온사 너는 진작에 날 잊었겠지? 하지만 네가 어떻게 날 잊을 수 있겠어?”안란심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너가 그랬잖아. 앞으로 내가 너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그런데 항상 너한테는 임묘자가 먼저였어.”그러자 안란심은 손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고는 온사가 멀어지는 방향에 시선을 둔 채,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가. 금주로 가서 성녀가 할 일을 해. 너 돌아올 때쯤이면 다시 날 기억해낼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마차는 경성과 점점 멀어지고 그 뒤로는 누가 찾아오지 않았다.행진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피곤하면 차에서 좀 자두시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객잔에 도착할 거요.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 안심하고 자시오.”“예.”북진연의 목소리에 온사가 순순히 대답했다.솔직히 아침에 영수를 마셔서 그리 졸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힘이 났다.마차 안에서는 옥패 공간에 들어가기 불편하기에 온사는 독경을 꺼내서 읽었다.막수가 챙겨준 보따리 안에는 새로운 의학 서적과 독경을 제외하고 약병들도 가득 들어 있었다.병치료와 부상 치료, 그리고 벌레를 쫓는 약도 있었다.심지어는 수면제와 근육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약물, 그리고 최음제의 해독제도 함께 들어 있었다.‘대체 사부는 내가 무슨 위험에 빠질 거라 생각해서 이 많은 걸 준비하신 거지?’온사는 재빨리 약을 도로 보따리에 넣어 공간에 집어넣었다.그러고는 차 안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오후에 잠시 내려 식사를 마친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쉬지 않고 이동했다.그렇게 날이 거의 어두워질 때쯤에 마차와 군
온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온사도 돌아와서 방문을 잠그고 옷을 갈아입었다.잠시 후, 섭정왕이 다가와 방문을 두드렸다.“사태, 다 되었소?”밥 먹으러 가자고 재촉하는 소리였다.군영에서 오래 생활한 섭정왕 전하에 비하면 온사는 행도잉 매우 더딘 편이었다.그녀는 그 말에 이따가 돌아와서 마저 짐정리를 하기로 하고 밖으로 향했다.“나가요!”문을 연 온사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가요. 아래층 반찬 냄새가 여기까지 풍기네요. 준비 다 됐나 봐요.”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기도 했다.북진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말하는 걸 깜빡했군. 마차에 간식 상자를 놓아두었는데. 가다가 배고프면 그걸 먹으면 되오.”이것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그리고 자신의 마차도 아니니, 남의 마차를 허락도 없이 여기저기 뒤지고 싶지도 않았다.일층으로 내려가자 옆에 있던 북진연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고개를 들자 언제 온 건지, 아까까지 조용하던 객잔에 손님들이 꽤 들어와 있었다.온사도 이상함을 느끼며 경계심을 세웠다.“내가 있으니 걱정 마시오.”북진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그의 숨결이 귓가에 닿자 온사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어깨를 움츠렸다.그녀는 그저 어색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나리,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지요. 두 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고요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러자 북진연이 온사를 이끌고 흑기군이 앉은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고요는 수저와 의자를 챙겨주며 말했다.“나리, 여기 요리사 솜씨가 좋나 봅니다. 반찬이 아주 향기로워서 군침이 흐를 지경이에요.”북진연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힐끗 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다음에 먼저 먹고 싶으면 말을 해. 어서 먹어.”고요 일행은 그제야 표정이 밝아져서는 급기야 식탁 앞에 마주앉아 먹기 시작했다.온사는 게걸스럽게 먹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다행인 점은 북진연과 그녀는 둘만 따로
재빨리 식사를 마친 북진연은 온사가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바라보던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에게 물었다.“왜 고기는 안 먹고 풀만 드시오?”온사는 아까부터 줄곧 야채만 집고 있었다.북진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이 집 고기반찬이 입맛에 안 맞아서 그러시오?”그러자 온사가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전하, 잊으셨습니까? 저 출가인입니다. 출가인은 고기를 먹을 수 없어요.”온사는 현재 법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어서 북진연도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그 말을 들은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한창 자랄 나이인데 저 자그마한 체구에 고기도 안 먹고 어찌 성장한단 말인가?“조금도 먹으면 안 되오?”온사가 고개를 저었다.“안 되죠.”북진연은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여긴 수월관도 아닌데, 몰래 먹어도 괜찮지 않소.”온사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안 됩니다. 수월관이 아니더라도 저는 수련 중이라, 계율을 어기면 수련의 법도를 어긴 거나 마찬가지인게 될 것입니다.”북진연은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다.비록 그는 수련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온사가 이렇게나 단호하게 말하는데 더 이상 권했다가는 그녀의 기분만 상하게 할 것 같았다.하지만 마음속 걱정이 계속 해결되지 않으니 표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잠시 후, 온사가 드디어 식사를 마치자, 북진연이 그녀에게 깨끗한 손수건 하나를 건넸다.“입 좀 닦고 위층으로 올라가 잠시 쉬고 계시오. 이따가 나도 올라가겠소.”“예.”온사는 그가 뭘 하려는지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그녀는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고요, 넌 가서 성녀 전하를 지키거라.”“예!”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고요는 거대한 검을 들고 사람들 틈을 지나 온사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온사가 모퉁이로 사라지자 북진연은 싸늘한 시선으로 손님 행색을 하고 있는 오합지졸들을 바라보았다.그들 중 일부는 북진연을 알아보고 지레 겁을 먹은 자들도 있
“예.”지시를 마친 그가 뒤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가며 심부름꾼에게 따뜻한 물을 부탁했다.“예… 바로 가겠습니다!”이미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심부름꾼이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갔다.위층으로 올라간 북진연은 온사를 놀래키지 않기 위해 일단 방으로 돌아가 옷부터 갈아입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올라가자 마자 삼층 방 문 앞에 앉아 있는 온사의 모습이 보였다.북진연이 흠칫 놀라며 그녀에게 물었다.“어찌 밖에 앉아 있소? 먼저 방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소?”“전하를 기다리고 있었죠. 몸에 무슨 피를 그리도 많이 뒤집어썼나요? 다친 곳은 없나요?”그를 본 온사는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괜찮소, 내 피가 아니니까.”북진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자랑하듯 말했다.“저런 오합지졸들로는 서른 명 더 와도 내 상대가 아니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옆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요. 아무도 우리 전하의 실력을 못 따라온답니다. 전장에 나가 있을 때 혼자서 수백 명의 적군을 무찌른 분인데 말이에요!”고요는 주절주절 북진연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북진연이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고요는 의아해하며 멍한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내가 뭘 잘못했나?’북진연은 눈치 없는 부하의 엉덩이를 걷어찼다.“당장 안 꺼져?!”고요는 그제서야 기죽은 얼굴로 도망쳤다.그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북진연과 온사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낀 온사가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 말했다.“다친 게 아니라면 됐습니다. 약을 바를 필요도 없겠네요.”북진연은 그제야 온사가 들고 있는 약병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가 다칠까 봐 걱정돼서 약병까지 들고 밖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아, 이제야 기억나는군. 방금 뒤에서 습격하던 놈들이 있어서 좀 다친 것 같소.”방으로 돌아가려던 온사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예? 전혀 안 다쳤다고 하지 않았나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른 더 와도 문제없다고 하던 사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
온모는 뒷담화 하다가 본인에게 들켰는데도 그들이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너희 어느 가문 애들이야? 왜 한 번도 본 적 없지? 어디 일반 관료네 딸인가 본데 어딜 감히 내 뒷담화를 하고 있어?”온모는 그제야 여기 있는 아가씨들 모두 못 보던 얼굴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진국공가로 들어온 뒤, 온모가 만난 사람들은 다 온권승의 부하 관원들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다들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온권승에게 아부하는 입장이기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하지만 눈앞의 소녀들은 그들 중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서 온모는 그들이 관직이 낮은 집안 자식들이라 평소에 진국공 가문에 방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내 아버지 체면을 봐서 너희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줄 것이다. 거부할 시, 너희들이 방금 한 말을 모두 아버지한테 알릴 거야. 그럼 너희도 곤란해질 건 물론이고 너희들의 아버지한테까지 피해가 가겠지!”온모는 턱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그러나 그런 협박의 말은 소녀들의 비웃음만 자아낼 뿐이었다.“세상에나, 쟤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역시 비천한 사생아야. 여자들끼리 한 말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대.”이소은은 경멸의 눈빛으로 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일러바쳐서 뭐 하게? 설마 우리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온사였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봤겠지만 너는… 그럴 가치가 없어.”이소은은 팔짱을 끼고 온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너!”이소은의 도발에 넘어간 온모가 도끼눈을 뜨고 상대에게 소리쳤다.“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다른 소녀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야.”온모는 그 말을 듣고 더 부아가 치밀었다.“너희 죽고 싶어? 내 아버지가 진국공이야!”“알아! 우리 다 알아!”“경성에 네
이번 제사에는 성녀가 필요 없었기에 온사와 수월관 사태들은 참석하지 않았다.제사가 끝난 후,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관원들은 처자식을 대동하고 입장했다.명절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 오늘의 연회는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어린 황제는 태후와 함께 공연을 감상했고 각 집안의 부인, 아가씨들은 떼를 지어 수다를 떨었다.줄곧 방에만 갇혀 있던 온모도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래서 부하와 얘기 중인 온권승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아가씨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갔다.“다들 여기서….”온모가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녀를 등진 한 아가씨가 말했다.“온사는 왜 오늘 연회에 안 왔지?”“못 온 거겠지. 걔 지금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잖아. 우리 어머니 말로는 절 생활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대. 아무 때나 하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그래? 너무 아쉽네. 올해는 어떤 가야금 곡을 연주하려나 듣고 싶었는데.”“우리들 중에 걔가 가야금 연주를 가장 잘하지 않아?”“당연한 소릴. 가야금뿐이겠어? 바둑 좀 못하는 거 말고 서예나 그림 실력 모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아쉽네. 앞으로는 걸작을 감상할 기회가 없겠어.”“진국공부에서 온모라는 애가 왔잖ㅇ라. 뭐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귀에 피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어. 요즘은 뭐 다른 소문 없어?”“있지! 최근에 그런 소문이 들리잖아. 걔 진국공 나리의 양녀가 아니라 사생아라고.”“세상에나, 그게 사실이야?”“사실이래!”“설마… 그런데 뻔뻔하게 연회에 왔어?”“난 저렇게 밖에서 태어난 애가 제일 싫어. 첩이나 이랑이 낳은 서자, 서녀들보다 더 얄미워!”“걔네 어미와 진국공 어르신은 일찍부터 연인이었대. 그런데 진국공부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인을 버리고 란씨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한 거지.”“그럼 왜 첩이나 이랑으로 들어오지 않고 굳이 밖에서 애를 낳았을까?”“주제도 모르고 자존심만 센 거지.”“맞아,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첩이 되길 거부하는 여자들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언제 널 버린다고 했어?”온권승은 홧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최근에 친 사고들을 생각해 봐. 그거 수습해 준 사람이 누구야? 다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이제 나도 너 못 지켜준다. 네 어미한테 간다는 말로 날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온모는 다급히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아니… 아니에요, 아버지. 협박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순간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화 푸세요, 아버지.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그녀는 울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어릴 적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죽은 어미와 너무 닮았으며 우는 모습까지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해주었다.어린 시절 풋풋한 설렘을 온권승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우는 온모를 보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어차피 너도 교훈을 얻었고 잘못을 알면 된 거야….”온권승의 어투가 드디어 누그러지자 온모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온권승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다만 이번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만일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방에서 나가지 말고 네 어미의 측근들도 만나지 마. 안 그럼 나도 다신 널 돕지 않겠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괜한 걱정이세요, 아버지. 온사의 어머니 시신도 이미 돌려줬잖아요. 걔가 뭘 더 어쩌겠어요?”온권승은 고개를 돌리고 한심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온사랑만 연관된 줄 아니? 란씨 가문이 이미 멸문했지만 조정에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만약 걱정해야 할 상대가 온사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였다.안타깝게도 온모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그녀는 온권승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어쩌
온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세 오라버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들, 어차피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온장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하지만 너와 관련 있는 자들이 우리 어머니의 시신을 관 채로 도굴해서 가져간 걸 봤어. 정말 이 일이 너랑 관련이 없다고?”온모는 이 일에서 완전히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와 관련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한 게 아니라고 한 이유는 큰 오라버니께서 본 그 세 사람은 제 친어머니께서 저를 지켜주라고 남겨주고 가신 사람들이에요. 다만 아버지께서 저를 진국공부 양녀로 들이면서 그들은 경성에 같이 따라오지 않은 거고요.”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거짓말을 이어갔다.“얼마 전에 제가 곤장을 맞은 이후로 너무 서러워서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하소연한 적 있어요. 경성으로 와서 날 좀 지켜달라고요. 그런데 그 일을 듣고 그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도굴한 거예요….”“정말 죄송해요, 큰 오라버니… 믿기 힘든 걸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온모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흐느꼈다.겉으로 보기에는 절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졌다.처음에는 온모를 탓하던 온장온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온사는 왜 네가 사람을 시켜서 그 짓을 했다고 하지? 게다가 보복한다고 시신을 훼손한다고까지 했다며?”온모는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그건… 저는 그 일을 알고 당장 양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놓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날 밤에 온사 언니가 저를 납치해 간 거예요. 언니는 저를 때리고 독까지 먹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가 시킨 거라고, 날 안 내보내 주면 다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거래가 성사된 거예요.”“내가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