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가능성도 있는 게 사실이지요. 쿨럭….”옆에 있던 온옥지가 기침을 하며 말했다.온장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어떤 간 큰 놈이 감히 이 진국공 저택까지 와서 막내를 납치하겠어?”경성 전체를 뒤져도 그럴만한 인간은 거의 없었다.온옥지가 담담히 말했다.“그거야 모르죠. 반달 전에 흑기군을 이끌고 우리 진국공 저택을 쥐 잡듯이 수색한 사람도 있지 않나요.”북진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하지만 온권승은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은 아닐 거다.”온옥지는 냉소를 지으며 반문했다.“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온권승은 병약한 아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섭정왕은 뒤에서 이런 비열한 짓을 할 인간이 아니야. 그 인간이 온모를 잡아가고 싶었으면 집으로 쳐들어왔겠지. 그때 진국공부와 충용 후작가를 수색했을 때부터 말이야.”비록 섭정왕 북진연과는 정적인 사이지만 그래서 상대의 성격에 대해 잘 알았다.“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겠죠.”불손한 태도에 온장온이 인상을 찌푸렸다.“넷째야, 말투가 그게 뭐니? 왜 화를 아버지에게 풀어? 지난번 일이 아버지 잘못은 아니지 않니.”온옥지는 눈을 부릅뜨며 반박했다.“그럼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요? 쿨럭….”“아버지는 무려 진국공입니다. 진국공 가문의 일에 어쩌다가 외부인이 참견하게 된 거죠? 쿨럭… 아버지께서 폐하께 고발했다면 섭정왕이 아무리 많은 병력을 손에 쥐고 있어도 그리 쉽게 우리 진국공 저택을 짓밟을 수는 없습니다!”“폐하께서 그 사람이 병권 좀 있다고 우리 집안을 짓밟는 걸 보고만 있겠어요?”온옥지는 홧김에 기침을 하면서까지 분노를 쏟아냈다.챙그랑!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온권승은 그의 발치에 들고 있던 찻잔을 던졌다.찻잔이 깨지며 뜨거운 찻물과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온권승은 음침한 얼굴로 말했다.“온옥지, 어디 아버지한테 불손하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아버지, 넷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막내가 너무 걱정돼서 순간 충동적으로 하지
그는 아버지와 온자월 모두에게 화가 나 있었다.맨 먼저 온자월의 얘기를 꺼내지 않은 건 막내가 이미 온자월을 혼내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온자월의 말에 늘 온화하게 모두를 중재하던 온장온마저 인상을 찌푸렸다.그는 굳은 표정으로 온자월의 말에 반박했다.“온사는 잘못 없어. 여기서 걔 얘기가 왜 나와?”온자월과 온옥지는 이 상황에서 온사의 편을 드는 큰 형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형님, 온사가 먼저 독으로 날 통제했어요!”온장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랬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거 잊었어? 애초에 너희가 짜고 수월관으로 찾아가 온사에게 약을 먹여서 강제로 끌고 오려 하지 않았으면 온사가 왜 너에게 독을 먹였겠어?”그 말에 온자월과 온옥지는 입을 다물었다.그들은 진심으로 이 사건의 발단이 자신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온옥지는 여전히 온사에게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녀 때문에 한달을 폐인으로 산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말도 못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던 그런 느낌을 떠올리면 병이 발작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악몽 같은 그 느낌을 떠올리면 온옥지는 지금 당장 온사를 죽여버리고 싶었다.“우리가 먼저 시작한 건 맞아요. 하지만 애당초 해치려는 마음도 없었고 오히려 당한 사람은 우리예요. 그런데 걔는 막내를 저격했죠. 막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온사는 셋째의 입을 통해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온장온은 잔뜩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처음부터 막내의 생일에 문제가 있었어. 걔의 출신부터!”온권승의 침묵을 통해 온장온은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이 얘기가 다시 거론되자 그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막내의 출신에 문제가 있다고요?”그때 온자월은 혼수상태였기에 온옥지의 방에서 일가족이 나눴던 얘기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온장온은 음침한 얼굴로 답했다.“나중에 막내 돌아오면 직접 물어봐.”어쨌거나 그는 이번만큼은 막내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자초지
“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라도 있나요?”온권승은 담담히 답했다.“증거는 없어. 하지만 막내는 실종되기 전에 누구를 만났어.”“누구를요?”온자월과 온옥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온권승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답했다.“그 아이는 시종을 시켜 안란심을 저택으로 불렀어.”온모는 아무도 모르게 일을 진행시켰다고 믿었지만 향하는 본디 온권승이 붙여준 사람이었다.그녀는 향하를 시켜 안란심을 집으로 불렀으니 온권승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안란심이요?”오랜만에 들은 이름이라 온장온 삼형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곧이어 온자월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온사를 밀어서 물에 빠뜨린 애 아닙니까?”“맞아.”온장온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막내는 그 아이를 왜 부른 거죠? 왜 사람까지 시켜서 그런 애를 저택까지 오게 한 겁니까?”안란심은 하마터면 온사를 죽일 뻔한 인물이었다.온장온은 온모에 대한 걱정이 분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너무 뜻밖이었기에 실망하고 분노했다.정체가 사람들 앞에서 탄로나서 충동적으로 오라비에게 독을 먹였다고 봐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 일로 반성하라고 금족령까지 내려졌는데 처소에서 가만히 반성을 하고 있기는커녕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온장온은 물론이고 온자월도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온사가 물에 빠진 일은 그때 크게 소문이 났었고 그때 이미 저택에 와서 살고 있었던 온모가 그 일을 몰랐을 리 없었다.그걸 알면서 왜 그런 여자를 집으로 끌어들였을까?“막내가 안란심을 불러온 게 맞나요? 막내가 맞은 게 소문이 나서 그 서녀가 이참에 뭐라도 건지려고 제 발로 찾아온 게 아닐까요?”온자월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온모를 대신해서 억지스러운 핑계를 만들었다.온권승은 담담한 얼굴로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실종 전에 온모는 그 아이를 만났고 그 뒤로 온사는 폐하의 명을 받고 금주로 가서 기우 대전을 주관하게 되었어.”순간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그들은 모두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온자월과 온옥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어찌 감히!”“온사가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어요!”온자월은 분노에 부르짖었고 온장온은 온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반박했다.온장온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온사가 비록 철없이 군 적도 있고 잘못을 한 적도 있지만 그 애는 먼저 나서서 사고를 치는 애가 아니고 그렇게 심한 짓을 했을 리도 없어!”“아버지께서 막내를 편애하시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온사도 아버지의 딸 아닙니까? 어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십니까?”“사실적 근거로 판단한 거고 가능성을 제기했을 뿐이다. 내가 꼭 그 애가 범인이라고 하지도 않았지 않니.”온권승은 다 식은 차를 마시며 담담히 대꾸했다.온장온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실적 근거라니요? 친딸을 의심하면서 이걸 사실적 근거라고 얘기하시는 겁니까? 아버지, 온사는 죄인이 아니에요!”이 순간 온장온은 드디어 왜 둘째가 그날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떠났는지 이해가 갔다.이 집안은 더 이상 사랑이 넘치는 옛날 집이 아니었다.아버지는 왜 이렇게까지 막내를 편애하는 것일까?아무리 막내가 아버지의 혈육이라고 하지만 온사 역시 친딸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어릴 때부터 그들과 함께 자란 진국공부의 적녀였다.아버지는 왜 온사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한 걸까?온장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형님, 그만 좀 하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막내를 빨리 찾는 게 우선입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건 나중에 얘기할 수도 있잖아요!”온자월은 짜증이 치밀었다.그는 온사가 어쩌면 막내를 어느 산골에 버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당장이라도 수월관으로 달려가서 막내를 어디 숨겼냐고 온사에게 따지고 싶었다.물론 정말 그렇게 할 용기는 없었다.또 수월관을 찾아가면 지난번처럼 최면제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난 못 가도 아버지는 갈 수 있잖아!’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온권승에게 말했
그는 무려 다섯 명을 보냈는데 다섯 명이서 한 명을 상대했는데도 보기 좋게 실패한 것이다.동시에 온권승은 온사가 온모를 납치했다고 점점 확신이 들었다.진국공 저택의 호위들은 절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이런 호위들을 뚫고 조용히 온모의 처소에 잠입해서 사람을 데려갔다는 것은 일반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수월관으로 사람을 더 보내서 어떻게든 막내 아가씨를 찾아내!”잠깐의 침묵 후에 온권승은 싸늘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예, 나리!”곧이어 다음 날 저녁, 수월관에는 또 한무리의 그림자 호위들이 잠입했다.이번에는 족히 열 명이었다.온권승은 이번엔 꼭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다.그러나 그 열 명마저도 보기 좋게 패하고 말았다.다음 날 소식을 전해들은 온권승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대체 어떻게 한 거지?”이 정도 실력을 가진 그림자 호위라면 황실에서 육성한 인재 중에서도 위치가 남다를 것이다.어쩌면 순위 10위 안에 드는 그림자 호위일 수도 있었다.온권승은 온사가 얼굴 좀 반반한 것 외에 아무런 잘난 점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황실에서 그녀를 이렇게까지 챙기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온권승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국공 나리, 사람을 더 보낼까요?”이미 이 일로 열다섯 명의 그림자 호위를 잃었으니 아무리 온권승이라도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그림자 호위 한명 육성하는 데는 대량의 인력과 돈이 들어간다.그런데 고작 이틀만에 열다섯을 잃은 것이다.그리고 걱정하는 막내딸은 지금까지도 행방불명인 상황.잠깐의 고민 끝에 온권승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밀착 호위를 바라보았다.“오늘은 네가 애들 데리고 직접 가. 온사 신변의 그림자 호위랑 길게 싸울 것 없이 막내 아가씨가 어딨는지 찾는 게 우선이야. 못 찾겠으면 바로 철수해.”“예, 나리.”그렇게 셋째 날 밤.수월관 곳곳에 수많은 그림자 호위가 숨어들었다.온사는 자신의 방에서 찻잔에 차를 따르고 조용히 경문을 펼쳤다.그리고 눈을 감고 평온한 목소리로 영혼을 기리는
“자객이라니?”어린 황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수월관에 성녀를 암살하러 간 자객이 있었단 말이냐? 누가 보냈지?”온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저는 감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감히 말할 수 없다니?”어린 황제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는 뻔했다.경성에 성녀를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어린 황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금주 기우 대전이 끝나고 금주는 세 달 만에 드디어 큰비가 내렸다.우연이라도 좋고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작동한 거라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비는 내렸고 복명 성녀는 금주 백성들에게 한해서 진정한 성녀로 거듭났다.그녀의 명성뿐만 아니라 온사를 성녀로 책봉한 어린 황제의 위상도 따라서 올라갔다.황제는 이 일을 통해 황권을 더 강화할 수 있었고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할 말이 생겼다.심지어 애초에 온권승의 편에 서서 그를 반대하던 관원들도 요즘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온사는 금주의 백성들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 황제가 위상을 올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그리하여 어린 황제는 점점 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처음에는 그저 란 고모의 보살핌에 보답하기 위해 대명 왕조의 유일한 성녀를 책봉했지만 그게 이렇게 큰 수확으로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그런 귀한 성녀가 그를 찾아와서 하소연하는데 나서지 않는 건 말이 안 됐다.어린 황제는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말했다.“짐이 어찌하길 바라느냐? 짐이 범인을 궁으로 불러줄까?”온사는 고개를 저었다.어린 황제가 금주의 일 때문에 자신을 도와줄 것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에게 큰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폐하, 제게 사람을 좀 붙여주실 수 있을까요?”“원하는 게 고작 그거냐?”온사가 말했다.“상대는 여러 차례 제게 자객을 보냈습니다. 오만방자한 인간이죠. 사람이 많다고 자신해서 이러는 겁니다. 만약 사람을 잃는다면 앞으로 한동안은
북진연은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온사와 함께 금주에 다녀온 이후로 이 여린 소녀가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처했는지 알게 되었다.그래서 오늘 황제한테서 온사가 자객에게 당할 뻔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가장 먼저 금주로 가는 길에 만났던 자들을 떠올렸다.특히나 김사도라는 인간은 무조건 다시 올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그래서 북진연은 늘 온사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거짓말이 아닙니다!”온사는 다급히 해명했다.“단지 전하께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뭐가 나한테 민폐라는 거지?”북진연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는 가까이 다가서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정색해서 말했다.“잘 들어. 너의 일은 나한테 있어 한 번도 민폐였던 적이 없었어.”온사는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녀는 경악한 눈으로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는 북진연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녀는 뭔가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니 앞으로 더 이상 나에게 뭔가를 숨기지 마. 알겠어?”고개를 숙인 그는 부드럽지만 강경한 어조로 온사에게 말했고 온사는 분위기에 취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온사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아니, 전하… 저는….”“되었다. 약속했으니 번복은 안 돼.”북진연은 긴 손가락으로 온사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무우야, 내가 진짜 화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면 내가 하자는 대로 해. 너의 안위와 관련된 문제 말고 다른 건 뭐든 해도 돼. 너에게 비밀이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비밀이 너의 생사와 직결된 문제라면, 그걸 얘기해서 너의 안위가 위협을 받는다면 괜찮다. 나한테 영원히 말하지 않아도 돼. 나도 그걸 알아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너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그 말은 온사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그녀는 북진연이 이 정도로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그 순간 그녀는 모든 불안이 사라진 느낌이었다.“무우야,
“난 너희가 누구의 사람인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관심없다. 오늘 밤 너희가 이 수월관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너희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어.”북진연은 장검을 빼들고 싸늘한 시선으로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그림자 호위들을 노려보았다.곧이어 몸 수색이 시작되었고 그들은 구강 내에 숨겼던 독약마저 일일이 뱉어내게 되었다.지금의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포로에 불과했다.북진연의 싸늘한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잠시 후, 마지막 그림자 호위마저 끌려왔다.쾅!몸에 자상을 입은 추월이 피투성이가 된 사내를 질질 끌고 오더니 다른 자객들의 앞으로 던졌다.그가 온권승의 심복이자 날카로운 검, 삼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랬던 그가 지금 폐인이 되어 돌아왔다.“좋군. 이제 다 모였네.”북진연은 장검을 삼도의 목에 겨누었다.“부처님 계신 곳에서 살생은 안 될 말이지.”북진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끌고 진국공부로 가서 다 죽여라.”“예!”그날 밤, 진국공 저택 밖에는 수많은 피가 뿌려졌다.온권승의 심복인 삼도를 포함해 수월관으로 갔던 모두가 저택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송장이 되었다.다음 날, 어린 황제는 조회에 나가 진국공 온권승이 갑자기 병이 도져 대문 앞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갑자기 질병이 도졌다고?”어린 황제는 놀란 얼굴로 대신들에게 물었다.“진국공은 평소 아주 건강하지 않았느냐? 어쩌다 갑자기 병이 도진 거지?”‘삼촌이 뭘 했길래? 설마 진국공에게 독이라도 먹였나?’물론 온권승은 중독으로 쓰러진 게 아니었다.홧병에 쓰러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대신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감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어린 황제는 충용 후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후작, 자네의 부인은 진국공의 여동생 아닌가. 혹시 뭐 들은 게 있는가?”충용 후작은 그제야 앞으로 나서서 사실을 전했다.“소신이 들은 바로 오늘 아침 진국공 저택 밖에 갑자기 수십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