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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втор: 이제리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았지만 시중드는 하녀가 없어 스스로 머리를 빗던 소녀는 뒤돌아 그를 보더니 역겨움을 참고 조용히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

방으로 들어온 온자신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온사에게 말했다.

“뭐 좀 물어보자, 막내 관복 네가 망가뜨린 것이냐? 왜 그렇게 못된 것이야? 분명 오늘은 막내의 성년식 날이기도 하거늘, 막내 관복을 망가뜨리다니!”

흥분한 온자신이 온사에게 묻던 그때, 온사가 뼛속까지 미워하던 사람이 온자신의 뒤에서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내밀었다.

“둘째 오라버니, 그만두세요. 제가 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언니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실수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온모는 가녀린 몸과 귀여운 외모로 항상 지켜줘야 할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구든 그녀의 겁먹은 사슴 같은 눈망울을 본다면 동정심이 생길 것 같았다.

그녀도 자신의 강점이 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특히 진국공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온모는 겨우 반년 전에 진국공 저택의 사람이 찾아서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3살 때 누군가에게 납치당했고, 어렸을 때부터 밖에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온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온모를 안쓰럽게 생각했고, 최대한 보상해 주려고 했다.

온사 역시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쨌든 온모도 그녀의 친동생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순진한 생각 때문에 전생에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렀다.

그런 온모의 얼굴을 다시 보자, 온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었다.

“막내야! 너는 어찌 그리 착하게만 구는 것이냐? 분명 다섯째의 잘못인데, 네가 어찌 그리 감싸고도는 것이냐?”

“아니라니까요, 아이고, 둘째 오라버니, 어찌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십니까.”

온모는 이 말을 하면서 심지어 고개를 돌려 온사에게 사과까지 했다.

“언니 미안해. 다 내가 말을 잘 못하여 제대로 설명 못해서 그런 것이야. 둘째 오라버니께 노여움을 풀면 안 될까? 오라버니께서 날 너무 아껴서 그러시는 거니까.”

“네가 어찌 사과를 하는 것이냐? 오히려 네가 사과를 받아야 마땅한 일인데!”

온자신은 매서운 눈초리로 온사를 보았다.

온사는 눈을 내리깔고 역겨움을 억누르며 말했다.

“네, 오라버니 말씀이 옳습니다. 요 며칠 일들은 제가 잘못했으니, 제가 동생에게 사과하는 것이 맞지요.”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이틀 늦게 환생한 탓이었다. 전생에서는 온모가 스스로 관복을 망가뜨리고 그녀에게 덮어씌웠었다.

심지어 온모는 아무런 증거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에게 망가진 옷을 들고 그 자리에서 울면 모든 사람들이 온사를 떠올렸다.

결국 그녀는 진작부터 온모의 각종 수작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온사가 여동생을 질투하고 있고, 마음씨도 나쁘고 쪼잔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온모가 ‘괴롭힘’을 당하면 모두 반드시 온사가 한 것이라고 했다.

온사는 모든 한을 억누르고 온모를 향해 살짝 웃으며 사과했다.

“요 며칠 이 일만 떠올리면 속으로 너무 후회가 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 했어, 용서해 줘.”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온모는 혹시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흥, 이제야 잘못을 깨달은 것이냐?”

온자신은 차갑게 웃더니 말했다.

“너처럼 못된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옥에 가두고 형을 맛보게 해주었을 것이다!”

온사는 속으로 똑같이 차갑게 웃었다.

내 동생?

허,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런 사람의 동생이 되기 싫었다.

전생의 오늘, 그녀는 온모에게 사과하지 않아 온자신에게 두드려 맞아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얼굴을 제외하고 온몸이 거의 검푸른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분명 오늘이 그녀의 성년식 날인 것을 알면서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그녀의 오라버니 네 명 중, 온자신과 온자월 쌍둥이 형제의 성격이 유독 나빴다.

둘째 오라버니 온자신은 아주 폭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 여동생을 예뻐할 때에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녀를 괴롭힌 모든 사람들을 다 때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예뻐하지 않을 때에는 두말 않고 그대로 그녀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특히 그녀와 온모가 싸울 때, 온모가 울면 그녀는 무조건 맞아야만 했다.

온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온자신은 그녀보다 키도 크고 힘도 셌다. 지금 그에게 맞선다면, 본인만 손해일 것이다.

그래서 온사는 고개를 숙이기로 한 것이다.

괜찮다. 이번 생에 남는 게 시간이니 천천히 복수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녀의 사과가 너무 깔끔했던 탓에 누군가는 오히려 부족하다고 느낀 것 같았다.

“둘째 오라버니, 언니도 사과를 했으니 이제 그만 하시지요. 관복이 없어져서 아쉽긴 하지만 그리 큰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성년식에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온모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원래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 온자신은 이 말을 들으니 갑자기 온모가 안쓰러워졌다.

“안 돼. 이번 일은 이렇게 그냥 넘길 수 없다.”

“이번엔 네 관복을 망가뜨렸지만, 다음번에는 어떤 못된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반드시 제대로 혼내어 똑똑히 기억하도록 해야겠어!”

온자신은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막내의 관복을 망가뜨렸으니, 네 관복을 막내에게 주도록 하여라. 오늘은 성년식 날이니, 관복이 없는 너는 가지 않아도 된다.”

순간 온모의 눈에 한줄기 빛이 스쳤다.

온사는 항상 그녀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고,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결국 온모가 스스로 자신의 관복을 망가뜨리고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건 온사의 관복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이 관복으로 말하자면, 네 명의 오라버니들이 1년 전에 그녀의 성년식을 위해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두관은 푸른색 금사가 감겨진 옥관이었고, 옷은 비단으로 짜였고 나비 자수가 놓여 있었다.

재질과 제작 모두 경성 최고였다.

그 당시 이 관복을 만들 때, 오라버니들은 온사에게 그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이 성년식 날 경성 전체에서 가장 부러운 여자가 되길 바란다고 했었다.

아쉽게도 나중에 그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이 바뀌었지만.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온사를 본 온자신은 그녀가 원치 않는다고 생각해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왜? 싫은 것이냐? 아니면 속으로는 애초에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았고, 방금 한 말들은 다 거짓이더냐?!”

“흥, 그런 거였군, 내 탓하지 말거라. 오늘 네가 주던 안 주던 다……”

“알겠습니다.”

온사가 갑자기 온자신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온자신을 보지도 않고 뒤로 돌아 방으로 들어가 일찍부터 준비되어 있던 그 관복을 가지고 나왔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그녀의 것이 아니다.

온사는 미소를 띄고 옷을 건네며 말했다.

“막내야, 여기. 이제 이 관복은 네 것이니. 어서 받거라.”

온사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주는 바람에 온모는 순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온사가 이렇게 쉽게 수긍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아주 생난리를 치며 온자신의 화를 엄청 돋게 해, 온자신의 성격상 그녀가 어쩔 수 없이 관복을 내놓을 때까지 때려야 정상이었다.

근데 지금 온사가 바로 수긍했다고?

온모는 뭔가 마음에 안 들었다.

혹은 아까부터 계속 온사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다니, 설마 목적이 관복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나?

그래서…… 관복에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

순간 온모의 눈에 하찮다는 듯한 눈빛이 스쳤다.

그녀는 자신이 온사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고 생각해,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멍청한 것.

내가 널 어떻게 까발리는지 두고 봐.

온모는 관복을 받아드는 척을 하며 손을 내밀었고, 손이 닿자마자 갑자기 아프다며 소리쳤다.

“아, 둘째 오라버니, 너무 아파요!”

관복은 바닥에 떨어졌고, 그녀는 뒤돌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온자신의 품에 안겼다.

온자신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온모를 감싸고 온사를 밀쳐냈다. 그는 이번엔 이름까지 부르며 화를 냈다.

“온사! 너 또 막내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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